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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세렌디피티(Serendipity)
Written By . 미니멜 (minimell) E-Mail . mini_mell@naver.com
탁탁, 하영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움직임은 1초에 한번씩, 혹은 그보다 빠르기도 했다. 평소 그녀가 긴장을 하거나 기분이 나쁠 때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저녁 7시, 하영은 시계를 흘끗 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이지 서울의 퇴근길은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눈앞에 꽉 막힌 차들을 보고 있노라니 짜증이 밀려왔다.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운전 중이지만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약 이 상태라면 인천까지는 꼬박 한 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하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차를 두고 왔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한 시간 전, 하영은 막 퇴근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경호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급하게 할 말이 있으니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하영은 자초지종 물어보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렇다 할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일방적으로 끊어진 휴대폰을 보며 하영은 난감을 감추지 못했다. 별다른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뜻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강남에서 인천까지 그 먼 거리를 가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러시아워인 시간에 말이다. 그렇게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는 하영의 가방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분명 경호일 것이다. 윤경호, 그는 하영의 오래된 연인이었다. 열일곱 살에 시작한 귀여운 풋사랑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10년이 되었다. 10년이라는 시간 속 여러 추억들과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와 그녀의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남자친구보다 가족이라는 말이 더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하영은 잠시 신호가 빨간불로 바뀐 틈을 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역시나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경호였다. “여보세요.” - 어디야? “몰라. 아직도 서울이야.” - 출발한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도 서울이라고? “차가 너무 막혀서…” - 그래도 너무 늦잖아.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어. “누군 늦고 싶어서 늦어? 어머니가 갑자기 오라고하시니까…” - 전화 좀 이리 내 봐. 얘, 하영아. 너 도대체 생각이 있니, 없니? 통화를 하는 하영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어머니가 통화중에 전화를 바꿔 받으신 것이다. 정말 이렇게 매번 이런 식이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기분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 하영은 그런 경호의 어머니가 불편하다 못해 정말 싫었다. “어머니, 네?” - 어른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교양 있으신 너희 부모님은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가르치시는 거니? 하영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수셨고, 그 덕에 하영은 남들이 흔히 말하는 교양 있고 반듯한 교육자 집안의 외동딸로 자랐다. 그래서 인지 작은 슈퍼를 운영하시는 경호의 어머니는 유난히 하영에게 열등감 아닌 열등감을 가지고 계셨고 매번 이렇게 부모님을 걸고 넘어졌다. “어머니, 그게 아니라요. 길이 너무 막혀서.” - 됐다. 더는 못 기다리겠으니 얘기는 경호에게 대신 하마. 너는 경호한테 들어라. 뚝. 전화는 또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만큼 자신이 뭐 그리 잘못한 건지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하영이 밀려오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뒤에서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신호가 어느 새 파란불로 바뀐 모양이었다. 하영은 서둘러 출발을 했고,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이 교통체증 속에서 다시 끙끙거리며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 뿐이었다. 홧김에 가방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분명 경호가 다시 전화를 걸었을 테지만 받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경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하영도 알고 있었다. 