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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을 통해 본 신라의 놀이문화
경주에는 발굴 및 도굴을 통하여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아직도 얼마나 많은 수의 유물이 신라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체 땅 속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신라시대의 놀이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주령구
안압지에서 발견된 주령구 복제품(국립경주박물관)
주령구 복제품(국립중앙박물관)
(진품은 관리소홀로 인하여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으나 실측된 자료가 있어 복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1975년 9월 경주의 통일신라시대 연못인 안압지(雁鴨池)에서 기묘한 주사위 하나가 발굴됐다.
높이 4.8cm에 정사각형면 6개, 육각형면 8개로 이뤄진 14면체의 주사위였다. 14면체라는 모양도 독특한 데다 각 면에는 ‘三盞一去(삼잔일거)’ ‘禁聲作舞(금성작무)’ 등과 같은 흥미로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삼잔일거'이란 ‘술 석 잔 한번에 마시기’ , '금성작무'란 ‘술 마신 뒤 소리
내지 않고 춤추기’라는 뜻이다.
이 주사위는 747∼774년에
제작된 목간이 나온 층 보다 아래에서 발견되어 주사위의 연대가 결코 목간보다 늦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앞설 수 있음을
뜻한다.
출토된 목간의 연대는, 여기에 적힌 연호, 간지를 통해서 확인된 바, 상한이 경덕왕(景德王) 6년(747)에 이르고, 하한이 혜공왕(惠恭王) 9년(774)에 걸친다.
따라서 목제 주사위의 연대는 그 상대적 하한을 경덕왕 6년에 두어도 좋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령구는 8세기 초의 통일신라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각 면에 새겨진 문구로 보아 이 주사위가 통일신라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사용했던 놀이기구라고 보고 있다.
이 주사위는 참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주령((酒令)이란 여럿이 모여 술을 마실 때에 서로 음주를 권하고 흥취를 돋우어 주는 유희를 가리키는 말이며 따라서 주령구(酒令具)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4개의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의 풍류를 잘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유물이지만 불행이도 유물 보존 처리도중 전기오븐 속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고 다행히 정밀한 실측도가 남아있어 복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주령구 출토 당시의 모습
주령구의 육각형의 면적(6.265㎠)과 사각형 면적(6.25㎠)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14면 각각의 면이 나올 확률이 1/14로 같다.
육각형면이 나올 확률은 육각형 개수(8개)만큼인 8/14, 정사각형이 나올 확률도 정사각형 개수만큼인 6/14가 된다는 것이다.
안압지 주사위는 정6면체의 3면과 3변이 한자리에 만나는 꼭지점을 변의 절반보다 6㎜가량 더 깊게 잘라서 만든 것이다.
만약에 변의 절반을 정확히 잡아 자르게 되면, 4각면 6개와 3각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를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4각면의 면적과 3각면의 면적이 큰 차이를 지니게 되므로, 던져서 얻는 경우의 수가 고르지 못하게 나온다. 안압지 주사위의 제작자가 정6면체의 꼭지점을 변의 절반보다 깊게 잘라서 6각면을 이끌어낸 까닭은 던져서 얻는 경우의 수를 고르게 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정다면체를 발견한 이는 플라톤이다. 또 14면 주령구처럼 정다면체를 변형시킨 준정다면체를 발견한 이는 아르키메데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원 저서가 소실되면서 아르케메디스의 입체는 구체적인 모양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619년이 돼서야 케플러에 의해 완전히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라는 케플러보다 무려 1000년 전인 7세기대에 정교한 모양의 준정다면체를 만들어 놀이도구로 활용했다는 얘기다.
또 하나의 주령구
우리나라에는 충남 아산시 온양민속박물관에 안압지 주사위와 똑같은 주사위가 하나 더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장장식연구관이 직접 아산으로 가서 조사한 결과 모양과 쓰인 문구
등이 안압지 주사위와 거의 똑같았다고 한다.
온양민속박물관 유물카드에
따르면 이 주사위를 수집한 것은 1977년 5월 20일. “민속품에 조예가 깊은 골동품 전문업체인 서울 아현동의 양주상회에서 샀다”고 당시
주사위를 구입한 온양민속박물관의 신탁근 고문의 말이다. 하지만 구입 그 후 이 주사위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온양민속박물관이 1977년 구입해 소장하고 있는 14면 주사위
경주 안압지에서 1975년 출토된 통일신라 주사위(복제품)와 모양이 똑같다.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이 과연 통일신라 주사위 진품인지를 놓고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장장식 연구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하루빨리 온양민속박물관 주사위의 연대를 측정하고 주사위 표면에 새겨진 서체의 특징, 각자의 기법, 명문의 문장 구조 등이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지 정교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온양민속박물관 주사위의 실체를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① 온양민속박물관 주사위가 또 하나의 통일신라 주사위 진품일 가능성
② 온양민속박물관 주사위가 안압지 주사위의 복제품일 가능성
③ 서로 별개의 것일 가능성 등이 있으니 만큼 조속하고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리라 본다.
