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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연의 시낭송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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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스크랩 [최정례]시 모음
김서연 추천 0 조회 149 16.07.24 16: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정례 시인 시 모음

 

 

1)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 최정례
2)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3)슬픔의 자루 / 최정례
4)온몸을 잊으려고 / 최정례
5)하산 / 최정례
6)3분 동안 / 최정례
7)비스듬히 / 최정례
8)발자국 / 최정례
9)늙은 여자 / 최정례
10)게들은 구멍 속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 최정례
11)레바논 감정 / 최정례
12)비 맞는 전문가 / 최정례
13)화투(花鬪) / 최정례
14)산벚꽃나무하고 여자 그림자하고 / 최정례
15)봄 그림자 / 최정례
16)논 / 최정례

 

 

 

 

1)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 최정례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익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 달란 말이야

 

 

 2)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 최정례

 


끝을 날카롭게 구부리고 지붕 위를 떠가는 초승달
왜 입 안에 신 침이 고이는 것일까
 

껍질 반쯤 벗겨진 사이로
신물 주르륵 흘러내리고 노란 껍질
익다 못해 터진 그 사이로 안개처럼 떠 있는


앞에는 키 작은 아이들 뒤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100년 전 사람들 단장을 짚고 안경을 쓰고
줄줄이 서 있던 일족의 흑백사진
한 잎 배를 타고 칠흑의 밤을 노 저어 가던 그 집


그 집 벽 위 액자에도 저런 빛깔의 과일이 한쪽 떠 있었던 것만 같다
먹어본 듯하나 아직 먹어보지 못한


주르륵 지붕 위로 미끄러져 내리던


100년도 전에 그 집 사람들 미끄러져 가면서
남자가 입덧 중인 여자에게
열매를 꺼내 한 쪽씩 입속에 넣어주고
아기들에게도 쪼개주고
둘러앉아 한쪽 눈을 찌그리며 터뜨려 먹고 있는데


그때 밀감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신 살구빛의 그것이 먹고 싶어
어미의 갈비뼈 밑으로 기어들어간 그 기억 때문일까


깜깜한 밤하늘 뚫고 신 살구빛의 새초롬한 달
신물 터져나오면 한쪽 눈이 찌그러지다 환해지는데
 

그 집 액자에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고
밤배 탄 사람들
아직도 기린처럼
그 열매 끌어내려 터뜨려 먹으며 가고 있는지
잔뜩 구부리고 초승달 미끄러져 내린다

 

 

 3)슬픔의 자루 / 최정례

 

 어머니가 꼼짝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오줌과 똥을 치우느라 엎드려 있는데
병원 밖 멀리 기차가 배추벌레처럼 꿈틀거리고
느닷없이 그 짐승이 거기를 가로질러 갑니다
 

그 짐승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무뚝뚝하기도 하고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석양 무렵이었습니다
 

햇빛 무서운 대낮에도 마주친 적 있습니다
아이가 잊고 간 도시락 갖다주러 가다가
반짝이는 잎 그물 사이로
농담처럼
그 짐승이 휙 지나는 겁니다
털 오라기 하나 떨구지 않고
길모퉁이 만개한 제비꽃 속으로
 

두 귀를 펼친 코끼리처럼
잎 그물 속에 출렁이다가
딱정벌레 오리나무 속 갉아먹는 소리 속으로


어느 날인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된 그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던 것도 보았습니다


내미는 손 잡혀버릴 것만 같아
손 내밀지 못하고
묶어서 자루에 넣어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는데
 

지난 유월 오빠가 집 앞 계단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왜 자꾸 그 생각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가 잡아 지고 왔던 자루
그는 우리에게 아이스케키를 사다준 것이었는데
자루 속에는 젖은 얼룩과 막대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4)온몸을 잊으려고 / 최정례

 

 

양귀비는 거북 눈속에서 하늘거리고
낙화암은 옆구리에 삼천궁녀를 거느렸네
 

차바퀴 밑에는 고양이가
늑골 아래에는 암세포가
야옹거리며 야옹거리며 사네
 

종합병원 건너편 저 멀리에
기차가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초록 배추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꿈틀거리며 건널 때
 