그도 어머니의 그런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매번 이런 일들이 반복 될 때마다 그녀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하영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 결국 하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휴대폰은 쉽게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운전에 정신이 소홀에 지는 순간, 쿵!! 적지 않은 충격이 몸에 전해졌다. 정지 신호에 맞춰 멈춰선 앞차를 하영이 그대로 들이 받은 것이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하영은 운전대에 머리를 부딪쳤고, 살짝 피가 묻어났지만 너무 놀라서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교통체증으로 저속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영은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하영이 들이박은 차의 운전자도 내려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영은 자신의 차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사과부터 했다. 상대방 운전자는 젊은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됐나 봐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아, 네. 전 괜찮은데… 근데 저보다는 그쪽이 더 큰일인데요?” “네?” 그제야 하영은 자신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하영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하영은 고맙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잠시 상처를 지혈하는 동안 남자는 자동차의 손상을 살폈다. 그리고는 멍하니 있는 하영에게 말했다. “일단 보험처리부터 하죠. 아! 직원은 안 불러도 되요.” “네? 네.” 남자는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고, 하영도 급하게 자동차로 돌아가 휴대폰을 꺼내 보험회사에 사고접수를 했다. 그사이 남자는 통화를 끝냈는지 하영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전화를 끊자 하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하영의 표정에 남자가 씩 웃었다. “사건 현장 사진을 찍어 둬야죠. 나중에 제가 뭐라고 할 줄 알고 그렇게 넋 놓고 있어요? 휴대폰 줘 봐요. 사진 찍게.” 하영의 휴대폰을 건네받은 남자는 꼼꼼하게 사고 현장을 찍어서 남겨두었다. 그리고는 하영의 휴대폰으로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범퍼 빼고는 크게 망가진 데는 없지만 그래도 견적 나오면 연락할게요. 이름이 뭐예요?” “신하영…” “저는 서준석이예요. 제가 지금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야해서요. 꼭 연락드릴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영에게 핸드폰을 건네주고는 서둘러 가버렸다. 다시 차에 오른 하영은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울음이 터졌다. 너무 놀란 뒤에 찾아오는 안도감이었다. 빵빵, 뒤에서는 차들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댔다. Serendipity 딸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약국 문이 열리고 경호가 들어섰다. 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경호는 의자에 앉아 자신을 본체만체 없이 일만 하는 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약국은 이내 한산해 졌다. 직원들이 하영에게 경호가 왔다고 눈치를 줬지만 그녀의 냉랭한 반응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하영은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고, 경호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신하영.” “…….” “미안해. 어머니 일은 내가 사과 할게.” “왜 매번 니가 사과를 하는 건데? 니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다친 데는 괜찮아?” “괜찮아 보여? 나 그날 사고까지 났어. 그러게 처음부터 너한테 해도 될 얘기였으면 날 뭐 하러 부르셨대? 난 뭐 할 일도 없이 노는 사람이야?” 하영의 이마에는 하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서 세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하영의 말을 듣던 경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 하영과 다투게 되는 이유는 어머니의 말도 안 되는 구박 때문이었다. 처음 경호의 어머니는 하영과의 교제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사실 교수 부모님에 직업이 약사인 하영은 경호에게는 분에 넘치는 상대였기에, 졸업 후 결혼을 하겠다는 경호의 말에도 흔쾌히 허락을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경호가 사범대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부터였다. 삼년연속으로 연거푸 시험에서 떨어지자 경호의 어머니는 그 원인이 마치 하영 때문인 것처럼 못마땅해 했고, 그런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로 하영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경호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하영은 더 속상했다. 그렇게 또다시 시험을 보게 된 경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한 달 후면 그 결과를 알 수 있게 된다. “하영아. 저번에 어머니가 하려는 말은…” “결혼 날짜 잡았다는 말? 아까 어머니가 전화해서 그러시더라. 결혼 날짜 잡았다고, 그저께는 그 얘기 하려고 불렀다고. 마치 너 시험에 붙어서 벌써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힘이 넘치시더라? 그러면서 뭐라고 하시는 줄 알아? 집은 20평짜리 전세 얻어 줄 거라고 하시면서 예단은 천만 원쯤에 가구에 TV, 냉장고, 침대는 전부 최고급으로 해오라고 하시더라. 내가 무슨 재벌 집 딸이야? 