혼종hybrid은 순수성purity을 침해하는가?
-혼종: 불순성을 넘은 또 다른 순수성인가?
이은숙 (본지 편집주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또 하나의 문제적 소설을 론칭했다. 바로 지난겨울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키메라의 땅』이다. 저자는 과감히 SF가 아닌 ‘예언 소설’로 읽어달라고 주장하며 소설 첫 페이지부터 “이 이야기는 당신이 이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5년 후에 일어난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시작한다. 그야말로 종말론적 공포를 고스란히 담아낸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세기말적 디스토피아를 그린 여타 소설과 다른 점은 주요 소재가 ‘혼종’이라는 것이다. 미래에 어떤 과학자들에 의해 탄생한 두더지, 돌고래, 그리고 박쥐와 인류와의 혼종들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혼돈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처음 컴퓨터 게임으로부터 시작된 이 단어가 이제 온통 우리의 세계 기반에 파고 들어간 것이다.
사실 ‘혼종’이라는 단어는 현대 사회에서 매우 흔한 말이다. 베르베르의 소설에서 말하는 혼종은 이종간 생식을 말하는 것으로, 혼종을 이 단어로 받는다면 게임을 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생활 용어가 된 단어이다. 안드로이드란 단어도 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anthropos(andro-)와 –oid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로 ‘인간형 로봇’을 뜻한다. 그런데 구글이 재빠르게 자신들의 스마트폰 운영체계의 이름을 이 단어로 명명함으로써, 이 혼종(합성어로서의)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상징하는 단어로 변장했다. (갤럭시 폰이 안드로이드 폰이다)
본격적인 혼종의 침입은 사실 자동차에서 시작되었다. 디젤 파동 이후 자동차 업계의 화두가 테슬라를 필두로 ‘전기차’와 ‘가솔린-전기’ 혼종의 하이브리드가 되면서 기존 화석 연료를 태우는 자동차만을 만드는 회사는 도태되어 버렸다. 특히 이 하이브리드 차량은 공학적으로 어려운 기술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솔린 엔진과 전기 모터는 그 토크 특성이 아주 다르고, 테슬라의 전기차처럼 충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행 중 자가 충전되는 방식이어야 하므로 매우 하이테크닉한 차량이다. 하지만 결코 섞일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구동력이 컴퓨터 제어로 조화를 이루니 그야말로 놀라운 효율을 보여주는 혼종이 되었다.
이디 이뿐인가? 건축에서 하이브리드는 이미 널리 퍼진 일상적 흐름이 되었다. 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이 합쳐진 주상복합건물, 한옥과 양옥의 절묘한 매칭을 보여주는 주택들, 콘크리트, 나무, 벽돌 등 이질적 재료들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질감으로 탄생한 건축물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개발 시대의 상징적 건물인 아파트도 이미 혼종적 건축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전 고층아파트에서 차량으로 빼곡히 주차되었던 1층 주차장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 아파트의 1층은 입주민들을 위한 공원과 힐링을 위한 회복의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첨단의 기술로 지어진 아파트와 가장 비기술적인 녹지공간이 혼종을 이룬 것이다. 이 혼종은 다만 아파트 단지뿐 아니라 지역 환경과도 연결되어 도시 아파트 단지에서 다람쥐나 족제비, 심지어 멧돼지가 출현하기까지 한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바바는 『문화의 위치』에서 이러한 문화의 혼종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은 항상 ‘그 사이’로서, 문화 상호작용의 역학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된다고 설명했다. ‘제3의 특별한 어떤 것’이라 말하는 듯 보이는 이러한 개념은 여러 오브제의 집합 자체로 의미를 생성하는 아상블라주와 비슷한 것으로 평면적 콜라주와는 다른 3차원적 입체 형태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바바에 의하면 건축이나 자동차공학 분야에서 이 혼종混種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이나 자동차나 하이브리드한 것들이 더 현대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효율적인 것으로서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이 과연 문학에서도 가능할까? 혹자는 산문시와 같은 작품을 혼종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혼종은 콜라주라기보다는 아상블라주이기 때문에 단순한 형식적 침범을 혼종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문학에서도 혼종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AI 문학이다. AI가 쓰고 인간이 수정하는(덧칠하는) 방식일 수도 있고, 인간이 쓰고 AI가 수정 및 퇴고를 해 주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이러한 문학이야말로 ‘하이브리드 문학’이라 할 만하다.
MZ세대에게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는 이미 일상에 가까워졌다. 학교에서 주는 숙제나 리포트를 AI에게 묻고 맡기는 일이 어느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ppt를 생성해 주는 AI도 있어서 사실상 AI 사용에 거리낌이 없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할 일은 주제를 정해주는 일밖에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러한 혼종적 글쓰기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작품을 통해 유발한 독자의 감동 또한 어떤 가치와 의미를 낳을 수 있을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작가 스스로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쏟아 넣은 작품의 가치가 하이브리드 문학에 남아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브리드는 융합이 아니다. 즉 섞이는 재료의 특성이 화학적 결합으로 인해 무너져 새로운 재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극도로 조화로운 물리적 연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AI의 강점과 작가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훌륭한 통합으로서의 작품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날마다 지식이 100배씩 성장한다는 AI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도 AI 문학을 회의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일면 무모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AI 문학에 대해 감히 회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순수성. 이전에 이 단어는 주로 예술지상주의 문학, 즉자적卽自的 문학 등을 가리켰다. 쉽게 말해 반反참여적 문학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현시대는 아무리 참여적인 작품이라도 순수성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 이제 순수성은 순純 인간성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기계가 관여한 문학을 과연 순수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작가가 여름 내내 더위와 모기와 싸워가며 쓰는 것 대신 AI가 5분 남짓 걸린 시간에 만들어낸 이야기에 우리는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까? 고치고 또 고쳐도 부족한 시를 단 몇 행의 명령어만으로, 아니 음성 명령만으로도 곧장 생성해 내는 시로 대체한다면 과연 인간의 그 인고의 시간에서 오는 정성스러운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을까? 필자는 AI가 더욱 발전하여 인고의 땀방울조차 흉내 낼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오직 작가가 쓴 작품만이 문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순수성이란 작가가 인간으로서의 한계선에서 그 제한을 넘어서려는 뼈를 깎는 노력이며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것과 같은 목숨을 건 수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 수고의 산물은 통증을 수반한다. 신경심리학적으로 ‘통증’은 굉장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것으로, 인간과 같은 생명체의 고유 감각이며, 그 체감각은 오직 생명체만이 느낄 수 있다. 따라서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서 복제된 문학 작품은 인간의 유전적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길잃은 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그렇게 인간의 신체와 두뇌를 넘어선 “특이점”을 아무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의존한 결과에 대한 부작용을 과연 인류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문학 작품이 AI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 산물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으로 트랜스휴머니즘이 한창 유행중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트랜스휴먼은 과연 인간인가’하는 논쟁도 만만치 않다. 몸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다거나 유전자 줄기세포 증식으로 만들어낸 장기나 신체 기관을 바꿔 끼워가며 사실상 수명을 영원히 연장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 인간은 과연 인간인 것일까? 인간을 분해해서 하나씩 교체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교체되었을 때 ‘내’가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혼종’의 전쟁을 다룬 소설을 쓴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소박하다. 지구에서조차 강력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집합명사는 아름답고 강력한 것이다. AI조차 그 집합명사인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 강력함이 소박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한 사람의 능력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수준이라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AI의 능력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우리의 고유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시와산문』 2026년 봄호를 읽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든 작가와 독자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미래는 아직 우리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