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보면 타락의 도시 서울을 거룩한 도성으로 만들겠다는 성시화운동이 의지를 가지고 몇몇 한국 교회 이름 있는 지도자 분들이 그 운동의 실천시작으로 “서울 성시화 헌신예배”를 수 천 명의 교인들과 함께 가졌다는 언론 보도를 보았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을 볼 것 같으면 “서울의 범죄율이 높다. 그래서 변화된 사회와 민족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이 꽉차게 해야 한다. 그래서 작은 신앙실천에서부터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적이고 이벤트적인 운동이 아닌 신앙실천을 우선하는 운동이다. 성시화운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운동이다. 그래서 4명 가운데 1명이 기독교인이라는 한국이 크리스찬이 1%도 안 되는 일본보다 1백배나 범죄율이 높은데 서울을 범죄율이 낮은 성시로 만들 것을 다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서울 성시화 운동 실천 방법으로는 전 시민에 3전 운동을 실시해 매일 일일 기도 운동을 전해 나라와 민족과 지도자들을 위해 1분씩 기도하는 것과 개인과 가정, 직장과 사회 등 모든 생활영역을 좀더 깨끗하고 정직하게 만드는 7성 운동을 펼쳐 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성시화 운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국 주요 도시들마다에서 조직되어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한국 민족이 많이 사는 외국의 도시까지 성시화 시키겠다고 이름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운운하는 것을 신문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근간에는 한 도시부터라도 집중 전략하여 완전 복음화 하여 성시화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서울을 성시화 한다는 목표아래 행사가 본격적으로 전개한다는데 보면 “수도 서울을 복음이 넘치는 도시로”, “서울 시민의 가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속히 오게 하자”, “내가 사는 도시 만큼은 거룩한 도시로 변화시켜 민족 복음화를 앞당기고 우리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시켜 가야한다”, “우리는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도성이 되는 꿈을 꾸어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도시며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등 이런 주장들이 성시화 운동을 하는 자들의 주목표며 강조점입니다. 여기에는 국내에 훌륭한 목사들이 많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들과 운동이 서로 교파를 초월하며 공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을 반대적인 입장에서 비판하며 비 복음적인 인본주의로 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견해 차이는 보다 본질적인 노선이나 입장의 차이로 좁혀지거나 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실현을 어떻게 깨닫고 보느냐는 관점은 합리적인 차원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만인적이냐, 택자에게냐, 사회적이냐, 교회적이냐는 입장의 차이는 서로가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이 되기 때문에 양보나 협력도 어려운 관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다 신학이나 신앙이나 교회관이나 구원관이 복음의 이해의 차이에서 생겨지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필자는 성시화 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 입장인데 그래도 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 글을 쓰는 것은 작은 소리 나마 복음적인 입장에서 밝히어 비판 없이 그런가 하는 자들 중에 같은 깨달음으로 도전이 될 사람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제네바를 성시화 하려한 것이 아니다>
서울이나 그 밖의 도시나 더 나가서는 국가를 성시화 하고 복음화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을 보면 칼빈도 당시 제네바를 성시화 했다고 강조하며 그것을 본받고 토대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시 제네바시는 칼빈의 주도 속에 교회와 사회가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도시의 성시화가 실현되었다고 보면서 모델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칼빈이 당시 제네바를 오늘날 우리처럼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시화 하겠다는 운동을 한 적도 없으며 세상 도시를 교회의 주도와 협력으로 함께 벌이는 운동을 통해 거룩한 도시로 전환된 결과를 보여준 것 또한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유럽의 국가와 도시들은 당시 로마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권력아래 있었습니다. 군주들도 막강한 종교정치 아래 지시를 받고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때로는 하수인 그대로의 역할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황 중심의 종교 정치가 유럽의 국가와 웬만한 도시들을 한 중심으로 주도하며 더 나가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세력이나 능력의 인간도 우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를 앞세워 교묘하게 이용하여 조직화하고 권세를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큰 잘못된 교회가 구성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칼빈이 제네바에 성직자로 서게 되었을 때 그는 복음적인 개혁주의 자로서의 역할을 실제로 주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제네바라고 하는 한 도시를 하나님 중심 정치체제의 사회로 돌아가게 하는 성시화 운동이 아니라 당시 제네바는 한 커다란 유형교회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칼빈은 조직만 크고 자기들 의도적으로 향하는 목적 아래서만 하나님의 권세를 내세우는 무서운 법이였지 실제 신자들의 사회생활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과 삶의 법을 만들어 주지 못했던 로마 카톨릭의 허상 적 상태였던 제네바를 하나님 중심의 교회된 모습과 생활로 개혁하는 사명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잘못된 외형적 카톨릭 교회의 모순적 굴레에서 하나님 나라 된 모습과 삶이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개혁해 갔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거슬림과 반대와 