해오란 다고 척척 다 해오게. 그리고 혼수도 살 집에 맞춰서 해가야지 무조건 최고급으로 해가면 20평짜리 전셋집에 그게 어울리니? 결혼? 그래, 결혼 해야지. 근데 지금은 아니야. 난 못해. 어머니한테도 그렇게 말씀드렸어.” “못한다니. 어머니 말씀은 신경 쓰지 마. 그냥 우리 형편대로…” “형편? 웃긴다, 진짜. 아직 시험결과도 안 나왔어. 결혼을 할지 말지 아직 모른다고! 떨어지면 어쩔 건데? 붙었다고 확신해? 그래놓고서는 결혼? 하, 웃기지 마. 난 대출 받아서 전세 얻고, 10년 20년 다달이 빚 갚으면서 사는 거 싫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다고!” “구질구질하게? 그게 어때서? 착실하게 평수 늘려가면서 대출 갚고, 내 집 마련하는 게 구질구질해? 내가 아는 신하영이 이렇게 속물이었어?” “그래! 나 속물이야. 그럼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한번 물어봐. 지금 누가 너무 한 건지!” 하영의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경호의 언성도 올라갔다. 10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이렇게 크게 싸운 적은 처음이었다. 매번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영은 꾹꾹 참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지쳐버렸다. 정말 경호와 결혼하는 것이 옳은지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래 사귀었으니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도 기쁘질 않으니 망설여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 미안해. 너 힘들고 속상한 거 알아. 하지만 조금씩만 더 이해하자.” “난 우리가 꼭 결혼을 해야 하는 지도 잘 모르겠어.” “뭐?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너 나랑 10년이나 만났어.” “오래 만났다고 해서 다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예전부터 너랑 결혼을 하는 게 정말 옳은 것인지 궁금하고 답답했었어. 너는 딱 운명이다, 라는 확신이 안 든단 말이야.” “세상에 그런 확신이 들어서 결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도대체 우리가 운명이 아니면 뭐가 운명이야! 사랑하잖아.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그걸 잘 모르겠다고! 우리가 정말 운명이라면 너에게 좀 더 특별한 느낌이 있었으면 하는데 아니잖아. 너는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멩이 같아. 너무 평범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는 그런. 요즘은 내 감정이 사랑인지 그냥 정인지 잘 모르겠어.” “…정인지,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고? 이럴 땐 내가 뭐라고 해야 하냐?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 같은 놈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그만하자.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우리 좀 더 생각해보자. 나 일해야 해. 그만 가.” 하영은 더 이상 경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홧김에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Serendipity 하영의 하얀 승용차가 자동차 공업소에 들어섰다. 사고 이후 나흘이나 미뤄두었던 망가진 범퍼 수리와 그때의 충격으로 그 외에 손상된 곳이 없는지 점검을 받아 볼 요량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후로 상대방 남자에게 연락이 없었다. 하영도 결혼 문제로 경호와 싸우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따가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차를 맡기고 돌아서는 하영에게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저기 신하영씨?” “네? 어머.” 바로 그 남자, 준석이었다. 사고가 났을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제법 잘난 얼굴이었다. 유들유들하게 생긴 것이 귀하게 자란 듯 보였다. 더구나 저 기름기 좔좔 흐르는 여유로운 표정까지 부잣집 외아들로 보인다고나 할까? “하영씨는 차?” “네. 차 점검 좀 받으려구요. 연락이 없으셔서 지금 막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저는 차 찾으러 왔거든요. 별로 망가진 데도 없고, 수리비도 얼마 안 나와서 그냥 제가 고쳤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인연인가 봐요. 이렇게 만나네요.” “고치셨어요? 그럼 검사비랑 수리비 제가 드릴게요. 얼마 나오셨어요?” “하하. 괜찮아요. 정말 얼마 안 나왔어요.”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그건 예의가 아니죠.” “그래요? 그럼 다음에 하영씨 시간 괜찮으실 때 저녁이나 같이 하죠.” “저녁이요? 겨우 그 정도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이런 미인분과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영광이죠.” 능글맞은 말투에 저 생글거리는 웃음까지 제법 여러 여자를 울렸으리라 생각되는 준석이었다. 하지만 하영은 준석의 그런 태도가 왠지 싫지 않았다. 연락을 하겠다며 떠나는 준석의 차를 보니 고급 외제차였다. 수리비가 조금 나왔을 리가 없을 텐데, 고작 저녁 따위로 수리비를 대신하겠다는 태도를 보니 경호가 떠올라 괜히 씁쓸해 졌다. 작년 그의 차를 누군가 박고 뺑소니를 친 적이 있었다. 수리비가 20만 원 정도 나왔는데 그 범인을 잡겠다고 난리치던 모습이 생각 난 것이다. 물론 그때의 상황이 지금 준석과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왠지 경호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Serendipity 하영은 휴대폰을 들고 준석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저녁을 사기로 했으니 먼저 연락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왠지 용기나 나지 않았다. 