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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 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 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사에만 급급하여 눈앞에 보이는 것, 현실의 향락에 가치를 두고 있 는 사람들에게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준엄하게 내려질 것이라는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깨어있으라고 가 르침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깨어 사는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깨어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 까? 자신을 자주 바라보며 산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여기 있나? 궁극적으로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으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깨어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깨어 사는 사람은 철저한 준 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준비의 핵심일 것입니다. 이를 어떻 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가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 모양새가 다르게 드러날 것입니다. 준비 없 는 시험에 임하는 학생을 보면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준비 없는 종말과 심판에 대한 기다림 역시 마 찬가지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가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날을 위 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시작하며 깊은 묵상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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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19,45-48) |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 이 왔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 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 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 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 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 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오늘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듣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 러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처음은 아닙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느님과 멀어진 후에 수많은 예언 자들이 그 길을 준비하기 위한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마지막 시기에 세례자 요한은 가 장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촉구합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분 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세를 갖추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 합당한 자세 가 바로 회개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세 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2000년 전처럼 인간으로 다시 강생하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 각자의 준비와, 세상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 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한 회개, 그리고 회개를 통한 끊임없는 자기 쇄신의 노력을 통해 인간으로 다 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라고 세례자 요한은 오늘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 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위해 회개와 쇄신을 가로막는 것 은 무엇인지 성찰하고 준비하는 대림시기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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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눈먼 사람 둘의 눈이 열렸다.” (마태오 9,27-31) |
그때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 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 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 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 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 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 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 다.”
오늘복음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지 묻고 있습니 다. 세례자 요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해왔던 바로 그 일 ‘소 경으로 하여금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며, 절름발이가 온전하게 걷게 하시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해왔던 바로 그 메시아라고 확언하면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메시아와 함께 살아가기에 합당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주시는 선물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메시아가 오신다 하더라도 그분과 함께하는 기쁨은 잠시뿐이며 오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과 그분의 사랑을 선물로 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주시고 그 참된 사랑과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 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셔도 받을 수 없는 상태라면,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았으나 그 초대에 응답할수 없는 상태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림은 바로 준비의 시기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나는 어떻게 준비하 고 있고,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기 위해 우리 자신을 어떤 그릇으로 빗어 나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합당하게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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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 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 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 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 다.”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보아라, 동정녀 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 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 복음묵상 :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오늘 복음은 주님의 탄생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순명과 양부이신 요셉 성인의 믿음에 의한 자기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강생의 신비가 시작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실천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고 온전한 가정에서 성장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이 세상 사람들의 협조 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시고 이 세상에서 성장하십니다. 예수 성탄을 며칠 앞두고 있는 오늘 우리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의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동참하신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 협조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이 즉시 천사의 지시대로 했듯이, 우리도 우리들의 것들에 갇혀있던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 애써야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 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잘 성장하셔서,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 가실 수 있도록 협조 해드리는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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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 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 리된 것이다.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일어나 아기와 그 어 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 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 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성인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삶을, 오직 예수님과 성모님 을 위해서 바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 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성가정의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 리에게 주어지는 삶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우리 가족이 그 말씀에 따 라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결국 그러한 가정이 이루는 교회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사랑의 성가정을 이루도록 2008년 한해 더욱 노력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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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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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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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양’하면 일반적으로 ‘어리다, 순하다, 깨끗하다, 흠이 없다’라는 이미지를 우리는 갖습니다. 