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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시인은 이성복입니다.
[약력]
1952년 경북 상주읍 오대리에서 아버지 이한구(李漢求)와 어머니 송정남(宋丁男)의 오남매 중 네째로 태어난다. 위로 누나 둘과 형,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1959년 상주 남부국민학교에 입학, 그 후 서울과 지방의 여러 백일장에 참가하며 잠재되어있던 글쓰기 욕망을 밖으로 끄집어낸다.
1963년 5학년 2학기에 서울 효창국민학교로 전학, 고모댁에서 기거
1965년 서울 중학교에 입학, 곧 형과 작은 누나가 올라와서 서대문구 천연동에 방을 얻어 비로소 안정된 생활. 이어 모든 식구가 서울로 솔거를 하여 이성복 일가는 서울생활을 시작
1968년 경기고등학교 입학. 교내 웅변반과 홍사단에 가입. 웅변반에서 나중에 국회의원이되는 유인태를 선배로 만난다. 고 2 때 교내 백일장 입선. 평론가 진형준과는 고교동창. 그때 이미 문학의 세례를 받고 있던 미래의 소설가 이인성을 한 해 후배로 만난다. 시인인 김원호 선생의 국어시간을 통해서 끊어진 글쓰기를 다시 시작. 여러 장르의 글이 실린 등사판 [사조]를 묶는다. 고 2 때 [ 창작과비평 ]에서 김수영 추모 특집을 읽음
197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학과 입학,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부임한 김현 선생을 처음 만난다. 교양과정부 문학상에 시 [知, 不知]등을 투고하나 낙선.
1972년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형성]에 편집기자로 들어간다. 김열규 선생으로부터 딜런 토머스와 원형비평을 배운다. 토니오 크뢰거. 크눌프 등 독문학을 열심히 읽는다.
1973년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전홍표, 진형준과 교우. 4월에 해군 입대. 12주 훈련 끝에 해군 구축함 및 해군작전본부 근무. 카롯사, 릴케, 도스토예프스키, 니이체를 독서카드를 만들어 체크하면서 읽는다. 군복무중에 신문문예 투고도 할 만큼 간간이 습작시를 만지나 다시 낙선
1976년 제대 후 복학. 불어에 대한 애정으로 열심히 공부. 황지우와 함께 교내 시화전을 하거나 정과리, 이인성, 진형준, 권오룡 등과 만난다. 산문집 [ 꽃피는나무들의 괴로움]에 실린 소설 [천씨행장]이 완성되고 [서시]가 씌어진다. 문리대 문학회 시화전이 열리고 황동규 시인을 처음 찾아가 인사한다.
1977년(25세) 김현 선생에게 노트 한 권 분량의 시를 보인다. 1977년 [ 문학과 지성 ] 겨울호에 [정든 유곽에서]와 [1959년] 두 편으로 등단. 졸업논문인 [폴 발레리 방법서설]로 김봉구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한다.
1978년 대학신문사 전임기자로 들어간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많은 시들이 이 시기에 씌어진다. 이성복이 '내 삶의 제1황금기'라고 말하는 시절. 김현 선생의 주선으로 [그날] 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거나 대학원 준비를 한다.
1979년 대학원에 진학. 대학원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유평근 교수를 만나게 된다. 소설가 김원일 씨가 상무로 있는 [국민서관]에서 아동문학서적의 교정 일로 8개월 가까이 근무한다.
1980년(28세) 서슬 퍼런 5월에 같은 대학원 동기이던 김혜란과 결혼. 7월, 신군부 권력에 의해 [문학과 지성]이 폐간. 10월에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 지성사) 상재. 시인 박남철과 만나며, 오규원 선생의 주선으로 김혜순, 최승자 등과 도 알게 된다. 그리고 [문예중앙]에서 김광규, 윤재걸과 더불어 대담.
1981년 부인이 먼저 대구에서 직장을 잡는다. [보들레르에서의 현실과 신비]라는 석사 학위 논문 완성
1982년 대구 계명대학에 강의 조교로 부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그해 겨울에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대구에서 이성복은 이태수, 서종택, 이하석, 강현국, 이기철, 구석본, 최석하, 이문열 등과 만나 뒤에 남을 삽화를 만들어간다. 그가 편집 동인으로 참가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을 창간. 3월에 첫 아이 효원(曉遠) 출생
1984년 프랑스의 엑스-앙-프로방스에 부인과 함께 유학하면서, 처음으로 이국생활에서의 쓸쓸함과 환멸을 맛본다.
1985년 귀국.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 세째 아이 수유(茱萸)가 태어난다. 5월에 남해 금산 여행.
1986년 제2시집 [남해 금산](문학과 지성사) 출간
1987년 계명대 정문 앞 대명한의원의 서찬호 선생으로부터 대학, 중용, 주역 등을 일 년 육 개월 가까이 배운다.
