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국제연극제(2024-08-06(화)>
1. <퇴직면접>(극단 사개탐사)
‘퇴직’을 앞두고 벌어지는 면접은 기괴한 느낌이 든다. 퇴출시키려는 사람을 굳이 심사하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다만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을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연극적 시도라 볼 수 있다. 퇴직을 앞 둔 연극교수 K는 진지하고 관념적인 삶에 대한 자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대화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찬동할 수 없다. 진정 의미있는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편하더라도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적인 성격의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도 파탄에 이르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반면 K를 면접하는 면접관 S는 일종의 운명주의자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일이 신의 의도와 의지에 의해 형성되고 진행된다고 믿는 철저한 계시주의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전혀 다른 성격의 3사람을 대립각으로 두고 그들의 대화와 우연하게 벌어진 건물에서의 총격 사건을 배경으로 현실 사회의 다양한 문제가 특별한 맥락없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일종의 삶에 대한 인간의 대응에 대한 분석과 접근이다. 하지만 현실의 끔찍한 위협 속에 기만적이고 관념적인 사고는 결국 자기 생존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지키는 것에 집착하고 허세와 위선은 무너지고 만다. 작품 마지막 총격범의 죽음은 어쩌면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의 무의미함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조금은 공허하고 조금은 어수선한 상황의 연속이다.
2. <우리 교실>(연극집단 청춘오월당)
20세기 가장 거대한 비극이었던 유태인 학살을 모티브로 학살의 잔혹한 행위가 심각하게 벌어졌던 폴란드를 배경으로 친숙한 인간적인 관계가 어떻게 민족, 국가, 이데올로기, 종교와 같은 외형적 기준에 의해 파괴되는가를 냉혹하고 신랄하게 그려낸다. 험난한 역사적 상처를 지닌 동유럽 국가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돈의 시간을 보낸 폴란드의 한 교실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민족포용정책을 추진한 정치가의 의지에 의해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사이좋은 친구로 살아간다. 하지만 정치적 변화는 때론 폴란드 민족주의의 굴기가, 소련의 침공으로 인한 유태인 세력의 강화가, 급기야 나치의 침공으로 인한 유태인 말살이라는 역사적 혼란 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무너지고 파괴되고 결국은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끔찍한 지옥도를 만들어낸다.
철없는 어린시절 서로에 대해 꾸밈없이 좋아했고 때론 뜨거운 연정을 품은 사이들이지만, 외부의 폭풍은 서로를 갈라놓았고 그런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실존적 존재들은 원하든 원치않든 서로를 파괴하는 존재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폴란드 민족주의가 급증하자 유대인과 폴란드인 친구 사이에는 거리가 생겼고, 소련의 지배가 시작되자 사회주의 세력이 많았던 유대인들은 폴란드 친구들을 억압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반면 나치의 침공이 시작되자 상황은 역전되어 나치에 부역한 폴란드 친구에 의해 유대인 친구는 죽음을 당하고 가장 친한 친구를 강간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나치의 패배 이후 상황은 또다시 바뀌어 소련의 점령 이후 숨어있던 유대인 친구는 자신들을 탄압한 친구를 심판하는 위치로 전환된다.
이렇듯 역사의 전환은 인간의 행위를 결정지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기준에 적합하지 않을 때 그들은 제거되어야 했고 파괴되어야 했다. 그런 행위가 비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가장 가깝던 친구 사이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적인 관계는 허상에 불과했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종속되어버릴 때 그들은 다만 그러한 힘의 말단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두가 친구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사람도 있었고, 유대인 친구를 아내로 맞은 과감한 선택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순수하고 철없던 시절, 서로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던 관계는 역사의 격량 속에서 무참하게 파열되고 말았다. 20세기 가장 슬픈 비극이 더욱 비극적인 점은 평소 익숙하게 만나고 생활하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폭력과 살육이 진행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연극 <우리 교실>은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가 얼마나 외부적 상황에 허약한가를 다시금 증언하고 있으며 그러한 비극을 선동하고 강제하는 인간들에게 분노를 느끼게 한다. 거대한 비극이 지난 후, 인간들은 잠시 반성한다. 하지만 시간은 또다시 유사하지만 새로운 증오와 차별 그리고 분노를 자극시키며 새로운 살육과 비극을 만들어낸다. 그 사이에서 연약한 개별적 존재들은 사라져간다. 집단적 광기가 인간에 대한 개별적 가치의 중요성을 망각시킨다. 역사 앞에서 무력했던 인간의 허약함에 전율과 허무를 느낀다.
첫댓글 - "역사 앞에서 무력했던 인간의 허약함에 전율과 허무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