대적함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유형 된 교회들이 완전한 교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는 가라지 같은 자들도 있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거슬리려는 신앙적으로 부족하고 형편없는 자들이 있는 것처럼 당시 대부분이 교인들로 되어져 있는 제네바도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제네바는 우리 시대에 한 세상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로마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개혁교회로 가려는 시점에서 로마 카톨릭을 이제는 원치 않으면서도 또한 새로운 하나님 중심의 개혁 교회로 가는 것을 용납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법을 강력하게 그들의 모든 삶에 적용되도록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당시 교회된 그들이 잘못된 종교와 그런 혼란과 미혹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함에는 하나님 나라 질서의 법인 말씀 중심의 제도나 규례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는 자들은 마치 당시 제네바를 오늘날 세상 도시로 보고 그 도시를 하나님 중심의 사회로 칼빈이 주도하여 마치 교회와 사회가 일치가 되도록 성시화 시킨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그의 신학의 핵심과 신앙교리의 전부가 들어 있는 칼빈 강요를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그의 신학과 신앙은 복음 중심의 개혁 주의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그렇게 한 지역, 사회가 이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나 주장한데는 어디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칼빈과 그의 신학을 바로 안다면 그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구원이 이루어져가는 거룩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으로 실현되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은 영적으로 영원히 일치가 될 수 없는 본질적 관계임을 복음을 통해 세운 것이 그의 신학인 것입니다.
<서울은 성시화 될 수 없다>
서울은 성시화 될 수 없습니다. 그 외 이 땅의 모든 도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곳도 장소로는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것이 어느 도시로 국가로 한 장소로 실현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대나 꿈에 불과한 지상천국일 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본질적인 면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언약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나 성격은 분명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런 천국을 기대하고 있다면 유대인들이 지금도 학수고대하는 메시야를 통해서 부강하고 평안한 옛 좋았던 이스라엘로 회복되기를 기대하는 신앙과 별다름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이야 말로 자기들이 꿈꾸는 지상천국을 고대했습니다. 그것이 안 맞고 그것을 실현시켜 주지 않는다고 당시 예수를 반대했고 메시야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잘못이해 했고 자기들 기대의 틀에다만 맞추고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유대 땅에 오신지 수 천 년이 지났지만 당시 때나 지금이나 그곳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시화 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유대사회는 현상적으로나 형편 적으로는 더 혼란스러웠고 환난은 더 가중되어 갔던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천국으로 임재하시고 또한 천국의 복음을 통해 천국이 무엇이며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이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을 말씀하셨고 또한 그렇게 천국 된 자들에게 실현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 어디나 특히 사역을 많이 하셨던 갈릴리 고을 그 어떤 한 곳도 전부가 그리스도 중심의 나라 형태로 변화 된 지역은 한 곳도 없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못 이루셨기에 그러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미래 속에 현재적으로 세상 속에 실현 되었지만 세상에서 거룩히 구별된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로 구분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태와 모습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지만 그렇다고 그 안이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거스리던 바리새인들의 마음 중심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재하고 실현되는지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왕국은 분명 약속대로 당시 유대 땅에 그가 오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형편 적이거나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 무리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으로 영생으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통치를 통해 그의 거룩한 몸 된 교회 모습으로 실현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보이는 바 된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기업된 언약의 땅을 통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온성, 즉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으로 구별하셨고 그곳에 임재하시고 교통하시는 은혜의 역사로 성전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으로 그가 찾아 오셔서 특별히 그들에게 언약의 백성으로 통치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짐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되는 성격의 의미가 있으면서 보이게 실현된 거룩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점진적으로 실현되어가는 단계적인 하나님 나라인 동시에 모형적인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될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셨고 언약해주셨던 것입니다.
