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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8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18. 큰 목소리는 여러가지 재난의 근원
"당신에게 가장 맞지 않는 일은 스파이네"라고 들 말한다. 걸으면 바로 휙 넘어지고, 조금 턱이 있는 곳에서는 헛디뎌 발을 삐고, 전봇대 같은것에 자주 부딪치기만 한다. 침착하지 못하고 거동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나는 유난히 남의 눈에 띈다. 게다가 목소리가 남다른 것 같다.
흰 살갗은 칠난(七難)을 가린다고 하지만 큰 목소리는 칠난의 근원이다. 남의 흉을 보거나 험담이라도 하면 또렷하게 들리고 만다. 나쁜 짓 같은 건 도저히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도 주변에서는 나 혼자만 지껄이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래서 "이봐! 조용히 해!"라고 선생님께 나 혼자 자주 혼나곤 했다.
사촌이 고향 돗토리에 놀러 왔을 때 역에 내리자마자 "네 목소리는 2킬로 밖에서도 들릴 것 같다."며 멀리서도 내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해 나도 어이 없어 했다. 특별히 높은 톤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목소리가 공기를 관통해, 멀리 일직선으로 나아 간다.
예전에 출판파티를 할 때 사회를 부탁한 두 사람(본직 아나운서) 친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마이크를 내가 들자 볼륨을 갑자기 올린 듯 접수처까지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에, "역시 굉장하다"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고 한다.
무슨 인과인지 이런 "특이한 목소리"를 가진 내가 남보다 많이(두, 세 배? ) 말을 하니 나도 모르게 주위에 큰 폐를 끼치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의 일인데 정말 황당했을 것이다.
도쿄 요츠야에 있는 중국집에서 친구 4명과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조금만 목소리를 줄였으면 좋았을 텐데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어느새 본목소리가 나고 만다. 가게 안의 구석구석 내 목소리는 울려 퍼졌음에 틀림없다. 이야기 내용 때문인지 다른 손님들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이야기 내용은 자신의 전생(前生)을 알 수 있다는 지인 도예가의 에피소드였다.
그 지인은 우연한 기회에 초대면의 동업자와 만났는데 그 순간 둘 다 서로 흠칫하며 가위 눌린 상태가 됐다고 한다. 잠시 지그시 얼굴을 마주본 뒤 "예전에 분명히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네요" 라며 대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조몬시대(縄文時代: 만년전 토기시대)다!" 라고 거의 동시에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진지하게 말해준 지인의 그 말을 하며 "도예가끼리니까 둘이서 분명 줄무늬 토기를 나란히 만들고 있었겠지" 라고 말을 이어가는 내 바로 건너편에서 라면을 먹던 커플의 머리가 긴 아가씨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이어서 내가 다시 입을 열자마자 참을 수 없었는지 그 아가씨의 입에서 풋하고 힘차게 라면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 그 후 그 커플 사이가 만약 깨져 버렸다면 그 책임은 내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 큰목소리가 세상을 위해 남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런데 거리에서 유난히 귀를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혹시 경남 씨?' 라고 말을 걸어보세요. 분명 저일 거예요.
(1993 08 0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19. 훌륭한 남자의 극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적인 이성과의 만남,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많이 계시는 "훌륭한 남자" 중에서도 아주 멋진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만난 행복을 지금 나는 절절히 되새기고 있다.
오카모토 분야(*岡本 文弥: 日本の新内節の太夫1895~1996)씨이다. 전통적인 고전이야기 재담가 유파의 하나인 신나이(新内)의 1인자이다. 연세는 아흔아홉으로 백수(白寿)를 맞이하셨다. 처음 이름을 들은 것은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였다.
" '종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가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자신이 신나이 공연으로 표현해보려고 '분야 아리랑'을 만들었대." (*新内: 샤미셍을 연주하면서 시를 읊거나 재담을 하는 공연)
아흔아홉 살의 나이로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에 감탄했고, 게다가 종군 위안부와 관련한 작품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함께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하고 흥미가 끓어 올랐다.
마음은 통하는 것으로, 도쿄 가쓰시카의 공연홀에 출연한 분야씨에게 꽃다발을 증정하게 되어, 무대 앞에서 '분야 아리랑'을 처음 들었다.위안부가 된 조선 여성의 슬픔과 분노를 울림 있는 목소리로 샤미셍에 맞추어 절절하게 읊고있는 분야 씨.