주령구가 신라 이후 계속 전래되어 고려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사위
안압지 동편 유적지에서 출토된 뼈로 만들어진 골제 주사위
경주시 인왕동 22-2번지 일원, 즉 안압지 동편 유적조사에서 주사위가 출토되었다.
이 곳은 2007년 11월 15일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을 진행 중인데 주사위는 이 유적지의 우물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주사위와 똑같은 형태이다.
이를 보아 신라 시대에 이미 주사위를 가지고 점을 쳤거나 놀이에 사용하였음을 알게 해 주는 유물이다.
주령구가 14면인 것에 비해 이것은 일반적인 정육면체로서 주사위놀이는 이것을 던져서 위쪽에 나타난 점에 따라 이기고 지는 것을 결정하거나 점괘를 맞추는 도구이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안압지와 그 주변지역은 세자가 거주하던 동궁을 비롯한 주요 중앙
관청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연구소의 안압지 동편 발굴조사결과 동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 건물지군, 부석(敷石)시설,
담장지 등과 도로유구가 확인되었으며, 확인된 대형 건물지는 길이가 30m 이상으로 안압지의 전각 건물지와 비슷한 규모이다.
원래는 안압지와 붙어 있었을 것이나 일제시 동해남부선 철로 개설로 인하여 안압지와 분리된 곳이다.
주사위가 발견된 안압지 동편 유적지
주사위는 원래 원시인들이 미래를 점치는 데 사용한 신비한 기구였으며 옥돌이나 짐승의 뼈, 단단한 나무를 재료로 하여 정육면체 모양으로 만들고, 각 면에 하나에서 여섯까지의 점을 새긴 것이다.
각 면은 1~6개의 작은 점이 표시되어 있는데, 관례적으로 각 면의 점들은 반대편 면의 점과 합하여 1-6, 2-5, 3-4와 같이 항상 7이 된다
이 주사위의 역사는 고대 BC 이전까지 올라가는 데 그리스·로마 시대의 후반기에는 대부분의 주사위가 뼈와 상아로 만들어졌지만 청동·마노·수정·얼룩마노·흑옥·설화석고·대리석·호박·자기 등의 다른 재료로도 만들었다.
현대의 주사위와 비슷한 모양의 입방체 주사위는 BC 600년경 이후의 중국에서도 발견되었고, BC 2000년경 이집트 무덤에서도 발굴되었다. 주사위에 대한 인도 최초의 기록은 2,000년 전보다도 훨씬 이전이다.
주사위는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놀이도구로 수없이 많은 주사위 놀이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경주에서 발견된 이 주사위는 골제로 제작된 것을 보아 아마 신라가 아랍과의 문물교류를 통하여 유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윷놀이
(전) 인용사지 출토 윷판
(전) 인용사지
(전) 인용사지는 경주시 인왕동 341-3번지 일원, 즉 반월성 남쪽 문천의 건너편 논바닥에 있는 폐사지이다.
2002년 11월부터 발굴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윷판을 새긴 돌판이 출토되었다.
지금의 윷판과 전혀 다름이 없다
인용사지는『삼국유사』에 창건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고려한다면 인용사는 삼국시대인 7세기 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굴조사 결과 중심연대는 8세기 후반이다.
최근 조사결과 와적기단을 사용한 건물
등과 같이 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건물지가 확인되므로, 창건 연대가 밝혀질 가능성이 크다.
(전) 인용사지는 월성의 남쪽에 위치한 점으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가진 사찰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과 남쪽에 배치된 동서삼층석탑지와 회랑지, 연못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삼층석탑의 경우 팔부신중이 기단에 배치되었음이 확인되어 신라석탑 연구에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석탑 주변에서는 의례와 관련된 지진구가 다수 출토되어 당시 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신앙의 중심지인 절터에서 윷판이 발견되어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지금의 신앙도량인 사찰과 당시의 사찰의 역할이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불교는 민간인의 생활속에 함께하는 종교이므로 사찰내에서의 행동 역시 매우 자유로웠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 527호 단원풍속화첩의 그림 '고누놀이'
자세히 보면 땅에 그려진 그림은 고누가 아니고 윷판임이 확실하다.
