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그 풀이 뚝, 뚝
끊기는 소리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의 굽은 오른손은
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펴져
나무처럼 자라오른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이제는 한가한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게 된 나는
저 양들을 보며 비로소 무언갈 깨달아 간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연주는 얼마나 놀라운가
풀 한 포기 없는 방을 풀밭으로 만들어 놓고
천장을 본 적 없는 하늘빛으로 물들이는 이 연주는,
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을
스르르 잠들게 하는 이 연주는!
음악은 연주와 더불어 잠이 들고
양들도 이젠 다들 풀밭에 무릎 꿇은 채 그만
잠이 들어
풀 뜯는 그 모습 더는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이제 한동안 음악 없이도 양들이 한가로이 풀 뜯는 모습
머릿속에 그릴 줄 알게 된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나는 그 풀이 된다
첫댓글 ♧♧♧♧♧♧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