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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峴에 오면 마음이 짠해진다. 한양도성에 있던 사대문과 사소문, 그중 사소문 중 서쪽으로 난 西小門은 刑曹에 의하여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형장으로 이끌려 나가던 문이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믿는 자에게 저승은 분명 천국이다. 도성 밖 서소문 사거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리고 물이 흐르고 社稷壇 밖이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선택된 형장터였다. 수감되어 있던 의금부, 좌우 포도청에서 이끌려 나와 우마차를 타고 울퉁불퉁 자갈길을 덜컹덜컹 거리며 서소문 언덕을 내려올 때 옥에서 동안 모진 심문으로 몸 곳곳에 난 상처의 흔들림은 지독한 마지막 고문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형장, 형 집행의 북소리가 울리고 망나니가 마시며 뿌리는 막걸리 냄새와 번득이는 망나니의 칼 빛은 순교자의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형장의 모습과 당시의 처절했던 순교의 행색과 순교자들의 얼이 겹겹 하게 쌓인 그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약현에 한국 최초 붉은 벽돌 조적조 고딕형 성당을 봉헌하였다.
병인박해 후 (1866- 1873) 한불 통상조약이 맺어지자 한국 천주교는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천주교 신자들을 위한 천주교 강학당을 만든다. 그곳이 바로 약현성당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착좌 하시는 곳 성당. 순교 장소를 내려다보시며 자비와 사랑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의 얼을 안아 주시는 것이다. 내가 속한 명일 구역 본당 소속이며 동서울 재속회 맛세오 형제회 회원인 형제들을 충정 역에서 만나 약현을 넘어 약현성당을 찾았다. 주어진 시간은 약 50분. 핵심만 간추려 한국 천주교 순교사를 풀어내며 설명하고 기도하며 마쳤다. 그리고 서둘러 한사랑 공동체로 내려갔다.
숨듯 말 듯 숨어 있는 것 같은 한사랑 공동체, 육채적 장애인은 아니지만 대신 마음의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치유의 센터다. 거대한 쓰나미처럼 몰려온 금융 장애는 한순간 국가를 파괴하고 사회를 무너트리더니 가정을 해체시켜 버렸다. 국가경제적 파탄이 원인이 되어 함께라는 불멸 혈연의 옹성 가정까지 초토화시킨 것이다. 한 가정의 가장은 집을 나와 정주의 개념을 벗어나 버렸다. 책임 회피가 아니라 정신적 충격으로 마음에 장애가 생긴 것이다. 아무 곳에서나 자고 한 푼이라도 생기면 초록색 소주병을 통째로 마셔버리며 세상을 잃어갔다. 그들에게도 세월이 이 만큼 흐르자 재활에 성공하여 본연의 신분으로 돌아 간 사람들도 있지만 본심과 형편심 두 개 사이를 오가며 위태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종교와 제도적인 도움으로 일을 하고 반대급부를 받거나 정부 또는 지자체의 지원으로 개인적인 경제는 최소한 해결은 되고 있지만 정신과 마음의 상처에 대한 치유는 아직 요원한 상태다. 이 역할을 어떻게 접근해 나가야 하는지 실질적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문명이 발달되면 될수록 정신과 마음은 오히려 황폐해지는 모순을 화두로 잡고 실내로 들어 서자, 아씨시 형제회에서 나와 주방 봉사를 하시는 자매님께서 내 주신 의자에 앉았다. 소피아 데레사 자매님께서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해 주셨다.
간호사 자격을 갖고 계신 일본인 수녀 두 분 께서도 한국 수도회 소속 수녀님과 함께 오셔서 한사랑 공동체에 소속된 형제들에 혈압 등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고 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은인들이 십시일반 나름 돕고 있는 곳이 한사랑 공동체다.
미사 참례를 끝낸 후 3층으로 자리를 옮겨 떡국으로 점심을 영보님과 나누었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방을 옮겨 구역모임을 갖은 후
일행들과 헤어져 묵상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에 스스로 계획을 세운 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계획은 용산신학교 자리를 들러 기도를 하고 당고개 성지로 가 마음을 살핀 후 새남터로 넘어간 후 외국인 선교사로서 들어와 순교를 당하신 성직자를 위한 기도를 마치고 걸어서 왜 고개로 가 주교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려 하였었다. 걷다 마음이 바뀌었다. 12월 찾아뵙는 것으로 하고 홀로 걸으며 사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방향을 다시 틀어 고가도로를 산책 도로로 변형시킨 서울역 앞 고가도로를 넘어선 후 남산성곽을 거슬러 오르다 북쪽 순환도로 방향을 바꿔 걷기로 작정한 것이다. Back - peack, 열어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고 들메끈을 적당하게 다시 조여 묶은 후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아주 천천히... 마음이 온전한 사람과 장애인의 경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군중 속에 고독을 느끼는 것! 가족 안에서 자신만의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장애의 범주에 드는가? 온전한 생각과 행위의 지혜를 주신 하느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정신세계를 빼앗아 가 정신의 절름발이로 만드신 까닭은 무엇인가? 나의 생각은 깊고 넓어져 갔다.
