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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고려님의 글을읽고
있는바 그대로 있어도 내용이 어떤것인지 몰라서 보지못한 책
육당 최남선과 '육당문고'
‘육당(六堂)’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천재이자 문학가·사학자였던 최남선(崔南善) 선생의 호다. 최남선 선생은 평생에 걸쳐 전 세계와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희귀 고서, 지도, 근대 신문·잡지 등 약 4만 6천여 권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양서를 1957년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고려대학교는 이를 기려 도서관 내에 별도의 특수자료실인 ‘육당문고’를 설치해 현재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최남선 선생은 고조선의 문화권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 몽골, 일본, 중국 내륙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역이었다는 ‘불함문화론’을 주장. 이는 신채호 선생이 《독사신론》에서 제시했던 "고조선의 영토는 흑룡강에서 황하 남북에 이르렀다"는 대륙적 영토관과 사상적으로 매우 깊이 공명하는 연구였다
장기민(張基民) 송곡(松谷)
1897년 3월 17일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결성 장씨 문중의 서당인 육영재(毓英齋)에서 장성휘(張星輝)의 지도 하에 학문을 수학했고, 장성휘로부터 대조선사(大朝鮮史) 교재를 숙지하며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연기군수는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각 면을 순회 강연하며 "시국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동면에서 이 연설을 지켜본 장기민은 "한국인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하다가 연설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장기민은 평소 뜻을 같이하던 장홍진(張弘鎭)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3월 28일 저녁에 동네 주민들을 선도하여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21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인용 위키백과)
〓 육영재(毓英齋): 조선 시대와 개항기, 그리고 각 지역의 향토 역사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된 명칭이다.
'기를 육(毓)'과 '꽃다울/뛰어날 영(英)'을 사용하여, 국가나 문중의 미래를 책임질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1. 관립 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과의 연관성
1886년 고종 내외의 명으로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다. 명칭은 약간 다르지만(育 vs 毓), '인재 양성'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은 동일
현직 관리와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영어와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조선이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을 통해 국력을 회복하려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2. 지역 및 문중의 서재(書齋)와 사설 교육기관
조선 후기 각 지역의 선비들이나 특정 문중에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건물의 이름으로 '육영재'가 자주 등장한다.
대구 육영재: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 정조 18년(1794년) 대구 지역의 유림들이 힘을 합쳐 세운 교육 장소다. 지역 인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곳.
기타 지역: 경남 산청, 전남 화순 등 전국 곳곳에 문중의 재실(齋室)이나 서당의 형태로 육영재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이 남아 있으며, 현재는 시도 유형문화재나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보호받기도 한다.
3. 한자 의미 풀이
'육영(毓英)'이라는 단어는 중국의 고전인 맹자(孟子)의 '진심상(盡心上)' 편에서 유래한 '득천하영재이교육지(得天下英才而敎育之)'와 맥을 같이 한다.
대조선사
단군조선에서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를 다룬 역사서. 2권 2책. 등사본. 총설에서 고려까지를 다룬 건책과 근세조선에서 한국의 멸망까지를 다룬 곤책으로 나누어진다. 저자와 제작 연대는 미상이다. 시대구분에서 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하에 제작되어 유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재는 국한문혼용을 택하고 있으며, 장절을 나누어 기술하는 근대적인 서술체재를 확립하고 있다. 각 시기별 서술에 앞서 총설(總說) 항목을 두어 조선사의 가치, 조선의 범위, 조선사의 기별(期別)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태고(太古), 상세(上世), 중세(中世), 근세(近世), 최근(最近)으로 시기를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태고는 조선족의 신흥시대(朝鮮族의 新興時代)·이성조탄강시대(二聖祖誕降時代)로, 상세는 대조선건설시대(大朝鮮建設時代)·오국시대(五國時代)로 구분하였다.
중세는 삼국시대(三國時代) · 남북시대(南北時代) · 고려시대(高麗時代)로, 근세는 근세조선의 전기(近世朝鮮의 前期) · 근세조선의 후기(近世朝鮮의 後期)로, 최근은 갑자이후시대(甲子以後時代) · 갑오이후시대(甲午以後時代) · 갑진이후시대(甲辰以後時代)로 각각 구분하였다.
각 시기의 마지막 장에는 제도 · 풍속 · 종교 · 학술 · 공예 · 미술 등 문화와 관련된 항목을 별도로 정리하였다. 시대구분에서 남북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 문화와 제도에 관련된 내용들을 별도의 항목을 두어 정리한 점 등으로 보아 이 책의 필자는 일제하 문화주의사관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서도 시대구분에서 장도빈(張道斌)이 『조선연표』에서 사용했던 ‘오국시대’를 설정한 점, 부여와 삼한세계를 적은 부분에서 사용한 ‘민주제(民主制)’라는 용어는 장도빈이 채용한 ‘부족자치(部族自治)’라는 용어를 그대로 대치한 것이라는 점, 문장의 서술에서 용어 뿐만 아니라 서술순서에서도 장도빈의 통사서의 것과 일치하는 점 등에서 장도빈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저술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조선사 [大朝鮮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대도서관에 현재 대조선사2책 --필사부분과 등사한것이 혼재한것(김ㅇㅇ분이 필사)육당기증 ,열람만가능
이외에 2책을 하나로묶은 합본분이 있음 표지에 대조선사 全 ,대조선사 두종류 대출가능 .두책다 등사본(철필본) 하나는 판독가능, 철필본(등사본) 을 등사하여 글씨체가 제각각 인쇄부분이 좋은부분도있고 판독하기힘든부분도있음 2권1책은 결정적으로 근세부분이전부 누락 고리이후 바로 최근세로 합본함(이조부분누락하고 한일늑약협정부분으로) 등사본특징상 인쇄부분 불량한곳이있고 한분이 전체를쓰지않고 부분부분 나누어서 여러명(5~6명)이 씀 .현재 합본된1책짜리는 대출도 가능(조건에따라)
동국대 2책,한국학연구원 2책 DB비공개(소유기관전부 )열람만 가능
1911년 제1차 조선 교육령 (The Japanese Ordinance of 1911).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직후, 일본 현지에서 1890년 반포된 교육칙어가 한국까지 적용이 확장되며 1911년 8월 23일 조선 교육령이 실시되었다. 새로운 교육 체제 하에서 각종 학교들을 규제한 조선교육령과 기타 교육 관련 규정들은 향후 30년간 이루어질 일본의 교육 방침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한국의 교육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서양인 중 하나였던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는 조선교육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법령에 명시된 정부의 정책은 모든 한국인들이 마음속으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한국인과 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에 대한 분리 및 차별 교육이다. ...
두 번째는 교육의 주된 목적이 일본의 충실한 신민을 양성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솔직하고 보다 대담하게 선언한 점이다.
세 번째는 낙후된 상황과 국민들의 열등한 정신 상태를 상정한 채 조선(한국)의 교육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1911년의 법령은 교육칙어에 근거한 지침을 내림으로써 교육의 주요 목적이 일본의 충실하고 선량한 신민을 만드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 법령은 또한 “국민성을 고취하고 국어(일본어)를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법령은 교육을 보통 교육(Common Education), 실업 교육(Industrial Education), 그리고 전문 교육(Special Education)으로 분류했다. 보통학교(Common school)는 보통학교(elementary common schools), 고등보통학교(common high school), 그리고 여자고등보통학교(girls’ common high school)로 나뉘었다.
아동들은 8살이 되면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교육받을 수 있었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은 고등 보통 학교에 진학하여 남학생의 경우엔 4년, 여학생의 경우엔 3년간 교육을 지속할 수 있었다. 전문 교육이나 실업 교육은 직업 교육이나 전문 교육, 또는 보다 상급의 적절한 교육을 받기 원하는, 일반 교육을 충분히 이수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한국의 교육 상황은 당시까지도 잔존하던 몇몇 “서당”, 관립학교, 사립학교, 여학교, 일본인 학교 등 다양한 학교들의 존재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 학교도 교육의 종류와 관련해서는 같은 원칙을 따랐다. “서당”은 정부 시스템이 지역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마을들에서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 존속이 허용되었다. 관립학교는 모든 수준에서 전적으로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는 교육 기관이었다. 사립학교는 민간 재정으로 운영되는 학교로서 전술한 학교 관련 규정을 따르는 표준반(standard)과 규정을 따르지 않는 비표준반(non-standard)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일본인 학교는 오로지 일본인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학교였으며, 여학교는 남학생들과 적절한 분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나이대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였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The Ordinance of 1922). 1922년 2월, 사이토 총독은 교육에 대한 새로운 법령을 발표했다. 새로운 법령은 비록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해 발표되었으나, 일반 학교와 대학에 대한 규제를 담고 있었고 사립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개입 정도를 명백히 확대하는 것이었다. 전술한 교과서와 교사의 자격에 대한 규정은 사립학교에 더욱 엄격히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 법령은 비록 외견상 1911년의 법령보다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긴 했지만, 매우 강압적인 성격을 띠었던 1915년 법령보다는 완화된 것이었다. 이전에 실시된 2개의 법령과 비교해본다면 사이토 총독은 사실상 일련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22년 법령에 나타난 자유주의의 증거는 그가 모든 과목을 일본어로 가르치도록 한 조건을 폐기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다시 한국어와 기술 과목, 그리고 한문을 교육할 수 있게 되었다.(언더우드)
사이토 총독에 따르면 새로운 교육 법령이 내포한 이러한 변화는 “일본과 조선이 함께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공통된 하나의 완결된 제도를 가져야만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하에” 초등 교육, 상업 교육, 실업 교육, 그리고 전문 교육의 기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조선총독부, 학무국, “제2차 조선교육령, 1922년 2월 9일)
이 법령은 약간의 개정을 거치며 한국인과 일본인 아동 모두를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통해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일본의 신민으로 주조하기 위한” 목적에서 교육법의 근본적인 개정이 이루어진 1938년 3월까지 유지되었다
1920년대 보통학교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인'제2차 조선교육령(1922년)'에 따라 외형적인 변화와 내면적인 통제가 동시에 이루어졌던 시기다. 이 시기는 소위 '문화 통치'라는 기만적인 정책 아래 교육 기회가 일부 확대되는 듯 보였으나, 그 본질은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한 '충성스러운 신민' 양성에 있었다.
당시 보통학교의 주요 특징과 사회적 맥락은 다음과 같다.
1. 학제 변화와 교육 기회의 확대
이전까지 4년이었던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이 일본과 동일한 6년으로 늘어났다
면마다 하나의 보통학교를 세운다는 원칙하에 학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는 근대 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열망을 식민지 체제 내로 흡수하려는 의도였다. 학교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거나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2. 교육 내용: '일본어'와 '실업' 중심 조선어 수업이 선택 과목화되거나 비중이 줄어든 반면, 일본어(당시 '국어') 교육은 더욱 강화되었다.
고등 교육보다는 농업, 상업 등 기초적인 실무 지식을 가르쳐 일본의 산업화에 필요한 하급 노동력을 양성하는 데 치중
매일 아침 일본 천황이 있는 쪽을 향해 절하는 '궁성요배'나 일본의 건국 신화를 가르치는 등 황민화 교육의 기초가 닦인 시기이기도하다.
3.차별적인 교육 구조: '보통학교(조선인)'와 '소학교(일본인)'로 이름부터 구분되어 있었으며, 교육 시설이나 예산 배정에서 극심한 차별을 겪었다.
4. 사회적 반응: 교육열과 저항
식민지 현실 속에서 출세나 생존을 위해서는 근대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부모들의 교육열이 대단했다.
학교 내 차별 대우, 일본인 교사의 폭언, 식민지 교육 방식에 반대하며 학생들이 단체로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20년대 보통학교는 외형적으로는 현대적 학제를 갖추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일본어를 강요하고 하급 인력을 양성하던 식민지 교육의 현장이었다 현재의 '중학교' 수준
보통학교를 졸업하면 '고등보통학교(현재의 중·고등학교 통합 과정)'나 '실업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보통학교 졸업만으로도 지역 사회에서는 상당한 '인텔리' 대접을 받았다
당시 보통학교 졸업의 가치는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조선의 문맹률은 매우 높았기 때문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마을에서 글을 읽고 행정 업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졸업 후 면서기(하급 공무원), 순사보, 은행원 등으로 바로 취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현재의 고졸~초대졸 정도의 사회적 진출 능력을 갖춘 과정으로 평가받았다.