며칠째 연락이 없는 경호가 생각났다.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괜히 양심이 따끔거려 먼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 후로 이틀이 그냥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하영이 망설이고 있을 때 딸랑, 종소리가 들리고 약국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라고 인사를 하던 하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하영씨?” 하영이 일하고 있는 약국으로 준석이 들어선 것이다. 벌써 세 번째 우연한 만남이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런 기막힌 인연이 또 있을까? 갑자기 감기 기운이 있어서 지나가다 약국에 들렀다는 준석의 말에 하영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리고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끝나요?” “30분쯤 후에요.” “오늘 저녁 괜찮아요?” 하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게 그날 저녁 하영은 준석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했다. 준석은 꼭 다시 만났으면 하는 마음에 수리비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냥 돈을 받고 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준석의 말을 듣는 하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식사비용은 하영이 아닌 준석이 지불했다. 그리고 준석의 차를 타고 집까지 편하게 돌아왔다. 다시 보자는 말과 함께 준석은 돌아갔지만 하영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Serendipity “여보세요?” - 하영아, 잠깐만 밖으로 나와. “준석씨? 무슨 말이야? 어디로 나오라는 거야?” 일주일 전, 준석과 저녁식사를 한 뒤로 두 사람은 두세 번 더 만남을 가졌다.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는 가벼운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오늘도 저녁을 먹고 준석이 집에 데려다 주었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흘렀는데, 갑자기 전화를 걸어 나오라는 준석의 말에 하영은 어리둥절해 하며 밖으로 나갔다. 집 앞에는 공업소에 있어야 할 하영의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 준석이 싱긋 웃으며 서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널 대신해 내가 찾아왔지.” “준석씨가 어떻게? 말도 안 돼. 아직 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거기 공업소 사장님이 아는 형이거든. 하영아 이리 와봐.” 하영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석의 손에 이끌려 자동차 뒤 트렁크 앞에 섰다. 준석이 천천히 트렁크를 열자 그 안에는 빨강 장미꽃이 가득 차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화려한 보석상자가 놓여있었다. 놀라는 하영을 보며 준석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조심스럽게 보석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이는 반지가 놓여있었다. “선물이야. 하영아.” “준석씨….” “하영아, 널 사랑해. 나랑 사귀어 줄래?” 하영은 기쁨에 눈물을 흘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이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영은 준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0년 동안 경호를 만나면서 알지 못했던 감정을 준석은 단 며칠 만에 하영에게 느끼게 해주었다. 준석은 하영에게 조심스럽게 키스를 했다. Serendipity “뭐? 경호랑 헤어졌다고?” 오랜만에 하영은 고등학교 친구 은섭과 진주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경호와 헤어졌음을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진주는 놀란 눈으로 하영에게 다시 물었고, 하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얼마 전 하영은 경호에게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화를 낼 줄 알았던 경호는 묵묵하게 이별을 받아들였고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 살짝 눈물이 비치는 것 같았지만 울진 않았다. 물론 하영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지난 10년의 사랑을 이렇게 끝내는 것이 안타까웠다. 남겨질 경호에게 미안했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쯤 견디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으흠… 그래?” “김은섭, 넌 이게 으흠… 그래, 로 끝날 얘기야?” “아닌 가…?” “당연히 아니지. 10년이야, 10년! 경호랑 하영이가 헤어졌다는데 그게 다야?” “…경호한테 들었어.” 은섭과 경호는 초등학교 친구사이였다. 하영이 경호를 알게 된 것도 은섭 때문이었다. 그러니 경호에게 이별 소식을 미리 들었을 것이라고 하영 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왜 헤어졌는데?” 진주의 말에 하영은 숨이 턱 막혔다. 다른 남자가 생겨서 헤어졌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영은 말없이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유가 왜 궁금해? 오진주.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거 같다.” “뭐야, 김은섭 넌 알아?” “나도 몰라. 안 물어 봤어. 경호는 지가 잘 못해줘서 그렇다던데?” 