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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천사가 천국 문을 열기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의 피 한 방울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굳게 닫힌 천국 문은 꼼짝도 안 했습니다. 그는 급히 다시 세상으로 와서 슬픔 가운데 죽어간 한 여인의 한숨을 거두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흘린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담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자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눈물은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약한 소금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담긴 눈물은 굳게 닫힌 천국 문도, 돌같이 굳어진 사람의 마음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보다는 기쁨을, 울음보다는 웃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때론 신앙생활 가운데 눈물을 흘려야 할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특히 믿음 없는 자들의 몰지각한 비난과 비판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면서 맡기고 어린아이처럼 울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손수건을 드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고 평강의 품에 안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식의 눈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입니다.
저는 그동안 40여일동안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감리교 선교국에서 <M-Project>에 지원했습니다. 선교국에서 미자립교회를 어떻게 하든지 자립할수 있도록 컨설팅해 주시고 도와 준다는 것입니다. 서울을 포함하여 경기도지역에 있는 교회 33교회가 지원했습니다. 최종적으로 7교회가 결정되었는데 <우리교회>가 선정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교회는 전국에 있는 감리교회를 볼것입니다. 임마누엘교회가 부흥하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부흥이 올수 있도록 기도하고 전도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정식으로 통보를 받았습니다. 수요일밤에 교회에 와서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말씀을 주셨는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주시는 말씀이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편 5-6절)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타락한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났다는 것입니다. 잘 믿어야 할 사람이 지금 시험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25세에 유다의 왕이 되어 53세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나라를 통치한 왕입니다. 아버지 아하스 왕은 성전에서 거룩한 기구들을 취하여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드렸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비야는 경건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여자였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더 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 받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아주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 이후에 최고로 성군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쪽에 강대국 앗수르가 자주 이스라엘을 쳐내려 왔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사람의 힘이나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18만 5천명을 다 전멸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성경은 무슨 병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죽게 된 병이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이 걸렸는데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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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장 10절)고 하였습니다. 사자굴속에서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면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잘됩니다.
성경에 승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끝이라 하는 곳에서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끝이 시작이다> 모세를 보십시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뒤에는 애급 군사가 잡으러 옵니다. 누가 보아도 끝입니다. 200만명 전체는 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 하나만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이 일하신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모세의 그 대 외침을 들어 보시렵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세계적인 설교자 스펄전 박사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도란 하늘 꼭대기에 있는 종을 땅에서 울려 하나님께 듣게 하는 것과 같다.
힘들이지 않고 적당히 당겨서는 종이 울리지 않는다.
한 두 번 당겨보고 응답이 없자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진정 기도의 사람은 전심전력을 다해 쉬지 않고 종의 줄을 잡아당긴다."
기도의 종소리를 크게 울리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의 응답이 올 때까지!
한 어린 소녀가 비록 할아버지 뒤에 타는 것이긴 해도 난생 처음 말을 타는지라 몹시 초조해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타기의 명수였습니다. 소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말에 태우자 소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떻게 해? 난 말을 탈 줄 몰라요! 한번도 타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걱정일랑 하지 말아라. 어떻게 타는지 몰라도 괜찮다. 그냥 이 할아버지만 꼭 붙잡아라, 아가야. 나만 붙잡으면 된다"라고 안심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와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하는 것입니다. 다름아닌 기도와 찬양으로써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생각'속의 기도조차도 우리의 의지를 돌려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주며 그에 대한 믿음을 불어 넣어줍니다.
우리가 고통과 좌절과 분노와 실패에 '빠지는' 위험에 처해 있을 때가 바로 하나님과의 끈을 높쳤을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의 시작과 끝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 불어닥친 격동의 파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알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거친파도'를 통과하면서도 하나님의 신령한 평화 가운데 나를 지키시며 나를 안전하게 데려오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이 필요합니다.
2.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드디어 두 가지 기도제목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생명은 15년 연장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앗수르 손에서 건져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도 받았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가 방법입니다.
한나도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장 17절)
하나님의 말씀이 오니까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가고 순종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속에는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진실합니다. 눈물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가 죽었다고 할 때 우셨습니다. 진실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웃으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진실을 보시며 눈물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십니다.
눈물속에는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 웃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눈물은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기도할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을 강물처럼 흘리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들어 주십니다.
눈물속에는 건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루 흘릴 수 있는 눈물량은 1입방 cm입니다. 생후 2-3개월후부터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갓난 아이에게는 울음은 있어도 눈물이 없습니다. 노년에는 눈물샘이 말라 눈물이 적게 흐른다고 합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눈물은 흐르게 됩니다. 눈물은 더러운 것들을 씻는 역할도 합니다. 눈물은 더러운 감정을 씻어 내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많이 우는 이들이 건강합니다.
어떤 의사는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 이유를 눈물에 두는 이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밖으로 돌면서 스트레스도 풉니다. 때로는 맛있는 것도 여자보다 잘 먹고 많이 먹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더 오래 사는 것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눈물이 많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3. 증거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한 초등학교에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소년의 어머니를 불러 퇴학을 통고했습니다.
“이 아이는 더이상 교육이 불가능합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구제를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들의 행동에 대해 보증하시겠습니까” 어머니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때 영훈이라는 소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다시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보증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예,제 친구가 잘못하면 제가 댜신 벌을 받는 것입니다” 영훈이는 소년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친구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결국 교장선생님은 그 소년을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이 후 난폭한 꼬마는 양순해졌습니다. 소년은 장성해 선교사가 되어 평생 아프리카에서 헌신했습니다. 바로잡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과 눈물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불치병에 들기 전에 히스기야는 진실과 전심으로 하나님보시기에 선한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영적 저축을 많이 하여 두었었습니다. 아버지 아하스 왕때 만들어 놓은 우상을 모두 부수어 버렸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지 못 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였습니다. 큰 일이었습니다. 혁명이었습니다. 더 큰 선행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성내에는 샘이 없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밖에 기혼샘이 있었습니다. 그곳부터 성안으로 수로를 팠습니다. 적들이 성을 둘러 싸도 그 물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그 터널을 지금도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부릅니다. 이 터널을 파서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물이 풍요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도록 하였습니다.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백성들을 잘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추억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병들기 전에 한 일을 보니 선행이었습니다. 진실과 전심으로 일한 것을 하나님은 추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과거에 선행을 쌓은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니라> 해가 되로 가는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증거가 있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영국의 한 시골 노인이 난생 처음 런던 관광을 왔습니다. 그는 그림에 조예가 있어서 유명한 화실에 들러 이 그림 저 그림을 구경하다가 신앙이 독실한 대화백이 필생의 걸작으로 그린 예수님의 상을 보고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경건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한참 그림을 쳐다보다가 노인의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 오!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관람객 중의 한 부인이 그 노인에게 가서 손목을 꽉 잡으며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 장면을 보고 "할아버지,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아래서 그들은 서로 통했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삽시간에 칠팔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예배 드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고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주님을 향하는 뜨거움이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항상 있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