1988년 계명대 중문과 교수들의 논어 윤독회에 참여, [문예중앙] 가을호에 [연애시와 삶의 비밀]을 창작 일기 형식으로 발표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란 박사학위 논문 완성. 제4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0년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과 [꽃 핀 나무들의 괴로움]이 살림에서 출간됨.
1991년 연암재단의 교수 해외파견 기금으로 파리의 Eoole pratigue des hautes etudes에 간다. 이성복의 기숙사방은 매주 토요일 날 개방되어 여러 전공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서로의 학문을 교환. 이성복 삶의 '제2 황금기'. 이시기에 불교와 원불교 경전 등을 읽게 된다. 불어로 쓴 논문 [역경으로 본 보들레르의 시적 여정]은 나중에 프랑스문학 연구지에 발표된다.
1992년 귀국. 계명대 미대 출신의 화가 이병헌과 교류. 이병헌의 누드를 소재로 [소묘]가 씌어진다.
1993년 제4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 지성사) 출간. [네르발 시 연구-역학적 해석의 한 시도](문학과 지성사) 간행.
1994년 (42세)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 불문과 부교수로 재직.
[대표작]
귀에는 세상 것들이 / 그 날 / 그 여름의 끝 / 길 1 / 꽃피는 시절 / 남해 금산 / 낮은 노래 2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 / 느낌 / 물고기 / 비 / 비단길 3 / 숨길 수 없는 노래 3 / 슬픔 / 애가 1 / 이별 1 / 이별 2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늦은 사랑에 관하여 / 편지 / 정든 유곽에서
[詩作노트]
詩는 '머리의 언어' 전복시키는 '몸의 언어'
“여배우의 모습 밑에서 수녀를 사랑하다니!…”
19세기 프랑스 작가 네르발의 ‘실비’라는 소설의 이 한 구절은 30년의 내 문학적 삶의 도정을 드러내는 적절한 비유로 쓰여 질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내가 문학을 애지중지해 왔던 것은 구두 밑창을 파고든 압정처럼 좀처럼 빠지지 않는 신경증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 제목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끌어와 말하자면, 지난 세월 내 혼곤한 문학적 삶은 ‘야심’이라는 의지와 ‘문학’이라는 표상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대체 난공불락의 그 신경증적 야심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까닭으로 하필 문학이라는 탄두를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뒤에 전해들은 이야기로 조립된 것이겠지만, 어린 시절 내 최초의 기억은 시골 마을에서 이사를 가는데 두어 살 된 아이가 한사코 떼를 써서 소를 몰고 가는 장면이다.
이를테면 그 최초의 나이테 위에 오랜 세월 내 삶은 닮은꼴을 이루며 덧붙여졌고, 출세지상주의적인 한 소년이 열혈 문학청년으로 바뀌었다 해서 그 나이테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1. 출세 지상주의 소년의 변신
처음 문학에 맛들이기 시작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별나게 문학이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도 문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학에 대한 나의 신경증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문학 때문에 행복했고 문학 때문에 좌절했다. 마치 심한 몸살을 앓을 때 몸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분간할 수 없듯이, 지금 나는 대체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놈의 문학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문학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니다, 내가 문학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한참 문학에 미쳤던 보다 젊은 시절, 나는 대체 사람이 ‘어떻게 시 없이 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나 다방에서나 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었고, 그리하여 친구들은 하나 둘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시절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썼던 비유이지만, 지금 나에게 문학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랑하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그런 여자와 같다.
문학과의 신접살림은 첫 시집을 내기까지 3년쯤이나 계속되었을까, 그 이후로는 불화와 별거의 연속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까닭이 없지만, 지금에 와서 짐작되는 바로는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들이미는 신경증적인 야심이 애꿎은 문학을 볼모로 하여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장을 보호하는 갈비뼈가 부러지게 되면 날카로운 뼈끝으로 내장을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문학을 신주단지로 모시던 야심이 제 허영을 채우지 못하자 문학을 애물단지로 구박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완벽한 글쓰기’ 운운하며 글쓰기를 미루어 왔던 것도 무시당한 야심의 자기 합리화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자아 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 쪽의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의 행태가 신경증의 한 양상으로 분류되고 있고, ‘완벽주의’나 ‘미루기’라는 병명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문학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보다 정확히 말해 내 야심이 일으킨 것이고, 지난 세월 나는 내 살을 파먹으면서 이른바 ‘문학신경증’을 앓아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문제의 근원이 드러난 이상, 병과의 싸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며, 아무래도 이 싸움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2. 詩는 행복·좌절 동시에 안겨
그렇다면 일단 신경증적 야심을 괄호로 묶고 나서, 문학은 나에게 무엇인가. 동어반복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문학이 없었다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문학은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렌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치 현미경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육안으로 안 잡히는 갖가지 미생물들을 발견하게 되듯이, 문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베일에 가리어진 삶의 본모습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흙 속에 묻혀 있는 글자를 읽어내는 어린시절의 놀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문학의 본질이 들여다보는 것, 읽어내는 것, 발견하는 것이라면 꼭 그렇게 해야 할 까닭이 있느냐는 물음이 따를 것이다.
