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fpGQyse-uLU
* 찬송 293장
<베드로전서 5:12-14>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제 베드로전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실제 권면의 내용은 어제 말씀으로 끝났고, 오늘의 말씀은 편지를 끝낼 때에 하게 되는 인사말이지요. 먼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라는 사람이 대필해 준 것임을 밝히고 있지요. 사도바울도 대필자를 통해 그의 서신을 기록하기도 했지요. 특히 바울서신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로마서 16: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이렇게 대필자가 자기 이름을 밝히면서 한 줄 인사말을 넣기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함께 동행했던 실라라는 사람과 동일인으로 알려져 있지요. 실루아노는 바울과도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감옥에도 같이 갇히고 여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함께 겪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또 베드로처럼 두각을 나타내는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늘 그 지도자들 뒤에서 협력하고 돕는 소중한 사람이었던 거죠. 앞에 드러나는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노력과 힘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수많은 동역자 조력자들이 함께 있었던 거죠. 우리 교회처럼 크지도 않는 교회여도 담임목사인 저 혼자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부목사님 전도사님, 그리고 장로님들과 항존직분자들, 그리고 여러 부서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함께 협력하고 조력하고 참여하는 헌신들을 통해서 이 교회도 이렇게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실루아노처럼 좋은 협력자가 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지요. 세상에서는 드러나는 지도자와 뒤에 있거나 보이지 않는 협력자를 급이 다른 사람으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보시거나, 때로는 드러난 지도자보다 드러나지 않은 협력자나 조력자를 더 소중하게 보실 때도 있을 겁니다. 예수께서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의 평가와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감당해야 할 영역에 묵묵히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삶인 것이지요.
12절 후반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의 결론을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내리고 있지요. 박해 가운데 있는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 나 베드로가 이렇게 베드로전서를 써서 권면할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우리의 앞으로의 모든 삶의 과정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바탕에 있고, 가장 중요한 원동력임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 위에 굳게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은혜를 깨닫는 신앙인 거죠.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갑자기 바벨론이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지요.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이미 망한 고대국가인데 베드로는 왜 갑자기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했을까요? 어느 시대이든 엄한 통치가 지배할 때에는 언론검열도 있고 서신검열도 있지요. 베드로전서가 로마에게 박해당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편지는 불온문서로 취급되어서 성도들에게 전달되지도 못하고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로마 대신 바벨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거죠. 요한계시록에서도 역시 박해의 아픔을 주는 로마를 바벨론으로 여러 차례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벨론 있는 교회라는 것은 지금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 성도들 뿐만 아니라 로마 전역에서 여러 곳에서 같은 박해의 아픔과 고통을 겪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13절 첫 부분에 ‘택하심을 함께 받은’ 즉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겁니다. 비록 어려움 속에 있어도 우리는 홀로 버려진 자들이 아니라 서로 얼굴을 대할 기회가 없었다 해도 우리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해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서로 가족처럼 문안하는 겁니다. 14절에서는 ‘너희의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하지요. 우리는 그만큼 친근한 같은 형제이며 자매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13절 마지막 부분에는 마가라는 사람이 언급되고 있지요. 마가는 바울이 1차전도 여행 때에 바나바라는 스승과 함께 다녔는데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지요. 그런데 전도 여행에 마가가 동행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던 아쉬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 마가로 인해 바울은 그의 스승이었던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헤어졌지요. 그래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 보면 마가가 나에게 유익하다고 하면서 마가를 보내줄 것을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 마가는 베드로에게도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소중한 동역자였음을 본문은 말하지요. 아까 언급된 실루아노와 더불어서 좋은 지도자에게 있는 좋은 협력자 좋은 조력자의 모습을 보여즙니다. 우리가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보이게 되든 보이지 않게 되든 예수님의 동역자 협력자 조력자, 세례요한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예수님의 신발끈이라도 묶고 풀어드리는 잔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4절 마지막에서 베드로전서를 이런 말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저희들 역시 베드로전서를 끝내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예수님의 좋은 동역자, 협력자, 조력자가 되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세상에서의 평가와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감당해야 할 영역에 묵묵히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12절 후반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의 결론을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내리고 있지요. 박해 가운데 있는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 나 베드로가 이렇게 베드로전서를 써서 권면할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우리의 앞으로의 모든 삶의 과정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바탕에 있고, 가장 중요한 원동력임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 위에 굳게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은혜를 깨닫는 신앙인 거죠.
아까 언급된 실루아노와 더불어서 좋은 지도자에게 있는 좋은 협력자 좋은 조력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보이게 되든 보이지 않게 되든 예수님의 동역자 협력자 조력자, 세례요한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예수님의 신발끈이라도 묶고 풀어드리는 잔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4절 마지막에서 베드로전서를 이런 말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저희들 역시 베드로전서를 끝내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