그 가락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내 온몸에 파도처럼 밀려와 폭풍을 맞은 듯 움츠러들어 있었다. 차례가 되어 꽃다발을 안고 무대에 올라갔지만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대하자말자 감동이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준비했던 한국어 인사말이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역시 도쿄의 오쓰카에서 열린 무대를 이번에는 객석에서 다시 한번 자세히 듣고 싶어 참석했다. 무대의 분야 씨는 손으로 의자를의지하면서 겨우 일어나 위안부가 된 열여섯 살 소녀의 풀고 싶어도 풀지 못하는"한(恨)"을 전해준다.
"♪고개를 넘으면 고향입니다. 돌아갈까 돌아갈까 하며 울었어요. 이렇게 망가져 버린 몸으로 어떻게 우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무정무도를 반복해 놓고는 외면하는 일본은 어떤 나라일까. 천대 만대 오래도록(*일본국가)... 이 억울함은 잊을 수 없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연이은 또 하나의 공연 제목은 "노모어 히로시마"로, 원폭시인 도오게 산키치 (峠三吉 1927~1953) 씨의 "아버지를 돌려달라 어머니를 돌려달라..." 의 시를 원폭의 비참함을 묘사하며 읊는다. 타오를 듯한 반골의 영혼과 깊은 인간애 때문인지 아흔아홉 살의 몸에서 힘차게 분출하여 나온다.
1920년대에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신나이로 만들어 반전사상을 고취했던 분야 씨의, 시대를 진지하게 대하는 자세는 아직 쇠퇴를 모른다. 그러면서도 윤기 있고 남자다운 매력마저 풍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남자의 극치가 아닐까.
예쁜 화환 주위에 "왠지 내일의 즐거움이 기다려 진다." 라고 적힌 분야 씨의 글귀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지, 내일이 기대되고, 정말 좋은 내일을 만들고 싶다, 라고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993 08 08)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0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0. 마츠모토 선생님과 조선의 아이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48년, 무려 반세기나 되는 세월이 흐르고 있다. 어느 날 꽉 찬 만원 전철에서 일행 친구에게 "마치 복원(復員) 열차 같네"라고 비유를 하자 바로 옆에 있던 아저씨가 "도저히 그럴 나이로 보이지 않네요"라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건, 그렇다. (*復員 ふくいん: 1945년 종전과 동시에 전시에서 평시 체제로 환원)
전후 태생인 나에게 전쟁 중의 일은 모르는 시대의 일인 만큼 흥미롭다. 역사의 연결고리 속에 현재가 있고,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쟁 중 와세다 실업고의 2부 교실을 무대로 한 비화를 알게 됐다. 좋은 이야기라서 전하고 싶다. 여기는 이야기꾼 오경과 같은 역할을 할 차례다. (*林五卿1970~한국 출신 여자핸드볼 선수)
현재 사이타마현에 살고 있는 80세가 되는 마쓰모토 신하치로(*松本新八郎1913~2005 역사학자)씨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마쓰모토 씨는 도쿄제대 국사학과를 졸업하자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낮에는 대학 사료편찬소에 근무하면서 야간에는 와세다실업고 야간부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그 교실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외세다실업고의 학생이 아닌 조선 아이들까지 섞이게 되었다. 여름 활짝 열린 복도 쪽 창틀 남어로 참새처럼 줄지어 서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점차 그 수는 늘어 30명 정도까지 불어났다. 그 광경들을 잊을 수 없다고 마쓰모토 선생은 그리워한다.
이런 수업은 당시 주류였던 황국사관과는 전혀 달리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인류의 발생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은 모두 마찬가지로 역사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며, 다음에는 새로운 시대가 필연적으로 온다는, 지금은 당연시되는 사실을 아무런 주저없이 가르치는 마쓰모토 선생님에게 학생들은 신선한 놀라움을 품었다.