은섭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 경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하영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영이 아는 경호는 다른 사람에게 이별의 이유를 떠벌리고 다닐 남자가 절대 아니었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닌 하영의 잘못이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Serendipity 준석과의 사랑은 정말 달콤했다. 그는 하영보다 두 살 많았고, 유능한 광고 디자이너였다. 부모님은 현재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준석은 언제나 유쾌했고 다정다감했으며 하영이 원하는 것을 금방 알아채고 챙겨주었다. 그는 아무리 따져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남자였다. 언제나 예쁘고 값비싼 선물을 받았고 호화스러운 곳에서 식사를 했다. 데이트가 끝나면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달콤한 키스도 나누었다. 하영은 그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딱 걸맞은 상대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하영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준석의 태도가 처음과 달라서가 아니었다. 늘 한결같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영은 그에게서 조금도 진심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하영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어떤 감정이랄 것이 없었다. 그녀를 품에 안은 그의 심장에서는 작은 두근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몇 번이고 꾹꾹 참아내던 하영이 한번쯤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릴 때면 그는 특유의 유들거리는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사랑해. 그러니까 화내지 마, 라고… 그러면 그럴수록 하영은 그의 말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언제나 준석의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다. 그리고 그 여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하영에게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다른 여자에게 그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결국 화는 분노가 되었고, 불안은 불만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버린 남자, 경호와 비교하고 있었다. 하영은 결코 후회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후회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경호를 버린 벌을 이렇게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준석씨, 사랑해…” “고마워.” 어렵게 꺼낸 사랑한다는 고백에 준석의 대답은 고맙다는 말이 전부였다. 하영이 듣고 싶었던 말은 고작 이런 말이 아니었다. 이러려고 경호와 헤어지고 준석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하영은 결국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둬들이기로 결심했다. “준석씨, 우리 헤어져.” “뭐?” “우리 이제 그만 하는 게 좋겠어.” “갑자기 왜 그래?” “준석씨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이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이 뭐 별거야? 왜? 어제 사준 구두가 맘에 안 들어? 피곤하게 좀 굴지 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내가 필요한건 준석씨 진심이란 걸 정말 모르겠어?” “하- 여자는 이래서 피곤하다니까. 그래 맘대로 해. 난 상관없어.” 준석은 차갑게 웃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영의 곁을 떠났다. 정말이지 딱 3개월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석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하영은 두 번의 이별을 경험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과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부터 하영의 가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0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한순간에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녀 스스로 견디어야 할 몫이었다. Serendipity 이년 후. “신하영” 하영이 차에서 내리자 입구에서 자신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진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신혼의 재미에 푹 빠진 진주의 얼굴이 환해보였다. “오진주. 뭐야 언제 왔어? 신랑은?” “아직, 거의 다 왔데.” “그래? 그럼 오면 같이 들어가자. 은섭이는?” “주인공인데 벌써 와 있지.” 오늘은 은섭의 사진전이 있는 날이었다. 이년 전 하영이 준석과 헤어짐을 결심하고, 경호와의 이별에 대해 뒤늦게 아파할 때 즈음 은섭은 여행을 떠났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녀가 여행에서 찍어온 사진이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경호도 온다던데.” “그래?” “괜찮겠어?” “벌써 이 년도 더 지났는데, 뭐 어때.”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혹시 불편하면 경호 오기 전에 먼저 가던지.”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아직 그와 두 눈을 마주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인사를 나눌 용기는 없었다. 