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LA (Enzo Flojo's Asia on My Mind) -
아시아 레전드 시리즈를 써가면서, 아시아 최고의 샤프슈터중 하나를 조명하려고 한다. 일본농구의 아이콘, 타케히코 오리모가 바로 그 선수이다.
난 오리모를 좋아한다. 그는 내가 90년대 아시아 농구에 빠져든 이유 중 하나였고 많은 일본인들이 그 시절 코트에서 공을 튀기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기도 할 것이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필리핀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79-76으로 필리핀을 꺾었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오리모는 전형적인 아시아 농구선수였다. 재빠르고, 그를 이용해 수비 사이를 빠져다니며 놀라운 3점 게임을 선보였다.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top3 올타임 아시안이다.
오리모는 1970년 5월 14일에 사이타마 현에서 태어났다. 고향 고등학교에서 뛰기시작해 니혼 대학교에 입학, 4학년 시절엔 전일본 챔피언을 차지했다. 직후 세미프로리그, 도요타 페이서스(도요타 알바라크의 전신)에 합류했다. 여기서의 활약으로 94년 일본 국가대표에 선정되었다.
그 이후 오리모는 대표팀의 주축이 되었다. 95년 서울 아시아컵에서 뛰었고 97년 ABC챔피언쉽 토너먼트에서 손꼽히는 득점원으로 활약했지만, 결승에서는 78-76으로 한국에 패했다. (MVP 전희철)
이듬해 피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오리모는 8.8득점에 69.7&의 3점슛을 보여주며 활약했지만 일본은 세네갈에게 60-55로 한경기를 이기는 것에 만족해야만했다. 이 대회 최고의 활약은 4/4의 3점을 기록하며 16득점을 기록한 나이지리아전.
99년 일본은 피바 아시아컵을 개최했고 오리모는 마이클 타카하시, 마코토 하세가와, 켄이치 사코 같은 선수들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에 참전하였다. 오리모는 이 대회에서 기대만큼을 해주었으나 4강에서 대만의 다이나믹 듀오- Lo Shin-Liang and Cheng Chih-Lung에게 77-61로 무너졌다. 이 경기 오리모는 16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국대를 2년간 빠졌으나, 02 부산아시안게임에 복귀했다. 다음 03 05 피바 아시아컵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고향 사이타마에서 열린 06 피바 월드컵에는 참전했다.
월드컵 당시 오리모는 36살 노장이였지만 12.2점으로 일본의 득점을 리드했다. 매 경기 두자리수 득점을 해냈고 대회 최고의 활약은 13득점 3개의 3점, 2리바 2어시 2스틸을 기록하며 78-61로 파나마에게 승리를 거둔 경기였다. 같은해 도하 아시안게임에 참전하여, 6위에 올랐다.
오리모의 마지막 국대 참전은 07년, 09년 피바 아시아컵이었다. 07년 8위로 추락하고 09년에는 19위에 그쳤다. 하지만 오리모는 두 대회에서 여전히 득점원으로 12.4점에 43%의 3점을 기록하며 본인의 소임을 다했다.
09 아시아컵때 오리모는 이제 40대에 접어들었고, 그의 국가대표 은퇴무대가 되었다. 국가대표로는 마무리 지었지만 그의 농구 경력은 끝나지 않았다. 도요타에서 카무이 호카이도(현재 레반가 홋카이도)로 이적하여 작년 은퇴할 때까지 존재감을 유지했다.
11년 카무이 홋카이도의 모 회사가 자금난을 겪으며 해체되어가는 와중에 그는 레반가 홋카이도의 사장으로 선수로써, 경영자로써 바쁜 나날 속에서 일본리그 사외이사직도 수행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사장으로써 첫 6년간은 경영난 속에 자비를 써가며 팀을 유지시켰어야했고,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가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간으로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고 말한다.
선수로써 코트위에선 다른 선수들과 동등하게 취급되길 바랬지만, 코트 밖에서 스폰서를 만날때는 자신의 명성을 활용했다.
스폰서와 만나는 자리에선 '우린 오리모씨 밖에 모르겠네요' 라는 말을 듣곤했다.
장대한 커리어 속에서 그는 02년 JBL MVP를 차지했고, 2회 베스트 5, 수차례 JBL 올스타 MVP에 선정되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토요타에게 우승도 세차례 안겨주었다(01, 05, 06)
커리어 통산 1,091/2,828, 38.6%의 3점을 기록했고, 12.8득점을 근 800게임, 27시즌 동안 기록했다. 일본 프로리그 역사상 10,000득점을 넘어선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있었죠.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커리어를 보냈습니다"
은퇴무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오리모는 레반가 홋카이도의 사장으로써 소임을 다한다. 작년 많은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직관수는 몇년간 꾸준히 늘어왔다. .
그의 은퇴는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였지만 예상치못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성대한 은퇴식을 열수는 없었지만,
9회째의 올스타 MVP를 추가하는 것으로 경력을 마무리 했다.
몇 달전 오리모는 B리그의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27년간 선수로 뛰었습니다. 엄청 긴 시간이였죠. 지금의 수상이 그 보답이 되어준거 같습니다"
국가대표로써 최고의 자리에 올라본 적은 없을지라도, 아시아 농구 역사에 있어서 그는 꾸준했던 활약을 보여줬던 선수로 기억되고있다.
일본은 어째 50까지 선수생활 하는 선수들이 있나 싶었더니, 축구 미우라 카즈요시도 팀의 금전적인 문제로
간판(사실상 엠베서더같은...)의 역할을 수행해야해서 그런 경우라더군요. 오리모도 비슷한 느낌이고.
20년도에는 정말로 은퇴할 스탯이였지만 40대 후반에서는 어느정도 괜찮은 기록을 보여줬네요.
수비를 좀 소프트하게 하는 리그라고 알고있고, 슈터로써 어느정도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였을까요.
몸관리도 잘했네요.
이 선수 국대때는 국제경기에 큰 관심이 없어 잘 알아보지는 못하겠는데, 뛰는걸 보니 살짝 익숙한 얼굴인거 같기도하고.
대충 문경은이 아직까지 현역생활 하고있다고 생각하면 될 꺼 같습니다.
참조 :
https://www.japantimes.co.jp/sports/2017/10/18/basketball/b-league/levanga-chief-takehiko-orimo-striving-juggle-responsibilities/#.XG55Orjgrcc
proballers.com/basketball/player/43454/takehiko-orimo
http://www.fiba.basketball/news/asian-legends-series-takehiko-orimo
첫댓글 오리모 기억나네요...
혼혈이던 마이클다카하시도 기억나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디 다치시지않고 오래오래 목표하신 나이까지 목표 이루셨으면 좋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