그러면서 열심히 듣는 아이들의 존재도 의식하면서 선생은 일본은 예로부터 한반도와 깊이 관련되어 대륙으로부터의 이주자가 문화를 창조해 왔다는 것도 가르쳤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와세다실업고는 소실되고, 마쓰모토 선생의 집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그곳에 예상치 못한 위문객들이 대거 찾아왔다. 30여 명의 조선 어린이들이다. 건네받은 두 개의 통에 쌀, 조선의 떡, 가다랑어포 등이 가득 차 있었다. 보답일 것이다. 진심이 담긴 선물이 선생님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로부터 2주 뒤 다시 그들이 찾아왔다. "선생님, 곧 우리 나라는 독립합니다. 우리는 귀국해 독립운동을 하겠습니다.” 그들의 작별 인사에 “생명을 소중히 하라”고 마쓰모토 선생님은 석별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전후 선생님은 그들의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다.
아무래도 기뢰를 건드려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한 것 같다. 패전 후 일본에서 10여 년 전까지 줄곧 마쓰모토 선생은 교단에 서서 평화를 지켜내는 신념을 관철해 왔다. 왜냐하면 헤어질 때 조선 아이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계속 마음에 새겨져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대와 마주하는 양심을 전하고 싶어 이를 포함한 좋은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책상을 마주하고 있다. 완성되는 날에는 꼭 읽어보세요(드디어 곧 발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마츠모토씨" 삼오관). (1993 08 1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1. 도둑을 향해 막대기를 내리치다
이 연재를 읽어주시는 분으로부터, "코를 베어 떨어뜨린 아버지는 잘 계시나요?"라고 물어 온 적이 있었다(지금은 물론 베여 떨어졌다 붙인 코는 잘 붙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아버지에게로 팬레터(?)도 온 적이 있다. 허당 어머니와는 달리, 뭐라해도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니까.
아버지는 평소에는 과묵하고 오로지 무서운 존재다. 지금도 아버지 앞에 나가면 이 수다쟁이인 내가 긴장해서 말도 잘 못하고 몸도 꽁꽁 얼어봍는다. 발을 씻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전의 건달패 "권팔씨"로 불렸던 아버지는 아직도 에피소드가 많다.
시골 친정에는 자주 낯선 사람이 과자 상자를 들고 찾아온다. 강물에 빠진 것을 구해 줬거나, 싸움의 중재를 하여 준 것 등등의 "미담"때문이다. 불쑥 나타나 이름도 알리지 않고 바로 돌아 가려하여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물으면 묻고물어 겨우 찾아왔다고들 말한다. 아버지의 몸속에 아직도 의협심이 연연이 흐르고 있는 것같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면 성격은 예전의 건달 기질로 확 바뀌어 수다스럽고 거친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언젠가는 만취해 소리를 지르며 경찰차의 선도로 돌아왔다. 술이 깼을 때는 아무런 기억이 남지 않으니 반성할 길이 없다.
내가 어린 시절의 일이다. 우리 집에 몇 번인가 도둑이 들었다. 장사를 하다 보니 물품이 도난당하거나 잠자는 동안 머리맡의 금고를 가져가기도 했다. 밤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는 아버지는, 긴장감과 주의력 없이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에게 자주 꾸중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창고 근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둑이다!!" 나와 어머니는 "그래" 라고 마음먹고 긴 막대기를 꼭 움켜쥐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그러자 어둠 속에 뒤돌아 앉아 있는 수상한 사람 그림자가 있지 않은가. 너덜너덜한 거무스름한 옷을 입고 머리부터 얼굴을 푹 천으로 덮고 있다. 그야말로 그림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도둑 그 자체다.
평소에는 멍하니 있는 엄마지만 여차하면 간담이 크진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는 그 사람을 향해 힘껏 막대기를 내리쳤다. "아얏"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도둑은 한달음에 도망쳐 나갔다. 공포에 떨면서도 아싸 하고 모녀가 쾌재를 불렸음은 물론이다.
무용담을 보고하려고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도 나도 먼저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아니 머리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지 않은가. "!?" 이유를 물어도 "넘어졌을 뿐"이라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와 어머니는 무심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멍청한 우리 모녀를 놀라게 해주려고 스스로 도둑으로 둔갑한 것 같다. 하지만 진실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그건 나였다"고 실토하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로, 아버지로서는 말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붙잡아 보니 내 아들'이 아닌 아버지라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도 아버지는 수많은 드라마를 계속 만들고 있을 것이다. (1993 08 22)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2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2. "영원한 남자"와의 재회
"가난뱅이 쉴틈이 없다"고 이번 여름도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 일과 관련해 이동하는 것 정도다.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다른 땅의 냄새를 맡고 바람을 맞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일 때문에 나가노로 향했다. 차례로 바뀌어 나타나는 경치를 기차 창문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8월의 태양을 받아 빛나는 해바라기 군락에 눈에 들어왔다. 전원 풍경의 단조로운 색채 속에서 유난히 선명한 그 노란색이 마음 한 구석의 기억을 소환했다.
