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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에 접어 드는 대목에서,,,
어느날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상한론에 나오는 인삼이 우리 인삼일까....
뭐 이런게 왜 궁금한지 ...
늙어서 치매 안걸리려 잔머리 굴려 봅니다.
상한론에 인삼이 등장 하였으면 그 때 인삼이 재배 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자연속에 있는 인삼이라면 산삼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중국의 인삼으로 우리 인삼과 다른 종류의 것은 아니겠는가?
그러면 어떤 것일까......?
교역이 활발하지 못한 시절에 한반도에서 생산한 인삼이...
長沙라면 중궁의 양자강 유역의 호남성인데 거기까지 도달 했을까?
만족할 만한 문헌은 못 찾았고요, 덕분에 인삼 공부는 많이 했어요.
기미 약성 이런거 보다는 주변 잡다한 사항을요.
재미있는 것은 요 아래 보시면 알듯이
장중경이 저술한 [상한론]에서는 처음으로 인삼을 이용한 처방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상한론에 처방이 있니까 사용 했을 것이라는 애기지요
일리가 있지만 ....
세계 제일이라는 우리 인삼의 역사치고는 좀 빈약하다는 생각을 해 보앗어요.
이것저것 찾아보니 암튼 대충 1600여년경에 지금 같은 인삼 재배가 본격화 되었다네요.
그전에는 자생하는 삼을 인삼이라 일컷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심마니가 산삼(자연삼)을 찾으면 "심 봤다~~" 그런다지요.
말로 보면 삼을 심이라 했다는 거지요.
볼펜심, 연필심... 등심, 안심... 새알심.... 등등이지요.
한마디로 무지 중요한 것, 중심이 되는 것 이런 것을 심이라 하는거지요.
그래서 삼을 심이라 했을까요
얘기가 옆으로 빠졌는데...
산삼이 가짜가 많아(돈 되는 것은 대개 가짜가 많지요) ~
중국 장뇌산삼이라고 우리와 종자가 다른 삼이 산삼으로 둔갑한다는
TV 기획물을 보면 종자가 다른 인삼(산삼) 있다는 거지요.
우수한 고려인삼임에도 불구하고 6년근을 가지고 홍삼을 만들어 먹는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인삼의 열 성분을 중화하자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열이 많은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하기 때문에 비싼 홍삼을 쓰는 거지요.
상한론의 인삼이 궁금한 것이 시대적으로 인삼이 풍부했을까도 있지만
氣味가 다른 약재/인삼이 있었다면
일테면 그때 소시호탕과 지금 소시호탕의 약성이 다를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요.
(그래야 크게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 안하지만)
팔강 중 한열을 보다더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는 거지요.
물론 시호, 반하, 황금 등등도 같이 생각해 볼만 하지만
인삼은 특히나 차이가 있다고 보니까 인삼을 거론 한거지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는대로 더 찾아 보고 생각해 보렵니다.
인터넷에서 언뜻 만삼이라는 글을 보았는데...다시보려 했는데 못 찾았어요.
호기심이 창조의 근원이라......
아래 가져온 글은 참고로 읽어 보시어요.
인삼의 기원 / 인삼의 역사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려인삼의 교역과 재배상의 발전 그리고 인삼에 관한 국가 시책상의 주요한 변천상을 발췌하여 연대별로 정리하였다.
문헌상 인삼이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시대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최씨 성을 가진 자가 중병을 앓자, 그의 부인이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산신령에게 기원하여 산삼을 얻어 그 종자를 재배한 것이 인삼재배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나 전설로 이야기될 뿐 뚜렷한 문헌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조「정조실록」에 "가삼 재배한 인삼이 성행한 이후 자생 인삼을 공납치 아니하고 모두 서울 인삼상인이 청부받아서 경상도 가삼을 사용한 듯 하다." 라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이 시기에는 인삼의 인공재배가 성행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인삼의 재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연도(AD)
내 용
513
백제 무령왕 12년 4월에 양(梁)의 무제(武帝)에게 인삼을 보내다.
627
신라 진평왕 9년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10년에 왕사(王使)를 통해 인삼을 예물로 보내다.
662
신라 문무왕 2년 나당(羅唐) 연합군 편성시에 수교품으로 인삼 200근을 보내다.
739
신라 효성왕 3년 발해국 문왕이 인삼 30근을 왜국(倭國)의 동대사(東大寺)에 보내다.
1009
고려 현종 원년(元年) 당시 국제 무역항인 예성강 벽란항에서 아라비아 상인들이 그들의 토산품과 고려인삼을 교역하다.
1123
고려 인종 원년 산양삼(山養蔘)의 번식 및 인공재배를 시도하다.
1123
"고려 인종 원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였던 서긍(徐兢)은 귀국 후에 <宣和 奉使 高麗圖經>이라는 서책을 출간하였으며 그 내용 중에는 고려인삼에 관해 ""然而 涉夏則損蠱.不若經湯釜而.熟者可久留""라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시 고려에서 홍삼제조 기술이 개발되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1392
조선으로부터의 조공품(朝貢品)에 인삼을 정하다.
1398
"조선 정종 원년 7월 왜국사자(倭國使者)에게 인삼 50근을 하사하였고, 동년 8월 왜국 족리막부(足里幕府) 사자(使者)에게 인삼을 하사하다. 송도(松都) 고려유민들이 대거 은둔하여 삼농사에 종사했으며 인삼의 인공 재배를 발전시키고 토착화하였다."
1405
조선 태종 5년 연경에 사신으로 갔던 예문관제학 김한로가 인삼을 사사로이 무역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그후로는 인삼의 사적인 국외반출을 나라에서 금하다.