공동체적 삶이란 무엇인가?
(혈연 가족, 가정, 분신 성격의 친척, 형제 같은 우정, 함께 삶을 지향하는 이웃, 직장인, 사회친구들과의 관계) 등의 연관에 대한 화두를 갖고 참례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살피는 계획을 세우고 일행들과 헤어진 후 첫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잠시 후 계획을 수정해 버렸다. 그냥 구름에 달 가듯이 걸으며 사색하고 묵상하며 관조의 세계로 몰입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는데, 아래, 내용들은 사색과 묵상으로 추려본 단상이다. 더 깊은 성찰을 완성하기 위한 마음공부의 행로가 아닌가 한다.
가족 간의 유대적 정서의 상실 원인은 재화를 잃음으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삶의 활력은 가족 간의 유대와 사회적으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을 통하여 얻는 것인데 재화의 상실로 그 관계가 하루아침에 소멸되는 바람에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혼돈에 빠지게 된다. 사람은 우선 자신감을 잃어버리면 스스로 무엇을 느껴야 할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게 변한다. 외적인 사건으로 충격을 받으면 내적 존재감인 정체성이 사정없이 허물어져 버리게 된다. 특히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상실하게 되면 정체성이 흔들리고 자학의 길로 들어서면서 정신적, 육체적 고유의 가치마저 별 저항 없이 술이나 마약, 도박 등 중독성이 강한 것들에게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순서대로 적어보면 정신적 충격 - 감정 닫힘- 억압과 고독 - 지속적인 스트레스 - 공포심과 분노 - 활동 의욕 상실 - 끝없는 혼돈의 삶 - 치유 - 재건 - 회복 단계이다. 이러한 단계를 거친 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은 치유의 과정으로 인입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혼돈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가게 된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멘토가 되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필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눈높이를 맞추고 마음을 둘러싸 멘 울화의 울타리를 겆어내고 자신을 사랑하는 정체성으로 회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마음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동정심으로 약간의 경비와 밥과 의류 등을 주면 된다는 구태에 머물러 있다. 정신의 기운을 올바르게 세워 줄 수 있는 멘토가 그들에게 필요하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곳은 바로 철로 길이었다. 인간 누구에게나 자신의 길이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자의 반 타의 반 변할 수 있다. 철로는 갈라지는 길은 있지만 길의 성격은 변화지 않는다. 자동차 길은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변화가 많고 돌발적인 경우도 많이 생기지만 철도는 정해진 선로에 맞춰 시종일관 달리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자신에게 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가고자 하는 선택과 방법을 모르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다. 어디런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여행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정주하는 곳을 떠나 떠돌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린 여행이라 부른다. 旅行도 분명 처음에는 路宿이었다. 왜? 옛적 집을 떠나는 일은 전쟁에 동원되어 집을 떠나 국경을 넘어 싸우는 일이기에 노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 후 전사하여 집으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남은 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전쟁도 아닌데 집을 나온 그들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염천교를 바라보고 사직단을 시야에서 가늠한 후 서소문 사거리를 보며 순교가 주는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앞으로 더 나갔다.
그리고 마주한 서울 역사(驛舍)와 광장. 파탄 후 그들이 집을 떠난 모여든 곳은 바로 용산역, 서울역, 청량리역 등이었다. 추위와 무더위를 피할 수 있고 적선과 배고픔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기에 몰려든 것이다. 자신이 해체되듯 상자라는 본연의 형체를 해체하여 깔고 덮으며 잠을 청하던 지하도가 잘 발달되어 있는 것도 한몫하였다. 어느 날 부산 출장을 다녀오느냐 새벽 4시경 도착한 서울역 우선 허기를 달래기 위하여 남대문 시장 부근에 일찍 문을 여는 해장국 집으로 가기 위하여 남대문 지하도에 들어선 순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득 찬 노숙인들 사이 작은 외길을 걸으며 울컥했었다.