문학신경증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문학을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에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원의적(原義的) 의미에서의 ‘콤플렉스’, 즉 표층/심층, 거짓/진실, 추함/고움의 대립구조로 나타날 것이다.
문학을 통해 발견하는 심층, 진실, 고움은 캄캄한 지하실에서 켜 댄 한 개피 성냥불처럼 덧없고 무력하다. 그 불꽃은 우리를 위로해 주거나 해방시켜 주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불꽃이 사라져도 ‘우리가 보았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문제는 문학이라는 불꽃,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시라는 불꽃이 피어나는 곳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라는 것이다. 흔히 테니스 선수는 팔로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허리로 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팔로 공을 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의식할 때만 몸 전체가 돌면서 나오는 힘이 공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한 피아노를 칠 때 손목에 힘을 주면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힘이 손목에서 딱 끊어지고 손목 힘만으로 치게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머리는 제가 아는 것밖에 모른다. 머리는 상식과 체면의 자리이고 신경증의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공이나 피아노를 칠 때 라켓 헤드와 손가락을 의식하라거나, 돌을 실에 묶어 돌리거나 장도리로 못을 박을 때 돌과 쇠뭉치에 의식이 모인다는 이야기는 문학하는 사람에게도 의미 깊게 들린다.
헤드와 손가락, 돌과 쇠뭉치는 문학에서 바로 언어에 해당한다. 문학은 언어에 기대고, 기댈 뿐만 아니라 투신함으로써 머리의 개입을 막고 몸의 힘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캄캄한 밤 배 위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다 쓰레기통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는 해군수병의 이야기와도 같다.
몸의 언어 혹은 언어의 몸은 엄청난 돌파력으로 머리의 언어가 구축한 삶의 가건물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령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무릎에 안은 성모 마리아는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떠올리게 하며, 마야라는 이름은 환(幻)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야(maya)와 다른 것이 아니며, 다시 마야라는 말은 피 흐르는 심장을 주먹으로 움켜쥔 마야 문명의 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마리아/마야라는 이름을 통해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이는 미술에서의 스크래치라는 기법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3. 해달 생태서 작가운명 발견
며칠 전 나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에서 바다에 사는 해달의 행태를 보면서, 몸의 언어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그럴 듯한 은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에 사백 회 가량이나 물질을 하는 어미 해달은, 잠수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을 물위에 발랑 뒤집어 눕혀 놓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사 분이라 한다.
글 쓰는 사람에게 어미 해달과 아기 해달은 한 몸이다. 그는 겉똑똑이 머리를 잠재워 두고 몸 속 깊은 곳을 들락거리며 쉼 없이 연상의 물질을 해대는 것이다.
해달이 먹이로 좋아하는 것은 조개류이다. 해달은 해변에서 주워온 돌을 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다 조개를 내리쳐 살을 꺼내 먹는데, 해달의 등뼈와 갈비뼈는 그 충격을 견뎌낼 만큼 견고하다. 재미있는 것은 해달이 조개의 빈 껍질을 배 위에 놓고 접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조개껍질은 언어가 아닐까.
언어는 글 쓰는 사람 자신의 몸 위에서 갈라지고 부서지며, 딱딱한 일상의 외피를 벗고 나서야 비로소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속살을 걷어낸 한 언어의 껍질은 다른 언어의 속살을 담는 받침이 되는 것이다.
해달은 바다 밑에 뿌리를 두고 수십 미터 웃자란 해초 다발에 몸을 감고 잔다. 그것은 밤새 높은 파도에 떠밀러 가거나 해변이나 바위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의 언어로 글쓰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 글쓰기가 욕조를 타고 대서양 건너는 일과 같다고 했지만, 언어라는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것.
내가 본 프로에서 어미 해달은 폭풍이 몰아치던 밤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물질도 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만 남아 떨고 있었다. 글 쓰는 사람이여, 당신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가.
[이성복시의 세계]
1. 이성복의 등장
1980년 10월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세상에 나온다. 1977년 『문학과지성』에 「정든 유곽에서」와 「1959년」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등장한 새내기 시인으로써 이르다면 이른 첫 시집이었다. 시집이 나온 당시의 반응은 폭발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시집이 1980년대 한국시단에 혁명적 감수성을 불어넣으리란 걸 예감했던 것이다. 시집의 해설을 쓴 황동규1)와 이성복이 시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김현2)을 뒤로하고라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쏟아진 아낌없는 찬사와 감탄은 젊은 시인에게는 과분하다면 과분한 것이었다.