1413
鄕藥集成方을 편찬하다.
1429
조선 세종 11년 명나라와 타협하여 양국간 교역결제 수단으로 금은과 고려인삼을 병용하고 1인당 휴대량을 10근으로 제한하다.
1601
"전국 공납인삼의 양이 1,900근 이다."
1602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국고에서 다량의 인삼과 은을 탈취해 가다.
1606
"조선 선조 39년 파삼(把蔘, 煮製蔘: 홍삼을 10개씩 묶은 것)의 제조를 엄금하였으며 路引을 발급하여 증명서 없이는 평안도 인삼산지의 출입이나 인삼의 商法來를 할 수 없도록 엄금하였는데 이는 인삼의 개별적인 상행위를 규제한 최초의 법이다."
1608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인삼과 은을 강요하여 국고가 결핍되다.
1610
조선 광해군 10년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술하다.
1621
명나라 사신에 의한 인삼과 은의 수탈로 인해 국고가 결핍되다.
1624
"북경으로 가는 朝貢使(年數回, 數百人)의 여비(旅費)를 은에서 인삼으로 바꾸다."
1645
청의 칙사(勅使)가 평양에 와서 국경을 건너 인삼을 밀채취하는 자가 많은 江界府의 행정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청하다.
1650
가짜 또는 조악한 품질의 인삼이 증가하여 외교예물(外交禮物)의 검사를 엄중히 하다.
1652
북경으로 가는 조공사절(朝貢使節)의 인삼 사무역(私貿易)을 금하다.
1662
북경 조공사(朝貢使)의 여비를 인삼에서 은으로 바꾸다.
1669
월강(越江)의 방지를 위한 주민조사로 인하여 농사불능(農事不能)이 되다.
1685
조선 숙종 12년 금삼절목(禁蔘節目)을 제정하여 인삼의 밀무역과 무단 불법 채취를 단속하고 처벌하였다.
1693
인삼의 공납이 어렵게 되자 상인들이 이를 악용하여 대납(代納)하고 폭리를 취함으로서 많은 주민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곤궁(困窮)해져 이의 구제를 조연(朝延)에 요청하다.
1705
"채삼지(採蔘地)에 부정이 횡행하며, 인삼의 밀매를 단속하다."
1711
가짜 인삼이 횡행하였는데 이를 놓친 지방관들은 엄한 처벌을 받다.
1724
영조 원년 송도(松都) 삼농인(蔘農人)들은 박유철(朴有哲)을 중심으로 대동 단결하여 일복식(日覆式) 삼농법(蔘農法)을 크게 일으키다.
1731
위조은률(僞造銀律)에 의해 부정인삼의 밀매자를 참형(斬刑)으로 다스릴 것을 정하다.
1771
조선 영조 47년 경상도 산간지방에 인삼의 밀재배가 성행하였고 중국 무역용 사제 홍삼이 제조되었다.
1772
조선 영조 48년 경상도와 전라도 산간지방에서 인삼재배가 성행하다.
1796
"홍삼(紅蔘)"이라는 문자가 처음으로 나타나다."
1810
북경 조공(朝貢)무역에 홍삼이 증가하고 개성에서는 인삼재배가 성황을 이루며 증포소(蒸包所)를 한양에서 개성으로 이전하다.
1835
조선 헌종 원년 개성의 보부상(褓負商)인 최문(崔文)이 전국 각 지방의 인삼재배를 관찰한 후에 개성지방의 풍토에 알맞은 인삼의 집약 재배법을 고안하여 보급함으로써 오늘날 개성인삼 재배법의 기틀을 세우다.
1853
"홍삼제조량이 25,000근에 이르다."
1908
조선 순종 2년 7월 대한제국 법률 제14호로 홍삼 전매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홍삼 제조권을 탁지부 사세국 삼정과로 이관하였는데 이때부터 홍삼의 전매제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장중경 (張仲景 ?∼?)
중국 의사. 자는 중경(仲景). 이름은 기(機). 난양[南陽(남양);河南省(하남성)] 출신. 《상한론(傷寒論)》 《금궤요략》 등의 저자이고 2세기 중반부터 3세기 초에 활동한 중국의학 의방(醫方)의 시조이며 의성(醫聖)이라고 했다.
정사(正史)에 전기는 없지만 후한(後漢)의 하옹의 별전에 <옹이 동군(同郡)의 장중경을 보고 그대는 뒤에 양의(良醫)가 될 것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족이 열병으로 목숨을 잃자, 장백조(張伯祖)에게 의학을 배웠다. 치료를 잘했으며, 특히 경방(經方)에 정통했다. 후한의 영제(靈帝) 때에 효렴(孝廉)에 뽑혔으며 후에 창사태수[長沙太守(장사태수)]가 되었다.
도읍 뤄양[洛陽(낙양)]에 있을 때 명의(名醫)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 역병(疫病)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상한론》의 서문에서 장중경은 <종족(宗族)이 200여 명이 되었으나 건안(建安) 원년(196) 이래 10년 안에 2/3가 죽었다. 사망자 가운데 7/10이 상한이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고훈(古訓)을 구하고 널리 중방(衆方)을 취하며 소문(素問)·9권·81난(難)·음양대론(陰陽大論)·태려약록 및 평맥(平脈)·변맥(弁脈)에서 가려뽑아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16권)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첫댓글 샘, 오늘은 다 못 보고, 담에 자세히 보겠습니다. ^-^
지두요... 타자 실력이 많이 느셨겠어요. 이렇게 길수가..쌤...열씸이 공부 하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