대학 1학년 때 만난 사람이 있다. 4학년생 선배로 같은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 존경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감정은 너무 강해서 내 마음속에는 '이 사람'밖에 없다며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아리의 모두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는 과묵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쉽게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 모습만 보는 것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채워졌다
여름방학 때, 큰맘 먹고 여름문안엽서을 보냈다. 색종이를 잘게 잘라 붙이고 위에 큰 송이 해바라기를 만들어 붙인 수제 엽서였다. 가운데 꽃심은 여러 색의 색종이를 작게 썰어 하나하나 붙여 나갔다. 땀을 닦는 것도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마음의 흔적을 그 해바라기에 담았다.
방학 후 처음 만났을 때 "엽서 고마웠다"는 말을 듣고 고작 목례만을 하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 나다(마치 중학생 처럼). 말을 나눈 것은 지금까지 그 한마디가 모두였다.
대학 생활이 여러가지 일들로 어수선했던 시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 단서도 없고 행방은 더더욱 알 수 없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어렸을 때부터 형과 여동생 셋이서 힘을 합쳐 살아왔다고 들었다.
막 결혼한 여동생이 교통사고로 급서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또 그 후 행방은 묘연해졌다.
"영원한 남자"로서 내 마음 속에 계속 자리잡고 있던 그와 언젠가 재회하는 일이 있었으면 하고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었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2년 전 어느 날 밤 전화벨이 울렸다. 이름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하고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어딘가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그는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었다. 직장의 벽에 붙어 있던 신문의 인터뷰 기사에서 내 얼굴과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는 놀랐다고 한다.
내가 일을 시작할 무렵 내 이름이 언론을 통해 나오면 그가 알아챌지도 모른다, 혹시 연락을 취해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를 품었는데 그게 정말 결실을 맺어 줄 줄이야...
지금 당장 가겠다고 하고 나는 집을 뛰쳐나갔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빨리 만나서 현실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으면 또 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은 계속 터질 것 같았다.
역에서 만나 꿈같은 재회가 성사됐다. 20년 가까운 시간의 흐름이 단번에 역회전한다. "그때 해바라기 여름문안엽서, 지금도 가지고 있어." 라는 그 말에 내 청춘의 공백이 드디어 채워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남의 불가사의는 하늘과 통하는 법인가 보다. (1993 08 29)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3. 결실을 본 집념의 캐리커처(초상화)
야마우치 죠지 씨(*山内譲二1940~)씨는 글자를 동물로 디자인하는 이모티콘으로 알려진 만화가다. 몇 년 전 죠지 씨를 만난 덕분에 나는 첫 번째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여행 잡지에 연재한 나의 기행문을 책으로 내기위해 출판사에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늘 운동화 차림의 죠지 씨의 풋워크는 뛰어나 무엇을 부탁해도 두말없이 맡아준다. 절친 세탈린의 모국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도 순식간에 이뤄졌다.
게다가 크메르 문자를 형상화한 동물 그림을 그림엽서로 만들어 세탈린이 만들던 캄보디아어 사전 출판 비용까지 염출해 냈다. 세탈린이 캄보디아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교과서,
글자표의 일러스트도 도맡아 주었다.
방글라데시의 친구를 소개했더니 고아원 건립을 위해 어느새 벵골문자 그림엽서를 만들어 주었고, 지금은 일본과 한반도의 우호를 기원하며 한글문자 동물그림을 제작 중이다.
언제 본업인 일을 하고 있을까, 자원봉사만 하고 생활은 괜찮을까 하는 주위의 걱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사, 모임, 술자리에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밀 정도로 여유를 보이며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죠지 씨이다.
좋은 일을 해 주었다는 표를 전혀 내지 않고, 상대에게 조금도 부담을 느끼게 하지 않는 점에 언제나 감탄하게 된다. 반면 나는 평소 받고 있는 은혜를 까맣게 잊고 있다.