1922년책주인 윤희운 --윤상현(3학년) 에서윤성현(4학년)으로 대물림
대조선사중 보통학교필사된것은 극히 일부 고조선부분만 나와있다(1922년 필사)
1922년판 1911(적색)
대조선사
총론
대조선사의 가치
一, 문명적(文明的)
일과(一課)
우리조선은 세계적 문명 발원지의 하나(一)이라 조선인이 오천년이래로 대문명을 발휘(發揮)하여 자가(自家)를 확장하며 이족(異族)을 개도(開導)하여 문명의 광화(光化)를 상하오천대(上下五千載)에 양(揚)하며 문명의 사택(思澤)을 연무만여리(延동서袤남북萬餘里)에 장(張)하였나니 조선사는 과연 대문명사인 가치를 유하였나니라
二,세력적(勢力的)
우리조선은 문명구국(文明舊國)인 동시에 상무구국(尙武舊國옛나라)이며 진취국(進就國)이며 대국(大國)인지라 조선이 건설(建設)되기전에도 물론 아조선인(我朝鮮人)이 대세력(大勢力)을 장(張)하여 제족(諸族)을 복(伏)하고 대지(大地)를 유(有) 하여거니와 설립이후에 더욱기리 세력을 분휘(奮揮)하여 내(內)로 실력(實力)을 확충(擴充)하고 외(外)로 위광(威光)을 진요(震耀)한지라 그러므로 문화는 울흥(蔚興)하고 무력(武力)은 장양(長揚)하얏스며 진(進)하매 만여리(萬餘里)의 대판도(大版圖)를 옹유(擁有)하고 수(守)함에 오천년의 대역사(大歷史)를 장호(長護)하엿으며 제족(諸族)의 경쟁(競爭)이 극렬(極烈)한 동북아세아 에 재(在)하여 이족(異族 ,한족<漢族>,일본, 돌궐족 등 )을 제축(制逐제압하여 쫒음)함에 패(敗)는 소(少)하고 승(勝)은 다(多)하며 득(得)은 다(多)하고 실(失)은 소(少)하엿나니 조선사는 과연 대국사(大國史)인 가치가 유하니라
三,기간적(期間的)
우리조선은 육대구국(六大舊國)의 하나(一)이라 조선인이 국가생활(生活)을 작(作)함이 4255년전4244년전(서기원1222년전1911년을 距거하야)시대에 시(始)하여 애급(阿弗利加아불리가아프리카)지나(支那아세아)와 전후(前後)가 되며 인도.파사 (印度,波斯아세아)희랍(希臘구라파)의 전진(前進)이 되는지라 저다섯개구국(彼五個舊國)은 혹(或)은 천년 혹은 수백년(기백년) 혹 수회(數回) 혹 수십회(數十回)를 이족(異族)의 정복하(征服下)에 신음(呻吟)하엿으며 혹은 이천년 혹은 천년 또 기백년(幾百年)에 멸망(滅亡)하얏으며 혹은 국가만 멸망하얏을뿐아니라 민족(民族)까지 멸망하얏거늘 조선은 동일(同一한 민족 ) 동일한 지리(地理)로 국가를 장전(長全)하야 금일(今日)에 지(至)하엿나니 이는(此) 동서구국(東西舊國동서고금)에 오즉 조선뿐이라 이럼으로 아조선사는 과연 세계제일의 대역사인 가치가 유하니라.
조선사의 범위(範圍)
一,시간적(時間的)
우리 조선사는 위(上)으로 태고(太古)로 시(始)하니 태고는 즉4255년전조선인(朝鮮人)의 어록(語錄)이오 아래(下)로 최근(最近)에 지(至이르니)하니 최근은 현대조선인(現代朝鮮人)의 어록이니라
二,지리적(地理的)
우리 조선의 지리는 동(東)은 창해(滄海)를 령(領)하며(거느리고) 일본군도(日本群島)의 서부(西部)를 략(掠탈취)하였으며 남(南)은 제주도(濟洲道)를 령(領)하여 지나동해(支那東海)를 접(接)하얏으며 북(北)은 흑룡강(黑龍江)을 월(越)하여 (넘어서) 야프로노이산맥(雅布魯諾威山脈음차 야블로노이)에 달(達)하엿나니 남북(南北)이 만여리(萬餘里)오 동서(동東西)가 육,칠천리니라
동부아세아(東部亞細亞)에 반원형(半圓形)의 이대지(二大地)가 남북으로 태평양(太平洋)을 연(沿)하여 각기(各其)만여리의 대판도(大版圖)를 유하엿나니 남대지(南大地)는 지나(支那)오 북대지(北大地)는 즉 아조선인의 활동하던 지역(地域)이라 그런데 이 북대륙(北大陸)은 흑룡강이 북부(北部)를 관류(貫流)하고 송화강(松花江)은 중앙(中央)을 관류하고 압록강(鴨綠江)이 남부(南部)를 관류하나니 조선인은 송화강남(松花江南) 압록강북(鴨綠江北)으로 중심(中心)을 삼아 드디여 그 동서남북의 해륙(海陸)을 점유(占有)하여 북대지이외(北大地以外)에 다수(多數)한 해양도서(海洋島嶼)를 령(領)하엿나니라
우리조선인이 지역을 남부 중부 북부에 분(分)하니 남부는 장백산 이남(長白山以南)으로 제주도전양(濟洲島前洋)에 지(至)하매 만주(滿州)의 남부(南部) 조선반도 발해(渤海)밋 그 좌우연안(其左右沿岸) 황해(黃海)다도해(多島海)창해(滄海)일본군도(日本群島)의 서부(西部)를 포괄(包括)하엿으며 중부(中部)는 흑룡강이남 으로 장백산(맥)에 지(至)하매 만주 몽고동부(蒙古東部)지나직예성(支那直隸城)의 동부밋 그 북부 노령연해주(露領沿海洲)밋 그 연해(沿海)를 포괄하며 북부는 흑룡강 이북으로 야블로노이산맥(雅布魯諾威山脉)에 달(逹)한 일대지(一大地)밋 그 연해이니라.
▶洲島(주도):주위(周圍)가 수역(水域)으로 완전히(完全-) 둘러싸인 육지(陸地)의 일부(一部) 분포(分布) 상태(狀態)에 따라 제도(諸島)ㆍ군도(群島)ㆍ열도(列島)ㆍ고도(孤島)로 나누며. 강(江) 어귀에 삼각주(三角洲)처럼 흙과 모래가 쌓여서 된 섬.
三,민족적(民族的)
우리 조선은 조선족인 민족단체(民族團體)가 조직한 국(國)이니 조선족은 아세아의 일민족(一民族)이니라.
아세아족(亞細亞族)은 삼파(三派세갈래)에 분(分)하니
(一)시베리아파(西比利亞派) (二)지나파(支那派) (三)해도파(海島派)라 그런데 조선족은 시베리아파(西比利亞派)에 속(屬)한 일민족(一民族)이니 실(實)로 대황조(大皇祖)의혈통(血統)을 동(同)한 일민족이니라
●아세아인종
시베리아파:조선족.돌궐족.퉁구스족(通古寺族,터키인土耳其人).몽고족(蒙古族)
통고스족(여진女眞등)몽고족(몽고인),토이기족( 土耳其人)등
지나파:한족(漢族).인도(印度).지나족(支那族).문백시족(門伯時族서장인).안남(安南.면전(緬甸).섬라(暹羅) 등
한족(漢族)인도지나족(印度支那族안남인,면전인,섬라인)등.문백시종(門伯恃種 서장인)
해도파:일본족
여사(如斯이와같이)히 아조선족은 순연(純然)한 일혈족(一血族)단체오 조선은 조선족의 건설 또 수호(守護)한 나라(國)이니 그런즉 조선사(朝鮮史)의 주인은 즉 조선족이오다.
맛 조선인에게 정복(征服)을 당하고 외교(外交)를 결(結맺은)한 이족(異族)은 역사사실에 수(随 따라서)하여 은현(隱現)하였을뿐 아니라.
조선사의 기별(期別)
一,태고(太古)
태고사(太古史)는 조선건설 하기 전(前)까지의 사(事)니 조선인이 동북아시아(東北亞世亞)에서 일어나서(起하야)제족(諸族)을 제복(制伏)하고 동남(東南)으로 발달한 시대오
二,상세(上世)
상세사는 조선기원원년(紀元元年)부터 기원2295년의 일(事)이니 제일(第一) 대조선건국시대오 제이(第二)는 오국(五國)부여 ,소조선,
마한,진한,변한시대라
대조선건국은 대황조(大皇祖)가 강세(降世)하여 대조선을 건설한시대로부터 대조선황조(皇朝)가 북(北)으로 부여(扶餘)에 도(徒)한 시대에 지하니 조선의 신흥(新興)시대오 오국시대는 조선의 황조(皇朝)가 북천(北遷)하여 부여(扶餘)를 건설하는동시에 만주남단(滿洲南端)
과 조선반도에 소조선(小朝鮮)마한 진한 변한이 건설한시대로 부터 고구리(高句麗)건설되기 전까지에 지(至)하니 조선의 점진(漸進)시대오
三,중세(中世)
중세사는 기원(紀元)2296년부터 기원3720년까지에 일이니 제일(第一)삼국시대(고구리,백제,신라)제이(第二)남북조시대「북조(北朝)발해,남조(南朝)신라」제삼(第三)고리(高麗)시대. 삼국시대는 고구리,백제,신라가 건설된시대부터 고구리,백제가 멸망한시대에 지(至)하니 조선의 대성(大盛)시대오 남북시대는 발해(渤海),신라가 병립(竝立)한 시대부터 발해 신라가멸망한시대에 지(至)하니 조선의 만성(滿盛)시대오 고리(高麗)시대는 고리가 건설된시대 부터 고리가 멸망시대에 지(至)하니 조선의 점진(漸進)시대오
四,근세사(近世史)
근세사는 기원3727년부터 4196년까지의 일(事)이니 제일(第一)근세 조선의 전기 제이(第二) 근세 조선후기 라
조선전기(前期)는 근세 조선의 건설된시대 부터 명종(明宗)에 지하니 조선의 쇠퇴시대오 근세조선의 후기(後期)는 선조(宣祖)부터 철종(哲宗)시대에 지하니 조선의 대쇠(大衰)시대며
五,최근(最近)
최근사는 기원4196년부터 4243년 까지의 사(事)니 제일(第一)갑자(甲子)이후시대 제이(第二)갑오(甲午)이후시대 제삼(第三)갑진(甲辰)이후시대라
갑자이후시대는 광무제(光武帝)등극한 시대부터 동학당난(東學黨亂)의 전까지에 지하니 조선의 대란(大亂)시대오 갑오시대이후는 동학당난의 시대부터 일로전쟁(日露戰爭)시대에 지하니 조선의 위급(危急)시대오 갑진이후시대는 일로전쟁이후시대부터 금일(今日)에 지하니 조선의 멸망시대이니라.
태고(조선건설되기전까지)
제일기(第一期)조선족의 신흥시대
제일장(第一章)조선족의 흥기웅비(興起雄飛)
◇ 조선족의 흥기(興起)
아 조선족이 아세아 동북대륙(東北大陸시베리아)에서 기(起)하여 난지(暧地 따뜻한 곳)를 구(求)하고 평원(平原)을 연(沿)하여 점점 동남으로 하(下)할새 어시호(於是乎그리하여)동(東)으로 흑수(黑水흑룡강)남북에 유력하여 (遊歷 여러 고장을 두루 돌아다녀) 서(西)으로 속말수(粟末水송화강)좌우에 서식(栖息)하여 남으로 조선반도에 입(入)하니 시(時때)는 거금 오천년이전시대이니라.