그러 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어린양’하면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그들의 조상들 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을 때 잡도록 명하신 그 ‘역사적인 어린 양’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 도교 전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과월절)의 ‘참된 어린 양이시고 그분이 흘린 희생의 피 로 우리는 구원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매 미사 때에 주님을 받아 모시며 ’하 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 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 를 우리 안에 모십니다. 그렇습니다! 내안에 모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모두 도 하느님과 우리의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 놓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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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 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 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 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 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 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선포를 시작으로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설교와 빵의 기 적 등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호수는 북쪽의 레바논 산맥의 헤르몬 산으로부터 물줄기를 받 고 다시 물줄기를 흘려보내어 요르단 강을 이룹니다. 이렇게 물을 받기도 하고 나눌 줄도 알기에, 갈릴 리 호수는 많은 물고기들이 사는 생명의 바다가 됩니다. 이에 비해 요르단강의 종착지는 사해인데 이 사해는 염도가 높아(보통 바다는 4%인데, 40%)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해 죽음의 바다라 불리지만, 받기 만 하고 베풀 줄 모르기에, 그 스스로도 죽음의 바다가 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람낚는 어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흘러보내고 또 받을 줄도 아는 갈릴래아 호수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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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로 대변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나오는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어찌보면 그 자체로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고 결국은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참된 의미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리고 의지할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물질적인 가난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하고 원하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 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만 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이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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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타볼산에서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 세 사도에게 당신의 감추어진 신적(神的) 면모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즉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진’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이제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으로써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로 가야 함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어떤 새로움을 향해 떠나는 삶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세를 지닌 모습이 베드로의 말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기쁨과 희열의 순간에 안주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사순시기를 ‘회개와 보속’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회개를 희랍어 원어로 메타노이아 (metanoia)라고 하는데, 성서에 나오는 이 낱말의 뜻은 죄를 뉘우친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에게로 마음의 방향을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회개보다는 회심(回心)이라고 해야 더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까지의 죄 속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향해 떠나는 삶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세를 지닌 모습이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이 사순시기에는 보다 더 하느님에게로 마음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시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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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신앙인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만났던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사순시기는 교회가 신앙인들에게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실 그분을 만나기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 만났던 그분을 모든 신앙인들이 만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구체적으로 그분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에 대해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나시는 분이시지만, 구체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웃 형제들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순시기 동안 신자들에게 고통 속에 있는 이웃 형제들을 찾아보고 방문하도록 하는 것도 이러한 뜻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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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육체적 불구나 어떤 재앙이나 병고는 모두 죄의 벌로 생각하였기에 소경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죄인이오, 나는 하느님께 벌 받은 놈이오”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에게 버림받은 존재였지만 그런 소경을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그에게 다가가시어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치유를 받은 태생 소경은 예수님을 메시아이신 하느님으로 알아보았지만, 멀쩡한 눈을 가진 똑똑하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물에 대한 정보가 감각에 포착되어도 그것을 제대로 해석할 마음의 눈이 열려있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소경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눈뜬장님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시기가 깊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 모두 육적인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잘 보인다고 착각하지 말고 예수님께 매달리고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순 시기는 눈을 뜸으로서 죄를 벗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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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달포 전에 방화로 인해 소실되어 한 줌 재로 변한 남대문의 화재사고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접하는 다른 이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가끔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어두운 문을 통해서 인간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흙으로 가는가? 흙으로 가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허무인가? 하지만 ‘죽음’에 외치신 예수님의 목소리 앞에 허무는 사라졌으며 죽음 그 자체도 세력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분에게만이 참된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심은, 당신이 장차 보여 주실 그 엄청난 사건인 부활을 암시해 줍니다. 썩어서 냄새가 났던 라자로가 다시 살아났듯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죽었다가 그처럼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인류를 죽음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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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총독이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 빌라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 군중이 대답하였다. ◎ “바라빠요.” ○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 군중이 모두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 병사들은 또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낮 열두 시부터 +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그곳에 서 있던 ⊙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 ○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오늘 주의 수난 성지 주일 전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다인의 뜨거운 환영과 환대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과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 이 두 주제를 묵상합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내용의 두 복음을 듣게 됩니다. 첫 번째 복음에서 유다인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아 놓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하고 외쳐 댑니다. 