옛적에도 남대문 밖에는 삼도에 흉년이 들면 난민들이 도성으로 몰려왔다. 수문장들이 지키는 문이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어 성곽 곁에 머물며 항의성 잔류를 하며 진을 쳤던 것이다.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촌에 살던 어진 왕과 어진 신하는 모여( 이들이 살던 마을 이름이 그래서 嘉會 마을이다) 궁리 끝에 적선의 모양새를 갖춘다. 가마숱 뚜껑을 아궁이에 걸고 전을 머슴 아낙들이 부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부치게를 지게에 질 머지고 남대문으로 와 난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청지기는 외친다. 북촌 00 대감 적선이요~ 그래서 떡의 이름이 빈자들이 먹는 떡이라 하여 빈자 떡이라 하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빈대떡이 되어 막걸리 안주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지금도 이러한 온정은 이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남대문 밖 서울역, 용산, 동대문 밖, 청량리 모습이다. 이렇게 좋은 역사는 한줄기의 빛이 되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친구가 결혼했던 남대문 교회, 그 친구는 지금 미국으로 이민 가 회계사로 크게 성공한 친구가 되었다. 당시 오르는 계단이 길고 높아 인상적이었던 유명한 교회였다. 이 교회의 역사는 130년이다.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 알렌과 헤론 부부, 스크랜턴 대부인이 알렌의 집에 모여 처음 주일 예배를 드렸다. 이 감격적인 예배는 이후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외교관 포크 등이 참석하는 정기적인 주일 예배로 자리를 잡아 나간다. 이후 이들은 선교에 나서서
제중원 공동체를 결성하게 되는데 1885년 10월 11일 루미스 목사의 설교와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 집례하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성찬식이 거행되기에 이룬다. 1886년 7월 18일에는 노춘경이라는 한국 사람이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개신교 최초 신자가 된다. 제중원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지만 선교가 허가되지 않았던 당시 시기에 주일예배를 본 최초 신앙공동체였다
제중원이란 무엇인가?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살림으로써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고종은 알렌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2월 29일(음력)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에 설치된 국립병원이었다.
건물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2주일 만에 백지화되고, 그 해 3월 12일에 새로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원 당시부터 소급 적용하였다. 알렌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260여 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W.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J.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왕실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6년 10~11월경 조선 정부는 한성 남부 동현의 왕실 소유 부지(지금의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제중원을 옮겼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 L. S.)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제중원은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 및 의약·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 이 후 선교사업기관으로 분리되어 의료업무를 계속하였는데,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겨 설립한 지 9년 만에 경영권도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1886년 3월 29일, 서양의학을 교육하고 양의(洋醫)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개교했다. 아울러 1886년 5월 미국 의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알렌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이 하사되었다. 조선 정부는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제중원 의사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 그러나 1890년경 제중원의학당의 의학교육은 중단된 듯하고,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다.
제중원 공동체는 1887년 2월 7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만주에서 로스 목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역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교회를 조직하여 떠난 후 제중원 공동체는 1894년 9월 26일 정부로부터 제중원을 인수하여 완전한 선교기관이 된다. 이토록 유서 깊은 교회는 교회를 만들고 학교를 만드는 선각자들을 배출하여 배재학당과 연희전문이 만들어지고 제중원이 세브란스 병원명으로 바뀌면서 추후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은 학교의 앞자를 따 통합 되어서 연세대학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루게 된 것이다. 대형 건물에 파묻혀 초라하게 다가오는 선교를 태동시킨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외형은 그렇게 보이지만 하느님의 바라의 반석은 흔들림 없이 굳건하다. 신천지 아웃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으로 다가 온다.
교회 사잇길을 걸어 힐튼호텔 측면으로 빠져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복원된 남산 서쪽 자락 한양도성에 올라섰다. 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큰 건물에 가려 행선은 연결되지 않지만 점 점만으로도 궁색하지만 나의 걸어온 길이 분명하게 유추된다. 어차피 선이라 것도 점과 점이 연결되어야지 선이 생기는 것 아닌가. 선과 선이 임의 방향으로 서로 진행하다 구색을 갖추면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산과 산을 이어 선을 긋고 선을 닮은 길이 열리는 곳에 문루를 쌓아 네 곳에 문패를 달아 놓는다. 동은 興仁之門, 서는 敦義門 남은 崇禮門이다. 낙산과 남산 사이 문이 흥인지문(동대문), 光熙門을 남산과 인왕산 사이에는 숭례문(남대문)과 서소문, 돈의문(서대문)을 두고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彰義門(북소문) 두고 북악 동쪽 기슭에 肅靖門(북대문)을 두고 북악과 낙산 사이에 동소문을 열고 도성 복판에 普信閣을 세워 仁義禮智信의 뚜렷한 공간을 만든다.
