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를 생명과 같이 생각한 천곡 최원도 선생▣
선생의 이름은 최원도(崔元道), 자(字)는 백상(伯常), 호(號)는 천곡(泉谷), 관(貫)은 영천(永川)이다. 정헌대부 판전의시사(正憲大夫判典醫侍事)를 지낸 유진(有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천성이 기개가 있고 뜻이 커서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으며 일찍이 목은 이색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학과 글씨에 능숙했으며 생원시험에 합격하였는데 태학관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고려 공민왕조에 대사간(大司諫) 벼슬을 지냈으나 기우러져 가는 고려조를 걷잡을 수 없어 뜻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효우(孝友)의 마음으로 집을 다스리며 지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군 남쪽 나현(羅峴)(現,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묘지를 잡아 장사를 지내고 묘지 옆에다 집을 짓고 3년간을 살면서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어 묘사를 지낼 수 있는 전지를 마련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국이 건국되자 구룡산(九龍山) 밑 천곡(泉谷)동에 숨어 살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뜻을 품고 운곡 원천석, 음촌 김약시, 석탄 이양중, 관가 정죄청, 복액 범세동 등 수십명의 동지들과 함께 봄과 가을에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의 가장 높은 바위에 단(壇)을 모아 단군과 기자(箕子)·고려 왕건 태조, 공민왕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그분들을 추모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선생의 고려조 벼슬인 대사간을 주면서 3번이나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살고 있는 집 옆에 서지루(棲遲樓)를 짓고 우제 이취, 서파 이안유, 태재 류방선 선생 등과 왕래하면서 시를 지으면서 한가롭게 일생을 보낸 분이다.
여기 신의를 생명처럼 생각한 일화가 남았으니 둔촌 이집(遁村李集)선생과는 일찍부터 뜻을 같이 하면서 서로 믿고 사귀었다. 공민왕17년(1368)에 둔촌 이선생은 송도(개성) 용수산(龍首山) 밑에 살았는데 중 신돈의 문객(門客)인 채(蔡)판서와 한마을에 살았다. 둔촌은 신돈이 말못할 행패를 부리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의 죄상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처벌하려고 모의(謀議)를 하였는데 그 사실을 채판서가 은밀히 탐지하여 신돈에게 밀고를 해 버렸다. 그때 국권을 장악한 신돈은 둔촌을 죽이려 하였다. 둔촌은 남몰래 늙은 아버지를 업고 추풍령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와 선생의 집을 찾아 살길을 구하였다. 그날 때 마침 선생은 향리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놀고 있을 때다. 둔촌은 아버지를 업고 밖에 있는 사랑채에서 쉬고 있는지라, 선생은 깜짝 놀라면서 무척 성을 내며 그곳으로 달려가 둔촌 부자를 쫓아내고 그 집을 불질러 버렸다. 둔촌은 선생의 깊은 뜻을 짐작하고 밖으로 나가 5리(2㎞)쯤 떨어진 곳으로 물러가 남의 눈을 피하면서 밤을 기다렸다. 선생은 밤이 깊자 지팡이를 짚고 마을 밖으로 둔촌을 찾았다. 드디어 둔촌 부자를 부축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낮에는 다락에 숨겨주고 밤에는 방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하고 항상 한 그릇의 밥을 나누어 먹어 가면서 집안사람들 한 사람도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나는데 신돈은 영천 포졸에게 둔촌을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일이 무척 위급하게 되었는데 향리의 사람들이 포졸에게 둔촌이 찾아온 그날 사정을 자세히 말하니 포졸들도 믿고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오래토록 아무도 모르게 지냈는데 하루는 부엌일을 맡아보는 여자종 제비가 가만히 엿보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한탄하며 종을 꾸짖었다. 딱한 사실을 안 여종은 누설하지 않음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증명하니 이 또한 보통 일은 아니라 하겠다. 그러던 중 3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 둔촌의 아버지가 벽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자기 옷을 입히고 염습을 하여 나중에 나현의 모친 산소 밑에 장사를 치루었다.
1371년 둔촌이 개성으로 돌아가려고 말하자 선생은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하늘이 선후의 차례대로
두 묘지를 정하여 놓음에
누가 그대와 나 두사람 마음을 알리."
라고 지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하면서 급란을 잘 다스리는 높은 의리의 사람이라고 했다.
둔촌 후손들이 산 밑에 보은당(報恩堂)이란 집을 지어 놓고 세세 연년 묘사 때는 여러 자손들이 선생의 은혜를 추모해 왔는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집은 허물어지고 지금은 터만이 남아 있다.
최씨와 이씨의 두 집에서 의리로 죽은 노비를 잊지 않기 위해 술과 밥을 지어 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금도 그 단을 유지하며 제사가 계속되고 있다.
○ 둔촌선생(遁村先生) 이집(李集)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 영웅호걸이었다. 세상일을 비방하다가 말이 신돈(辛旽)에게 미쳤다. 신돈이 몰래 해치려고 하자, 선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갔다. 동년(同年) 최원도(崔元道)가 영천(永川)에 산단 말을 듣고 드디어 그를 찾아가니, 최원도가 매우 두텁게 접대하고 3년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 선생의 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최원도는 빈렴(殯斂)의 모든 일을 자기 아비와 똑같이 하여 그 어머니 무덤 옆에 장례를 지내게 하고 시를 지어주면서 말하기를,
慷慨僞時淚滿襟 / 세상의 어지러움을 슬퍼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구나
流離孝懇達幽陰 / 나그네의 효도와 정성은 저 세상에까지 이르도다
漢山迢遞雲煙阻 / 한산은 아득히 멀어 구름과 연기로 가로막히고
羅峴盤回草樹深 / 나현은 돌고 돌아 풀과 나무가 무성하도다
天占後先雙馬鬛 / 하늘이 쌍마의 갈기의 선후를 점침과 같으니
誰知君我兩人心 / 누가 군과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리오
願焉世世長如此 / 원하건대 세세에 길이 이와 같이 하여
湏使交情利斷金 / 모름지기 우리 우정 굳게 굳게 하리라
첫댓글 둔촌선생은 목숨을 나눌만한 친구가 있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兩家에서는 서로 祭를 올려 기린다고 합니다.
대단한 우정을 나누신 賢人들 이십니다... 어지러운 난세에 서로의 관계보전을 생각한 지혜, 그리고 따듯한 배려로 처절한 삶을 극복하는 정경이 코 끝을 뜨겁게 합니다... 좋은글 새기며 좋은시간 머물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