다윗 시대 이후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유다왕국은 몰락되어져 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약속된 메시야 왕국은 점점 도래해 가고 있었던 것이 유다역사입니다. 성전은 무너져 없어지고 이제 하나님의 도성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민족 종교의 중심지요 율법의 저주로부터 정죄 받은 자들의 곳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갈 4:25-26).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후손들로 불려진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인 시온성은 도래할 메시야 왕국으로 선지자들은 예언하였고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여 불러진 자들이 그 중심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증거 했으며(슥 8:3-8 참조) 히브리 기자는 당시 역사적으로 보이는(히 12:22-23)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었던 시온성이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실현된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했습니다(마 3:1-2). 예수님도 꼭 같은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마 4:17).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유대민족이 바라는 좋았던 보이는 왕국시대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보다 발전된 영적 하나님 나라로서 유다 영역을 넘어 온 세상으로 천국 복음을 통해 구원과 구별된 구원의 삶으로 이루어져 가는 교회가 이제는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자 기대하며 소동하던 유대사람들을 넘어 먼 동방에서 온 동방박사들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를 받아 새롭게 실현될 나라의 통치자로 오신 왕 되신 그리스도께 경배하게 하고 그 지시를 받고 살아가는 자가 이방에서 있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요 본질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가운데 현재적이나 영적으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로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먼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마 13:24). 여기서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 했고 좋은 씨를 뿌린 자는 인자되신 예수님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땅에 천국은 시작되나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구원 받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짐을 밝힙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가라지가 뿌려졌다고 말씀합니다. 그 가라지는 원수 마귀 악한자의 아들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어느 곳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의 사람들이 생겨지고 반대로 죄 가운데 있는 불신앙의 세상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바다(세상)에 던져진 그물 같아 온갖 물고기를 모아 끌어내어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는 것으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통해 천국의 역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천국을 이루는 참된 복음의 역사는 이 세상을 구원과 유기로 구분시킴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천국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마 13:11) 그래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 같아 이것을 기쁨으로 보는 자가 있고 보지 못하는 자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기대 적으로 이상적으로 형편이나 현상적으로 지상천국을 바라던 유대 무리들은 그런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만 볼 수 있고 들어 갈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요 3:3, 5). 그래서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이 유대 사회가 지배정치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재난이나 질병이나 어려운 형편에서 회복되고 혼란 속에서 서로의 갈등과 반목 속에서 벗어나서 평화와 안정이 깃든 현실적 도성으로 되는 것을 메시야 왕국으로 고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주시지 않자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 왕국을 빙자한 이단으로 몰아 죽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하시지 않은 성시화 운동을 예수의 종이요 그의 교회된 사람들이라는 우리가 인간적 운동으로 세우려고 하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어떻게 세상의 한 도시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띤 거룩한 도성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한 도시의 전체사람이 한 나라의 전체국민이 복음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나라를 복음적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들의 이상적 구현에 맞추고 기대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기독교 이상주의에 불과합니다. 고작 구현한 하나님의 도성이 범죄가 없고 잘살고 좋은 도시가 되는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인류가 줄 곳 추구 했던 유토피아나 우리 사회가 구현했던 새마을 운동 새 정신 운동하고 별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제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별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6-7절을 보면 로마 교회를 가리켜 말씀하기를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느 도시나 어느 나라나 어느 장소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하나님 나라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과 교회된 자들을 향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증거 했고(빌 3:20)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한 것입니다(벧전 2:9).
넓게는 이 세상 가운데나 좁게는 어느 지역 중에는 분명 구원이 될 수 없는 악한 자에게 속한 가라지 같은 자가 있고 반면에 그리스도를 믿어 그 안에 거룩한 무리된 교회된 자들이 섞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지역이 한 도시가 거룩한 도시인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분명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오히려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고 말씀합니다(고후 6:14-17).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눅 20:38) 또 네 나라사람들(유대무리)이 너를 고소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 빌라도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나님 나라의 분명한 상태와 모습을 밝히셨습니다(요 18:35-36).
그래도 우리가 세상 도시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시화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처사요 억지가 되는 것이며 더 나가서는 천국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알아야할 많은 교인들을 실족케 하거나 혼란케 하는 일이요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거룩하게 실현되어 가야할 하나님 나라를 거슬리는 인본주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 나라를 세우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의 교회로 세우시고 영원한 그의 거룩한 나라 된 모습과 삶을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먼저 깨닫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