◇조선족의 웅비(雄飛)
조선족이 동남으로 하(下)하는 때에 동북아세아에 제민족(諸民族)의 경쟁이 극렬하니 그중 아족(我族)의 사린(四隣사방이웃)에 한족(漢族)통구사족(通古寺族)돌궐족,몽고족이 유(有)하니라 숙신,읍루,물길(勿吉)말갈,여진,선비(鮮卑)거란( 契丹, Khitan ),옥저( 沃沮)는 모두 아족(我族)이니라. 이상 제족(諸族)이 각기세력을 장(張)하며 생존번영을 경쟁할새 그기간 아족이 우승세력(優勝勢力)을 점하며 혹은 동화(同化)하며 혹은 제복(制伏)하며 혹은 구축(驅逐몰아서쫒아냄)하니 그리하여 흑수의 남북(요하 遼河)의 동(東 만주대륙)조선반도(朝鮮半島)가 다 아족의 강토(彊土)가 되나니라. 치우(蚩尤)는 숙신인(肅愼人)이니 지용(智勇)이 무쌍(無雙)이라 지나대륙을 아가물(我家物)로 작(作)코저하여 황제(黃帝한족의시조)로 더불어 탁록(涿鹿)의 풍운을 량(釀)하다가 그 지(其志그뜻)를 미전(未展펼치지못함)하엿으나
아족의 위대(偉大)한 면목(面目)을 잠현(暫現잠시나타남)하였다할지니라
제이기(第二期)
제일장(第一章) 세력의 점성(漸盛),문화의 점진(漸進)
一, 세력의 점성(漸盛)
아조선족이 기(旣이미)히 제족(諸族)을 제(制)하고 만주대륙과 조선반도에 번연(繁衍)을 도(圖)할새 착착(着着)이 토(土)를 척(拓)하며 민(民)을 식(殖)하며 기초(基礎)를 공고(鞏固)하며 거(居거주)를 안(安)하며 업(業)을 흥(興)하며 세력을 장(張)하니라
二, 문화의 점진(漸進)
어시(於是)에 문화가 점점진보 되여 경작(畊作)의 법(法)이 생하며 항해(航海)의 술(術기술)이 기(起)하며 건축(建築)의 술이 흥하며 기타(其他)일반문화가 발육(發育)을 시(始)하니라
상세(上世) .조선기원원년부터 기원2295년까지
제일기(第一期) 대조선건설시대
제삼장(第三章)대황조출세(大皇祖出世)및 대황조건국(大皇祖建國)
一, 대황조출세(大皇祖出世)
환인(桓因)은 천야(天也)오,환웅(桓雄)은 신야(神也)오, 환검(桓儉)은 신인야(神人也)시니 (一云 檀因 檀雄, 檀君)시위 삼신(是爲三神)
이라. 상원갑자(上元甲子)시월13일에 환검(桓儉)이 이신화인(以神化人)하사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지(持)하고 태백산단목하(太白山檀木下)에 강(降)하사 신교(神敎)를 설(設)하사 민(民)을 교(敎)하시니 인민(人民)이 피화(被化)하사 귀자여시(歸者如市)함으로 신시씨(神市氏)의 칭(稱)이 유하니라 삼천단부(三千團部)에 분치(分置)하시다
▶ 백성들이 덕화(덕망에 감화)를 입어, 그를 따르고 모여드는 사람이 마치 저자(시장)를 이룬 듯 대단히 많았다
二,대조선건설
-----생략
보통학교(普通學校)에서는 끝에 우리의세가지 자랑 부분이 덫부쳐서 교육
★조선의 지리와 조선족의웅비부분등등 보통학교(普通學校 1922년)판은일부 내용을 교열하여 한반도 에 끌어다 집어녛으려하는듯한 흔적이 역력 글자를 한자씩바꿔치기하고 주변국가의 위치를 모르게빼버리기도하는 수법과 치우(蚩尤)고사를삽입해서 마치 대륙을 지우려는듯 한족(漢族)시조 황제(黃帝)와의 탁록전쟁후 도전은 한때의 꿈으로 만족하고 안위삼으라는듯 중화민국과 일제는 역사외곡을 한번더 덧부쳐서 역사를 새로꿰맞추려는듯한 의도가보임 .과도기의책(20년대)--이책이후 어느시기인지모르게 철저히30년대 한반도에선 삼천리금수강산 이라 세뇌 주입교육으로
예시 )사위(四圍) 를 사린(四隣)으로, 지나동부를 접(接)한것을 지나동해를 접한것으로.등등
1911년 판
조선사의 범위(範圍)
一,시간적(時間的)
조선사는 위(上)으로 태고(太古)로 시(始)하니 태고는 즉4244년전 조선인(朝鮮人)의 어록(語錄)이오 아래(下)로 최근(最近)에 지(至이르니)하니 최근은 현대조선인(現代朝鮮人)의 어록이니라
二,지리적(地理的)
조선의 지리는 동(東)으로 창해(滄海)를 령(領)하야며(거느리고) 일본군도(日本群島)의 서부(西部)를 략(掠탈취)하얏으며 남(南)으로 제주도(濟州道)를 령(領)하야 지나동부(支那東部)를 접(接)하얏으며 북(北)으로 흑룡강(黑龍江)을 월(越)하여 (넘어서) 야프로노이산맥(雅布魯諾威山脈음차 야블로노이)에 달(達)하엿나니 남북(南北)이 만여리(萬餘里)오 동서(동東西)가 육,칠천여리(육칠천여리)라
동부아세아(東部亞細亞)에 반원형(半圓形)의 이대지(二大地)가 태평양(太平洋)으로 연(沿)하여 각기(各其)만여리의 판도(版圖)를 유하니 남대지(南大地)는 지나(支那)오 북대지(北大地)는 즉 조선인의 활동을 옹(擁)하던 지역(地域)이라 그런데 이 북대지(北大地)는 흑룡강 (黑龍江)이 북부(北部)를 관류(貫流)하고 송화강(松花江)이 중앙(中央)을 관류하고 압록강(鴨綠江)이 남부(南部)를 관류하나니 조선인은 송화강남(南) 압록강남(鴨綠江南)을 중심(中心)하야 드대여 동서남북의 해륙(海陸)을 점령(占領)하야 북대지이외(北大地以外)에 다수(多數)한 해양도서(海洋島嶼)를 령유(領有)하니라
조선인이 지역을 남부 중부 북부에 분(分)하니 남부(南部)는 장백산 이남(長白山以南)으로 제주도전양(濟州島前洋)에 지(至)함에 만주(滿州)의 남단(南端) 조선반도 발해(渤海)밋 그 좌우연안(其左右沿岸) 황해(黃海)다도해(多島海)창해(滄海)일본군도(日本群島)에 서부(西部)를 포괄(包括)하야 중부(中部)는 흑룡강이남(黑龍江以南) 으로 장백산맥에 지(至)함에 만주(滿洲) 몽고동부(蒙古東部)지나직예성(支那直隸城)에 동부밋북부 노령연해주(露領沿海州)밋 그 연해(沿海)를 포괄하얏고 북부(北部)는 흑룡강이북(以北)으로 야블로노이산맥(雅布魯諾威山脉)에 지(至)하얏는 일대지(一大地)밋 그 연해(沿海)니라.
三,민족적(民族的)
조선은 조선족인 민족단체(民族團體)가 조직한 국(國)이니 조선족은 아세아인종 (人種)의 일민족(一民族)이니라.
아세아인종(亞細亞人種)은 삼파(三派세갈래)에 분(分)하니
(一)은시베리아파(西比利亞派)오 (二)는지나파(支那派)오 (三)은해도파(海島派)라
그런데 조선족은 시베리아파(西比利亞派)에 속(屬)한 일민족(一民族)이니 실(實)로 대황조(大皇祖)를 동(同)하고 혈통(血統)을 동(同)한 민족이라
●아세아인종(亞細亞人種)
시베리아파:조선족.퉁구스족(通古寺族,女眞等).몽고족(蒙古族몽고인) 토이기족( 土耳其人)등
지나파:한족(漢族).인도지나족( 印度支那族 안남인,면전인,섬라인)등.문백시족(門伯時族서장인).
해도파:일본족
여사(如斯이와같이)히 조선족은 순연(純然)한 일혈족(一血族)단체오 조선은 조선족의 건설 또 수호(守護)한 나라(國)이니 그런즉 조선사(朝鮮史)의 주인은 즉 조선족이오.
다맛(다만) 조선인에게 정복(征服)을 당하거나 조선인과 외교(外交)를 결(結맺은)한 이족(異族)은 역사사실을 수(随 따라서)하야 은현(隱現)하였을뿐이니라.
조선사의 기별(期別)
一 태고 .태고사(太古史)는 조선건설하기전까지의 일(事) 이니 조선인이 동북아세아(東北亞細亞)에 굴기(屈起)하야 제족과 각축하며 제족을 제복(制服) 하고 동남(東南)으로 발달한시대오 二 상고(上古).상고사는 조선기원원년부터 기원2295년까지의 일이니 제일 대조선건국시대 제이 오국시대라.대조선건국은 대황조가 출(出)하야 대조선건설된뿐
태고(조선건설되기전까지)
◆제일기(第一期)조선족의 신흥시대(新興時代)
제일장(第一章)조선족의 흥기밋웅비(興起밋 雄飛) 세력의 점성(漸盛)과 문화의 점진(漸進)
一, 조선족의 흥기(興起) 밋 웅비(雄飛)
조선족의 흥기(興起)
아 조선족이 아세아 동북대륙(東北大陸시베리아)에서 기(起)하야 난지(暧地 따뜻한 곳)를 구(求)하며 평원(平原)을 연(沿)하야 점점 동남으로 하(下)할새 어시호(於是乎그리하여)동(東)으로 흑수(黑水흑룡강)남북에 유력하며 (遊歷 여러 고장을 두루 돌아다녀) 서(西)으로 속말수(粟末水송화강좌우)에 서식(栖息)하며 또남으로 조선반도에 연급(延及)하니 시(時때)는 거금 오천년이전시대이러라.
조선족의 웅비(雄飛)
조선족이 동남으로 하(下)하는 때(時)에 동북아세아에 제민족(諸民族)의 경쟁이 극렬하니 그중에 아조선족(我朝鮮族)의 사위(四圍사방의 둘레)에는 맥족(예맥,양맥 )여진족(숙신 읍루,말갈,여진,금저 金渚 )호족(胡族 동호,선비,거란)옥저족(남옥저,북옥저)한족(漢族지나의 한인)이 유(有)하니라 이상 제족(諸族)이 각기세력을 장(張)하야 생존번영을 경쟁할새 한족(漢族은 요수 서남(西南)에서에 방흥(方興)하야 동(東)으로 연(延)코져하고 여진족은 동남(東南)에 산거(散居)하야 서남(西南)으로 향(向)코져하고 호족(胡族)은 동남(東南)으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脉)을 월(越)코져 하고 맥족 옥저족은 먼저 조선반도에 입(入)하얏거늘 아조선족이 제족(諸族)과 각축하야 제족을 승(勝)하야 제족을 배(排물리치고)하고 더욱더욱 동남(東南)으로 하(下)하야 드디뎌 조선반도 내(內)까지 웅비하야 제족(諸族)을 반도일우(半島一隅한구석강원도) 에 구축(驅逐몰아서쫒아냄)하며 옥저족을 반도동북 일우(一隅 함경도)에 제복(制伏)하니 어시호(於是乎) 흑수의 남(南)「요수( 遼水)의 동(東 만주대륙)」또 조선반도(朝鮮半島)가 다 아조선족의 강토(彊土)가 되니라.
二, 세력의 점성(漸盛)과 문화의 점진(漸進)
조선족이 이미(旣기)히 제족(諸族)을 제(制)하고 만주대륙밋 조선반도에서더욱더욱 번연(繁衍)을 도(圖)할새 착착(着着)이 지(地)를 척(拓)하며 민(民)을 식(殖)하야 기초(基礎)를 인(因)하고 거(居거주)를 정(定)하며 업(業)을 흥(興)하야 신력(新力)을 장(長)하니라
二, 문화의 점진(漸進)
어시(於是)에 문화가 점점진보 되야 경작(畊作)의 법(法)이 생하며 항해술(航海術)이 기(起)하며 건축술(建築術)이 흥하며 기타(其他)일반문화가 다 발육(發育)을 시(始)하니라
◆제이기(第二期) 이성조 탄강시대
제이장(第二章) 이성조(二聖祖)의 탄강(誕降) 환웅성조의 신덕(神德)
一.이성조(二聖祖)의 탄강(誕降)
환인(桓因)성조(聖祖)의 탄강
아조선족이 대륙 밋 반도에 번연(繁衍) 하야 세력이 점성(漸盛)하고 문화(文化)가 점진하사 환인성조가 탄강하야 성덕(聖德)이 유(有)하샤 전민(全民)을 풍화(風化)하시고 대건설을 준비 하시니라.
二.환웅성조의 신성(神聖)
환웅(桓雄)성조 (聖祖) 의 탄강 (誕降)
환인(桓因)성조(聖祖)가 성자(聖子) 환웅성조를 탄생하시니 환웅성조 또한 성덕(聖德)이 유(有)하샤 성부(聖父)의 대업(大業)을 계승(繼承)하니라.
성조(聖祖)의 신덕(神德)
환웅성조 임의(이미)성부(聖父)을 계(繼계승)하심에 천부지인(天符之印--御壐어새)을 지(持)하시고 삼천병(三千兵)으로 태백산(太白山--평북묘향산 平北 妙香山)에 어(御)하샤 전민족(全民族)을 도솔(導率)하실새 곡(穀곡식)을 주(主)하야 농업(農業)을 려(勵장려)하시며 병(病)을 주(主)하야 의약(醫藥)을 시(施)하시며 형명(刑𠇮)을 주(主)하야 법정(法政)을 행(行)하시며 선악(善惡)을 주하야 교화(敎化)를 장(張)하시며 기타(其他)삼백육십일정(三百六十一政)을 반시(頒施반포하여베품)하시니라.
민족의 형세(形勢)
성조(聖祖)의 위령(威靈)이 크게 성하며 성조의 교화가 크게 행하니 자시(自是)로 전민족의 통일이 공고(鞏固단단하고튼튼)하고 전민족의 실력(實力)이 팽창(膨脹)하야 문물이 장족(長足)으로 진(進)하고 위광(威光)이 사린(四隣)으로 진(進)하는지라 전민족이다 성조(聖祖)를 애대(愛待)하야 천왕(天王)으로 존(尊)하더라
성조(聖祖)의 세계(世系)
환인성조ㅡ환웅성조(或혹은 神市氏신시씨라 하고 혹은 桓雄天王환웅천왕 이라함)一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
⊙상세(上世)ㅡ조선기원원년(朝鮮紀元元年)부터 기원이천이백구십오년(紀元2995년)까지
대조선건설시대 (大朝鮮建設時代)
一. 대황조의 출세(出世)밋 대황조(大皇祖)의 신공(神功)
대황조(大皇祖)의 출세(出世)
환웅성조가 태백산 단수하(檀樹下)에 궁실(宮室)을 축(築)하시고 거(居)하시더니 조선기원전(前) 사십년에 성자(聖子)단군대황조를 탄생하시니라
태황조(太皇祖)의 어휘(御諱)는 왕검이오 단목하궁실(檀木下宮室)에서 탄강하신 고(故)로 존호(尊號)는 단군(檀君)이라
대황조 생(生)하샤 그 인(其仁)이 세(世)에 관(冠)하시고 그지(其智지혜)가 세(世)에 절(絶)하시고 그 신위(其神威)가 사해(四海)에 진(震)하시더니 필경(畢竟)에 환웅성조를 계(繼)하샤 전민족을 도솔(導率)하시니라
대황조의 신공(神功)
시시(是時이때)에 반도동부(半島東部)에 점거(占居)한 맥족(貊族--예맥)이 반(叛)하거늘 태황조(太皇祖) 친(親)히 동정(東征)하샤 우수주(牛首州춘천)에 지(至)하야 적(賊)을 정복(征服)하시고 장군(將軍) 여상기(余相己)를 류(留)하야 예맥후(濊貊侯)를 삼고셔 맥족을 통할(通轄)케하시고 또 시시(是時)에 아민족이 반도의 동남부 밋 그 근해도서(其近海島嶼)에 착착(着着)히 식민(植民)할새 토착(土着맥족)의 수적(水賊)이 차(此)를 방해(妨害) 코자하거늘 대황조--황자삼인(皇子三人)을 견(遣)하샤<보내서>혈구(穴口)강화전등산(江華傳燈山)에 삼랑성(三郞城)을 축(築)하야 적(賊)을 토멸(討滅)하시고 또 시시(是時) 역내산천(域內山川)이 조색(阻塞 가로막아서 못하게 함 )험착(險錯)하야 민거(民居백성들의거주)가 불편(不便)하거늘 대황조--대신(大臣) 팽오(彭吳)등을 견(遣)하야 산을 개(開)하며 수(水)를 도(導이끌어서)하야 민거(民居)를 안전(安全)케 하시니라.