그런데 그 죠지 씨에게 재난이 닥쳤다. 운명의 신은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짓을 하나보다. 어느 날 밤 거나하게 취해 걷고 있었는데, 일방통행 길을 잘못 들어온 차에 뒤에서 받쳤다.
운전자는 일단 내렸다가 틈을 보고는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인근 파출소를 찾아가 신고했지만 차량번호를 모르면 찾을 수 없다며 차갑게 대응했다.
그렇다면 스스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며 풋워크가 가벼운 죠지 씨는 차에 부딪혀 불편해진 오른손으로 남자의 캐리커처를 바로 그려내 빗속을 상처 입은 다리를 끌고 다디며 붙혔다고 한다. 그 집념의 수사활동(?)이 주효해 수상한 인물이 가시화하였다.
인근 주민들로부터 근처에 사무실을 가진 사람을 쏙 빼닮았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그 사람은 캐리커처가 붙은 이후 한 달 동안 밤중에 몰래 나올 뿐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시험 삼아 캐리커처를 떼자 두리번거리며 낮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설마 그도 차에 부딪힌 사람이 프로 만화가였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기를 쏙 빼닮은 캐리커처와 처음 대면했을 때는 필시 놀라워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죠지 선생님 정말 멋지게 해 내셨습니다.
(1993 09 0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4(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4.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전화벨에 수화기를 들자 귀여운 통통 튀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저요, NHK에 합격했어요!" 아... 대학 4학년 유카 양으로부터다.
"경남 님이 꿈은 포기하지 않으면 꼭 이루어진다고 말해준 덕분입니다." 예전에 언론계를 지향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석한 모임에서 강연을 할 때 맨 앞줄에서 한마디 한마디 빠뜨리지 않겠다고 열심히 들어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잘 됐어요. 이제부터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내 목소리도 들뜬다. 취업시험은 어디서나 아웃이라고 들었던 만큼 좌충우돌 기사회생 홈런에 박수다. 내 이야기에 힘을 얻었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다.
확실히 내 수다에는 상대에게 활력을 생기게 하는 약효(?)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나 자신에게도 효과가 있었으니까... 이번 여름 고시엔 대회에 나의 모교 돗토리 니시고(鳥取西高)가 출전했는데 재작년 가을 나는 모교 문화제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살아 있음을 잊지 말아야지"였다. 올해로 창립 125주년을 맞는 전통있는 학교에 다닐 때 나는 신통치 않은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연단에 오르다니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
살아 있음을 잊지만 않으면 공부를 못해도 어떤 실수를 해도 괜찮다, 뭐든지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스스로는 생각지도 못한 힘이 잠재적으로 있으니 꿈을 갖고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천육백 명이나 되는 후배들 앞에서, 내 입에서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어쨌든 뛰어난 사람과는 거리가 먼 내가 "나를 봐요" 내가 그 본보기 같은 것이니 무슨 말이든 설득력이 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학생들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단상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후일담이지만, 강연 내용을 교내지에 기고해 달라는 의뢰가 있었고, 그 때문에 보내온 자신의 강연 녹음테이프를 듣게 되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싫은데, 하물며 강연 내용을 다시 듣다니 섬뜩하다. 마침내 마감일이 지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조심조심 테이프를 돌렸다. 그 무렵은 대인관계의 피로로 인해 내 정신 상태는 최악이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마음을 참으며 억지로 듣고 있었지만, 그러다가 점차 나는 그래,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에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 들었을 때는 "좋아, 지지 말고 힘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이 용기를 얻고 격려를 받다니 어이가 없지만, 과연 이것은 정말로 힘이 난다고 몸소 실감한 것이다.
그런데 까불이인 나는 모교 강연 때 끝나고 행사장을 나설 무렵, 예기치 않게 일제히 일어나 보내준 후배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에 그만 감동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여러분들, 다음에는 아쿠타가와상이나 나오키상을 받고 또 올게요!" 한층 고조된 함성을 뒤로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진짜 덜렁이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약속했는데 조만간 소설에 도전해 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면 않될 일이란 없다, 하지만 에구머니나, 무엇을 쓸까(이 칼럼을 읽은 한 여성 편집자가 얼른 찾아와 주었다.
