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9,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2022, 총306쪽
이 책은 저자가 이미 다양한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꾸려 펴내 것이다. 그냥 막무가내로 엮으려니 스스로도 연결성이 없다고 느껴졌는지 송나라 때 문인 소식(蘇軾, 1037년 1월 8일 ~ 1101년 8월 24일(음력 7월 28일)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을 동봉하여 그의 시 적벽부(赤壁賦)의 흐름에 맞추어 차례를 엮어 놓았다.
하나의 제목이 나타날 때마다 소식의 문장을 주제처럼 써 놓은 뒤 저자가 인생의 허무를 견디는 법을 친구와 이야기하듯 썼다. 하나의 제목에 따른 한 가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금 관련이 있게 보이는 영화나 명화를 슬쩍 갖고 와서 함께 전시하여 재미를 더해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 26쪽을 보면
'사람이 천지 간에 산다는 게 군집하는 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뿐이다. 홀연히 모였다가 홀연히 흩어진다. 소리 낸 것이 말이 되고 흔적을 남긴 것이 글이 되지만 금방 노쇠하여 적막하게 사라지고 만다. 새와 짐승이 울고 구름과 안개가 변해 사라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으리오. 이런 인생 길에서 그래도 글 쓰는 일에는 다소 의미를 두었다. 수백 년 전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말할 수 있으니 그 사람이 뛰어나고 문채와 풍류가 기록할 만해서가 아닐까?' 라는 김매순의 '대산집을 인용하는 등 다양한 자료를 증거로 하여 인생의 허무를 받아여야 한다고 생활 어조로 담담하게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다. [고생대의 삼엽충이나 중생대의 암모나이트와 같이 이미 멸종한 존재를 떠올리며 장차 멸종할 존재로서 그들과 공동체를 이룬다(29쪽)] 라는 문장에는 나도 서슴지 않고 동의하였다.
인생의 허무를 이기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대해서 라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실생활에 필요한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공들인 노력, 그리하여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한다.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고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소통이 잘 안 될 때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19세기 영국의 실생활 용품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의 벽지디자인과 사회주의자 동맹 선언서 표지에 실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 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데 모리스의 1879년 버밍엄 예술협회와 디자인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인용해서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다.(160쪽)
그리고 저자는 어떤 것을 음미하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허무를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퍼스트 카우]를 인용하면서 우리 모두는 삶의 전장에서 젖을 짜이고 있는 순한 동물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우리는 향기로운 케이크를 굽고자 하는 사람이고 소젖을 짤 때는 다정하게 짜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고 언젠가 베이커리를 열겠다는 달콤한 꿈을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생한 우리의 삶의 사실들을 지긋이 음미하지 않으면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마음은 밀가루처럼 흩날리기만 할 뿐 빵처럼 부풀어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176쪽)
또 한 가지 저자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마음의 탄력성'이다. 다양한 가치들에 자유자재로 눈을 돌리고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를 수 있어야 삶이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쟁은 긴장 상태이기 때문에 경쟁 구도에서는 마음의 유연성이나 탄력성을 가지기 어렵다. 따라서 희망, 자신감, 정의 등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경쟁이 작동하지 않고 경직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강 위의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 파이의 확대, 욕망의 제거, 공정한 시험 등과 같이 한정되지 않는 자원에 가치를 두는 삶은 마음의 탄력성을 갖게 하여 삶의 허무를 견디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인용한다.151쪽) 인간 실존의 위대함은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그 끝나지 않는 고통을 향해서 다시 걸어 내려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시포스가 바위를 들어 올릴 때의 불거진 그 탄탄한 근육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가 굴러떨어진 뒤에도 시시포스는 다시 터덜터덜 걸어내려와서 또 다시 바위를 들어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실존의 위엄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삶은 삶이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마음의 탄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풀이었다가 나비였다가 나무였다가 또 구름일 뿐이다.
아래 그림은 이 책 150쪽에 있는 얀 라위컨의 그림이다. 제목은 [손에서 미끄러져 산 아래로 굴러가는 큰 바위를 보고 있는 남성]이라는 작품인데 1689년도에 제작되었다. 우리 인생이 바로 그림 속에 저 남자와 같다는 것이다. 손에서 미끄러져 산 아래로 굴러가는 바위를 보고 있는 저 남성 말이다.
그림출처: 동아일보 [김영민의 본다는 것은]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