이성복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통해 시단의 중심을 공격적으로 파고든다. 여기서 공격적이라고 한 것은 그의 첫 시집의 너무도 낯설고 당돌하고 이질적인 모습을 가리킨다. 공격성과 관련해 당시 사람들이 그의 시를 어떻게 수용했는가는, 그에 대한 평문에 흔히 쓰인 말들, 즉 ‘충격적인’ ‘당혹스런’ ‘당황하게 하는’ 등의 표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의 시적 방법론이나 내용이 일반화되고 확산되어 당시 사람들의 충격을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70년대를 휩쓴 김수영 군단에 뒤이어 80년대엔 일군의 이성복 아류들이 문단의 일각을 점령한 것을 보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한국시단에 던진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미루어볼 수 있을 것이다.
2. 새로운 시, 「1959년」
기존의 시와 이성복의 시가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가는, 「정든 유곽에서」와 함께 『문학과지성』에 투고한 작품이자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제일 앞에 놓인 작품인 「1959년」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시가 씌어진 당대의 현실을 과거의 그것으로 위장해 진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1959년」3)은(「1959년」을 「1979년」으로 바꿔 읽으면 시의 의미가 좀더 분명해진다), 언뜻 보면 시인이 자유연상의 힘을 빌려 자신의 내면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무매개적으로 병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실 이 시에는 시적 자아의 분열적 세계인식을 관통하는 핵심적 이미지가 존재하는데,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오지 않는 ‘봄’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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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복의 시를 읽고 당황한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몇 가지 유형의 시 어느 것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김수영과 비슷하면서도 김수영에게서 볼 수 있는 사변적인 요소를 극도로 줄이고 있다.
황동규, 「행복 없이 사는 훈련 ―이성복의 시세계」
2)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년)는 매우 중요한 시집이다. 그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아니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을 매우 중요한 시집이라고 말한 것은, 그 시집이 황동규․정현종․오규원 등의 한국시에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김현, 「따뜻한 비관주의 ―이성복론」
3) 이성복의 제1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가 시집의 꼴을 갖추기 위해 눈비비던 70년대말~80년대초는 파시즘적 개발독재가 공동선의 가치와 의사소통의 합리적 절차를 배제한 채 ꡒ잘 살아보세ꡓ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그를 통해 일상적 삶을 완전히 식민화해가던 광기의 시대였다. 그리고 80년의 광주는 그 광기의 가장 추악한 발현태였다.
최현식, 「이성복론 ―관계,탐색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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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오지 않는 봄’에서 비롯된 것이다. ‘봄’이 오지 않은 채 여름이 시작되어버린 괴변으로 인해, <복숭아나무는/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살구나무는><不姙>을 앓고, <소년들의 性器>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는 뒤틀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4) 그렇다면 ‘봄’은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일단 문맥 그대로 파악한다면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봄은 오지 않았다>는 구절은 자연의 순환적 질서의 파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겨울 다음에 응당 와야 할 봄이 오기도 전에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은 그러므로 시인이 질서 있고 정상적인 세계가 아닌 무질서하고 비정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은연중에 나타낸다.5) 여기서의 비정상적인 세계란 앞서 인용한 글에서의 ‘광기의 시대’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소년들의 性器>를 고쳐주어야 할 의사들마저 <아프리카까지 移民을 떠>나는 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無氣力과 不感症>이다. 무기력과 불감증은 <오지 않는 봄이어야>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체념 상태 또는 외부의 어떤 자극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거나 반응하지 않는 자폐적인 정신적 마비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무기력과 불감증 또한 ‘오지 않는 봄’이 불러온 것으로써, 어떤 보편적 질서나 가치체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봄’이 상실 혹은 인식 불가능에 처했을 때, 시적 자아는 그로 인한 공포로 인해 교란되고 불임화된 자연의 질서와 생산력, 자신으로 인한 가족관계의 왜곡에까지도 놀라지 않는 무기력과 불감증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무기력과 불감증의 기능은 시의 후반부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첫째로는 절망적인 삶의 현실을 습관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修飾했을 뿐 아무 것도 追憶되지 않았다>는 시행 속에 그런 기능이 암시되어 있다. 또한 무기력과 불감증은 ‘추억’의 원동력도 앗아감으로써 오늘의 현실에 수동적으로 안주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기력과 불감증은 타인의 마음과 교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쇄시켜 버리는 한편, 타인과의 왜곡된 교감을 부추긴다. 이러한 기능은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라는 시행들 속에 표현되어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발랄한 생동감은 나에 의하여 거부되거나 춘화가 연상시키는 타락한 성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에서 무기력과 불감증에 안주해 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을 시인은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6)
이성복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보여준 욕설이나 노골적인 단어의 사용, 불규칙한 행 구성, 환상적인 이미지 등 다양한 기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무기력과 불감증’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충격요법을 사용한 것은 ꡒ낡은 것과 늙은 것에 대한 불편함에서 비롯된 것ꡓ7)이고 기존의 방법으로는 독자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들을 반성하게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점에 있다. 이성복은 새로운 시쓰기의 방법론을 제시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현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기를 원한다. 또한 독자들 스스로 무기력과 불감증의 무서운 기능을 깨닫고 반성하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이성복이 제시하는 위반의 시쓰기는 삶의 현실과 기존의 서정시에 대한 독자들의 반성을 유도해 내려는 전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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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용희,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작가세계』 2003년 가을호), 76쪽.