윷이 보이지 않아서 고누라고 이름지었는지 모르겠으나
아이의 손보습을 보아 경상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콩윷(짜개윷)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제목도 윷놀이로 바뀌어야 하지않을까?
윷놀이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소급해볼 수가 있다. 윷판은 경북 영일군 청하면 오줌바위를 비롯해 경북 안동시, 영양군, 경주 남산과 반월성, 고령군 일대, 충북 단양군, 진천군, 울산시, 서울 북한산 등 전국 곳곳의 자연암반과 고인돌 덮개돌, 건물지 주초석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경북 고령군의 경우 고령읍 지산리, 운수면 월산리와 대평리, 성산면 무계리, 쌍림면 신당리, 송림리 등 여러 곳에 집중 분포하기도 한다.
바위에 새겨진 윷판은 빠르면 신석기, 늦어도 청동기 시대에는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암각화 및 전례되는 문헌에 등장하는 윷판은 예외 없이 모두 둥그런 모습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다(天圓地方)는 고대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북 고령 지산리의 윷판 암각화
윷판을 보면 바깥이 둥근 것은 하늘을 뜻함이요, 안이 모진 것은 땅을 뜻함이며, 29개의 말밭은 중앙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28수를 뜻하며, 중심자리와 네 귀를 빼면 24절후로 1년 기후의 변화를 뜻하고 있다고 민속학자들은 말한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하늘을 섬겼고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윷을 던졌으며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윷놀이는 단순한 놀이 차원을 벗어나 우주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정사각형 모양의 윷판은 후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바둑
분황사지에서 출토된 15줄 바둑판 (위쪽의 흰 색은 보수한 부분임)
2006년 경주 분황사에서 15줄짜리 바둑판(사진)이 발견됐다. 분황사 전역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19줄의 바둑판과는 달리 15줄이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19줄의 바둑판을 사용하였는데 신라에서는 15줄 바둑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신라에서는 효성왕(재위 737~742)에 바둑이 성행한 것 같다. 효성왕이 태자시절,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함께 궁정(宮庭)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자기가 왕이되면 잊지않고 기용하여 옆에 두겠다는 약속을 했다.
“내 잊지 않으마. 혹여 나중에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을 까맣게 잊었다. 신충은 이를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잣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다. 그리고 신충니 써 붙인 노래는 삽시간에 신라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때서야 왕은 신충과의 약속을 기억해 내고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자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738년, 역시 효성왕 때의 일이다.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두 가지를 당부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한다. 중국과 비길만 하다는구나. 그들에게 대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해라.”
그리고 “당의 바둑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다.
“(현종은) 신라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 (以國人善碁)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楊季膺)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서 나왔다.(國高혁 皆出其下) 이때 왕(효성왕)이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보물·약품 등을 하사했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효성왕조’에도 나와 있다
당시 당나라의 바둑은 최절정기에 이르렀다.
궁정에 기대소(棋待詔)라 하는 전문 기사제도를 둘 정도였다. 그랬으니 현종은 ‘바둑을 잘 둔다’는 신라사람들에게 선진바둑의 실력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자세한 승패의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당시 당나라 국수(國手) 양계응에 맞서 신라 고수들이 돌아가며 도전하는 흥미진진한 반상대결을 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신라고수들은 연전연패했다. 15줄 바둑에 익숙했던 신라의 고수들이 19줄 바둑으로 무장한 당나라 양계응에게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닌가. 어떻든 효성왕은 신라 기사(棋士)들을 ‘지도’한 당나라 사절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아마 이것이 한·중간 바둑 교류의
효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구슬놀이
반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돌로 만든 것과 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들이 있으며 흙으로 만든 것에는 구멍이 나 있고 가는 홈이 파여 있는 것을 보아 끈을 꿴 뒤 묶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명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직물을 짤 때 사용된 방추차와는 모양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어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끈으로 묶은 뒤 지금의 해머처럼 멀리 던지기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더 큰 석구는 볼링처럼 굴려서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선조들의 유물이 후손에게 남긴 재미있는 과제가 아닐까?
경주시내 왕경구역 곳곳에서 출토되는 방추차(직물을 짤 때 사용)
위 사진의 구슬모양과는 다른 형태이다.
이러한 방추차가 시내 왕경지역 곳곳에서 발견되다는 것은
추석 전 동,서부가 나누어 천을 많이 짜는 시합을 했다는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더 많은 놀이거리가 있었겠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제약하다보니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지금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유물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해석을 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을것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