두 번째 복음에서 유다인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고발하고 침을 뱉고 때리고 조롱하며 “사형에 처하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라고 거칠게 소리치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 변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 존경과 칭찬을 드리며 열렬히 환영하던 군중들이 며칠 후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증오와 흥분에 사로잡혀 생명이신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렇습니다! 미사 때마다 늘 참된 신앙인들로서 충실히 잘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우리들이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쉽게 변하는 우리들이라면 당시의 유다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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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뿐 아니라 죽은 모든 사람의 부활까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신앙인들로서 그러한 부활을 체험하며 신앙생활을 해가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육체적 죽음은 아니더라도 정신적 죽음과 부활은 체험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내게 영 끊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면 먼저 그 악습의 원인을 생각해 보며 만약 그 악습이 내 욕망 때문이라면 주님을 위해 그것을 포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한다면 욕망 앞에서 나는 정신적 죽음을 체험하면서 아울러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이루는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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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자연 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온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처럼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우리들에게 오늘 복음은 꼭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믿고, 체험해야만 믿겠다는 실증주의자들을 대신하여 토마 사도의 불신앙을 표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불신앙의 원인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기에 불투명한 인식을 토대로 착각하면서 사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씀은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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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14) |
[주간 첫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 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 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할 수 있겠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인데 그 중 첫째로 만나 뵐 수 있는 방법은 성경입니다. 두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서를 해석해 주실 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성서를 통해서, 달리 말하자면 성경을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나뵐 수 있고 그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둘째 방법은 성체 성사에서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적에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영성체 할 적에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방법은, 복음의 끝에 잘 나타나 있듯이,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와 일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방법 중에서 “빵을 뗀다”는 말로 표현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되는 다른 방법들을 종합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신자들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성서말씀을 듣게도 되고,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와 함께 머물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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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요한 6,1-15) |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 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흘리는 참된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 제 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소는 특히 빛나는 은총이며 하느님이 믿고 기대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보면 그러한 성소는 남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예전에 본당에서 사목할 때 어떤 열심한 신자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자녀 중 한 명이 성소의 길을 가려고 하였으나 한사코 반대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의 자식이면 몰라도 내 자식을 그런 어려운 길을 가게 할 수 없다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에서인데 결코 그래서는 안 되며 많은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성소라 함은 성직자와 수도자들 같이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례를 통해 그분의 자녀로 태어나 신앙인의 길을 살아가는 것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할 때 그것을 우리는 일반 성소라 합니다. 따라서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그것을 의식하며 살도록 다짐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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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2-59)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여행을 좋아합니다만 여러분은 어느 나라와 어디가 제일 가보고 싶습니까? 더 나아가서 신앙인으로서의 우리들이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물론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여러분들 중에는 “그래, 나는 신앙인이니까 이스라엘이나 바티칸과 같은 나라를 다녀오고 싶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최종 목적지로서의 나라는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러한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우리 신앙인들이 제일 가고 싶어하는 하늘나라에 가는 길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시는 길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란 어떤 길입니까? 그 길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길은 ‘하느님을 위하고’‘사람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신 예수님의 그 ‘위하여’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나만을 위함’에서 ‘서로를 위해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위해서’의 삶으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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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1-6) |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얼마 전 이소연이라는 한국 여성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러시아 우주선인 소유즈 호를 타고 우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지만, 아무튼 사람이 하늘에 올라간다는 일은 대단히 흥미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인간은 비행기를 만들었고 이후엔 우주선을 만들어서 이제는 우주여행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어도 하늘에 오르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을 어떤 물리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물리적인 승천 이상의 보다 큰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우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러시아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이 지구 궤도 저 위에 올라갔을 때 말하기를 ‘하늘에 올라와 보니 하느님이 안 보인다.’하면서 지상 관제소에 유명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백 번 맞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하늘의 어느 한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셨다 해서 그분도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승천을 통해서 실은 우리 가까이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육신의 시야에서는 사라지셨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신 것이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승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 말씀을 항상 굳게 믿으면서 우리의 승천을 위한 신앙에 더 큰 희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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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3) |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려워서 다락방에 모여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 돌아가시게 한 로마의 힘과 유대인들의 세력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있는 집안을 가득 채우며 혀같은 것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습니다. 바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후 어찌보면 바보 같던 제자들이 여러 가지 외국어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으며 로마의 권력과 유대인들의 세력이 살벌한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닙니다. 