5) 남진우, 「닫힌 세계 열린 의식 ―이성복의 시세계」(『바벨탑의 언어』, 문학과 지성사, 1989), 147쪽.
6) 이경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대표 시 대표 평론 Ⅱ』, 실천문학사, 2000), 122쪽.
7) 이성복, 「액자 속의 사내를 찾아서」(『이성복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4), 144쪽.
8) 이경호, 같은 글,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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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문학사적 의의
이성복은 첫 번째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독특한 시적 상상력과 언어의 표현방식으로 주목과 평가를 받고, 이 시집의 성과로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앞서 인용한 황동규의 말처럼 이성복은 ꡒ표면적으로 김수영과 비슷하면서도 김수영에게서 볼 수 있는 사변적인 요소를 극도로 줄이고 있ꡓ으며, 김현의 말처럼 ꡒ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의 시에 새로운 활로를 열고, 김수영, 김춘수 등의 한국시에 새로운 출구를 열 수 있는 가능성ꡓ을 제시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성복에게 ‘김수영문학상’이 수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복이 한국시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생각볼 때, 그가 결국은 이전 한국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70년대 시문학은 김수영이란 원천에서 흘러나온 두 개의 지류가 서로 교차․대립하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성복은 그 한 갈래인 민중문학자들의 흐름과는 다른, 또 하나의 지류를 타고 자기 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복 시에 나타나는 요설․풍자․우상 파괴적 태도 등은 김수영이나 오규원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가족이나 친구 같은 주변 사람들의 가난․고통․아픔을 통해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를 암암리에 드러내는 수법은 보다 가까운 선배 시인인 장영수가 즐겨 사용하던 것이다. 그리고 형태적인 측면에서 그가 선보인 언어의 유희는 송욱을 연상키는 바가 있다.9)
그렇지만 선배 시인과의 연관 관계가 이성복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차질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배 시인과의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은 그가 뿌리 없는 무국적인이 아닌 바에야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흔히 씌워지는 월계관 중인 하나인 ‘새로움’을 해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성복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그가 살아온 개인사와 가족사를 토대로 그와 근저한 개체의 삶들이 벌이는 다양한 양상과 그 결들을 재구성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그의 삶에 대한 투시 방법은 그동안 한국의 근대시를 점유하고 있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이나 형식을 말끔히 청산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특징을 지닌다. 그는 이념의 허울과 언어의 감옥에 갇힌 과거 시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주변 일상세계와의 밀도 있는 교감을 통해 스스로의 의식을 일깨우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는 고투의 흔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즉 현실에 갇힌 자아의 잠재의식을 해방시키는 심리적인 자유연상법을 구사함으로써 이미지를 활성화하여 내면세계의 양태를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한다.10) 그가 보여준 이러한 노력들은 이전 70년대의 참여문학자들과는 분명히 맥을 달리하는 것이다. 참여문학자들이 자신들의 논리적인 당위성에만 너무 치중했다면, 이성복은 그의 첫 시집을 통해 70년대를 뛰어넘어 80년대 시적 지평의 확대를 이루어냈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80년대 시는 이성복의 세례 속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70년대의 황혼과 80년대의 여명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성복의 작업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성복은 70년대와 80년대의 교량 역할을 했는데, 그 다리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세계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국시인 중에 이성복에서 시적 감수성을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성복이 1980년대 한국시단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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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남진우, 같은 글, 145~46쪽.
10) 이영섭, 「투병기의 고통과 사랑 ―이성복 시 연구」(『한국 현대시 형성 연구』, 국학자료원, 2000), 3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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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그는 누구인가]
1986년 겨울, 내가 창비에서 첫시집을 묶을 때 발문을 이성복 선생님께 부탁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우파가 좌파의 시집에 발문을 쓴다는 것이 어째 이상하다. 두번 째 시집 낼 때 그때 내가 발문을 써 주마”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 첫 시집은 동화작가 권정생이 두번째 시집은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발문을 썼다.
