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라운 결혼식
지난 4월 6일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가 타계했다.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그의 부인은 바로 유명한 헐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 동아TV는 10일 세계의 왕실에서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가 만든 모나코 왕가를 소개했다. 1956년 이뤄진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은 세기의 이벤트인 만큼 요란했다. 켈리가 미국에서 모나코로 가져간 옷은 20만
달러어치. 현재 시가로도 2억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대형 트렁크 4개, 모자 상자 20개, 기타 옷 상자가 수십 개가 켈리와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결혼식도 성대했다. 켈리는 MGM 스튜디오의 의상담당이 제작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한 벌에 무려 360m가 넘는 실크와 레이스가 사용됐다. 몸통 부분은 희귀한 작은 진주로 수가 놓였고 레이스는
125년된 것. 레이스 값만 무려 2500달러. 신혼부부에게 들어온 축하 선물만 백만 달러어치. 하이라이트는 신랑이 신부에게 준 선물. 45m
요트를 결혼선물로 준 것. 두 사람은 그 요트를 타고 1달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이후 카롤린 공주, 알베르 왕자, 스페파니 공주가 태어나면서 비로소 그리말디 왕가가 만들어졌다. 공주와 왕자는 여름이면 왕비의
친정이 있는 미국이나 프랑스에 있는 왕실 소유 별장 록 아젤에서 지냈다. 낙원같은
왕실 생활이었겠지만 이들의 행복은 1982년 9월 13일 깨진다. 왕비가 당시 17세였던 스페파니 공주와 함께 차를 몰고 록 아젤 별장에서
궁으로 오던 중 절벽으로 추락한 것. 당시 왕비의 나이는 52세.
조문객중엔 다이아나 황태자비도 있었다고 방송은 전했다. 해설자는 외부인
출신 왕비라는 점에서 다이아나 왕비가 그레이스 켈리에게 무척 의지했다고 설명했다. 왕자와 공주의 이후 삶은 파란만장했다. 카롤린은 어머니가 선택한 언스트 왕자를 거부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1980년 이혼한다.
이탈리아 사업가와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남편은 이내 모터보트 사고로 사망한다. 한동안 초췌한 모습으로 외부출입을 삼가던 그는 1999년 마침내
어머니가 점찍은 언스트 왕자와 결혼한다. 막내 스테파니는 가수로 활동했다. 그런데
단지 이색적인 눈길만 끈게 아니라 5백만장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는 설명이 나왔다. 모델 활동도 했다고. 1990년 경호원 다니엘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면서 결국 이혼했다. 장남인 알베르는 클로디아 쉬퍼와 염문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40세를 넘긴 뒤까지 독신이라고. 방송은 그레이스 켈리가 세상을 떠난지 이미 20년이 넘었지만 모나코엔 그의 흔적이 아주 강하게
배어있다고 전했다. 우표, 컵 등 일상 용품에 그의 이름이 붙어있고, 그레이스 극장 등 그의 이름을 딴 공간도 운영중이었다. 또한 그레이스가
묻힌 묘엔 매년 수천 명이 문상을 온단다. 모나코가 낭만의 왕국이 된 데는 세기의 미녀와 사랑에 빠진 왕,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바탕이
됐다고 방송은 전한다. 한편 지중해를 바라보는 낙원같은 땅은 누구나 살고싶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곧이어 나온 해설은 환상을 실현하는덴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걸 곧장 일깨웠다. 이 왕국에선 작은 원룸 아파트의 가격이
60만 달러나 된다. 토지가 평당 2만 달러를 상회하니 놀랄 일도
아니다.