二.대조선의 건설밋 대황조의정교(政敎)
대황조의 건국(建國)
대황조 임의(이미)외구(外寇 밖에도적)소(掃)하시고<쓸어버리고> 수토(水土)평(平)하심에 전민족이 대황조를 봉(奉)하야< 받들어 >군(君임금)을 삼으니 시(時)는 서력기원전(西歷紀元前)2333년이오 거금(距今)4244년전이오 대조선기원원년(紀元元年)이더라
대황조--제(帝)가되샤 국호를 조선이라하시고 평양(平壤)에 황도(皇都)를 정(定)하시고 비서갑후(非西岬侯)의 녀(女)로 황후(皇后)롤 책(冊封)하시니라
대황조의정교(政敎)
어시(於是)에 대황조--신성(神聖)한 정교를 장(張)하야 천하(天下)를 통치(統治)하실새 편발(編髮)의 제(制度)를 정하샤 민(民)으로 하야금 발(髮머리카락)을 편(徧)하야 수(首머리)에 개(葢)하게하며 의복(衣服)의 제(制)를 정(定)하고 음식(飮食)의 도(度법도)를 개량(改良)하시며평양에 성(城)을 축(築)하야 무비(武備)를 정(整정비)하시며 혈구(穴口)에 단(壇참성단參星壇)을 축(築)하야 천문(天文)을 측(測관측) 하시며 문화(文化)를 더욱 천양(闡揚)하시며 부서(富庶백성이많고살림이넉넉함)를 더욱 증진(增進)하시니 천하가 대치(大治)하야 황화(皇化천자의 덕)는 전국(全國)을편(遍두루)하고 황위(皇威위엄)는 사표(四表천하)에 진(震)하니라
一.황성(皇聖)의 계출(繼出)과 국력의 팽창
황성(皇聖)의 계출(繼出)
태조(太祖) 붕(崩)하시고 태자(太子)부루(扶婁)등극(登極)하니 시(是)가 부루제(扶婁帝)라 성덕(聖德)으로 국(國)을 계(繼)하더니 부루제 붕(崩)하고 태자 고등제(太子高登帝) 등극(登極)하니 또한 성덕(聖德)유(有)하얏고 그후에도 성군(聖君)이계기(繼起)하시니라
국력의 팽창 (國力의 膨脹)
여사(如斯)히 세세(嵗嵗)로 성군이 출(出)하야 내(內)로 덕정(德政)을 수(修)하며 외(外)로국위(國威)를 진(振)하니<떨치니>어시(於是)에 국력이 더욱 점점팽창(漸漸膨脹)하야 민속(民俗)이 인후(仁厚)하고 민생(民生)안락(安樂)하며 사린(四隣)이 다 국광(國光)을 앙(仰)하더라
二.대륙의 척식(拓殖)급(及)황조(皇朝)의 북천(北遷)
대륙의 척식(拓殖)
아조선족이 국(國)을 유(有)한 이래(以來)로 조선반도가 국가의 중심지(中心地)가 되고 만주대륙은 변지(邊地)를 작(作)하얏더니 기간(其間)에 반도동부맥족(半島東部貊族)의 일파(一派)가 북(北)으로 종(縱)하야 속말수 서남(粟末水西南지나 개원부근 支那開原部近)에 군취(群聚)하야 예맥국(穢貊북방민족國)을 개(開)하야 조정(朝廷)을 항(抗)하고<막고>또 기타제이(其他諸夷)가 점점 남만주 남부에 유입(流入)하야 또한 조정(朝廷)을 항(抗)하거늘 조정에서 종래(從來)로 병(兵)을 출(出)하야 예맥국을 토멸(討滅)하야 맥인(貊人)을 항복(降伏)밧고 또 기타제이(其他諸夷)을 위복(威服)하니 자시(自是)로 만주대륙을 다시 개척(開拓)하야 아조선인의 북방번식(北方蕃殖)이 더욱 성(盛)하더라.
황조(皇朝)의 북천(北遷)
태황조(太皇祖)황도(皇都)을 평양(平壌)에 정(定)하셧다가 그후(其後)에 당장경제(唐藏京帝)가 국도(國都)를 당장경(唐藏京황해도 구월산하 黃海道九月山下)으로 천(遷)하얏더니 지시(至是이때에 이르러)에 만주대륙이 개척되야 국가의 북방강토가 광대(廣大)함에 당장경의 국도로는 통치(統治)의 불편이 다(多)한지라 밋 부여제(扶餘帝)등극함에 국가통치의 편(便)을 도(图)하야 국도(國都)를 부여(扶餘지나의 개원 開原)로 천(遷)하니<옮기니>시(時때)는 기원일천일백십팔년(紀元1118)이라 자시(自是)로 부여가 국가의 중심지가되니라
三.북천(北遷)후의 천하정세(天下政勢)
천하의분열(天下의 分裂)
황조(皇朝)가 이미 북으로 천(遷)함에 대륙은 통치가 편하나 조선반도는 변지(邊地)를 작한지라 연고(然故)로 반도내의 제후(諸侯)가 각(各)히 그 봉역(封域)의 정치를 천제(擅制)<마음대로>하야 황조(皇朝)의 정령(政令)이 불행(不行)하니<행하지않으니>어시에 천하가 점점분열하야 후일 오국분립(五國分立)의 시대를 작출하니라
제도.공예.풍속.종교
♤제도: 국제(國制)는 봉건(封建)의 제(制)니 전국(全國)의 제후(諸侯)를 분치(分置)하야 세습(世襲)으로 그 영내(領內)를 관리케하고 제(帝)는 제후를 통솔하야 전국에 임(臨)하니라.
♤ 공예는 점점진보되얏나니 평양에 성(城)을 축(築)하고 혈구(穴口)에 성을 축함이 그 일예(基一例)니라
♤풍속 열성(列聖)이 계출한 이래(以來)로 문화 무력(文化武力)이 일즉 진보되야 인민(人民)이 다 순후(淳厚)하야 선(善)을 락(樂)하고 강장(强壯)하야 용(勇)을 호(好)하니라.
♤종교는 배천교(拜天敎)니 천(天)이 만물을 주재(主宰)인 동시에 아국(我國)의 열성(列聖)은 천(天)의 자손이라하며 대황조가 혈구 마니산(穴口摩尼山)에 제천단(祭天壇)을 축하고 천(天)에 제(祭)한이래로 후세에 지(至)하야도 이(此)종교가 행(行)하니라
대조선 황조(皇朝)의 제계(帝系)
단군대황조ㅡ부루제ㅡ고등제ㅡ당장경제ㅡ아사달제ㅡ부여제ㅡ동명제(東明帝)
지난23년 1월30일 송계선생의 야블로노이그림첨부
남북 만여리 동서 6~7천여리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만주족의 역사책이다.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만주원류고 혹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라고 한다. 흠정(欽定)은 황제의 판단, 또는 판단한 것을 가리키는데 흔히 책의 명칭에 붙이곤 했다. 즉 '흠정'이란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책은 황제가 내용에 직접 관여하여 편찬한 것이다.
흠정만주원류고는 만주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역사책으로 건륭제 42년인 1777년 대학사 아구이, 우민중 등이 칙명을 받들어 이듬해인 1778년에 완성하였다. 당시 한림원(翰林院)이 주관하여 관학자(官學者)들과 관리 30여 명이 참여하여 편찬했다. 기존의 역대 사서와 지리지, 개인 문집 등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이 모아져 있다.
'만주원류고'라는 제목은 만주족의 조상의 원류를 고찰한 책이다. 당시 건륭제는 한족 역사가들이 만주에 대한 이해가 얕아서 고증을 제대로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하여 여러 명성 있는 대학사들을 모아 문헌들을 모으게 하고, 수집한 문헌들을 근거로 만주족들이 옛부터 생각해오던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주장들을 대학사들이 평가하게 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인의 뿌리 의식을 최대한 고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만주인의 유산을 입증하여 청나라 통치의 정통성을 강조하기를 희망했다.
내용은 기본적으로 여진, 만주인이 시대별로 숙신→부여→읍루→삼한→물길→백제→신라→말갈→발해→여진(건주, 완안)으로 그 계통이 이어지고, 청나라의 건국은 1천여 년 동안 이어져온 계통의 고유한 정치, 문화적 발전과 진보의 결과로 설명
만주의 여러 부족 및 풍속·지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선 만주의 원류로 읍루, 물길, 완안 같은 숙신계 종족들은 물론 친척뻘인 옥저, 부여, 발해도 다루고 있고, 심지어 백제, 신라를 포함한 삼한까지 만주의 원류 중 하나로 고찰하고 있다. 대강 구성에 대해 설명하자면 여지껏 작성된 사료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청나라의 사고전서 학자들이 이를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는 형식이다. 예컨대 부여의 4가(마가, 우가, 저가, 구가)는 중국인들이 모르면서 마음대로 동물(말, 소, 돼지, 개)을 들어 이름 붙였다고 비판
만주원류고의 제1권 부족편에는 《발상세기(發祥世紀)》라는 책을 인용하여 만주족이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을 얻게 된 내력과 만주를 건국한 과정에 대해 기록
만주족이 사용한 애신각라는 청나라의 국성(國姓)이지만 만문자료에는 이 명칭이 잘 쓰이지 않고, 만문노당(滿文老檔)이나 만주실록(滿州實錄)에 애신각라는 세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 성씨가 청나라 황실에서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다. 만주어로 '애신(愛新)'을 금(金)이라고 한다. 흔히 '각라(覺羅)'를 성(姓)의 뜻이라고 한다. 즉, 만주어로 '김씨'라는 뜻
《흠정만주원류고》
삼가 우리 나라의 태어남을 살펴봅니다. 상서로움을 기르고 모음이 아름다운 찬양노래와 부합하니 그 휘황찬란하게 빛남은 원조[3]가 상(商)을 낳음과 같고 고매[4]에서 함과와 같습니다.
삼가 실록을 고찰해 보면 시조께서 세 씨족의 난을 평정하시고 악다리성(백두산 동쪽 아막혜 벌판)[5]에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로 곧 '만주'라 이름을 짓고 대대로 이어 오며 신령함을 모으고 기쁨을 두터이 하였습니다.
원황제(누르하치)께서는 허투아라[6]의 땅에서 창업하시고, 이어서 경조께서는 태양 같이 빛남을 발휘하사 오령의 동쪽 소극소호하의 서쪽의 모든 부족들을 순무하셨습니다.
이제 과거사를 회상해 보면, 숙신 부여 삼한 말갈 백제 신라 발해 여진 등 모든 나라의 연혁을 가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신 등이 삼가 부족의 한 갈래를 세워서 먼저 역사서적에 실린 바 각 조목들을 들어서 오늘날의 고증에 참고하여 혹은 그 소리가 와전된 것을 바로잡고 혹은 그 나뉘고 합쳐진 자취를 상고하되 숙신으로부터 시초를 삼고, 나라의 이름을 간단히 살피고 조상님들의 계통을 찾고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취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건륭제 42년 8월 19일, 내각이 칙령을 받들어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조금 전에 《금사(金史)》를 보니, 금나라 시조가 완안부(完顏部)에 거주했으며, 그 지역에는 백두산(白山)과 흑수(黑水)이 있다고 했다. 백산은 곧 백두산(장백산:長白山)이고, 흑수는 흑룡강(黑龍江)이다. 우리 청나라는 나라를 일으켰으니, 산천의 기운이 크게 모인 것이 대금(大金)과 정확히 같다.
또 그 책에서는 금나라의 선조가 말갈(靺鞨)에서 나왔으며, 이는 곧 고대의 숙신(肅愼) 땅이라 하였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처음 나라를 일으킬 때, 본래 ‘만주(滿珠)’라고 불렀고 그에 속한 이들을 ‘주신(珠申)’이라 하였는데, 뒤에 만주(滿洲)로 고쳐 불렀다. 한자 표기만 변했을 뿐, 실제로는 고대의 숙신과 동일하여, 지경이 서로 같음을 증명한다.
삼한의 이름도 단지 진한, 마한, 변한이라 서술했을 뿐, 그 뜻을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삼국에는 각각 ‘한(汗: 군장)’이 셋 있어 나라 하나씩을 이끌었을 것이나, 역사가(史家)가 ‘한(汗)’이 군장(君長)을 뜻함을 몰라 음이 같은 ‘한(韓)’으로 잘못 옮긴 것이다. 이후 무식한 자들이 ‘한(韓)’을 성씨로 오해하기까지 했으니, 실로 우스운 일이다.
또 당나라 때 ‘계림(鷄林)’이라고 부르던 곳은 지금의 ‘길림(吉林)’이 잘못된 형태일 것이며, 신라, 백제 등의 나라들도 그 주변 지역일 것이다. 예전 사람들이 이를 바로잡지 못해, 명나라 말엽에 미혹한 사람들이 글자 몇 개만을 따서 왜곡한 것이니, 개가 짖는 것에 불과하여 따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중 특히 큰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조종께서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칭호를 받았다고 하여 이를 두고 우열을 논하나, 이는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 명나라는 아직 강성하여, 두 나라 사이를 좋게 하려 했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내려 우호를 맺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우리 국력이 점차 강해지고 명나라는 점점 쇠약해졌으며, 또 간악한 모함을 믿어 우리를 해하려 하였으므로, 태조께서 크게 노하시고 ‘칠대한(七大恨)’을 하늘에 고하며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였다.
살이호(薩爾滸), 송산(松山), 행산(杏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명나라가 화친을 청했으나 내쳤다. 어찌 우리를 업신여길 수 있었겠는가!