겨자씨 속엔 눈폭풍이
뻐꾹 소리 속엔 먼 산이
 

온몸을 잊으려고
이 세상 냄새를 잊으려고
눈꺼풀 속으로 백일몽 속으로
절벽 아래로 ?꽃 잎 아래로
흩날리네 흩날리네

 

 

 5)하산 / 최정례

 

 

그때 나는 숲에서 나와 길에 올랐다
검은 떡갈나무 숲 한 뼘 위에
초승달 눈 흘기고 있었다


숲에서 나오자 세상 끝이었다
 

우리 밑에 짓눌려 부스럭대던 잎사귀들
아이처럼 지껄이던 산 개울 물소리
아무 생각 없이 나눈 악수는
흘러 흘러 흘러서 바위틈으로 스며들고


숲에서 나오자 깜깜했다
 

허공중에 피었다 곤두박질 치는 것
깨진 접시 조각처럼 잠시 멈춰 있던 것
보았느냐고, 묻고 싶은데
 

갑자기 숲은 아득해져서
지나간 잎사귀들만 매달고 흔들리고

 

 

6)3분 동안 / 최정례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드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7)비스듬히 / 최정례

 

복숭아나무 똑바로 서 있는 거 못 봤다
꼭 비스듬히 서 있다
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지는 척
구릉 아래쪽으로 기울어
몸 가누지 못하는 척


허공에 진분홍 풀어
지나가는 사람 걸어 넘어뜨리려고


안 속는다, 안 속아


몸은 이쪽에 머리는 저쪽에 풀어 두고
왜 서 있나
비틀비틀 무슨 생각하며 걸어 왔나


도화
길 밖으로 꽃잎 다 흘리고


안 속는다, 안 속아

 

 

8)발자국 / 최정례 
 

무슨 새의 발자국이 눈 위에 총총총
몇 번 찍고 사라진 흔적 앞에
휘파람새
휘파람새를 본 적도 그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데
얼떨결에 그 이름 입에 담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백지 한가운데 흩뜨려놓다가 한줄기 휘파람따라
사라질 것 같네
 

이 계곡이 숨겨놓은 눈사태보다도
털짐승의 갑작스런 출몰보다도
발밑
얼어붙은 계곡 물의 깊이가 더 무섭네
 

휘황찬 상점의 유리에 비쳤던
순간의 그림자처럼
무슨 짐승이 날개를 친 흔적도 없이
앞뒤없이 백지 위에 발자국만 남겼나
 

엄마, 위인전 읽다가 태어난 연도보다 죽은 연도를
몰라서 물음표가 되어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드는 거
같애. 예를 들어 장영실(?~?), 이걸 보면 너무 무서워
서 확 넘겨버려. 아이가 말할 때
 

어디선가 휘파람 한줄기 내려오면서 회오리 속으로
머리채를 잡아끄네

 

 

9)늙은 여자 /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10)게들은 구멍 속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 최정례

 


갯벌에 꼬물대던 작은 게들이
갑자기
천지개벽의 지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정지한다


나는 아무런 의도가 없어, 없어
너희를 잡아 다리를 부러뜨릴 생각도
찜 쪄 먹을 계획도 없다구


그래도
꼬물거리던 그들은 내 기척에
기겁을 하고
눈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뻘 저 편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척 게눈을 뜨고 내 눈치를 본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그들이 내 발길을 피해
일제히 재빠르게 몸을 옮길 때
순간의 무수한 게걸음에
수평선이 빙그르 도는 것 같다


아찔하다
하늘은 뻘로 바다는 하늘로 뒤집힌다


난 바람을 쐬러 방파제에 서있고 
옷자락을 펄럭일 뿐인데


섭섭하다
게들이 구멍 속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죽은 척 살아서 내 눈치를 볼 때

 

 

11)레바논 감정 / 최정례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 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 박정대의 시 '이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지요' 중에서

 

 

12)비 맞는 전문가 / 최정례

 

 