지난 이년 동안 참 많이 경호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염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아픈 감정쯤은 아무렇지 않게 숨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본인 앞에서조차 가능할 지는 자신이 없었다. 경호를 보는 순간 덜컥 눈물부터 쏟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 후 진주의 남편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은섭의 전시회장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사진으로 가득 찬 공간 안에 하나의 기둥이 서있었고 전시회장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척이나 진지하게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은섭이 세 사람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하영은 천천히 사진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때?” “저 기둥은 뭐야? 저기에 걸린 사진은 뭐가 달라?” “내 인생의 중심이 되는 것들.” “중심? 암튼 특이하긴. 근데 사진전 주제가 아이들처럼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다, 이거야?” “응.” “순수한 사랑이라. 왜 이런 생각을 했어?” “우연히 한 장의 사진을 봤어. 꼬마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였는데, 서로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어. 자꾸만 잊히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결심했어. 전 세계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렌즈 안에 담기로 말이지.” “뭐야, 어떤 사진이기에 천하의 김은섭을 감동시킨 거야?” 은섭은 아무 말 없이 하영을 데리고 중심이 되는 것들이라던 기둥 앞에 멈춰 섰다. 사각의 기둥의 네 면에는 네 개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첫 번째 면에는 바닷가에 서있는 소년이었고, 두 번째 면에는 은섭의 돌 사진이었다. 세 번째 면에는 어떤 아이의 웃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면에는 은섭이 말한 그 사진이었다. 흑백의 낡은 사진 속에는 공원의 잔디밭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꼬마 신부의 볼에 턱시도를 입은 꼬마 신랑이 살짝 뽀뽀하는 사진이었다. 하영은 그 사진 속 꼬마 신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예쁘지? 남자아이도 그렇지만 뽀뽀를 받는 여자아이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이지 않아? 어린 꼬마들이지만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잖아. 난 그게 너무 감동적이었어.” “저 꼬마 여자애 누군지 알아?” “아니. 나도 우연히 얻게 된 사진이라서 잘 모르겠어. 왜? 아는 얘야?” “나야…” “응? 너라구?” “응. 저때 찍은 사진 집에 있거든. 저 꼬마 신부 나야.” “오진주!” 그 순간 하영의 귓가에 갑자기 진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경호였다. 이 년 만에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당황한 하영은 재빨리 기둥 반대편으로 몸을 숨겼고, 그 찰나 경호가 은섭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순간 당황해하던 은섭도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경호를 맞았다. 하영을 향해 경호가 걸어오고 있었다. 비록 기둥에 가려 서로 볼 수는 없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어서 자리를 피해야 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발자국만 움직여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눈물을 참고 숨죽이고 있는 사이 은섭과 경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됐다며? 축하해.” “고맙다. 포기하려고 했더니 됐네.” 경호는 작년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정말 그의 어머니 말처럼 하영 탓이었는지,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난 후 경호는 당당히 시험에 통과를 한 것이다. 은섭의 축하에 쑥스러운 듯 웃던 경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곤 신기하다는 듯이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라? 이거 나잖아.” “뭐?” “이 사진 속에 꼬마 남자애, 나야.” “뭐라고? 저게 너라고?” 이번에는 은섭의 눈이 커졌다.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듯이 사진 속 꼬마 신랑을 가리키며 경호는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당황한 은섭이 재차 확인하듯 경호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응.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공원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그때 찍은 거야. 어디서 났어?” “정말로 너 맞아?” “응. 집에 사진 있을 걸? 우리 엄마가 줬어?” “아니… 선물 받았어.” “그래? 신기하다. 저때 웨딩촬영 중이었는데, 사진사가 들러리 좀 서달라고 해서 찍었어.” “그럼… 저 여자애도 누군지… 알아?” “몰라. 아마도 나처럼 놀러왔던 꼬마 애들 중에 한명이겠지. 이렇게 보니까 느낌이 다르네.” “말도 안 돼…” “신기하다. 이런 일도 있구나. 근데 김은섭 너 왜 이렇게 놀라?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응? 아, 그게 실은…” “은섭아, 경호야 이리 와 봐.” 진주가 은섭과 경호를 불렀다. 