이성복 선생이 제2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을 때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 염무웅인데 나는 염무웅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80년대 말에 대구에 있는 한 방송국의 문학관련 프로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나간 적이 있다. 진행자가 갑자기 시인 가운데 누구를 가장 좋아하나 하고 물었다. 나는 즉시 이성복 시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진행자가 당신은 민중문학을 하고 이성복은 그렇지 않은 걸로 아는 데 어떻게 이성복을 가장 좋아할 수 있느냐고 다그치듯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복의 작품에는 내가 동의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인간적 면모, 또 예술을 대하는 장인적인 기질 같은 그런 태도를 존경한다”고 대답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성복이라는 인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따뜻하고 겸손하며 섬세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직한 시인이다.
앞서 언급한 짧은 예화는 그와 관련하여 내가 서 있는 문학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마 그를 지지하는 많은 지지자들 가운데 나는 문학적 성향으로보아 가장 이질적 대척점인지도 모른다.
1982년 여름, 내가 대학 4학년 때 처음 선생님을 뵌 이래 지금까지 16~7년을 선생님 곁에서 가르침을 받아오면서, 나도 언젠가 번듯한 이성복론을 한 편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최근까지 평론가들이 이성복 문학에 대해 쓴 평론이 50편이 넘는다. 굉장한 숫자다.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소위 민족문학진영 평론가들의 글이 없다. 정과리가 “그의 시를 사회학적으로 번역해 낼라치면 그 특이한 미학을 놓쳐버렸고, 그의 시를 이미지들의 변주로 도식화 해 놓고 나면, 그 이미지들이 꿈틀대며 발산하는 뜨거운 현실성을 놓쳐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는 안타가움을 토로한 바도 있지만 그럼에도 내 생각으로는 특히 그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봐야 그 풍부한 시적 의미가 완전히 해명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씌어진 많은 이성복론과는 다른 글을 써보려고 내심 벼르고 있다.) 그러나 문학을 보는 눈도 짧고 공부도 부족하여 한 해 두 해 미루는 사이 벌써 십 수년이 지나고 말았다.
월간 <현대시>로부터 커버스토리를 부탁받고 사실 내키지 않았다. 본격적인 작품론이나 작가론도 아니고 근황 탐방이나 가십 꺼리 정도의 글을 쓰기가 어쩐지 맘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원고 마감 기한도 촉박했다. 난색을 표하자 청탁자가 이성복 선생이 나를 지명했다고 했다.(나중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성복 선생은 대담으로 알고 가까이 있는 편한 내가 하길 바랐다고 했다)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82년 봄에 그는 계명대 교수로 부임해 왔다. 나는 4학년 2학기 수업 가운데 한 강좌로 선생님의 보들레르 강의를 직접 들은 바 있다. 이런 관계말고도 나는 그의 이런 저런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아 지금껏 그를 문학뿐만아니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누구못지 않게 가까이 지내고 이런 저런 속내까지 털어 놓는 사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를 매우 어려워 한다. 그리고 앞서 몇 줄의 구절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소위 문학적 경향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여러가지 요인들이 나로하여금 이 글 쓰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막막하여 그간 이성복 선생이 낸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그에 대해 평론가들이 쓴 평문들을 대부분 다시 읽어 보았다. 그 중에서 특히 이성복의 문학앨범이라는 책을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이성복 문학의 기초 자료로 충분할 만큼 세세한 그의 문학적 계기와 신변사가 기록되어 있다. 문학앨범은 화보, 문인들의 교우관계를 비롯한 사생활, 그와 관련된 평문, 저자의 문학론 등이 적절한 배열로 구성된, 흔히 문학 초심자들의 흥미나 가십 거리로 읽기 좋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상업적인 출판형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판도 철저히 자본의 돈벌이 생리를 따른다. 따라서 당연히 일가를 이루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원로문인이나 잘나가는 젊은 문인이 출판 대상이다. 우리나라의 수천 명 문인 가운데 이성복 시인이 고은 신경림 등의 원로를 포함 열손가락 안으로 제한된 그 문학앨범의 출판 대상이 된 것은 어떤 의미로든 문단에서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겠구나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책의 첫장을 펼쳤다.
“졸업을 축하한다. 용락에게“라는 볼펜 싸인과 함께 95년 2월 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아마 내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할 때 그가 준 책인 모양이다. 내가 받은 그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하는 시집에는 “죽음으로써 기억한다”는 짧은 글귀와 함께 나에게 준다는 연필글씨가 쓰여 있다. 나는 이 시집을 지금도 무슨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당시 문학청년이던 내가 위와 같은 아주 멋있는 글귀와 함께 한창 뜨고 있는 시인에게 직접 시집을 증정받는 기쁨은 문학청년의 길을 걸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지금부터 나는 그간 내가 겪은 이성복 관련 몇 개의 삽화를 그리려고 한다. 이 삽화를 통해 독자들은 시인 이성복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문학적 향기를 읽어내길 바란다.
