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미골,오릉(五陵),오묘(五畝),미동(美洞),오미(五美) : 마을의 地形이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어 五陵이라 부르다가 후에 五畝로 고쳤다. 五美는, 조선 시대 중기에 이 곳 豊山 金氏의 가족 8형제 중,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사실을 크게 칭찬한 말로서 인조 대왕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豊山 金氏의 집성촌으로 동녘골(東村)과 서녘골(西村)로 나뉘어 있다. 장판재(將板嶺) 五美洞의 바로 북쪽에 있으며, ?山 金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던 시기에, 이웃 마을의 박씨와 친선을 도모하여 이 재에서 장기를 두고 놀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죽암정(竹巖亭) 이 곳 金氏가 조선 중기에 건립한 것으로, 동녘골(東村)의 북쪽 뒷산에 위치한다. 무성한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의 바위를 헐어 그 위에 지었으며 일족의 친목 행사 장소는 물론, 주로 서실로 활용되었다. 화수당(花樹堂) 동녘골에 위치하여, 이 곳 金氏 일족의 모임 장소로 쓰였으며,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일제 초기에는 동민 자체로 五陵學術講習會를 열어, 신식 교육을 실시, 항일 사상 등을 일깨웠던 곳으로 현재 豊北初等學校의 전신이다. 보푸래미,보림(甫林) : 五美洞의 서녁골에서 서북쪽과 서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로, 아랫보푸래미(下甫林)와 웃보푸래미(上甫林)로 나뉜다. 아랫보푸래미는 농사를 짓고 살며, 웃보푸래미는 豊山 金氏의 世德祠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道林追遠祠와 道楊講堂은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유명하며, 이 강당은 김씨 일족의 행사 장소로,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미내미,미나미,미남리(美南里) : 五美洞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뱅개미,반가미,방감(方鑑) : 옛날에는 白楊으로 불렀다고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方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安東 權氏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名姓들이 살고 있다. 솔가실, 솔갖,송지(松枝) : 오미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高靈 朴氏의 집성촌이다. 개거리,개골,개곡(開谷),용흥(龍興) : 용이 올라 갔다는 데서 유래하여 龍興이라 했다하여 솔갖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산골(山谷) : 개거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수답이던 농토가 수리 시설로 인하여 전천후 옥토로 변한 마을이다. 수릉골,수렁골(水蓉谷),수용리(水龍里) : 마을 앞의 들 이름이 수용(水蓉)들인 데서 연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한말까지는 60여 가구의 대부락이 형성 되었고, 수리 시설로 주변 농토가 옥토로 되었다. 새랄,사라(仕羅),위라 : 개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도랑의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예천군 호명면 본동과 접경이 되며 호명면 구소재지가 이 곳에 있었다. 절터(仕羅寺) : 新羅時代 마을 뒷산에 仕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지금도 절터에는 기왓장이 발견된다.
첫댓글 회장님, 자료 준비하고 해설도 열심히 하고 오랜만에 왔는데 정말 알찬 답사였습니다.
*^^*
[처음에는 安東 權氏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名姓들이 살고 있다]의 '名姓'은 '各姓'이 아닐런지요.
단일 성씨가 사는 마을을 집성촌이라 한다면 그 상대말로 각성받이라는 말을 쓰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