기둥 뒤에서 어쩌지 못하고 있는 하영에게 피할 시간을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 하영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우연히 찍은 사진 속에 그 꼬마 남자아이가 경호였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꾹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언제나 운명이 있을 거라고 믿었고,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했다. 그래서 지난날 사랑했던 경호를 버리고 준석을 택했던 것이다.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참고 참아왔던 경호에 대한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하영은 경호와 은섭이 자리를 옮기는 틈을 타 급히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혹시 경호와 마주칠지 모른다는 생각해 정성스럽게 한 화장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범벅이 되어 번졌다. Serendipity 경호는 전시회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하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경호는 기둥 앞에 섰다. 그리곤 네 번째 흑백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꼬마 신랑이 자신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하영도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분명 무척이나 신기해했을 텐데, 놀라는 하영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경호는 살며시 웃음이 났다. 이별 후 매일같이 그녀를 만날 수 있길 기도했다. 우연히 만나는 것이 어렵다면 오늘처럼 은섭의 사진전에서 마주치길 바랐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찾아왔던 것이다. “윤경호.” “응.” “하영이 생각해?” “응.” “뭐야, 아니라고 할 줄 알았더니.” 은섭의 말에 경호가 멋쩍은 듯 허허, 웃었다. 돌아가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쏟아질 것이다. 어머니 마음에 드는 조건의 여자를 소개받아, 만나서 밥 먹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언젠가 경호도 그럭저럭 적당한 여자를 선택하게 될 것이고, 어머니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호의 마음이 점점 급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기에 더 그립고 간절했다. “오늘 맞선이 있었어.” “맞선? 보고 온 거야?” “보긴 봤지. 얼굴 보자마자 죄송하다고 돌아서서 나왔으니까.” “여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었어?” “아니. 괜찮았어. 직업도 외모도 나한테는 과분했지.” “근데?” “여길 올 수가 없잖아. 하영이를 만날 수가 없잖아.” “멍청하긴. 그렇게 보고 싶으면 전화해 봐.” 경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년 전 다른 남자가 생겨서 떠난다는 하영을 잡지 못했다. 내가 더 사랑한다고, 더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하나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초라했다. 그녀가 말하는 운명적인 사랑의 상대가 될 수 없음에 하늘을 원망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너무나 사랑했던 여자를 단 한 번도 용기 내어 붙잡지 못한 비겁함이었다. 전화를 걸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 와서 보고 싶었다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씁쓸해진 경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섭이 살며시 말을 꺼냈다. “비밀 하나 말해줄까?” “비밀?” “응. 저 사진 속에 꼬마 커플에게 숨겨진 비밀 말이야.” “뭔데? 저 꼬마 신랑이 나라는 사실 말고 더 큰 비밀이 있어?” “있지. 정말 놀라운 비밀. 숨겨진 비밀은…” 은섭은 잠시 숨을 삼키고, 뜸을 들였다. 그런 은섭을 경호는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때마침 전시회장에서는 하영이 좋아하던 팝송인 Westlife가 부른 The ros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하영을 위해서 경호는 이 노래를 참 열심히 연습했었다. 그리고 청혼을 할 때 꼭 불러주겠다고 혼자서 다짐하고는 했었는데, 결국 한 번도 불러주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경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은섭에게 잠깐, 이라고 말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누구세요?” “…….” 상대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발신자도 표시되지 않는 전화였다. 경호는 이상하다는 듯이 전화를 끊으려다 갑자기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분명 낮은 숨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휴대폰에 귀를 기울이던 경호는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윤경호. 왜 그래?” “하영이…” “뭐? 하영이는 갑자기 왜?” “여기 있어.”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금 이 전시회장에서 흘러나오는 Westlife의 The rose가 휴대폰 너머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하영이가 분명했다. 끊어진 휴대폰을 들고 경호는 전시회장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분명 이 곳 어딘가에서 이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한참동안 경호는 하영을 찾아 다녔다. 