"경남 씨, 저와 아쿠타가와상이나 나오키상을 받읍시다" 라고 말하면서. 일러스트레이터 구로다 세이타로(*黒田征太郎1939~) 씨가 책 장정을 해주기까지도 결정됐다. 이제 내가 쓰기만 하면 돼.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말이 있지만... ) (1993 09 12)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5(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5. 인품은 안으로부터 빛난다.
만남의 인연 속에는 에이(永) 씨가 있다. 몇 번이나 신세를 지고 있지만, "만남의 달인" 에이로쿠스케(*永六輔1933~2016방송작가)씨의 주선으로 가나가와현 하다노시(神奈川県秦野市)에 있는 미즈노에 타키코(*水の江滝子1915~2009 여배우) 씨의 집을 방문했다. 전망이 좋은 산 중턱의 단층집이었고, 애완견 여섯 마리가 일제히 반겨주었다.
"도저히 일흔여덟 살로 보이지 않지요." 라며 장난기 가득하고 밝게 말하는 미즈노에 씨는 매우 건강하고, 넋을 잃을 정도로 예쁘다. 같은 여자로서 나도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어렸을 때 TV에서 보아왔던 "제스처"의 타키씨라는 이미지가 강하지안 훨씬 윗세대에게는 송죽가극단(*松竹歌劇団1928~ 1996)에서 큰 인기를 얻은 대스타로 알려져 있다. 또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郎1934 ~1987배우) 씨를 비롯해 많은 스타를 키운 일활(日本活動写真株式会社의 약자)의 명 프로듀서로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은 수다를 삼가하세요" 라는 에이 씨의 엄명(?)에 따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얌전하게 맛있는 집요리를 먹으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 특히 인상에 남는 이야기가 있었다.
전쟁 중의 일로 당시 타키 씨는 극단 "단뽀뽀(민들레)"를 결성해 활약하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경위였는지(탄광 합숙소를 도망쳐 왔는지), 쫓겨서 갈 곳 없이 찾아온 조선 남자들의 식사와 잠자리 등을 제공하며 남모르게 도와 줬다고 한다.
말도 통하지 않고 작업복 차림인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만난 부처님 같았을 것이다. 그 수는 열 명 이상이나 되었다. "국적 불문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타키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녀의 말을 이어받아 에이 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당시 도움을 받은 사람이 저명한 음악가가 되어 울 2월에 개최된 미즈노에 씨의 "생전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서 왔다. 그는 에이 씨에게, 그녀는 성격상 그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그 은혜를 얼마나 고맙게 느끼고 있었는지를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고 한다.
타키 씨는 전쟁 전 미국을 방문해 흑인 차별의 심각성에 분노한 것을 체험의 하나로 이야기해 주었다. 인종, 민족을 넘어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기는 쉽지만 일상에서 실천하기는 어렵다.
며칠 전 일본인 지인이 노래방 스낵에서 분개하는 일이 있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자리를 같이 했던 재일교포 여성이 돌아간 뒤 친구 사이로 보이는 젊은 일본 여성 두 명이 "뭐야,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좋을 텐데..." 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체로 그런 대화를 할 때는 얼굴이 험악하고 싫은 표정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그 이야기를 수화기 너머로 들으며 타키 씨의 풋풋한 미소를 떠올리게 되었다. 속 마음은 지절로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그 사람 자신의 성격과 상관없는 부분에서 '차별'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묶고 얼굴까지 일그러뜨리고 만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첫걸음은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닐까.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빛남은 나이에 상관없이 퇴색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미즈노에 씨를 만나 그것을 체득했다. (1993 09 19)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6. 가족이란 피의 연결뿐인가?