그곳에 몰려 살던 사람들 권력을 잡기 위하여 끼리끼리 몰려 살았다. 서인과 동인들이 그들이다. 서인의 영수는 송시열이었고 동인의 영수는 윤선도였다. 서로 참혹아게 대하였다. 각종 사화를 일으키며 권력을 탐하였던 그들은 나름대로 끝없이 분당해 나간다. 보수의 성격 서인과 진보적인 남인들 사이에 왕권을 놓고 대립하면서, 조선중기를 지나며 신분적으로 사대부라하고 인격적으로 사군자로하여 존경받던 무리중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괴감에 사회전반의 변혁을 꿈꾸게 된다. 허균이 그랬고 지봉 이수광이 그랬으며 반계 유형원, 이어서 성호 이익이 앞장을 섰다. 그 휘하의 양반들중 안정복과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벽,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학을 시작하지만 결국 종교의 모임으로 변하며 분란을 일으켜 윤지충은 부모의 신위를 불사르는 저항으로 표면화 된다. 결국 죽임을 당하고 이어진 종교생활 안에서 정적에 의하여 박해끝에 서소문 사거리, 당고개, 새남터 남한산성 동문밖, 갈매못, 전주 남문 형장터, 공주 황새바위, 양근나루 백사장 등 전국 곳곳에서 순교의 길이 열렸다. 과연 누구가 하늘의 주인인가? 하는 유생과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릿지의 담론인 천주실의가 불러 일으킨 영향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다.
성곽을 타고 오를수록 문 안이라 서울 사람들이 불렀던 도성 안은 넓고 반듯하게 보였다. 그러나 지점은 나로서는 알겠지만 거대빌딩 숲 영향으로 분별력을 상실하게 한다. 아하 저기가 서양식 병원 최초로 세워진 구리개 제중원자리지, 음 저기는 嘉會洞이렸다. 육조거리, 의금부, 좌우포청, 명례방, 백동, 이수광이 살던 지봉 아래마을 정약용 형제가 기거하던 두껍말, 이벽의 집 수표교 등등
소나무가 청청 하다는 남산, 애국가에선 이렇게 부른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거북선 철 갑처럼 든실하게 생긴 소나무 수피 보며 민족의 혼의 지속을 염원하는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백범께서 서 있고 토마스 의사께서 서 있다. 평화의 선각자들이시다. 꽃이 다 진 화단에 홀로 살아 핀 자주빛 꽃 한 송이, 이름을 알고 있는 꽃이 였는데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더듬거렸다. 혼자라는 의미 고독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페쇄성이 짙다. 모든 생각과 행위 전체가 자기당착적이다. 어쩌면 정주의 삶을 버리고 길거리로 나서는 순간 그럴 작정으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눈 사람을 굴리면 굴릴수록 덩치가 커져나가듯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도 습관이란 것을 덧칠해 나가면 본심은 퇴락해 사라지고 습관심에 모든 것은 억눌려 자신의 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루 이틀.. 사나흘이 문제지 그 이후에는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익숙해 지다 육개월이 넘어가며 일상이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남산 성곽을 복원 공사가 한참이다. 광장으로 사용하는 곳은 연결은 포기하고 박석에 성곽이 지나는 자리임을 표시하고 박아 놓았다.
곧장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을 포기하고 서북방향으로 내려섰다.
목멱산방이 있는 건물벽에 이전을 알리는 방이 붙어 있었다. 단풍이 겨울이 오는 것을 거부하듯 단풍의 뒤태를 보이면 아직 걸려 있어주변 풍광을 호화롭게 한다. 원래 남산의 이름은 목멱산이었다. 북악과 더불어 한양도성 중심역할을 한 산이다. 남산골 샌님이란 칭호로 불리던 양반들이 몰려 살던 곳이다. 붓을 만들고 나막신을 만들어 내다팔며 연명을 하던 권력중심에서 벗어난 양반들, 그들은 목멱산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며 혹시 나랏님과 눈이라도 마주칠 기회가 있을까하며 시선을 궁궐에 박아 놓고 아침조회를 끝낸 왕이 궁궐 안 산책 동선에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는 사실 아닌 웃으개같은 이야기가 흘러 나오던 곳이 바로 목멱산 자락 권세잃은 양반들 마을에서 흘러 나왔었다. 이곳까지 오자 오늘 마음의 화두는 대충 정리되어 있었다. 조금 걸으며 조지훈 선생의 시비가 나온다. 나와 정서적으로 일치를 이루는 시인이라 무척 좋아 한다. 정서적인 결백이 항상 선생의 시어를 떠올리면 가득차 오른다. 시비곁에 서서 천천히 읽은 후 목례를 드린 후 곁에서 벗어나 동진하기 시작하였다.