한고조는 진나라의 정장(亭長)이었고, 당조 조상은 수나라 관료였으며, 송은 후주(後周)의 신하였다. 이들은 다 정통을 잃고 갈등하며 명의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왕조는 명나라가 스스로 무너지고 이자성 난이 발생한 뒤, 오삼계가 우리 군대를 맞아들이고 도적을 토벌하게 하여 천하를 안정시킨 뒤, 세조께서 북경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그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 국가는 하늘의 은혜를 받고 백두산에서 길이 열렸으니, 상나라의 현조(玄鳥)와 주나라의 고미(高禖)가 상서로운 조짐을 보인 것과 같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대금(大金)과 같은 계통이며, 천녀가 목욕했다는 부르후리(布勒瑚哩) 못도 백두산에 있으니, 모두 백산, 흑수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밖의 건주(建州)의 연혁, 만주의 시작, 고금의 지명 차이 등을 모두 상세히 조사하여 책으로 엮고 후세에 보이도록 하라. 대기(阿桂), 우민중, 화신, 동고에게 명하여 조사하고 편집하여 차례로 올리게 하고, 내가 직접 정리하겠다. 이상을 널리 알린다. 칙명이다.(인용 위키백과)
고조선인(古朝鮮人)의 지나연해(支那沿海) 식민지(植民地)
분야 어문 > 수필 > 중수필/평론
저작자 최남선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
古朝鮮(고조선)
近畿百年(근기백년)에는 朝鮮(조선)이라 하면 白頭(백두)以南(이남], 漢拏[한라) 以北(이북)의 蠅頭(승두) 小域(소역)을 指言(지언)함이 되었으나, 歷史上(역사상)에 在(재)하여 朝鮮(조선)이란 명칭은 그 包括(포괄)하는 境域(경역)이 실로 廣大(광대)하니, 그 界限(계한)이 北(북)으로 黑水(흑수)와 南(남)으로 溟海(명해)를 遠過(원과)하고, 東(동)으로 蝦夷(하이)와 西(서)으로 突厥(돌궐)에 隣接(인접)하여 太白(태백)의 山(산)과 鴨綠(압록)의 水(수)가 國南(국남)의 惡瀆(호독)이 되었으며, 또 建國(건국) 初期(초기)로 言(언)하여도 長城(장성)內外(내외)와 黃河(황하)南北(남북)은 朝鮮(조선)과 漢(한)兩民族(양민족)의 雜居地(잡거지)로 있었느니라. 古朝鮮(고조선)은 무론 便宜上(편의상)으로 設立(설립)한 名稱(명칭)이니, 그 年代(연대)는 대개 三國(삼국) 鼎立[(정립)의 形勢(형세)가 完成(완성)하기 前(전)이요, 그 局面(국면)은 黑水(흑수)以南(이남)으로 朝鮮半島(조선반도)와 및 支那內陸(지나내륙)의 무릇 朝鮮(조선)種族(종족)이 住居(주거)하고 事業(사업)하던 모든 地方(지방)이요, 그 種族(종족)은 肅愼(숙신)濊(예)·貊(맥)으로 始(시)하여 漢土(한토)에 繁衍(번연:번성한)한 여러 團部(단부)와 韓地(한지)에 峙立(치립)한 여러 邦家(방가)니라. 그러나 금번 問題(문제)에는 沿海植民地 (연해식민지)의 起滅(기멸)을 論(논)할뿐이므로 年代(연대)·境域(경역)·種族(종족)이 물론 다 여기 有關(유관)한 一局部(일국부)니라.
〔注意(주의)〕 此篇(차편)을 讀(독)할 時(시)에는 더욱 鴨水(압수:압록강) 以北(이북), 遼河(요하)以上(이상)에 置身함(치신:몸을둔곳)을 物忘(물망)할지니, 古朝鮮(고조선)의 中心(중심)이 곧 此間(차간:이사이)에 在(재)함이라, 渤海(발해)는 古朝鮮(고조선)의 門前(문전)小湖(소호)요, 恒岳(항악,서악,항산)은 西隣(서린:서쪽에인접한) 接界點(접계점)이니라.
▼(조선 후기나 구한말 같은) 근기백년의 쇠퇴기에는 '조선'이라고 하면 백두산 이남, 한라산 이북의 파리 머리만 한 작은 영토(승두소역)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으나, 역사상으로 보면 '조선'이라는 명칭이 포괄하는 영토(경역)는 실로 광대하였다.
그 경계는 북쪽으로는 흑룡강(흑수)을, 남쪽으로는 남쪽 바다(명해)를 훨씬 지나쳤고, 동쪽으로는 일본(하이)과, 서쪽으로는 돌궐에 인접하였다. (그 광대한 영토에 비하면 오늘날 국경으로 여겨지는) 백두산(태백산)과 압록강은 당시 고조선 남쪽에 위치한 작은 산과 도랑(호독)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또한 건국 초기를 보더라도 만리장성 안팎과 황하 남북은 조선족과 한족(중국) 양 민족이 섞여 살던 곳(잡거지)이었다.
'고조선'이라는 이름은 물론 역사 서술의 편의상 설정한 명칭이다. 그 연대는 대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정립 형세가 완성되기 이전 시기를 말하며, 그 활동 무대(국면)는 흑룡강 이남에서부터 조선반도(한반도), 그리고 중국 내륙 중 조선 종족이 살면서 활동하던 모든 지방을 뜻한다. 그 종족은 숙신·예·맥족을 시작으로 하여 중국 땅(한토)에서 번성한 여러 부족(단부)들과 한반도 땅(한지)에 우뚝 솟아났던 여러 국가(방가)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연안 식민지의 일어나고 멸망함을 논할 뿐이므로, 고조선의 연대·영토·종족은 물론 모두 이와 관련된 일부로서 다루어질 것이다.
[주의] 이 편을 읽을 때에는 독자 스스로가 압록강 이북과 요하 위쪽(만리장성 너머 만주 대륙)에 몸을 두고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바로 이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발해(발해만)는 고조선의 대문 앞에 있는 작은 호수에 불과하며, 항산(중국 산시성에 있는 산)은 서쪽 이웃 나라와의 경계점일 뿐이다.
海上(해상)의 活動(활동)
地(지)가 이미 海(해)를 挾(협)하니 萬重(만중) 波外(파외)에 飄渺(표묘)한 雲山(운산)은 그의 眸子中(모자중)慣景(관경)이요, 一碧水面(일벽수면)에 漲落(창락)하는 潮汐(조석)은 그의 鼓膜邊(고막변)習聲(습성)이라, 거기 笑(소)가 泛(범)하고 거기 詩(시)가 出(출)하는데, 더군다나 生活上(생활상)實利(실리)가 또한 그리로서 來(래)하는 者(자) 多(다)하니, 그들은 海(해)의 親(친)할 것을 知(지)할지요, 海(해)의 利(리)한 것을 資(자:밑천,자본)할지라, 곧 그들의 生活上(생활상)動作(동작)의 折半(절반)이 海上(해상)에 있을밖에 없거늘, 더욱 그 海(해)란 것이 荒暴(황포)한 것도 아니요, 變作(변작:변덕)스러운 것도 아니라, 我(아)의 觜(자)와 彼(피)의 角(각)이 對面(대면)으로 斗出(두출:산세가 험준하게 유난히 바다 쪽으로 내민 형세)하여 呼(호)하는 듯 應(응)하는 듯 서로 抱擁(포옹)한 중에 生成(생성)한 渤海(발해)가 宛然(완연)히 小湖(소호)와 如(여)하거늘, 兩間(양간)을 點綴(점철)한 島嶼(도서)는 飛橋(비교:매우높게놓은다리)를 天成 하니 (천성:저절로이루어진것이니), 風(풍)은 靜(정:고요)하고 浪(랑:물결)은 穩(온:평온)한데 濃油(농유:두터운기름]) 같은 水波(수파:물결)만 은근히 私語(사어:속삭임)할 뿐이라, 이에 航海(항해)가 起(기)하고 交通(교통)이 頻(빈:빈번)하여 雲影(운영:구름의그림자)과 共馳하는(공치:함께달리는) 飽帆(포범:돛을달고나가는배)은 朝鮮人(조선인)의 殖利(식리:식민지의이익)를 輸(수))하고, 濤聲(도성:파도소리)과 諧響(해향:명성)하는 經棹(경도:노를저어지나감)는 朝鮮人(조선인)의 移民(이민)을 運(운)하여 忙急(망급:황급히)하니, 活動(활동)의 聲(성)에 海洋(해양) 島邊(도변) 白鷗(백구)의 甘夢(감몽:단꿈)이 無時로(무시:시도때도없이) 驚波(경파:빠르게일어남)되니, 이는 대개 自然(자연)한 理勢(이세:이치)일 뿐이라, 또한 必然(필연)한 要求(요구)일지로다. 이에 支那(지나)의 沿岸(연안)에 朝鮮人(조선인)의 植民地(식민지)가 成立(성립)되어 가더라.
▼해상(海上)의 활동
땅(강역)이 이미 바다를 끼고 있으니,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구름 낀 산은 그들(조선 종족)의 눈에 익숙한 풍경(모자중관경)이요, 한 자락 푸른 수면에 밀려오고 밀려가는 조수(조석)는 그들의 귀에 익은 소리(고막변습성)였다. 그 바다에서 웃음 짓고 배를 띄우고 그 바다에서 시(詩)가 흘러나왔는데, 더군다나 생활상의 실질적인 이익 또한 대개 그 바다로부터 오는 것이 많았으니, 그들은 바다와 친해져야 함을 알았고 바다의 이로움을 밑천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활 속 활동의 절반은 바다 위(해상)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더욱이 그 바다라는 것이 거칠고 포악한 것도 아니요, 변덕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우리 쪽의 곶(觜: 산부리)과 저쪽(중국 대륙)의 모퉁이(角)가 마주 보며 험준하게 바다 쪽으로 내밀어, 서로 부르는 듯 응하는 듯 껴안은 형국 속에 만들어진 발해(渤海)는 그 모습이 완연히 작은 호수(소호)와 같았다. 또한 그 사이를 수놓은 섬들(도서)은 하늘이 내린 높은 다리(비교)를 이루고 있으니, 바람은 고요하고 물결은 평온하여 마치 두터운 기름(농유) 같은 잔잔한 물결만이 은근히 속삭일 뿐이었다.
이에 항해술이 일어나고 왕래(교통)가 빈번해져, 구름 그림자와 함께 달리는(공치) 돛을 가득 올린 배(포범)들은 조선인이 일구어낸 이익을 실어 날랐다. 파도 소리와 조화를 이루며 울리는 노랫소리 속에 부지런히 노를 저어 지나가는 배들은 조선의 이민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황급히 움직였다. 이 활기찬 활동의 소리에 해양과 섬가에 사는 흰 갈매기(백구)의 단꿈이 시도 때도 없이 놀라 깨어 파도를 일으켰으니, 이는 대개 자연스러운 이치와 형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발전을 위한) 필연적인 요구였도다.
이에 마침내 지나(중국)의 연안에 조선인의 식민지가 성립되어 가기 시작했다.
渤海 沿岸 (발해연안)
그 先着足(선착족:먼저도착)한 地(지)는 渤海沿岸(발해연안)이니, 아직 漢人(한인)이 東來(동래)하여 河上(하상)에 奠居하기(전거:머물러살곳을정하기) 前(전)으로부터 沿岸(연안) 到處(도처)와 및 海上(해상) 諸島(제도)에 무수한 碇泊處(정박처)와 植民地(식민지)가 存在(존재)하였으나, 來往(내왕)과 遷徙(천사:자리를움직여옮김)가 無常(무상)하더니, 및 內陸(내륙)의 異人(이인)으로 더불어 交通(교통)과 貿易(무역)이 生(생)한 후로 더욱 移植(이식)이 盛大(성대)할 뿐 아니라, 점차로 固着的(고착적) 植民地(식민지)가 設立(설립)되어 가더라. 그중 著名(저명)한 者(자)를 記(기)하건대, 山東(산동)海角(해각)에 奠居(전거)한 禑人(우인)은 가장 久遠(구원)한 것인 듯 하니, 紀元(기원) 即前(즉전)에 唐堯(당요)가 羲仲(희중)을 使하여 (사:보내서) 東作(동작)을 理(이)케 할 時(시)에 그 暘谷(양곡:해돋는곳)의 地(지)를借(차)하였고, 夏禹(하우)가 山川(산천)]을 治略(치략)할 時(시)에 境界(경계)를 劃定(획정)하였으며, 嵎氏(우씨)의 西北(서북)의 內陸(내륙)]으로 入奠(입전)하여 濟水(제수)의 左右(좌우)에 居(거)한 一派(일파)는 萊人(내인)이라하니, 上古(상고)로부터 牧畜(목축)에 善(선)함으로 著名(저명)하고, 또 일찍부터 蠶桑(잠상)을 務(무)하여 繭絲(견사)로써 交易(교역)하였으며, 萊地(내지)의 北(북)으로 九河地方(구하지방)은 河人(하인)이라 하니, 古(고)의 夙沙氏(숙사씨,기원 전 약 8세기) 이래로 著名(저명)하며, 今(금) 遼東灣(요동만)의 沿海地(연해지)에 奠居(전거)한 者(자)는 支那人(지나인)이 島人(도인)이라 稱(칭)하니, 皮服(피복)으로써 著名(저명)하더라. 此等(차등)은 內競外爭(내경외쟁)으로 由(유)하여 다 進步(진보)의 度(도)가 高(고)하였으며, 더욱 그 地理上關係 (지리상관계)로 하여 政治的活動(정치적활동)보다 産業上發展(산업상발전)이 성대하더라.
