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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루카 11,15-26
모든 바람이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바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인들은 선을 위하여 하나가 되고 악인들은 악한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고 하시며 악마들도 악한 일에서는 갈라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게 무엇일까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러니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인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그렇다면 우리가 죽기까지 청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청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그러니 먼저 우리 안의 악을 몰아내는 성령님을 청합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욕망을 몰아내십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머지는 다 곁들여 받게 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여 청하지 못하는 것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삶은 영적 평화와 연합을 추구하는 누군가를 통해 그녀의 가족을 포함해 누구라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강력한 예입니다.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시에나의 부유한 대가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25명의 자녀 중 25번째 였지만, 그녀의 형제자매 중 상당수는 유아기까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자코모는 부유한 양모 염색가였고, 그녀의 어머니 라파는 의지가 강하고 실용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가족과 마찬가지로 가타리나의 부모는 그녀가 결혼하여 존경할 만한 결합을 통해 가족의 지위와 부를 더욱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사회적, 재정적 지위에 있어 잠재적인 자산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가타리나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불과 여섯 살 때 사도 베드로, 바오로, 요한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환상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가타리나가 나이가 들자 그녀의 가족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회 계층의 젊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기대였으며, 가타리나의 부모는 잠재적인 구혼자를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가타리나는 결혼이나 가족이 꿈꾸던 세속적인 삶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을 대체할 행복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가타리나의 소망은 명성이나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평화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그녀는 수녀원 밖에 있으면서도 기도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평신도 공동체인 ‘만텔라테’(Mantellate)에 합류했습니다.
그녀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은 그녀의 가족을 걱정시켰고, 가족은 그녀가 극단적인 영적 수행을
버리고 좀 더 전통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를 계속 희망했습니다.
그녀의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가 그녀를 고독한 삶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봉사하도록 부르면서 그녀의 삶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이에 순종했고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지만, 교회와 사회 모두에서 빠르게 강력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타리나가 참여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아비뇽에서 로마로 교황권이 복귀된 일이었습니다.
거의 70년 동안 교황들은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살았는데, 그로 인해 이탈리아와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큰 정치적, 종교적 불안정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하여 그에게 교황권을 로마로 돌려보내고 교회에 평화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카타리나의 지혜와 영적 권위에 감명받은 그레고리오 11세는 그녀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고
결국 1377년에 교황권은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교황권에 대한 참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타리나는 이탈리아, 특히 교황권과의 갈등이 특히 심했던 피렌체의 다양한 전쟁 세력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노력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피렌체로 가서 평화 협상을 했습니다.
가타리나는 결코 권력이나 명성을 추구한 적이 없었지만,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살기를 기대했지만, 가타리나는 오직 영적인 평화와 연합만을 추구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헌신을 통해 그녀는 교회 변화를 위한 강력한 힘이 되었으며, 로마에 교황권을 회복하고, 전쟁 중인 파벌들에 평화를 가져오고,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개혁과 거룩함을 촉구했습니다.
영적인 평화만을 원했던 카타리나는 로마에 교황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평화를 가져오며, 교회가 거룩함을 향하도록 영감을 주는 등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학원도 보내고 돈을 많이 들이며 노력합니다.
하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덤으로 받게 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녀 가타리나처럼 마음의 평화,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됩니다.
그녀는 ‘대화’라는 책을 써서 교회 학자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글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소원합시다.
죽기까지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생각만 해도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1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1,15-26:
우리 시대 악령의 실체!
우리 시대 대 마귀 베엘제불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마귀!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괴한 형상에 날카롭고 큰 뿔이 달린 얼굴에, 괴성을 지르고 길길이 뛰는 무서운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형태의 마귀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마귀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기괴하고 흉측한 이미지와는 반대입니다.
화려한 포장지와 달콤한 맛과 향기로 자신을 감추고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취약함을 파고듭니다.
어쩌면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우리 시대 경계해야 할 대 마귀입니다.
오직 돈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돈이 하느님 위에 위치하며, 돈을 숭배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악령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승승장구와 떵떵거림, 이를 방조하고 외면하는 사회 시스템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불의한 방법을 총동원해 천문학적 재물을 쌓은 이들이 휘두르는 횡포와 갑질의 칼날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고통과 상처를 외면하는 우리 교회의 안일함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이 시대 악령으로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죽음의 문화’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 안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배금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가정 폭력, 대화의 단절, 편리주의, 물질만능주의가 슬금슬금 들어오더니 완전히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 시대 악령의 실체인 것입니다.
오늘의 가정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그 간교한 악의 세력, 죽음의 문화를 우리 가운데서 쫓아내기 위해 합심해야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시대 악령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배금주의입니다.
재물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입니다.
돈을 하느님 윗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합심해서 큰 목소리로 외쳐야겠습니다.
“돈이 다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리가 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실상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져갑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만은 영원하십니다.
이 세상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스러워도 견딥시다.
모든 것 주님 손에 맡기고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시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강론>
(2024. 10. 11. 금)(루카 11,15-26)
<신앙생활은 ‘구경’이 아니라 ‘동참’입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15.17-18ㄱ.23-26)”
1) 여기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는 율법학자들(마르 3,22), 또는 바리사이들입니다(마태 12,24).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많은 군중이 직접 보았기 때문에(루카 11,14), 그들은 그 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고, 그 일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억지 논리’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싫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도 싫어서 억지로 생각해낸 ‘궁여지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억지 논리’를 상식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라고 반박하신 말씀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입니다.
사람들을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그 해방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해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을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으로 ‘사탄의 악’을 제압하는 싸움.
이 싸움에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선이 아니면 악입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해도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은 바로 ‘나를’ 위한 활동이기 때문이고, ‘나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동참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구경’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동참’해야만 하는 생활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수동적으로, 또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죄만 안 지으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마태 7,21).
4) 24절-26절의 말씀은, 예수님 덕분에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면, 성령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마귀 들렸다가 해방된 사람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아무것도 안 한다면, 마치 주인 없는 빈 집에 도둑이 드는 것처럼 마귀들이 다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또는 자신의 삶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과 정신과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예를 들면, 만일에 신앙인이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서 점을 본다면,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큰 죄를 짓는 것이고, 그런 짓을 끊어버리겠다고 서약한 세례 서약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고, 자기 안에 마귀를 다시 끌어들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