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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루카 11,29-32
사이비: 거짓말이 만드는 인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를 악하다고 하십니다.
왜 표징만 요구하는 이들이 악할까요?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든가 하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새벽에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상에서 이전까지 느낄 수 없었던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술 취해서 헛것을 본 거야!’라고 생각하며 내려왔습니다.
이때 느꼈던 게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그 이유를 표징이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표징까지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행복’이라는 모토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결혼을 생각했다가 이제 ‘하.사.시.’를 읽고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더 큰 행복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표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행복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더 행복해져야 한다는 마음에 저절로 지적인 호기심이 누구보다 컸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이는 그 방법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던 중 ‘하.사.시.’를 만나게 되었고 참 행복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참 행복의 지혜가 표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로 완벽히 결심하게 만든 책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었습니다.
주님은 표징보다는 참 행복의 길로 이끄는 방법으로 지혜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마음 안에는 믿지 않는 합리화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징으로는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지혜가 오히려 마음을 바꿉니다.
사실 표징은 내가 지혜로 마음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 때 나중에 보여주십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예수님 시대에 하느님을 믿던 이들도 다 신앙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다가오기는 주저하였습니다. 그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지혜가 예수님께로 이끄는데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니네베 사람과 남방 여왕의 예를 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 먼 길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그분에게 표징을 요구한다는 말 자체가 그분을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을 ‘사이비’라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신앙인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 뜻을 따를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이비를 만드는 이들이나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은 지혜를 원치 않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거짓말’에 있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할 때는 제페토 할아버지의 지혜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신천지는 어떻습니까? 포교를 하는데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열매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TV 뉴스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정보의 유입이 얼마나 큰 해를 입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합니다.
거기에는 마치 표징과 같은 놀라움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필요한 부분만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짜 맞춰서 가르치는 것인데도 사람들이 속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지혜를 찾기를 원치 않는 사이비에 적합 화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모든 사이비들에게 적용됩니다.
광주 대교구 최창무 주교님이 나주 율리아의
모든 것들이 거짓된 것임을 교령으로 반포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를 제가 처음 접했을 땐 저도 매우 신기했었습니다.
성체가 입 안에서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모습 등을 비디오를 통해 보았을 땐 정말 믿음이 더 깊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진 것은 자신이 쥐고 있던 제병을 던진 것이라는 증언과 자료를 보고 또 입에서 성체가 피로 변하는 것은 입 안에 나 있는 상처를 터뜨려 피가 나오게 했다는 것을 들었고,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것도 그녀가 묵고 간 곳에서 향수병이 발견됨으로써 거짓이었다는 것 등을 듣고 나서는 그녀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특히나 그녀가 미장원을 할 때부터 많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또 그녀의 오줌을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는 것 등을 보았을 때는 그런 것들에 광신적으로 빠져있는 신자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이비에는 항상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수원 교구에서도 최덕기 주교님께서 미리내 상주 데레사의 모든 것들도 거짓임을 교령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도 수녀님들에 의해 그 계시 받아 그린 그림들을 보고 글을 읽어보며 신기해했었습니다.
역시나 그런 것들로 믿음이 커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배우며 그때 보았던 많은 것들이 신학적으로 오류가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들이 마귀에게 속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리내 중앙에 있는 삼위일체상도 계시를 통해 보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간단히만 말하면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양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은 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고
있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무엇에 제약받으신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또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영(靈)이시고 (요한 4,24)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이가 없다고 하고 (요한 1,18: 6,46) 교회의 가르침도 아버지는 볼 수 없는 분이라고 가르치는데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와 동급이 되려는 것이고 하느님을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사이비가 점점 강하게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지혜가 아닌 표징만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표징만 요구하는 세대가 된 이유는 거짓말을 허용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도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가집니다.
사이비 새진리회는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 맞서는 이들은 지혜로 하나하나 설명하려 듭니다.
둘은 적대관계가 되어 서로 싸웁니다.
제가 오랜만에 본당에 왔을 때 정말 놀랐던 것은 성경, 그리고 기도서나 성가책을 제외하고는
성물방에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이유는 당시 성물방 책장에는 엄청난 책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지혜를 찾지 않게 된 이 세상은 이제 사이비가 만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말합니다.
“독서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십시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1,29-32
주님 경외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요나가 살던 시대, 아시리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동서로는 인도에서 시작해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러시아까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 북경이나 런던 정도 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 받은 요나가 요리 조리 도망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던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느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아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강론>
(2024. 10. 14. 월)(루카 11,29-32)
<원래 표징이란, 믿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일입니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1) 앞의 16절에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정말로 메시아라면,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서 그것을 증명하시오.” 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는 일차적으로는 당신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표징 같은 것만 요구한 당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넓은 뜻으로는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고, 회개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를 거절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강제력’을 통해서 신자로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억지로 신자가 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적으로 압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진심으로 믿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2)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마태 12,40).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은 너희가 나를 안 믿지만, 나의 죽음과 부활을 보게 되면 믿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안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리스도교 내부의 교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고,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신자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그들은 원래 ‘믿고 싶어 했던 사람들’, 또는 ‘믿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3) 요나 예언서 전체 내용을 생각해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을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고 회개하여라.”, 또는 “너희가 먼저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표징을 보아도 안 믿을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만 듣고서도 믿고 회개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교훈이 됩니다(요나 3,5).
그런데 그들이 멸망 선포를 듣고서도 절망하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는 점도 좋은 교훈이 됩니다(요나 3,9).
분명히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보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렸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표징이란, 원래 믿는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혹시라도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 있는 다음 말씀을 예로 들면서, 표징이란 안 믿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키시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보자 자신들의
믿음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믿었으니까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5)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예수님 자신이 곧 표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구원의 길’을 가리키는 도로표지판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표지판을 믿고,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가면 ‘구원’에 도달하고, 안 믿고 다른 쪽으로 가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을 보면, 재림 예수라고, 또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거짓 메시아도 많고, 사이비 종교인도 많습니다.
도로표지판처럼 보여도 진짜 표지판이 아니라, 구원의 길이 아닌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가짜 표지판이 많은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가짜 표지판들에 속아서
인생을 망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