▼ 발해 연안(渤海沿岸)
그들(조선 종족)이 먼저 도착하여 자리 잡은 땅(선착지)은 바로 발해 연안이다. 아직 중국 한족(한인)이 동쪽으로 와서 황하 강가(하상)에 터를 잡고 살기 전부터, 발해 연안 도처와 바다 위의 여러 섬(제도)에는 무수한 정박처와 식민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왕래와 이주(천사)가 일정하지 않고 자유로웠으나, 점차 내륙의 다른 민족들과 교통하고 무역이 생겨난 후로는 이주가 더욱 성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점차 완전히 정착하여 사는 고착적인 식민지가 설립되어 갔다.
그중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부족들을 기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인(嵎人): 산둥반도의 끄트머리(산동해각)에 터를 잡고 살았던 이들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구원) 듯하다. 서기 전(기원 즉전) 요임금(당요)이 신하 희중을 보내 동쪽의 농사를 다스리게 할 때 그들이 살던 해 돋는 곳(양곡)의 땅을 빌렸고, 우임금(하우)이 산천을 다스리고 다듬을 때 그들과의 경계를 획정하기도 했다.
내인(萊人): 우씨 부족의 서북쪽 내륙으로 들어가 제수(濟水)의 좌우에 살았던 한 갈래이다. 이들은 상고 시대부터 목축을 아주 잘하는 것(좋아한것)으로 유명했고, 또 일찍부터 누에치기와 뽕나무 기르기(잠상)에 힘써 명주실(견사)로써 교역을 하였다.
하인(河人): 내인들이 살던 곳의 북쪽, 즉 구하(九河) 지방에 살던 이들이다. 옛 숙사씨(소금을 처음 구웠다는 전설의 부족) 이래로 소금 제조업 등으로 널리 알려졌다.
도인(島人): 지금의 요동만 연안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이들로, 중국인(지나인)들이 '도인'이라 불렀으며, 짐승의 가죽 옷(피복)을 잘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부족들은 내부적인 경쟁과 외부적인 투쟁(내경외쟁)을 거치면서 모두 문명의 진보 정도가 매우 높았다. 더욱이 그들이 처한 지리적 관계로 인하여, 정치적인 정복 활동보다는 상업과 무역, 제조업 등의 산업적 발전이 대단히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江淮(강회)의 間(간)
自然(자연)의 趨勢(추세)로 年代(연대)의 歷(역)함을 隨(수)하여 점차로 南進(남진)하여 支那(지나) 東沿海(동연해)의 一帶(일대)가 거의 다 그 圈內(권내)에 入(입)하니, 一盛一衰(일성일쇠)에 起蹶(기궐)이 無常(무상)한 者(자)는 고사하고, 그중 영향이 多大(다대)한 者(자)를 列擧(열거)하건대, 紀元(기원)十一(십일)세기경에 南進運動(남진운동)이 더욱 盛(성)하여, 드디어 淮水(회수)上下(상하)의 地(지)에 大植民地(대식민지)가 성립되니,이곧 支那人(지나인)의 畏服(외복)하던 淮夷(회이)라 하는 者(자)라, 因(인)하여 西入(서입)하여 垈南(대남)·淮北(회북)의 內陸(내륙)으로 발전하니, 歷代(역대)의 沿海(연해) 植民地(식민지) 중 가장 강대한 者(자)요, 夏禹(하우) 이전으로부터 蠙珠(빈주)의 製作(제작)과 纖(섬)(黑經白緯(흑경백위)·縞(호素[소])의 織物[직물]로 藝能(예능)을 擅(천)하였으며, 東南(동남)으로 江(강)의 附近(부근)에 至(지)한 者(자)는 別(별)로 漢土(한토)]의 中原(중원)과 交涉(교섭)이 無(무)한 故(고)로 事蹟(사적)이 無聞(무문)하고, 오직 近海(근해) 島上(도상)과 禹域(우역) 以外(이외) 今(금) 支那東海岸(지나동해안) 南荒(남황)의 地(지)에 居住(거주)한 이른바 南島人(남도인)이니, 卉服(훼복)을 着(착)하고 織具(직구)를 製(제)하고 柚橘(유귤)을 培(배)하여 漢土人(한토인)으로 交易(교역)하였음을 知(지)할 뿐이니라. 此等(차등)은 대개 工藝(공예)에 長(장)하고 經商(경상)에 敏(민)하여 巧妙(교묘)한 製作(제작)으로 漢人(한인)과 交易(교역)하고 지날 뿐이러니, 후에 中心的人物(중심적인물)을 得(득)하여 크게 국가적 活動(활동)을 始(시)하더라.
▼강회의 간(江淮의 間: 장강<양자강>과 회수 사이)
자연스러운 역사의 추세에 따라 세월이 흐름(연대의 역함)에 맞추어, (조선 종족은) 점차 남쪽으로 전진(남진)하여 중국(지나) 동쪽 연해 일대를 거의 다 그 세력권(권내)에 넣게 되었다. 한 번 흥하고 한 번 쇠하며 일어나고 넘어짐이 일정하지 않았던 자잘한 부족들은 고사하고, 그중에서 역사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존재들을 열거해 보겠다.
서기 전(기원) 11세기경에 이르러 남진 운동이 더욱 성해져서, 마침내 회수(淮水: 화이허) 상류와 하류 지역에 거대한 식민지가 성립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중국인(지나인)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던 이른바 ‘회이(淮夷)’라는 존재이다. 이들은 이를 발판으로 삼아 서쪽으로 들어가 대남(垈南)과 회북(淮北)의 내륙 지방으로까지 발전해 나갔으니, 역대 우리 선조들이 세운 연안 식민지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요·순·우왕(하우) 시절 이전부터 민물조개 진주(빈주)를 가공하는 기술과 검은 날실과 흰 씨실로 짠 고운 베(섬), 그리고 흰 명주(호소)를 짜는 직물 기술에서 독보적인 재능(예능을 천함)을 자랑했다.
한편, 동남쪽으로 더 내려가 장강(江: 양쯔강) 부근에 이른 자들은 중국(한토)의 중원 세력과 별다른 교섭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사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근처 바다의 섬들과 중국 영역(우역) 밖인 지금의 중국 동해안 남쪽 거친 변방(남황) 땅에 거주했던 이른바 ‘남도인(南島人)’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풀로 만든 옷(훼복)을 입고 베틀 같은 직조 기구(직구)를 제작하며 유자나 귤(유귤)을 재배하여 중국인(한토인)들과 무역(교역)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부족들은 대개 공예 기술에 장기가 있었고 장사(경상)에 민첩하여, 정교하고 교묘하게 만든 제작품을 가지고 중국 한족(한인)과 교역하며 지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훗날 뛰어난 중심인물을 얻게 되면서 비로소 크게 국가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沿海植民地(연해식민지)의 團結(단결)
기원전 十二(십이)세기 전후(殷[은]의 武乙[무을]의 時[시])로 沿海(연해)移住民(이주민)의 潛勢力(잠세력:숨어있던세력)이 비로소 發現(발현)하여 四方(사방)으로 크게 發展(발전)하여, 殷(은)의 運命(운명)이 一日(일일)을 縮(축)하는 時(시)가 곧 我(아)의 運動(운동)이 一步(일보)를 進(진)하는 時(시)러니, 더욱 殷(은)이 망한 후에 그舊民(구민)의 一部(일부) 來附(내부)하고 또 故國(고국)을 위하여 義擧(의거)를 求(구)하며, 屢次(누차) 周(주)로 더불어 開戰(개전)하다가 利(이)를 見(견)치 못하고, 또 周(주)의 天下(천하)가 日(일)로 整頓(정돈)하매 자연히 散漫(산만)한 各部間(각부간)에 民族的(민족적)自覺(자각)이 生(생)하여 勢力(세력)을 團結(단결)하고 國家(국가)를 건설하더라.
▼연해 식민지의 단결(沿海植民地의 團結)
서기 전(기원전) 12세기 전후(중국 은나라의 왕 무을 시절)를 전후하여, 중국 동쪽 연안에 와 있던 조선 종족 이주민들의 숨은 세력(잠세력)이 비로소 겉으로 드러나 사방으로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은(殷)나라의 운명이 날로 쇠퇴하는 시기가, 곧 우리(아)의 역사적 운동이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는 시기였다. 더욱이 은나라가 망한 뒤에 그 은나라 유민(구민)의 일부가 우리 세력에 들어와 붙 좇았고(내부), 또 이들은 망한 자신들의 고국을 위해 의로운 거사(의거)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 유민과 연합한 우리 선조들은 새로 일어난 주(周)나라와 더불어 누차 전쟁을 벌였으나(개전) 끝내 이익을 보지 못했다. 또한 주나라의 천하 지배 체제가 날이 갈 수록 안정되고 정돈되어 가자, 마침내 (중국 동해안 일대에) 자연히 흩어져 살던(산만했던) 우리 민족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적 자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흩어졌던 세력을 단결하고 마침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徐(서)의 偃王(언왕)의 大陸經略(대륙경략)
淮泗(회사)의 間(간)에 國(국)한 徐(서)의 偃王(언왕)은 生(생)하여 神異(신이)하고 또 雄才(웅재) 大略(대략)이 有(유)하매 四方(사방)이 來歸(내귀])하는지라, 이에 族屬(족속)을 統合(통합)하고 精銳(정예)를 養畜(양축)한 지 數十年(수십년)에 大擧(대거)하여 周(주)를 伐(벌)하여 河上(하상)에 至(지)하니, 周(주) 비록 强大(강대)하나 이 正名(정명)의 師(사)요, 充實(충실)의 力(역)을 當(당)하매 鋒刃(봉인)을 未接(미접)하여 勝敗(승패)가 先判(선판)하는지라, 周(주)의 穆王(목왕)이 그 方熾(방치)의 勢(세)와 無底(무저)의 力(역)을 畏(외:두려워)하여 東方(동방)의 諸侯國(제후국)을 分割(분할)하여 偃王(언왕)의 主權下(주권하)에 移屬(이속)하고 和(화)를 乞(걸:구걸)하더라. 偃王(언왕)이 都(도)를 漢地(한지)東(동)(今금 江蘇省강소성 徐州府西서주부서)에 移建(이건)하니, 그 境域(경역)이 今(금) 江蘇省(강소성)의 大部(대부)와 河南(하남)安徽(안휘)兩省(양성)의 一部(일부)에 當(당)하며, 후에 유명한 大運河(대운하)가 西南隅(서남우)로 入(입)하여 東北隅(동북우)로 走出(주출)한 地(지)라, 北(북)에는 泰山(태산)이 鎭(진)하고 南(남)에는 長江(장강)이 帶(대)하였는데, 高郵(고우)·洪澤(홍택)등 斷續(단속:끊어지고이어진) 無數(무수)한 湖沼(호소)가 그 中間(중간)을 點綴(점철)하였더라.
▼서(徐)나라 언왕(偃王)의 대륙 경략(大陸經略)
회수(화이허)와 사수(泗水) 사이에 나라를 세운 서나라의 언왕은 태어날 때부터 신비롭고 기이하였으며, 또한 영웅적인 재능과 원대한 계략(웅재대략)을 지니고 있어 사방의 사람들이 그에게로 와 복종(내귀)하였다.
이에 언왕이 같은 종족(족속)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정예 군사를 기르고 축적한 지 수십 년 만에, 마침내 군사를 대거 일으켜 중국의 주(周)나라를 치기 위해 황하 강가(하상)까지 진격하였다. 주나라가 비록 강대하다고는 하나, 언왕의 군대는 명분이 바른 군대(정명의 사)였고 국력이 충실하게 차오른 상태였으므로, 칼날을 서로 맞부딪치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먼저 판가름 나버렸다.
당시 주(周)나라의 목왕(穆王)은 서언왕의 바야흐로 치솟는 무서운 기세(방치의 세)와 끝을 알 수 없는 강력한 국력(무저의 역)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거느리던 동방의 제후국들을 떼어내어(분할) 언왕의 주권 아래로 넘겨주고(이속) 화친을 구걸하였다.
이에 서언왕은 도읍을 중국 한족 땅의 동쪽인 서주(徐州) 서쪽(지금의 중국 강소성 서주시 일대)으로 옮겨 건설하였다. 그 영토(경역)는 지금의 장수성(강소성) 대부분과 허난성(하남성), 안후이성(안휘성) 두 성의 일부에 해당하였다. 이곳은 훗날 유명한 대운하가 서남쪽 모퉁이로 들어와 동북쪽 모퉁이로 흘러나가는 요충지이다. 또한 북쪽에는 태산(泰山)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고요히 누르고 있으며, 남쪽에는 장강(양쯔강)이 띠처럼 두르고 있고, 고우호(高郵湖)·홍택호(洪澤湖) 등 끊어질 듯 이어지는 무수한 호수들이 그 중간을 수놓고 있다.