내가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을 때 이성복은 자신의 문학앨범 외에 또 준 것이 있다. “술 마시지 말고 구두 사 신어라”라는 말과 함께 돈 10만원을 흰 봉투에 넣어 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신을 사지 않고 술 마셨다. 새삼스레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받았다. 시에 관련된 가르침에서부터 우리 애들 책뿐아니라 하다못해 그가 프랑스 유학 마치고 귀국하면서 우리 마누라에게 선물한 화장품까지 목록으로 작성하자면 꽤 길 것 같다.
80년대는 ‘시의 시대’로 불릴 만큼 시가 많이 쓰여지고 수용되었다. 그리고 좋은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문학관련 저널은 시의 시대 운운하면서 기사의 앞머리에는 항상 이성복이라는 이름을 올려 놓았다. 속된 말로 한창 뜰 때였다. 문학청년이던 나는 어느날 그에게 “선생님은 천잽니까. 어떻게 시를 그렇게 잘 씁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나는 천재도 아니고 문학에서 천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애정이 문제이다. 내가 문학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느냐하는 것이 시인으로서 성공의 가늠길이 아닐까” 하는 말씀을 하셨다. 노력을 말씀하신 것인데 나는 이 말에 공감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문학 강의 첫시간에 이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문학수업을 시작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한 때 우리 시단에는 이성복 신드롬 같은 게 있었다. 시를 공부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성복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시와 비슷한 발상법의 모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많은 평론가들이 앞다투어 이성복 시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문단에 등단한 이래 짧은 시간에 그토록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문인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복은 문학적으로 성공한 셈인데 그 성공 뒤에는 앞서 말한 바 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 말처럼 80년대는 불의 연대였다. 뜨거웠고 변혁의 열기가 충일하던 연대였다. 이성복은 문학적으로 볼 때 자유주의자이다. 그는 정치적 실천보다 내면 탐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당시는 대학교수들이 시국사건에 대해 서명의 형태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서슬퍼런 군사독재 아래서 서명 결과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누구보다 먼저 서명자 명단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지식인의 소명을 다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당시 민주화운동가로 명망 있던 교수들도 처음에는 서명을 피했다가 일차적으로 서명한 교수들이 별 탈 없자 그 다음부터 서명에 동참하는 실망스런 기회주의적 모습을 드러낸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이들과 비교해보면 그는 애초 민주화운동한다고 유별나게 나서지 않았지만 자기 앞에 오는 책무는 회피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런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그가 정직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문학에 대해서도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신뢰를 보냈다.(물론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는 서명한 자들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악이라는 단순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진정성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초에 나는 지방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가 노조문제로 구속된 후 풀려나 수배자로 잠시 숨어 지낸 적이 있다. 이후 내 신변문제는 해결되어 신문사에서 해고된 후 집에서 두어살 바기 애를 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내가 사는 낡은 아파트로 그가 사모님과 함께 여름 과일을 굉장히 많이 사가지고 찾아 왔다. 당시 작고한 김현 선생의 장례에 참석하고 대구 내려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당시 내 딱한 처지에 대해 여러가지 위로의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그가 스승의 죽음을 겪으면서 새삼 사제지간의 정이나 인간의 정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다.
평소 나는 그가 지나치게 행복해서 문제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이 이야기는 본인에게도 한 바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부분의 것을 이룬 사람이다. 한국과 같은 학벌 사회에서 소위 케이에스라는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했고 대학 교수 신분에다. 시인으로서도 젊은 나이에 한국에서 가장 각광 받는 시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부인도 역시 경기여고 서울대 출신의 교수이며 자녀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더 부러울 것이 없는 다복한 가정이다. 나는 이런 그의 주변이 예술가로서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해 봤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고통이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것 같은 인생이, 실패나 들러리 인생의 처절한 비애를 한번이라도 겪어보지 않은 삶이 질곡과 그 가파른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생의 진정한 슬픔이나 비의를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나는 이성복 선생에 대해서는 이것이 항상 의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의 문학에 쏟아진 일방의 그 많은 갈채와 찬사가 그의 문학을 더욱 성숙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역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문학도 인간의 정치적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정치란 권력 획득이 중요한 목표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며 당연히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 80~90년대 그의 문학을 들러싼 찬사 일변도의 담론이 혹시 당시 우리 문학의 주류이던 문학과 지성 그룹의 후광에 대한 평론가들의 자진 굴복이나 경기 서울대 출신이라는 그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무언의 동조는 아니었을까?(그가 문학과 지성 출신이 아니라면, 그리고 서울대 불문과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과연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하는 지극히 천박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근래 수 년간 이성복 선생은 시를 쓰지 않았다. 대신 테니스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다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여름에 계명대 철학과의 목요철학 세미나라는 공개강좌에서 나는 세계화 시대의 민족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자기 제자가 발표한다고해서 대견(?)한 생각이 들었는지 굳이 방청했다.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신통찮은 실력에 준비마저 부족한 터에 그가 청중석에 앉아 있으니 강연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횡설수설 규정 시간을 겨우 떼우고 관련 교수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주차장 입새에 앉아 오랫만에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그는 구제금융체제의 현실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이제 나라 꼴은 어떻게 되며 우리 자식들은 어떻게 사나. 해고 노동자문제는 어떻게 하나. 앞으로 더욱 검소하게 살아야겠다. 절약하기 위해 승용차도 두고 시내버스 타고 다닌다는 등(이후 그는 아예 승용차를 팔고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버스 통근을 하고 있다) 엉망이 된 나라현실에 대해 깊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속으로 교수가 괜히 엄살떠나 하는 시선으로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없는 소리 못하고 과장하지 못하는, 순결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예민함을 아는지라 나도 함께 무척 우울했다.