말 한마디로 앉은뱅이를 고쳐 주는 등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다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 오늘의 주님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모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또 거기서 더 나아가 견진성사를 통해 더욱 더 성숙된 신앙인으로 거듭 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을 받은 우리들이지만 많은 이들이 신앙의 기쁨을 잃고 있으며 신앙을 통해서 오는 은총의 맛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산다고 하지만 늘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문을 박차고 나와 활기차게 복음을 전했듯이 우리들도 더욱 더 열성적인 신앙인들로 변화되어야 함을 우리는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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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21,15-19)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내적인 사랑, 생명이, 우리 눈에 보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 즉, 주님의 강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게 드러났는지 알 수 있으며, 그것을 또한 오늘의 말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요한 3,16) 이렇게 사도 요한에 의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사랑 안에 서로 일치하여 계시기에 하느님의 특성은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먼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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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요한 8,34-9,1) |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의 신비와 더불어서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중심이 되는 신비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살아 있는 빵으로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 날의 부활을 위해서 당신의 몸인 성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일마다 혹은 매일 주님의 거룩한 성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격도 없는 죄인들이 감히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먹는 우리도 바로 하느님처럼 그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성체성사가 지닌 이러한 뜻을 깊이 생각하고, 또한 합당하게 성체를 배령할 수 있도록 영육 간에 합당한 준비를 항상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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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코 10,1-12)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붙어있던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공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얼핏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의 구원도 어찌 보면 목적이라기보다는 결과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단순히 아침.저녁 기도나 궐하지 않고 주일미사에나 열심히 참례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이 기도의 내용처럼 사는 생활, 즉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생활이 더 중요하며 이보다 더 값진 기도가 없고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로서 이보다 더 큰 제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성당에서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것처럼 꾸미나 그 자리를 물러서기가 무섭게 지존하신 하느님의 뜻과 교회의 뜻을 거스리는 위선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는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머리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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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오 11,25-30) |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 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 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인간적으로 보기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참으로 의외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을까요? 우선은 부족한 사람들을 뽑아야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할 것이기에 그들을 뽑으셨을 것입니다. 만일 아는 것이 많은 사람, 잘난 사람은 오만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는커녕 자신의 영광을 탐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부족한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는 생각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성직자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세례 받은 우리 모두도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로 뽑힌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비록 부족한 우리 자신들이지만 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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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오 5,27-32) |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 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박해가 와서 끌려가고 법정에 넘겨져서 혹 죽게 된다 해도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겐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박해는 없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몽둥이를 들이대며 믿음을 포기하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누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장에서 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하면 오늘 복음의 끝부분에 나오는 말씀처럼 주님께서도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심판 때에 우리를 모르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오늘을 통해서 내일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수고하고 땀 흘려서 천국에서 열매를 맺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굴속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영생에 대한 희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면 믿음으로 인해 오는 고난은 그 무엇이든지 다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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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오 6,19-23) |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은 연중 제 13주일이자 교황의 날입니다. 교황, 교회의 최고 사목자를 일컫는 이 말은 영어로는 Pope, 이태리어로는 Papa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아버지 혹은 아빠라는 아주 친근한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우리 동양권에서는 교황이라는 엄청난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최고 사목자이신 교황은 황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교회의 모든 공식 문서에 서명을 하실 때는 언제나 이렇게 하십니다. “모든 종들 중의 종인 --- 세.”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교황은 황제와 같은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종들 중의 종으로서 모든 인간들 중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늘 세계의 평화를 걱정하시면서 기도하시고, 교회의 모든 양들의 구원과 안위를 걱정하시며 교회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최고 사목자로서의 무거운 짐을 지신 교황님께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분을 비추시어 언제나 바른 판단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온 세상의 정신적인 인도자가 되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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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오 8,1-4) |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늘 김대건 신부님의 삶에 비추어서 사제로서의 제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 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하던 중 안도현 시인의 시 중 다음 구절이 떠올 랐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렇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짧지만 정말로 굵게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나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과연 뜨거운 사람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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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오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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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올 봄에 일년생 꽃들의 씨앗을 숙소입구의 작은 뜰에 조심스럽게 심었는데 결국에는 영양가 없는 거친 흙에 문제가 있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의 내용이 오늘 복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가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다 해도 그 씨를 받아서 싹을 틔우는 땅이 나쁘면 헛수고가 됩니다. 마치 농부가 땅을 쟁기로 갈고 거름을 주듯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마음을 깊이 파서 깨뜨리고 양분을 주어야만이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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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오 10,1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