실내는 물론 건물 밖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하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해진 경호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하영… 너 대체 어디 있냐….” “윤경호! 너 미쳤냐? 여기서 뭐해!” 은섭이었다. 대화를 하던 중간에 하영이를 찾겠다며 돌아다녔으니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경호는 실없는 사람처럼 허허허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포기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영의 바람대로 운명처럼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는데, 단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다. 정말 하영과는 인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경호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은섭이 말을 꺼냈다. “안 궁금해?” “뭐가?” “사진의 비밀 말이야.” “비밀? 아… 뭔데? 뭐 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궁금해?” “그래… 말해봐.” “그럼 지금 그 사진 앞으로 가봐. 거기 정답이 있어.” 알 수 없는 은섭의 말에 경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경호는 그 사진의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냥 밀려드는 허무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어선 것뿐이었다. 경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은섭을 뒤로한 채 천천히 전시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복잡한 표정으로 입구로 들어서던 경호의 발걸음이 멈칫, 멈추어 섰다. 흑백사진 앞에 하영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다가갈 수도 껴안을 수도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한 얼굴인지, 얼마나 간절했던 만남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입을 꽉 다문 경호가 힘겹게 한 발을 내딛었다. Serendipity 멀리 입구에 들어서는 경호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고,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너무 떨려서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번호도 없이, 아무런 말도 없이 걸려온 전화 한통만으로 한 번에 자신임을 알아채준 경호에게 하영은 너무 고마웠다. 멀리서도 느껴질 만큼 애틋하게 자신을 바라봐 주는 경호의 두 눈이 기뻤다. 쿵쿵,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맞춰 한발, 한발 다가오는 경호의 모습이 너무 행복했다. 보이지 않는, 느껴지지도 않는 운명을 찾아서 하영은 너무 바보 같은 선택을 했었다. 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항상 머무르던 사람이기에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흔하고 흔한 돌멩이일 지라도 그 사랑은 쉬이 깨지거나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것임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늦게 깨달았지만,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어린 시절 꼬마 하영과 꼬마 경호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씨앗이고 사랑은 겨울의 매서운 눈 아래 땅 속에서 인내한 후 봄에 장미로 피어나는 것이 사랑’ 이라던 The rose 노랫말처럼 하영과 경호의 사랑도 시리고 길었던 모진 시간을 견딘 끝에 드디어 피어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세상에 운명이 있다면, 그리고 그 운명을 기다린다면 가장 가까운 곳부터 살펴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겠죠. 부족함이 많은 글이지만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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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맨 마지막에 경호랑 하영이가 만나는 부분... 소름이 쫙돋았어요... 감동적이에요~ good~~~!!!!!!!
감사합니다 ^^
무슨 한편의 드라마 보는 느낌이었다고 해야하나.. 음, 아주 일상적인 소재였지만 재밌게 읽었어요. 전 원래 이런거 잘 안읽고 뒤로가기 누르는데..미니멜님은 잘 쓰신 것 같아요 ^^ ! 잘 읽고 가요
네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저는 사실 저 둘이 다시 붙을 줄 알았답니다 'ㅅ' 저는 초능력자니까요!!< ...농담이었구요, 너무 진실로 받아들이진 말아주세요. 정말 윗분처럼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잔잔하게 밀려오는 감동이 좋았구요. 꼭 이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어딘가에 있고, 지금 이 순간 저런 결말을 맞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ㅅ' 좋은 소설 잘 봤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모두들 행복하게 웃고 있겠죠? 근데... 정말 초능력자이신가? ㅋㅋ
저는 초능력자이므니다 ㅇㅇ..<< 아이큐 250에 공중부양과 투시,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죠< ㅋㅋㅋㅋㅋ
대단한데요 ㅋㅋㅋㅋ 스타킹에서 만날 수 있는거죠? ㅋㅋㅋ
저는 희귀한 사람이라 절 잡아다 실험할까봐 무서워서 스타킹은 몬 나가요 ㅠㅠㅠㅠ 미니멜님에게만 말하는거였십미다'ㅅ'데헷<
재밌어요 굳 굳 굳!!
감사해요 ! ^^
세렌디피티.....저도굉장히좋아하는단어예요!!!!!영화에서보고빠져버렸답니다:)그런데,정말여운이길게남는소설이네요!!!ㅋㅋㅋㅋㅋㅋㅋ진짜너무잘읽고가요ㅎㅎ
감사합니다 ^^ 저도 세렌디피티 영화 너무 좋아했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