TV리포트 김대홍 기자 3Dparanthink@yahoo.co.kr">paranthink@yahoo.co.kr" target=_blank>3Dparanthink@yahoo.co.kr">paranthink@yahoo.co.kr
방송 전문 인터넷 신문 TV리포트
제보 및 보도자료 tvreport.co.kr <저작권자 ⓒ 도끼미디어
TV리포트>
1982년
모나코에서 한 자동차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 자동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와 그녀의 막내딸인
스테파니 공주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그 사고로 죽고 스테파니 공주는 큰 부상없이 곧 회복되었는데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레이스 켈리는 건축회사 사장인 아버지와 모델인 어머니 그리고 퓰리처 상을 받을 만큼 능력있는 극작가 큰아버지의 영향으로 별로 부족함 없이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쉽게 볼 수 없는 기품과 지성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불과 25세의 나이에 오스카상을 수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지자
여러 유명한 남자배우들과의 염문이 생기지만 그녀는 도도하고 차가운 매력으로 그녀의 이미지를 흐트리지 않는다. 1954년 잡지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해 모나코의 왕실을 방문했던 그녀. 당시 모나코의 왕자였던 레이니에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 이듬해 칸 영화제에 귀빈자격으로
참석했던 레이니에 왕자와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다시 재회하게 되고 두 사람이 사진상으로 꽤 잘 어울린다는 한 사진작가의 요청에 의해 켈리는
다시 모나코 왕궁을 찾게 되고 레이니에 왕자는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켈리는 왕자답지 않게 소박하고 편안한
레이니에 공에게 호감이 갔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여배우로서 왕자와 결혼하여 왕궁에 들어앉아야 한다는 사실에 주저했었고 당시 같은 영화에 공연했던
프랭크 시내트러 역시 그녀에게 집요한 구애를 하고 있어 선택하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왕비로서의 화려하고 안락한 삶을 선택할 것이냐. 프랭크와
결혼하여 인기절정의 여배우의 삶을 계속할 것이냐. 영화 <상류사회>에서 켈리는 레이니에 공에게서 선물받은 12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보이는데 그것은 레이니에 왕자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는 그녀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의 모습은 은막에서 사라지고 모나코 왕과의
화려한 결혼식 이후 그녀는 공식석상 이외의 자리에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후 모나코는 그녀와의 결혼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상당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세간의 부러움과는 달리 엄격한 궁중생활과 스트레스로 인해 상당한 우울증에 시달렸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사고시 같이 동승했던 막내딸 스테파니 공주는 상당한 왕실의 말썽꾸러기(?)로서 각종 잡지에 좋지 않은 기사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등장하곤
하여 모나코 왕 부부의 속을 썩이곤 했다. 그리고 왕비의 죽음 이후에는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 <살인자>라는 쑥덕거림까지 받았었는데
그로 인해 상당한 심적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사고난 차를 직접 운전했던 것도 그녀였고 그녀가 어머니인 왕비의 기분을 전환시켜준다는
의미에서 프랑스까지 몰고 가서 서커스 구경을 하고 오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 아마 세간의 수근거림이 더했을 것이지만 사실 레이니에 공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 바로 그녀이고 레이니에 공이 아플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곁을 지키는 자식도 바로 그녀라고
한다.
내용출처: http://kin.naver.com/open100/r_entry.php?rid=7095#12
* 역사속 유명한 왕비나 황후들의 일생 - <릴레이 지식인>중에서
여기서 잠깐 모나코 왕가인 그리말디家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칼로 흥한 모나코, 저주에 갇힌 700년
유럽의 입헌군주국 모나코 왕가에 그리말디의 저주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고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최근 전했다. 레니에 3세 국왕이 지난 6일 병환으로 타계한 데 이어 최근 딸 캐롤라인 공주의 남편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공(公)까지 급성 췌장질환으로 입원하는 등 우환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지난 700여년간 모나코 그리말디 가문을 괴롭혀온 저주 탓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그리말디가에 결코 행복한 결혼은 없다는 게 저주의 내용이다. 저주의 뿌리는 모나코 왕가의 시조인 프란체스코 그리말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그리말디는 1297년 순례길에 오른 수도승으로 위장,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며 왕궁으로 잠입한 뒤 보초들을 살육하고 모나코 영지를 강탈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그를 악한 그리말디(Grimaldi the Spiteful)라고 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문의 문장(紋章)에 수도승 복장을 한 채 칼을 쥔 두 남자를 새겨넣을 정도였다. 그리말디 가문의 우환은 이같은 과거가 후대에 드리운 그늘이라는 게 호사가들의 해석이다. 지난 40년간 점철된 사건들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레니에 국왕은 1956년 빼어난 미모의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를 아내로 맞았으나 결혼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82년 켈리는 자동차사고로 사망했고, 레니에 국왕은 이후 재혼하지 않은 채 외로이 살아왔다. 켈리와 레니에 국왕 사이에서 태어난 1남2녀의 결혼도 순탄치 않았다. 캐롤라인 공주는 21살이던 78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7살 연상의 프랑스 남성과 결혼했다가 2년 만에 이혼했다. 그의 두번째 남편은 90년 모터보트 사고로 숨졌고, 세번째 남편 에른스트 공은 음주가 지나친 데다 폭행사건에 자주 연루되는 등 구설수의 단골손님이다. 스테파니 공주는 미혼 시절 경호원 다니엘 뒤크루와 두 아이를 낳은 뒤 뒤늦게 결혼했다. 하지만 1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공주의 세번째 아이는 또다른 경호원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재작년 포르투갈 출신 곡예사와 다시 결혼했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 레니에 국왕의 타계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게 된 알버트 왕자는 47살의 나이에도 미혼이다. 그는 결혼이나 후세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다. 모나코는 일단 공주 또는 공주의 직계후손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 프랑스 보호하의 독립국 형태인 모나코의 주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놓은 상태다. 그리말디 가문은 1731년 남계(男系)의 대가 끊기자 왕녀 루이스 이폴리트의 남편이 자크 1세로 즉위, 왕위를 이은 적이 있다.
<최민영기자
3Dmin@kyunghyang.com">min@kyunghyang.com〉 기사제공 :
샬롯(Charlotte Marie Pomeline Casiraghi)
샬롯이 2003년 프랑스 샤넬의 이미지 모델로 활동한다고 합니다.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캐롤라인공주가 각별한 친구사이
첫댓글 저 살짝 담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