돗토리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는 남동생으로부터 첫아이인 딸이 태어났다는 전화가 왔다. 동생의 아내는 신장이 나빠 출산이 걱정됐다. 체중 2,200그램으로 정상 체중에 조금 미달한 아기라도 모자 모두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아, 정말 다행이다" 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배불뚝이에 실눈인 남동생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지만(다행히 아기는 엄마를 닮았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비슷한 생각으로 "아, 정말 다행이다" 하고 TV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화면에는 동생의 아이가 태어난 같은 병원 현관 앞을 자기 아이를 안은 엄마가 기쁘게 퇴원해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돗토리의 산원에서 신생아가 사라진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사건이 해결되고, 부모에게로 무사히 돌아온 아기 하나이 타쿠마(花井琢磨)가 검사를 위해 입원했다가, 마침내 가족들만의 생활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나는 타쿠마의 할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는 서점의 사장님과 아는 사이로, 하나이 씨 가족의 상황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런 만큼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사장님 앞으로 편지를 냈더니 답장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신에게는 손자가 돌아왔지만, 상대(범인)의 조부모는 손자를 잃은 것이 되는 거죠, 라고 타쿠마의 할아버지는 말했다고 한다.
아기를 훔치는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 범인 부부에게는 "아이는 아직?" 이라는 주위의 목소리가 유무형의 압력이 되고 있었다고 들었다. 말하는 쪽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도 듣는 쪽에는 부담스럽고 마음 아프게 들릴 수 있는 법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겨야 마땅하고, 더욱이 피가 이어진 친자식이 좋다는 생각은 모두들에게 뿌리내리고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해방된다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을 결속하는 것은 정말 "피의 연결" 뿐일까. 가나가와현 에비나시(神奈川県海老名市)에 사는 오자키(尾崎)씨 일가의 이야기이다. 항공사를 퇴직한 뒤 목사의 길을 택한 오자키 후고(尾崎風伍 63세), 마리코(62세) 부부는 베트남전이 격화되던 1968년 베트남으로 건너가 남녀 한 명씩의 베트남 고아를 거둬들였다.
그후 성장한 아들은 구청 공무원으로, 딸은 보모가 돼 건강하게 일하고 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리집 식구들은 흥미로은 가족이다. 네 사람 모두 다른 집에서 태어났지만 한 가족이 되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리코 씨가 조심한 것은, 두 아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친부모가 죽었고, 태어난 나라는 베트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대했다는 점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오히려 자연스러운 부모 자식 관계가 생겨났다. 이러한 자세는 억지로 노력해서 마늘서진 것이. 아니고 서로 의 진짜 모습을 인정하며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혈연 가족이니까 애정이 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한발 더 벗어나 다시 한 번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진정한 애정이 생긴다고 봐요." 라는 마리코 씨의 말이 나의 마음 속에 오래 새겨져 있다. 혈연관계에 연연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1993 09 26)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7. 가와사키→오사카, 고행의 하루
태풍의 영향으로 신칸센이 운휴라는 뉴스가 나왔다. TV 화면을 보면서 지난 여름의 잊지 못할 8월 6일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이른 아침에 일어난 사고로 도쿄, 오사카 간 신칸센은 모두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는 저녁까지는 어떻게든 오사카에 도착해야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파란만장한 날이었다. 당일 두 강연회가 오사카와 가와사키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겹치고 말았다. 그것을 깨달은 것이 3주 전이다. 황급히 어느 쪽인가 일시를 바꾸려고 했지만, 쌍방 모두 무리라는 대답이었다. 손오공처럼 털을 뽑아 분신의 술수를 부릴 수도 없다. 난감해진 끝에 가와사키를 오전, 오사카를 저녁으로 하는 것으로 타협이 되었다.
가와사키에서 학교 선생님들 앞에서 평소처럼 강연을 한 후, 고타마(*신간센이름)가 시즈오카까지는 운행한다고 하니 어쨌든 신요코하마역으로 서둘러 갔다. 나머지는 재래선을 갈아타고 오사카로 가면 어떻게든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고타마에 타자마자 깨달았다.
일단 타기까지가 한고비였다. 이미 사람들로 넘쳐나는 승강구에 몸을 넣으려 하자 "이제 더 들어갈 수 없어요!" 하는 소리가 날아온다. 이쪽도 포기할 수 없어 필사적이다. 몸을 간신히 밀어 넣지만 다리는 공중에 뜬다. "이봐요, 밀지 마" 라고 고함을 지른 사람의 얼굴이 눈앞이다.