십여 년 동안 그가 한 일은
비 맞는 일뿐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는 재빨리 나가야 한다
버스 정거장 가로수 아래로
머리에 코에 수염에 빗줄기가
주르륵 흐르도록 해야 한다
주머니 가득 빗물을 채우고
그를 기다렸던 버스가 텅 빈 채
다시 출발할 때까지
서서 비를 맞아야 한다
건너편 창에서
그녀의 그림자 사라질 때까지
과자처럼 바삭거리며
리모콘과 뒹구는 그녀를 위해
가로수 늘어진 가지를 흘러
머리카락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셀 수 있어야 한다
담배는 주머니 안에서 죽이 돼야 한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비 맞는 장면을 보여 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젖는 일을
불편없이 사랑해야 한다
전근대적 추억을 고용하려고
희생적 지출을 한 그녀을 위해
그는 비 맞는 전문가니까


 

 시집 - 햇빛 속에 호랑이 (세계사)

 

13)화투(花鬪) / 최정례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뚝 또 뚝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이 파이는 소리
나는 차배달 왔다가 아저씨와
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 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 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슬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매조가 님이란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시집 - 붉은 밭 (2001년 창작과비평사) 
 

 

14)산벚꽃나무하고 여자 그림자하고 / 최정례

 

 

 

그는 산벚꽃나무와 여자 그림자 하나
데리고 살지요
그는 돈도 없고 처자도 없고 집도 없고
그는 늙었지요
바위 구멍 굴딱지 같은 곳에서 기어 나와
한참을 앉아 있지요
서성거리지요
산벚꽃나무 기운 없이 늘어진 걸 보니
봄이 왔지요
냄비를 부시다 말고
앓아 누운 여자 그림자를 안아다
양지쪽에 눕히고
햇빛을 깔고 햇빛을 덮어주고
종잇장같이 얇은 그녀도 하얗게 늙어가지요
산벚꽃나무 장님처녀 눈곱 달 듯
한두 송이 꽃 매달지요
그녀의 이마가 그녀의 볼이 따뜻하지요
아니 차디차지요
이 봄은 믿을 수가 없지요
그녀를 눕혔던 자리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그녀가 천천히 날아가지요
산벚꽃나무 너무 늙어 겨우 꽃잎
두 장 매달았다 떨구지요
또 봄은 가지요
그녀는 세상에 없는 여자고
그래도 그는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지요
산벚꽃나무하고 여자 그림자하고

 

 

 

15)봄 그림자 / 최정례

 

 

산천동 간절히 가고 싶었지만 못 갔어요
병이 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는 길인데
연초록의 어린 순을 내민 가로수들이
길바닥에 그림자를 눕혀 놓고 있었어요
나무 어린 그림자 밟고 지나가는데
내 속에 그림자도 막무가내로 누워버리겠다는 거예요
산천동 꽃그늘에 덮인 산동네는
얼마나 처연한 빛을 띠고 있을까요
나도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워 헛소리를 할 수 있다면
 

그런데
늑대의 털을 걸쳐 입은 내 그림자 벌떡 일어나더니
어리고 생생한 잎을 먹어치우고
그것들 헤치고 달렸어요
달리는 버스 지붕
길가에 조그만 상자까지도 다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었어요
모르는 척 마구 밟고 갔어요
영혼이라는 게 있을라구요
상자곽 같은 게
무심코 흔들리는 나무가지 같은 게
빌딩 꼭대기에 약간만 석양이 남아
그 위를 붉은 구름이 더돌고
아이는 계속 열이 올랐어요
그림자 점점 자라 한 저녁을 덮어갔어요


 

 시집 - 붉은 밭(창작과 비평사)

 

 

16) 논 / 최정례

 

 

얼어붙은 논바닥에
벼 베인 그루터기에
이목구비에 다 내주고
 

찬비 오는데 어쩌려고
그들은 아직도 들판에 서서
실려가는 쌀자루를 바라보고 있나
 

꿈속에 버리고 온 아버지처럼
발목 얼어붙어서
 

땅끝으로 가서는 낭떠러지를 만나고
더 끝으로 가서는 자기 발등을 찍는
 

꿈속에 버리고 온 아버지처럼
 

 

 
 

<최정례 시인>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0년『현대시학』에 시 「번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94년 첫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1998년에 두번째 시집

『햇빛 속에 호랑이』, 2001년에 세 번째 시집 『붉은 밭』

2006년 네번 째 시집 『레바논 감정』간행.

1999년 제10회 김달진 문학상, 2003년 이수문학상 수상.

2007년 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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