◎주나라 역사에서 가장 영토 확장에 열성적이었던 주 목왕조차도 서언왕의 기세에 눌려 동방의 제후국 30여 개(혹은 40여 개)를 떼어주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 《 한비자》, 《후한서 》
徐國(서국)의 沒落(몰락)
過度(과도)히 仁(인)하여 柔弱(유약)에 易陷(이함)함은 偃王(언왕) 晩年(만년)의 大弊(대폐)라. 初(초)에 大陸國(대륙국)의 基盤(기반)이 成(성)하매 크게 仁義[(인의)를 行(행)하여 널리 德化(덕화)가 敷(부)하니, 天下(천하)의 疲者(피자)·渴者(갈자)가 咸戴同歸(함대동귀)하여 陸(육)으로 朝(조)하는 者(자)만 三十有六國(삽십유육국)이 되더니, 후에 極端(극단)으로 文(문)을 尙(상)하고 武(무)를 廢(폐)하여 敵國(적국)이 來擾(내요)하여도 戰(전)은 不忍(불인)의 事(사)라 하여 힘써 충돌을 피하므로 疆土(강토)가 日蹙(일축)하며, 후에 周楚(주초)의 聯合軍(연합군)이 來侵(내침)함에 及(급)하여 威勢(위세)가 大減(대감:크게감소)하고 諸部(제부)의 同盟(동맹)이 또한 瓦解(와해)하는지라, 因(인)하여 彭城(팽성)의 東山下(동산하)로 移居(이거)하니라. 그러나 隆厚(융후)한 德化(덕화)에 浹洽(협흡:두루미쳐화합)한 者(자)는 慕仰(모앙:우러르고사모함)이 日深(일심)하여 遜國(손국)의 主(주)를 忍捨(인사:참고용서)치 못하여 追從(추종)하는 者(자) 累萬(누만)이라. 因(인)하여 山名(산명)을 徐山(서산)이라하고 및 王(왕)이 崩(붕)하매 後人(후인)이 그 德(덕)을 慕(모)하여 徐山(서산) 石室(석실)에 神廟(신묘)를 建(건)하여 祀(사)하더라.
▼서국(徐國)의 몰락(沒落)
과도하게 인자하여 유약함에 빠지기 쉬웠던 점은 서언왕 만년의 가장 큰 폐단이었다.
처음에 대륙 국가의 기반이 완성되자 언왕이 크게 인의(仁義)를 행하여 널리 덕스러운 감화(덕화)를 펴니, 천하의 지치고 목마른 자(피자·갈자)들이 모두 그를 받들고 돌아와 의지하였다. 뭍(육지)을 통해 그에게 와서 조공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한 나라만 해도 서른여섯 나라(36국)에 달했다.
그러나 훗날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문(文)만을 숭상하고 무(武)를 폐지하니, 적국이 쳐들어와 어지럽혀도 "전쟁은 차마 못 할 일(불인의 사)"이라 하여 힘써 충돌을 피하기만 했다. 이 때문에 영토는 날로 줄어들었다. 훗날 주(周)나라와 초(楚)나라의 연합군이 침략해 오기에 이르자, 서나라의 위세는 크게 감소하고 주위 부족들과의 동맹 또한 와해되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언왕은 나라를 내어주고 팽성(彭城: 지금의 강소성 쉬저우)의 동쪽 산 밑으로 처소를 옮겨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높고 두터운 덕스러운 감화에 푹 젖어 있던 백성들은 그를 우러르고 사모함(모앙)이 날로 깊어졌다. 그리하여 나라를 잃고 물러난 군주(손국의 주)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끝까지 따르는 자가 수만 명(누만)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이 정착한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언왕이 세상을 떠나자(붕하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서산의 석실에 사당(신묘)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厥後(궐후)의 徐人(서인)
그 根基(근기)의 固(고)치 못한 所以(소이)런가, 淮上(회상)同盟(동맹)이 一朝(일조) 滅裂(멸렬)하매 諸部(제부)가 다시 孤立的(고립적)으로 動作(동작)하여 別(별)로 可觀(가관)할 功績(공적)이 없더니, 周(주)의 厲王(여왕)(我아 기원 五오세기 전후)時(시)에 大擧(대거)하여 周(주)를 攻(공)하여 大政略(대정략)을 行(행)하니, 周(주)初(초)에 虢仲(괵중)을 命(명)하여 對敵(대적)케 하였으나 필경 見敗(견패)하여 거의 天下(천하)를 擧(거)하여 淮人(회인)의 行令地(행령지)를 作(작)하다가, 宣王(선왕)이 嗣位(사위)하여는 國力(국력)을 竭(갈)하고 國命(국명)을 賭(도)하여, 親(친)히 率兵(솔병)出陣(출진)하여 數年(수년)을 開場仗(개장장)한 결과로 겨우 我人(아인)을 得攘(득양)한지라, 詩(시)로 美(미)하고 歌(가)로 贊(찬)하여 彼人(피인:저사람)들이 垂絶(수절:거의끊어진)命脈(명맥)이 幸續(행속)함을 歡喜(환희)하더라.
其時(기시)淮南(회남)에 根據(근거)한 者(자)는 彼人(피인)이 淮夷(회이)라 稱(칭)하고, 淮北(회북)에 根據(근거)한 者(자)는 徐戎(서융)이라 稱(칭)하니라.
▼궐후(厥後: 그 이후)의 서인(徐人)
그 국가적 뿌리가 단단하지 못했던 까닭이었을까. 서언왕의 몰락과 함께 회수 위의 동맹(회상동맹)이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찢어지자, (조선 종족의) 여러 부족이 다시 고립되어 제각각 활동하게 되었고, 한동안 별로 눈여겨볼 만한 공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다가 주(周)나라 여왕(厲王) 시절(우리 연대로 서기 전 5세기 전후)에 이르러, 다시 군사를 대거 일으켜 주나라를 공격하는 거대한 정치·군사적 책략(대정략)을 감행하였다. 주나라에서는 처음에 서한(西漢)의 장수 괵중(虢仲)에게 명령을 내려 대적하게 하였으나, 결국 우리 군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견패). 그리하여 거의 주나라 천하 전체가 회수 사람(회인: 조선 종족)들이 명령을 휘두르는 영토(행령지)가 될 뻔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주나라의 선왕(宣王)이 왕위를 이어받아서는 나라의 모든 힘을 다 짜내고 국가의 운명을 걸고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에 나아가(친솔병출진) 수년 동안 큰 전쟁(개장장)을 벌였다. 그 결과로 겨우 우리 민족(아인)을 밀어내고 방어(득양)할 수 있었다. 이에 주나라 사람(피인)들은 이를 시로 아름답게 기리고 노래로 찬양(시미가찬)하면서, 거의 끊어질 뻔했던 자신들의 왕조 명맥이 다행히 이어진 것(행속)을 기뻐하고 환호하였다.
당시 회수 남쪽(회남)에 근거를 두었던 우리 종족을 주나라 사람들은 ‘회이(淮夷)’라 불렀고, 회수 북쪽(회북)에 근거를 두었던 우리 종족은 ‘서융(徐戎)’이라 칭하였다.
南方(남방) 移居民(이거민)의 盛衰(성쇠)
그러나 彼一時(피일시) 此一時(차일시)라, 厥子(궐자) 幽王(유왕)의 時(시)에 至(지)하여 德(덕)이 薄(박)하고 政(정)이 亂(난)하매, 다시 자주 戰事(전사)를 起(기)하여 周室(주실)을 疲弊(피폐)케 하니라. 是後(시후)로 彼(피)의 王室(왕실)이 式微(식미)하고 諸侯[(제후)가 跋扈(발호)하여, 드디어 五覇時代(오패시대)로 入(입)하니, 此時(차시)에는 淮(회)·徐(서)諸人(제인)이 또한 會(회)에 來豫(내예)하여 利害(이해)를 相較(상교)하였으니, 후에 瑯琊(낭야)로 遷하매 (천:옮김에) 크게 征戰(정전:정벌전쟁)을 事(사)하여 中原(중원)을 凌暴(능폭)하고 小邦(소방)을 攻取(공취)하니, 이는 偃王(언왕) 이후의 大功業(대공업)이나 遺文(유문:죽은사람이생전에지어놓은글)이 簡(간:간략)하여 其詳(기상:그상세함)을 繹(역:번역)치 못하는 바요, 이렇게 垈淮(대회)의 間(간)에서 驅馳한지(구치:말이나수레를타고달린지) 數千年(수천년)이러니, 및 我紀元 二世紀 (아 기원 이세기)에 秦(진)이 起(기)하매 다 四方(사방)으로 散居(산거)하여 鐵蹄(철제:말발굽)의 響(향:소리)과 金甲(금갑:갑옷)의 影(영:그림자)을 다시 可接지(가접:접하지) 못하게 되니라.
以上(이상)은 南方(남방) 漢土(한토)에서 我[아] 先人(선인)의 活動(활동)하던 遺蹟(유적)을 瞥見(별견:언뜻보게)함이라, 想(상)컨대 滔滔(도도)한 江漢(강한:한강)도 審聽하면(심청:자세히살펴들어보면) 波聲(파성:파도소리)뿐이 아니요, 巍巍한(외외:높은산) 垈嶧(대역:터)도 諦視하면(체시:자세히보면) 拳石(권석:한줌돌)만이 아닐지로다
▼남방 이거민(南方 移居民)의 성쇠
그러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피일시 차일시). 주나라 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의 시절에 이르러, 왕의 덕이 박하고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우리 선조들은) 다시 자주 전쟁(전사)을 일으켜 주나라 왕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후로 저들(중국)의 왕실이 점차 쇠약해지고(식미) 제후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며(발호) 드디어 춘추오패(五覇)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회수와 서나라 지역에 있던 우리 선조들(회·서제인)이 제후들의 회맹(會)에 당당히 참여하여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비교할 정도였다. 덧붙여 훗날 낭야(瑯琊: 지금의 산둥성 일대)로 중심지를 옮긴 후에는 크게 정벌 전쟁을 벌여 중국 중원을 압도하고(능폭) 작은 나라들을 쳐서 빼앗았다. 이는 서언왕 이후 가장 큰업적이었으나, 전해지는 역사 기록(유문)이 너무 간략하여 그 상세한 전말을 풀어내지(역치)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이렇게 대산(태산)과 회수 사이의 넓은 대륙에서 말과 수레를 몰며 호령한 세월이 수천 년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연대로 기원전 2세기(서기 전 3세기경)에 이르러 진(秦)나라가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자, 대륙의 우리 종족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산거) 되었다. 그리하여 웅장했던 우리 군대의 말발굽 소리(철제향)와 눈부셨던 황금 갑옷의 그림자(금갑영)를 다시는 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은 중국 남방 땅(한토)에서 우리(아) 선인들이 활동했던 찬란한 유적들을 언뜻 대강 살펴본 것이다. 생각건대, 저 도도히 흐르는 양자강과 한수(강한)도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심청) 단순한 파도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요, 높고 웅장한 대산과 역산(대역)의 터도 자세히 살펴보면(체시) 한낱 굴러다니는 돌덩이(권석)만은 아닐 것이로다. (그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거대한 숨결과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一九一五年 三月(1915년 삼월)月刊월간 靑春 六號 (청춘 육호)
자료대한민국사 제29권 > 1953년 > 정전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목표에 관한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 제목 | 정전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목표에 관한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
| 연월일 | 1953년 7월 7일 |
| 출전 | FRUS 1953, 1344~1346쪽 |
정전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목표에 관한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정전협정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의 목표
문제
1. 한국 관련 미국의 기본 목표를 결정한다.
전제
2.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논의
3. 배경:정전협정에 명시된 조건에 따라 협정 체결 이후 90일 이내에 정치 회담을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이 회담은 공산주의자들과 유엔 대표부 사이에 열리는 것으로 한국은 유엔 관련자 자격으로 참가한다. 미국의 전술은 미국의 대(對)한국 기본 목표에 비추어 가능한 조건 하에서 결정된다. 한국의 주도하에 한국을 통일시키며 또 통일된 한국이 미국의 안보 체제에 연계된 군사 동맹국으로 만드는 것은 현재의 여건 하에서는 실질적으로 가능한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목표는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무력으로 퇴치시켜야 비로소 가능한 일로써, 현재의 정전협정이 수용된다면 사실상 이 안은 폐기될 것이다.
4. 가능한 대안적 목표
▦a. 미국 안보 체제에 연계되고 군사 동맹국인 한국과의 분계선을 따라 한반도는 불명확한 기간 동안 분단될 것이다.
▦b. 한국이 중립 통일된다면 이는 실질적으로 성격이 변하지 않은 한국의 통치 하에 놓임을 의미한다.(그러한 목표가 달성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로 하여금 미국적 정치 지향을 가진 통일 한국의 설립을 받아들이게 하며, 그 대신 미군과 기지를 철수하고 한국과 상호 안보 조약을 조인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주도하에 통일될 한국의 영토적 정치적 완결성과 유엔 가입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대한민국 방위군의 성격과 수준에 제한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 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공산주의자들이 현 정전협정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상 현 상태의 지속을 의미하는 첫 번째 대안에 암묵적으로 동의할 의사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두 번째 대안을 첫 번째 안보다 선호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인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인은 전쟁으로 인해 무질서하고 약화된 작은 나라에 살고 있으며 중국이나 시베리아에서 고토회복 운동을 벌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우려는 한국이 미국 혹은 궁극적으로는 일본 군사력의 기지나 교두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을 중립 통일시키는 것이 북한 위성 정권의 희생과 상당한 체면 손상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자들도 이러한 희생을 만주에서 또 중국 북부의 산업, 운송, 항구 설비로부터 불과 수 백 마일 떨어진 곳에 미군 기지가 설립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의 결과 앞으로 상당기간 경제적 부담이 될 북한이라는 짐을 덜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세계적 관점에서 본다면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한국 문제 해결안을 자신들에게 순 불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평화적 “조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7. 한국의 입장: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국민들은 분단지속을 강력하고 감정적으로 반대해왔다. 한국 정부의 지도하에 통일된 독립 한국을 수립한다는 해결책은 자신들의 주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의 호응을 받을 것이다. 이승만이 분단된 한국의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가져온 지도자가 되기를 더 바랄 가능성은 있다. 비록 그러한 통일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 돼야 한다는 조건이 붙더라도 말이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들의 보증에 전혀 가치를 두지는 않더라도 미국과 공산진영 모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준다면 한국의 안보는 적절히 보장되는 것이다.