아울러 그는 계약제로 가는 대학의 임용체제와 모든 것을 논문 중심의 점수제로 환원해서 승급이나 급여를 결정하는 식의 신자유주의식 경영으로 가는 대학 체제에 대해 깊은 우려와 절망감을 드러냈다. 가령 몇 년이 걸리는 예술적 성취를 이룬 시집 한 권이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는 엉터리 같은 논문 한 편의 삼분의 일 정도의 점수도 받지 못하는 이와 같은 제도 아래서 예술가가 느끼는 비애나 절망감은 이해할 만 한 것이다. 그는 여차하면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서울가서 문학잡지 편집일이나 하면서 문학이나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아이엠에프 때문에 모든 것이 글렀다며 애석해 했다.
최근에 그는 계명대 문예창작과 학과장을 맡았다. 불문과 교수와 겸직이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해왔다. 주 용건은 강의 시간표 문제였는데 그것보다는 다소 흥분한 어투로 대뜸 동료 교수 아무개는 논문 한 편 쓰고 학술진흥원으로부터 1천5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또 누구는 120여쪽 짜리 번역 하나하고 950만원을 받았는데, 지금과 같은 아이엠에프 시대에 이렇게 돈을 함부로 써도 되느냐, 천만 원이면 웬만한 사무직원이나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 되는 돈인데 나라돈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써도 되느냐. 나는 평소 집 애들에게 검소하게 살아라고 하면서 용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절약해서 살면서 저축한 돈으로 의미있는 일도 하곤했는데 이럴 바에야 아예 차도 몰고다니고 학술논문 많이 신청해서 돈 벌고 이름도 날리고 차라리 그렇게 사는게 낫겠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그의 어투로 봐서 뭔가 꽤 흥분할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건 전혀 평소의 선생님 모습이 아니다.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르겠거니와 사실 선생님은 누가 돈주면서 그렇게 살아라해도 못 살 분이다. 사리분명하고 예의바르고, 나는 그를 보면 항상 조선시대 예절에 밝은 전형적인 선비의 몸가짐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는다.
이성복 시인이 주역과 원불교를 깊이있게 공부하고 특히 주역을 원용해서 박사논문도 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즘 그는 가톨릭에 몰입해 있다. 두 해 전 사모님의 인도로 영세를 받은 후 열심자가 되었는데 본인의 말로는 6명을 가톨릭에 입문시켰다고 했다. 언젠가 그는 40대 후반인 자신의 나이를 기차 여행에 비유하면서 서울-부산행 새마을호를 타고 동대구역쯤 와 있는 것이 현재 자신의 나이이며 이제는 정리해서 내릴 일만 남았노라고 쓸쓸해 한 적이 있다. 그 쓸쓸한 이야기 끝에 그는 나에게도 가톨릭에 귀의할 것을 권했다.
내가 주임 강사로 있는 대구 예술마당 솔이라는 문화공간의 시창작교실에서 매 분기마다 한두 명의 특강 강사를 모시는데 회원들이 이성복 시인을 원해서 그를 특강 강사로 두어 번 모신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는 가톨릭 성인들을 비유의 대상으로 삼아 그분들의 행적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등 수준 높은 강의로 회원들을 사로잡곤 했다. 여기에 그 강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한 회원이 선생님은 글쓰시다가 글이 안될 때 어떻게 풀어가느냐고 묻자 그는 요즘도 글을 쓰다가 글이 안 되면 죽고 싶을 때가 많다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이 대답에 충격 받았다. 이미 일가를 이룬 시인이 뭐 그까짓 시가 좀 안 써진다고 죽고 싶기까지 할까? 하는 것이 안일한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문학에 대해 적어도 이 정도와 같은 초심자의 열의나 경건성이 있기에 우리에게 좋은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새삼 많은 것을 느꼈다. 이래저래 그는 나에게 평생교육의 장이다. 그 곁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무한한 행운으로 여긴다.
몇 년간 절필했던 그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적어도 앞으로 몇 년간은 다시 그의 작품을 따라 읽는 재미로 세상살이의 무료함이나 답답함이 좀 줄어들 것 같다. (김용락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