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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6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코 6,7-13
내 욕구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욕구가 안 보인다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 ‘유태인의 상술’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여성의 주머니를 노려라, 현금을 가지고 있어라, 장기적인 투자가 이긴다 등의 소제목이 기억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빵을 좋아하면 빵장사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빵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것을 좋아할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사가 안 되면 ‘내가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데 사람들은 왜 안 사지?’ 라고 생각하며 개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 빵장사를 하면 빵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파는 것을 바라보기에 이렇게 저렇게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팔아야 더욱 사려고 하는 사람의 욕구를 더 잘 알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내 욕구에 집중하면 상대의 욕구에 무관심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얻으려면 내 욕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려면 내 욕구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신학생들에게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사제상에 대해 물었더니, “강론 잘 하는 신부”,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제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1위가 ‘겸손한 신부’, 2위가 ‘기도하는 신부’였습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혼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더 큰 힘이 발휘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둘이 여행 나와서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실 마르코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복음을 전하다가 헤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둘이 서로 의지가 되라는 뜻도 있겠지만 관계를 잘 맺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아무래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제의 강론의 힘이 떨어질 것입니다.
본당 사제와 본당 수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보기에 우선 서로 관계를 잘 맺는 사목자들이 되고 그 이후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옷도, 전대에 돈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에 대한 욕구,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욕구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 욕구가 눈을 가려 신자들의 욕구를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미래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명예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진맥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진맥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
잔잔한 물이 되어야 상대의 모습이 비춰져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들에게 신자들이 보기에 세상 재물에 애착이 없는 복음전파자가 되라는 뜻 같습니다.
또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받아주는 집에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과 친하다가 또 저 사람이 좋으니 저 사람과 친해지는 사람은 선교를 위함이 아닌 자신과 어울릴 사람을 얻기 위한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욕구도 선교를 하는데 매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의 애정이나 인정을 바라는 사람들 역시 복음을 순수하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본당의 신자들이 갈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정에서도 자유로운 복음전파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무언가 부족하여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명목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신 안에 복음이신 하느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시는 사람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기름을 바르면 병이 치유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전해주는 것에서 충분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편안해하는 아기 얼굴을 보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내 욕구에 가장 덜 집중하는 사람이 복음전파를 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이라야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자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복음: 마르 6,7-13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일용할 양식도 들어올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그야말로 혜성같은 존재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신선한 예수님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들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그분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슴을 후벼파는 명쾌한 가르침에 박수를 치고 환호했습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말과 행동이 완벽히 일치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만만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하시는지,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떠나기 직전, 몇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하시는데, 참으로 특별합니다.
적어도 일주일 남짓 되는 장거리 일정일텐데도 불구하고,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참으로 난감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가 너무 지나쳤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문전걸식을 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팡이는 왜 지닐 수 있게 하셨을까요?
산짐승이나 전갈, 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서 지팡이와 신발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명씩 파견하지 않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혼자 가면 외롭고 쓸쓸하고, 얻어먹을 때도 부끄럽고 난감할 텐데, 둘이 함께 하면 용기도 생기고 의지도 되고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서로 지탱해주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큰 선심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당부하신 강조점은 단순하고 검소한 정신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라는 엄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행함에 있어 안락한 것에 대한 포기는 가장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오로지 복음 선포에 지니고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게 하기 위한 포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한 순례자가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더니, 건장한 남자들이 묵직한 햄머 하나씩을 들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무엇하는 사람들인가요?” “저희 수도원 수사들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수사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지금 수도원을 허물고 있는 중이랍니다.”
“아니, 멋진 수도원인데, 대체 왜요?”
“저 건물을 허물면 새벽에 동이 트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더 큰 포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쉽지만 낡은 나를 허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립니다.
아깝지만 어제의 나를 포기하면 새로운 세상, 새 아침이 밝아옵니다.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그대는 길을 떠날 때 전대도 지니지 말고, 여벌 옷을 생각하며 걷지도 마십시오.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일용할 양식도 들어올 것입니다.
어떤 새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하느님 섭리로 먹이를 얻으리라 근심없이 희망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합니까?”(프루텐티우스 교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목요일 강론>
(2025. 2. 6. 목)(마르 6,7-13)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물질적으로는 ‘빈손’,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실 때,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바로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얻으려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으려고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빈손’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세상에 오실 때의 당신의 그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가라는 명령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들 자신들의 ‘삶’으로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2) ‘빈손’으로 가라는 명령은,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복음만’ 가지고 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면서 가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3)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빵도 없었을 것이고, 여행 보따리도 없었을 것이고, 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껴입을 여벌옷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대 같은 것은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것들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을까?
예수님의 명령은,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또 그런 것들을 구하려고 하지 말라는, 즉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4) 복음을 전해 듣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복음만’ 청해서 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것만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것만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또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 ‘구원과 생명만’ 청해서 얻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들이나 세속적인 것들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면, 아무리 간절하게 청해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이고, 미신입니다.
5) 사도행전에 있는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사도 3,1-8).”
여기서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파견되었을 때만 ‘빈손’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그렇게 생활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과 권한,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받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자선을 청하는 이에게 줄 돈은 없었지만, 그들은 ‘돈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것을 장애자에게 주었습니다.
만일에 그 장애자가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면,
또 예수님의 사도들을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을 청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