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노니 그대는
수연장을 세피리로 불어보았는가? (고개를 젓는다)
유초신이나 자진한잎은 세피리로 불어보았는가? (역시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 향피리로 중광지곡을 불어보거나 가곡을 불어보았는가?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본다)
이윽고 그는 대답한다.
나는 피리 수련을 수십 년 하였지만
실내악을 닮은 방중악(房中樂)인 가진회상과 가곡 외에는
세피리를 불어 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불어보았다는 소식도 들어보지 못했으며
불어볼 생각도 못 했고 그럴 까닭도 없었는데 이런 질문을 받으니 조금은 황당하오이다.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향피리로 중광지곡을 불어 보고
세피리로 유초신지곡을 불어보았지만
서로 간에 운지법이 조금 다르고 음색과 음량이 다르지만
기본음은 같아 모든 곡을 한 종류의 피리로 불어도 큰 상이점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번거롭게 세피리라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후학을 힘들게 하오?
악곡에 따라 피리 종류를 달리해 부는 까닭이 있소?
그는 답한다.
피리는 음량이 커서
주로 밖에서 크게 판을 벌이는
행악(行樂)이나 ‘새면 치는’ 삼현육각에 쓰였는데,
방중에서 악기를 즐기던 무리 중에 심미안이 깊은 이들이
사랑채와 대청에서 현악 중심으로 방중악을 즐기다가
다채로운 악기로 더욱 깊은 소리를 추구하려 관악을 들이니
피리 소리 홀로 높아서 조화를 꾀하려 세피리를 만들지 않았겠소?
그러니 피리는 향피리라오, 세피리는 현악 위주의 곡에서 조화를 위해 쓰는 것이라오.
대금 독주곡으로 유명한 <상령산 풀이>는 평조의 상령산을 한 옥타브 내린 곡이지만
세피리로 불지 않고 향피리로 꿋꿋하게 부는 것도 다 그러한 까닭이라오.
: 향피리는 우뚝한 기상이며, 세피리는 부드러운 조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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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끄덕이며 말하기를
그대에게 유초신 상령산의 합악을 청하오되
나는 ‘법대로’ 향피리로 불려니 그대는 ‘불법으로’ 세피리로 불어
평조 상령산을 세피리로 연주하며 합주하는, 그대 생애의 첫 기회가 되기를 바라오.:
향피리의 웅장함이 푸른 나뭇잎으로 출렁거리고
세피리의 미려함이 붉은 능소화로 피어
소리 꽃나무가 웅혼하게 흔들리던
소리 향 그윽하던 밤이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