착시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가 가보니 사실이었다. 어른거린 단풍이 아니라 늦가을 정취의 주인공인 단풍과 떨어진 그 낙엽들이 붉은 빛을 붓으로 칠한 것 같은 모습인 아름다운 정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감탄이다. 그리고 다정하게 온손도 손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연인이 보여 다시 찍을 수가 없었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정말 가을은 이별의 온갖 정겨움과 환희와 헤어지는 슬픔과 아련한 길고 긴 이완의 공간만을 남긴 채 떠나는 모양이다. 이어서 다가오는 것은 어두움과 흰빛이 공존하는 겨울이다. 겨울의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겨울은 닫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는 일들이 참 많다. 쉼은 열망으로 가는 길몫이며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던가! 새봄에 트는 움도 겨울에 만든다. 개화의 동력도 사실은 겨울에 축척하는 것이다. 가을에 그런것을 만들 겨룰이 없다. 곱고 아름다운 단풍빛을 만들려면 혼신을 다해야 하는데 무슨 여력이 있겠는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는 겨울만이 새생명과 아름다운 꽃을 개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직선이 여러번의 곡선을 연이어 만들더니 맞은편에 남산타워를 옮겨 놓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타워 곳곳에 심어 놓은 단풍나무가 숲을 이루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야간에 타워를 올려다 보면 숨이 조여 올 만큼 멋진 광경이 연출된다. 내친 김에 야간까지 서성거려 하다 걸음을 재촉하였다.
장의자가 있어 가서 가만히 앉았다. 그리고 등을 기둥에 기대는 순간 요철이 느껴졌다. 뭐지? 시선을 주자 해태가 빙긋 웃고 있었다. 아마 상상의 동물이지, 불을 먹는다는 해태는 화마의 천적이다. 외사산 중에 하나인 관악산은 화산이다. 한양도성을 화마로 보호하기 위하여 현판을 세웠다. 그리고 이름까지도 崇禮門, 그냥 일설에 관악산의 화마가 한양도성으로 들어 오지 못하게 막기위한 수단이란다. 그리고 불을 바시는 해태는 경복궁 정문 양쪽에 세워 두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 서울시 행정당국에서는 오래전 서울시 마스코트로 지정한 상상의 동물이다. 요 녀석이 등을 간지롭혔던 것이다. 장충체육관 앞 마당까지 가려던 계획을 이곳에서 정리하기로 하였다. 바로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이 있던 곳이다. 악명 높은 취조실이 있던 곳, 지금은 서울시 행정실무 빌딩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구름다리를 만들어 옛 수방사 있던 곳 지금 남산 국악당과 한옥마을로 변신하였다. 연결해 놓았다. 터널을 지나 구름다리를 걷너가니 스트리트 뮤지엄이 있었다. 아주 작은 산막같은 규모의 전시시설이다.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을 사용할 줄 알았고 연장을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불에 달구고 펴서 두드리고 치열하게 시간의 공방 벽을 넘어 공예로 환생시킨 작품들을 보면서 작가의 의도하는 표현을 깊게 긴 시간 감상하였다.
두드림은 일종의 연결을 원하는 신호이며 동화의 그릇으로 가는 지성물이다. 아주 작은 공간의 전시라 그랬는지 단조의 울림이 강렬하게 다가 왔다. 다시 길을 아래로 열어 나갔다.
국악을 배우는 영재들의 교욱의 장소가 있는 남산 국악당 이다.
한옥에 깃든 모든 재료들은 흙으로 되돌아가 간다는 의미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현대문명이라는 총아들은 거의 인간들에게 장애와 독소 불러 일으키는 재앙으로 되돌아 오지만 나무와 흙과 풀로 만든 한옥은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흙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깊이 성찰하며 대문을 벗어 나왔다.
첫댓글 최고!
과찬!!
글을 읽으며, 사진을 보며,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묵직한 첼로의 선율을 들으며 가슴 한구석에 뭉클 일어나는 가득찬 감동. 늦가을을 화면에서나마 만끽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
구역님들과~*
뜻 깊은 모임을 하셨군요
추운 겨울 훈훈한 소식 글
잘 읽었습니다~*★
훈훈한 겨울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