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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 2. 매인 나귀와 새끼 - 마 21: 4. 이루려 하심
마 21: 2. 매인 나귀와 새끼 -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주께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그것은 어미를 떨어질 수 없는 어린 새끼이었다.
그는 그의 전지하신 눈으로 그 나귀 새끼를 보셨다. 또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1]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구체적인 장소를 지명하셨다.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주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보인다.
그는 온 우주의 큰 주인이시며, 원하시는 대로 어디서든지 무엇을 취하거나 사용하실 수 있는 자이시다.
2]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두 마리를 언급하고 있는 마태의 본문은 70인 역(LXX)을 참조한 것이다.
히브리 본문에서의 슥 9: 9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 표현하고 있다. 마가와 누가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하여 한 마리의 나귀만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탄 것을 증거하고 있다. 마태의 본문에서의 어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탄 사람이 없는 그 나귀 새끼가 순순히 따라오게 하기 위한 용도로서 언급되었을 것이다.
나귀와 나귀 새끼에 대한 마태의 표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 나귀는 오랫동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온 유대 백성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귀 새끼는 이러한 멍에를 메지 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이방인을 상징한다. (Jerome, Justin, Alford).
Ⓑ 나귀는 예수 이전의 모세를 통한 신정정치(Theocracy)를 상징하고 있다.
나귀 새끼는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해 형성된 어린 교회를 상징한다.
또한 예수께서 나귀를 탔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1)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자신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온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즉 슥 9: 9의 메시아 예언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 동물이다.
* 창 49: 10-12 –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 민 24: 17 -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 사 9: 6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사 11: 1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미 5: 2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2) 이차적인 의미로서
나귀는 초라한 짐승이어서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일 이외에 이것을 탄 유대 왕이 없었다.
세속적인 통치자들은 본래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말을 타고 입성한다고 하는 점과 비교해서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는 점이다.
* 왕하 9: 13 -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이와 더불어 마가와 누가가 기록한 바대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분의 순결한 품격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속성의 나귀를 타신 메시야는 바로 순결한 평강과 겸손과 섬김의 왕이며 이는 예수가 참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것이다.
마 21: 3. 무슨 말을 하거든 -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증언한다.
그는 온 우주의 큰 주인이시며, 원하시는 대로 무엇을 취하거나 사용하실 수 있는 자이시다.
1]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본문의 경우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 호 퀴리오스)라고 칭하신 것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말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 마가와 누가에도 나타나고 있는 경우의 '주'(Lord)는 '소유주'(owner)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눅 19: 33에 의하면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그 임자들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나귀의 소유주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 여기서의 '주'(主)는 '주 여호와'를 암시하는 말로
나귀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소유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가장 천한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주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이다.
Ⓒ '주'라는 말이 나귀의 소유주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주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로서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신적 속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 위한 자기 계시의 하나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점점 더 명백히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한 그의 후기의 사역 기간의 특징과도 잘 부합(符合) 된다. (D. A. Carson).
예수는 수난의 일주간을 앞두고 자신이 온 인류의 구속주이자 왕이시며 따라서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위에 순복(順服)해야 함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써, 자신을 '주'로 부르시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게 하셨다.
2]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 이미 나귀를 예약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에 따라 나귀를 즉시 보냈다고 하는 추측(Lange)은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벱바게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베다니에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친구가 있었다.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등).
그 나귀의 주인도 역시 예수의 숨은 제자로 예수께서 나귀를 쓰시려는 용도(use)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보냈다고 하는 견해(Carr)도 있다.
그러나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은 공생애의 후반기를 보내는 예수 자신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려는 또 하나의 자기 계시(自己啓示)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 21: 4. 이루려 하심 -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
마태는 주님의 말씀이 스가랴 9: 9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임을 증언한다.
말은 전쟁의 동물이요 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방의 왕들은 말을 탔고 나귀를 타지 않았다. 나귀는 경멸을 당하는 짐승이었다.
1]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태가 예수의 사건이 구약의 본문의 성취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한 문구이다(1: 22. 2: 15. 4: 14. 8: 17. 12: 17. 21: 4. 27: 9).
마태는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일이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예수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바로 그 예언을 성취시킨 일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다.
몇몇 사본에는 '선지자'라는 말 다음에 '스가랴'나 '이사야'가 덧붙어 있다.
2]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께서 최후의 예루살렘 방문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 밖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신 것은 유월절 엿새 전이었다. 이날 예수께서는 마리아로부터 향유의 부음을 받고 그날 밤에 베다니에서 주무셨다.
* 요 12: 1-8 –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모든 것이 결정적인 시간을 향하여 착실하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내 때' 즉, 대속의 때를 위하여 마지막 유월절은 다가왔다.
* 요 7: 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의 죽음을 위하여 마리아는 향유를 부은 것이다. (요 12: 7) 그리고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하여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나귀를 준비하도록 명하셨다.
(1)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① 예수님은 '내 때'를 위하여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 방문에 오르셨다.
이 무렵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부활에 대하여 거듭 말씀하셨다.
* 마 16: 21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마 17: 9, 22-23 –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생각하신 '내 때'는 다가오는 유월절이었다.
* 마 26: 18 –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이것은 구약의 마지막 유월절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단번에 대속(해방)하셨기 때문에 구약의 유월절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 요 1: 29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또한 그것은 신약의 성만찬으로 대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대속의 날'은 이해의 '유월절'이었으며 장소는 '예루살렘'이었고, 그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의 지척인 베다니에 도착하셔서 최후의 결단을 준비하셨다.
② 최대의 축복 유월절은 유대인 최대의 축제로서 애굽에서의 탈출(해방)을 기념하는 절기다.
애굽에서 탈출한 날이 니산월 14일이었기에 이날 하루가 유월절이며, 다음날부터는 7일간 무교절 축제가 계속되는데 이 무교절까지를 일반적으로 유월절이라 했다.
* 신 16: 2-3 – 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 겔 45: 21-25 – 21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유월절을 칠 일동안 명절로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22 그 날에 왕은 자기와 이 땅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23 또 명절 칠 일 동안에는 그가 나 여호와를 위하여 번제를 준비하되 곧 이레 동안에 매일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이며 또 매일 숫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며 24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숫양 한 마리에도 한 에바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25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칠 일 동안 명절을 지켜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지니라.
이 유월절 축제는 예루살렘에서 30Km이내에 사는 장년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이 절기에 참여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유월절에 잡는 양이 약 25만 마리가 되었고 이 때에 모인 사람이 약 250만에서 270만 명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도 이 절기를 기회로 고국 방문을 했다. 이 참가자들은 대개 절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근신하고 정결하게 하는 기간을 가졌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한 것은 유월절 4일 전인 니산월 10일로 수많은 군중이 '호산나'를 외치며 '왕'을 영접했던 것은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대한 군중이 참여하는 이 축제에 예수를 십자가에 닮으로써 구속 사역의 완성을 예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은밀하게 하시는 일이 없지만, 인류를 다시 찾는 이 절대적인 대역사를 그렇게 하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땅히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장엄하게 집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의 의미나 생명의 의미가 인류의 운명이 바뀌는 이 대역사는 군중들이 지켜보는 역사의 밝은 현장에서 영원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준비를 끝내고 베다니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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