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루카 11,27-28
나에겐 주님의 뜻이 행복인가, 괴로움인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자로 수감돼 있는 형을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들어가 탈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교도소는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누구도 탈출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까지 죄인으로 자신을 찾으러 감옥에 들어왔으니 형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이 온 몸에 새긴 문신이 바로 그 교도소의 지도이고 완벽하게 짜인 탈출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형도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평생을 무기징역자로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형에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쫓아 감옥을 탈출하여 결국 누명을 벗게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우리 불행 안으로
들어오신 분의 뜻이 우리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복의 기준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머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은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는 분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옥이 행복이라고 믿으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을 탈출시켜 주려고 하는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합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결국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겐 장난감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닙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장난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고통스러움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뜻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참 행복의 이유인 것입니다.
일반 대학교 다니며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쳤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1년간 버텼습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저를 수많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압니다.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바꾸어 놓아야 행복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2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루카 11장 27-28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오늘 제시된 복음은 무척 짧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복음말씀입니다.
3년간의 공생활 가운데 절정기를 보내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군중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목활동을 통해 하느님 무한하신 권능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감쪽같이 일으켜 세우시는가 하면, 지독하게도 떨어지지 않던 악령들도 예수님의 한 말씀에 하나같이 다들 나가 떨어졌습니다.
기적과 치유의 능력만 갖추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변도 얼마나 탁월한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입을 여셨다 하면, 주옥같은 말씀, 감칠 맛 나는 말씀이 샘물처럼 솟아나왔습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매너 좋지, 인물 좋지, 거기다가 겸손하지...
사람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 ‘뿅’ 갔습니다.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당신 자신으로 인해 모친 마리아까지 덩달아 칭송을 받으시니 예수님 입장에서 아주 기분이 뿌듯한 일입니다.
저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응답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무슨 뜻밖의 말씀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이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재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은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나자렛, 이스라엘에 안주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작은 시냇물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육적인 관계에 매달려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뜻을 성취하기 위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작은 물줄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참 신앙공동체는 폐쇄된 작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벽을 무너트립니다.
국경도 넘어섭니다.
민족도 초월합니다.
남녀, 빈부격차, 인종, 이념, 사상...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언젠가 큰 바다에서 이 세상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인류 전체가 크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강론>
(2024. 10. 12. 토)(루카 11,27-28)
<신앙생활과 회개에서 무임승차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1)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라는 말은, “선생님의 어머니는 복되신 분입니다.” 라고 찬양하는 말이고, 이 말은 사실상 예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엘리사벳의 인사말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이 말은 ‘성령으로 가득 차’, 즉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느님의 인간 구원 사업을 증언하고 찬양하고, 동시에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증언한 말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모님 태중의 아기는 복되신 분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응답해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성모님도 복되신 분입니다.
‘복되신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 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어떤 여자’의 말도 엘리사벳의 말과 같은 성격의 증언과 찬양인지, 아니면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여자가 그런 말을 한 일에도
성령의 힘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그렇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입니다.
<여기서 ‘오히려’는 ‘그렇기도 하지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행복하다.’ 라는 말은 ‘복되다.’,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도 복되신 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복되신 분이다.
그리고 성모님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은 곧
‘복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그 ‘복’을 받았고,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복이 ‘완성’될 것입니다.
3)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다.”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말씀’을 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4)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어떤 특혜도 없고, 예외적인 특권도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족들도,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신앙인 가족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못 얻습니다.
하늘나라 입장과 구원에는 ‘무임승차’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창세기 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할 때,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라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롯은 악한 사람인데도 아브라함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롯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5) 우리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과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고, 회개도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모니카 성녀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경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회개와 개종은 모니카 성녀의 기도 덕분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회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 자신이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공이 컸음은 틀림없지만...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냉정한 분이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또 회개를 기피한 사람들 자신들 탓입니다.
‘그날’이 되면, 그들은 다른 누구를 탓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