8. 두 가능한 대안 사이에서 미국의 이익:독립된 통일 한국의 수립은 미국의 지속적인 정치 목표였다. 이 목적은 한국의 중립화를 통해서만 실질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중립화에 따라 미국의 한국 주둔을 포기하는 것은 전면전 발생 시에도 미국의 이해관계에 치명적이지 않다. 전면전이 발발한다면 한국을 방어하고자 하는 미국의 바람이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이 지역 내에서의 침공 위협에 대해서 전면전이 예상되는 유일한 경우는 그러한 침공을 저지하고자 하는 미군이 보복 공격을 감행할 때뿐이다. 내부 전복이나 간접 공격의 위험은 한국군에 의해 또 미국의 비밀 활동과 경제 원조를 통해 저지될 수 있으며 또 저지되어야만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본의 안보는 공산 군사력(공군력 포함)을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철수시키는 것이다. 한국에 미군 기지를 주둔시켜야 하는 필요가 없어짐으로써 미국은 상당한 비용 절감을 할 수 있다. 한국의 대규모 중무장 군사력은 자유세계 다른 곳에서 미국이 자신의 군사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한국의 통일은 일반적으로 유엔의 중요한 업적으로 여겨져 유엔의 명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도로 한국을 통일하고, 더군다나 중립까지 이룬다면 이것은 전쟁이 오히려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그 만큼 미국의 신뢰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결론과 제안 사항
9. 실질적으로 성격이 변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주도하에 한국을 통일시키고 중립화시키는 것은 미국의 이익으로 이러한 상태의 확보가 미국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목표는 미국에 정치적 지향을 둔 통일 한국의 수립을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며, 그 대신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과 미군 기지를 철수 시킬 것이며 한국과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목표는 대한민국 주도하에 통일된 한국의 영토적 정치적 완결성과 유엔 가입을 보장하고 한국군이 강대국의 침입이 아니라면 충분한 자위(自衛)력을 갖춘 군대발전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FRUS 1953, 1344~1346쪽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5권 > 1920년 1월 18일 > 朝鮮古史硏究會는 京城 長春舘에서 발
1920년 01월 18일
문화,학술 > 학술,사상 > 학술일반 > 학술단체
高等警察關係年表高等警察用語辭典每日申報 1920.1.20
朝鮮古史硏究會(조선고사연구회)는 京城 長春舘(경성 장춘관)에서 발회식을 거행한 바 지방 儒林(유림) 漢學者(한학자) 및 오랫동안 中國 滿洲(중국만주)에 거주한 인사 6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룬 가운데 취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다. 동 회는 滿洲에 大高麗國(대고리국)을 건설한다는 풍문이 있었다.
會長 李相珪(리상규)
副會長 權道相(권도상)
總務 金秉洙
理事 金炳興 외 6명
書記 鄭震錫 외 1명
議員 曹在學 외 12명
趣旨(鄭安立 설명)
朝鮮古史硏究會라는 것은 결단코 정치적 회합은 아니 올시다. 오직 학문적 집합이오니 곧 조선 고대 역사를 연구하자는 목적이올시다.
우리는 사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올시다. 하거늘 이 장구하고 광영있는 역사를 세계적으로 소개하기는 고사하고 우리 민족 간에도 보급치 못하였읍니다. 오히려 아주 우리 민족은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 하여도 과한 말이 아니올시다. 그런 고로 우리는 우리의 역사 더욱이 古代史를 연구치 아니치 못할 것이올시다. 그런데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는 세가지 중요한 것이 있읍니다.
그 세가지 중요 조건은 「史蹟사적」, 「疆土강토」, 「人種인종」을 중요하게 연구할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고대에는 이 세가지가 모두 과연 화려한 역사를 가졌읍니다. 국내 국외에 위대한 「史蹟」과 광대한 토지와 이억만 이상의 인구가 있던 우리 조선이올시다. 그렇게 화려 중대한 역사를 가진 우리 조선민족은 중엽 이래로 강토와 인종이 점점 쇠퇴하여 지금은 십삼도 이천만이라는 민족이 죽을 꼴아지에 있읍니다. 심지어 말류의 폐가 이천만은 고사하고 한 고을 한 면 한 집까지 몰각하고 한 사람의 신명을 유지치 못하게 되었읍니다.
본인은 십여년간 해외에 돌아다니며 실지로 답사하고 목도한 바가 많읍니다. 흥안령 이북으로 시베리아 지방에 과연 우리의 사적상에 참고품이 많이 있고 언어와 풍속까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많이 있음을 볼 때에 본인은 우리의 역사를 연구치 아니치 못하리라는 생각이 불일듯 하였읍니다.
고대사를 연구하여 첫재로는 우리가 어떠한 우리인 것을 알어야 하겠고, 둘째에는 동양인 서양인에게 세계적으로 널리 포고하여 우리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생각이 났읍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연구하여야 고대의 역사를 잘 연구할가? 우리들은 대개 지식이 부족하고 더욱이 만주에 있는 우리 민족은 거개 무식계급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까 이러한 어려운 연구를 함에는 불가불 고명한 학자를 고빙하여 연구치 아니치 못할 것이므로 중국인이던지, 조선인이던지, 일본인이던지, 이것을 연구할만한 자격이 있는 학자를 고빙하여 고대사를 정확히 연구하라고 이번에 고사연구회를 설립한 것이 올시다. ……
……남의 역사가 아니오 나의 역사이다. 이 만주시베리아는 남의 땅이 아니오 나의 땅이다. 하는 생각이 나는 동시에 저 「自我」를 확장하고 생활을 충실케 할 것이 올시다. 그러면 오늘날 고사연구회의 사업은 조선민족의 생명을 부활시키라는 운동이 올시다. 또 정당하게 나아가는 인생의 갈길이올시다.
……우리 목적은 좁은 관념을 넓히고 좁은 생활을 확장하자는 취지에 불과합니다. 그런고로 남의 정신 남의 세력에 지배되여서는 아니됩니다. 어데까지던지 우리의 주의와 주장을 굽히지 말고 나아감이 우리의 할 일이 올시다. 특별히 저 만주 「시베리아」 지방에 있는 우리 민족은 오백만이상에 달하였으나 지식정도가 매우 유치하닛가 될 수 있는대로 그들을 개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더 한걸음 나아가서 그들이 말함과 같이 만주에 있는 중국인 로국인까지 친목하여 크게 동양주의(東洋主義)를 발휘하기를 바라는 것이 올시다. 그 결과에는 우리의 고대에 위대한 역사 그것을 사실로 실현하여 볼날이 있을는지 몰으는 것이 올시다. 우리 민족의 생명을 방해하는 언론이나 정치가 있으면 이는 우리 민족을 죽이려 하는 자이니까, 우리는 이따위를 우리의 원수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오 또 우리는 이러한 큰 사업을 하라는 우리니까 박지와 악행으로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부정당한 사실이 없는 이상에는 우리는 용맹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高等警察關係年表
高等警察用語辭典
대한민국독립일주년 다시뭉쳐 실지회복(失地恢復) 한번뭉쳐 민국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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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안녕하세요. "병우"님!
아주 긴 내용이었지만, 열심히 눈여겨, 세세하게 보았습니다.
사실 "불함론"이라는 말은 여러 분들이 인용하면서, 주장을 했지만 문제는 "불함"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그대로 반도 백두산"으로 귀착되는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위의 글에서 중요한 것들은 : 말하고 있는 각각의 지명(산의 이름, 강의 이름, 기타 지명)이 본래의 것이냐?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오늘날의 것이냐? 하는 핵심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아집니다.
* 또한 각각의 부족이나 종족들의 시원지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사서의 원전내용과 서로 배치되는 글들이 있습니다. 특히 몽고족에 관한 것은 신원사, 몽고비사, 원사등지에서는 징기스칸의 선조가 카스피해를 건넜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옛 몽고족은 카스피해 서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 또 조선반도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내용에 대해서는 솔직히 "최남선 선생"의 원작일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 댓글로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 "사실 필사본"이라는 것은, 후대에 첨삭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여건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신뢰성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합니다.
또 "최남선 선생"의 필사라면 : 글씨체 또는 굵고, 가는 글씨체의 여러 모습이.... ...실제 "선생'의 서체인지... ...여러 문제들이 주장될 수 있다고 보아지며, 특히 '조선반도'라는 말은, 이러한 심증을 더욱 굳게 합니다.
사실 조선반도라는 말은 사서에 등장하는 예가 없습니다.
* 또 지적하고 싶은 것은, 조선의 영토는 만리가 됐든 동서 6,7천리가 됐든... ....중원대륙에서의 것이지, 중원대륙을 뺀 동북지방만을 가지고는 그 면적을 논할 곳이 없다라는 것이며,
위에서 나오는 "동북"지방이란 : 어디를 중심으로 두고 "동북지방"이라고 했을까?하는 것입니다.
* 오늘날의 '만주(동북삼성)과 그 북방지대와 연해주'등지는, 20세기 초만해도 무인지경, 무주공산으로 불렸던 곳으로, 그곳은 어떤 행정체계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할 진대 "동북지방을 강조하는 글은, 이 글이 뒤에 첨삭과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한 가지는,
"萊夷(래이)" 또는 우이(嵎夷)등에 관한 것인데... ...위의 내용대로라면 : 최남선 선생은, 사기나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통전들도 보지 않았다는 말과 같아, 그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래이'는 본래 동이의 최 서방에 살고 있었던 자들로 화산(섬서성)으로부터 무려 7,8000천리 먼곳의 염기가 많았던 래산 주위에서 축목으로 살아가던 유목족의 동이족이었으며,
"우이" 또한 후한 시절에 "오늘날의 섬서성 우부풍 관할에 있었던 부족으로 역시 동이족의 한갈래라고 하였음에도 이들이 산동성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최남선 선생"의 원작인가? 아니면 선생 역시 일제의 사관과 같은 사관을 가지고 있었느냐? 아니면 누군가 첨삭하는 것이냐?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견됩니다.
* 또 조선반도의 이야기인데... ...
1910년 경의 일제 조서보고서에 따르면 : 반도 땅의 당시 인구수와 양반 숫자, 문맹율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 '반만년 조선왕조(총칭)'를 뿌리채 흔듭니다.
5000년을 반도에서 조선왕조(총칭)가 계속 이어왔다면 : 문맹율이 80-90% 이상이 결단코 될 수 없으며, 양반(사대부)가 겨우 5%도 되지 않는 숫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노예왕국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며, 우리들은 대부분 노예들의 후손들이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또한 자연환경(산, 강, 호수, 반도 땅의 거리와 면적, 동네이름, 행정조직, 읍성, 토산물, 기후, 방위등등)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사, 동한사, 조선사나, 여러 지리지등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나라 사학계는 지리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것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 최남선 선생의 "조선반도"이야기는 의문점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그 당시의 조선반도 이야기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 조선 5000년 역사에서 조선반도는 대한제국 그 이후의 일입니다.
* 정말 좋은 정보을 주시고, 게재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조선말기로 부터 대한제국과 일제시대의 글을 통해 우리는 반만년 조선사를 더욱 확실하게 연구할 수 있는 사명감을 갖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 위에서 말씀드린 것은 물론 필자의 제 사견입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 무더운 계절에, 책상앞에 앉아 있기 조차 거북한 때, 이렇게 좋은 소재, 좋은 글을 게재해주시고. ....감사할 따름니다.
아마도 내일 모레 이 달이 지나고 나면,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해라니요 그냥 이런책도있다 정도로만. 대조선사 를 필사(90%정도)한분은 김ㅁㅁ이란분이 필사한것을 가지고있다 기증한듯합니다 당시 등사본 필체를 보면 책마다 필체가 재각각으로 같은글씨체가 없었읍니다 내용이같은것을 대량으로 등사하여 유통한듯합니다 책당 분량이 많아서 5~6분들이 나누어서 맡아 썼습니다 지금있는것(고대) 책마다 같은글씨체가 없읍니다 필사본은 쓴분성명이 정확히쓰여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않아 ㅁㅁ처리 했습니다 .혹시내용전부 보시고자한다면 제가 확보한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합본분,하나는 곤편(상태하) 입니다
책을쓸당시 활자화할수없는 상태(인쇄소문제아니면 검열을통한 총독부검정절차)이런 치하아래서 민족의식을 각성,고양시키려는의도에서 써서 등사를 통하여서 널리유통 그러다보니 문제는 일부등사한부분중 잉크가 덜들어간곳 인쇄불량으로 잘못오독할수있음 예시로 극히일부제주도가 청주도로 보이고 강화도 혈구(穴口) 가 육구(六口)가 된것을 그대로 본인의 글씨체로 써서 인쇄유통한것을 볼수있었는데 필사한것은 정확히 제주도,혈구로써진것으로 볼때 옮겨쓴분들은 그냥 보이는그대로 대필, 일본이 제작발행한지도책을 보면인도 도인도반도 산동도 산동반도 온갖곳에 다 반도를 붙여놨음을볼때 현한반도는 아닙니다 그럴수없는 넓이땅 어느정도가필이있는지 모르나 그래도 1920년대 당시에도 이정도의 교육과 역사 변조를 10년대쓴책과의 차이를 통해 여실히 역사를왜곡,감추려하는지 알아야하고 알수있고 DB를만들어놓고도 관계자외 볼수없게만들어놓으니 누가알고쉽게보며 잘못된부분이있으면 그부분이잘못되얏다 지적할수있을텐디 극히일부만의 역사를 만들어놓으니 ,다행히 남당 박창화유고 는 사이트개설당시 올려노아서 볼수있음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들어가 남당 박창화유고 치면 정창원에서 필사한책볼수있어요 감사합니다 즐거운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