극한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밀폐된 공간 속에서 각자의 인간성이 엿보여 흥미롭다. 이기적인 사람, 상냥한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등등. 시즈오카까지 약 두 시간 동안 주위의 만원 승객들을 나름대로 관찰하면서 꽉 막힌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재래선에서 두 시간 가까이 다시 참을 인(忍)자 하나로 일관하여 겨우 도요하시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오사카 쪽으로 가는 고타마가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사람이 많아서 개찰구는 입장이 금지되어 있지 않은가. 그자리에서 줄곧 40분이나 기다려 겨우 대망의 신칸센에 올라탔다. 열차 내의 살짝 튀어나온 판에 걸터앉아 옆에서 똑같은 형상으로 앉아 있는 칠십대 노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침 첫 신칸센 노조미호로 도쿄에서 시코쿠로 갈 예정이었다는 그 노부인은 아이를 다 키워내고 겨우 친구와 여행할 수 있게 됐다며 웃는다. "과로로 오십대에 돌아가신 남편과 지금 함께 여행을 하며 경치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슴에 달고있는 로켓(*사별 남편의 사진)을 살짝 보여주었다.
혼란과 피로의 소용돌이 속에서 훈훈한 마음을 내 가슴에 펼쳐준 작은 만남이었다. 신오사카 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무렵이었다. 당연히 강연회는 취소되어 있었다. 마중 나와준 주최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악몽 같은 하루도 지나고 보면 그립다. 인내의 레이스를 완주한 듯한 만족감마저 든다. 그리고 짜증난 인간들 속에서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던 그 노부인의 수줍은 고요한 미소도 잊기 어렵다. 분명 오늘도 그날과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열차 운휴 드라마가 생겨났을 것이다. (1993 10 0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8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8. 침을 맞은 큰 충격
사람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 있다. 나에게는 바늘을 사용하는 일이 적성에에 맞지 않는다. 행동거지가 허술해서인지 치마 자락이 자주 풀린다. 하지만 이를 손보려면 바늘을 사용해야 하나 바늘이 겁나서 바느질은 물론 잘 못한다. 이를 보다 못한 이웃 친구가 한꺼번에 해준다.
주삿바늘은 보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든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나는 자주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왕진을 온 의사가 주사기를 꺼내자마자 김장독 속에 숨은 적도 있었고, 병원 진찰실 창문으로 맨발로 도망 간 적도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신체검사가 있어 주사를 맞아야 했다.
"이걸 해야 입학이 가능한가요"라고 정색을 하고 물은 나는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을 듣자 순간 대학을 포기할까 진심으로 고민했을 정도다. 그런 나였기에 빳빳하고 긴 탄력을 가진 여러 개의 바늘을 몸에 박아 넣는 침구(鍼灸)의 그 침과는 영원히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 그런데도, 그런데도...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일이다.
어제 집 근처 캄보디아 음식점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는 설마 내가 침을 맞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친한 캄보디아 여성 세탈린과 공통의 친구인 침술사 토미타 씨로부터는 자주 가게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어제는 특별히 요통이 심해 토미타 씨가 평소처럼 치료해 준다고 해서 부랴부랴 외출한 것이다. 가게에 손님이 없어지자 나를 긴 의자에 업드려 눕게 했다. 어엿한 여성이지만 권투선수로 오인받은 적이 있다는 토미타 씨는 굵은 팔을 뻗었다. 그런데 그녀의 오른손에 침을 들고, 왼손으로 몸을 꾹누르니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이거야말로 도마 위의 생선 신세가 아닌가. "그만 둬요" 라는 내 비명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글쓰는 일을 하려면, 체험이 제일이니까 일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라며 토미타 씨는 참으라고 한다. 울상이 된 나는 "싫다, 싫어, 그렇다면 글쓰기를 그만두겠다"고 말하지만 전혀 들어 주지 않는다.
"친구인 아저씨가 침을 맞은 후 왠지 갑자기 여장(女装) 취미로 바뀌었대. 아하하하." 라고 옆에 있던 세탈린의 쾌활하고 밝은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그런 건 싫어, 나도 여장 취미가 되면 곤란해." 스스로도 영문 모를 호소를 하며 저항을 시도했지만, 토미타씨의 박력 앞에, 마침내 등과 다리에 열두 개나 침을 맞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침에 놀란 충격 때문인지 요통도 날아갔다. 지금 나는 침을 맞은 후의 통증으로, 이미 머릿속은 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 원고지를 응시하며 연필을 잡아도 침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여장 취미로 바뀐 아저씨처럼 뭔가가 확 바뀐다면 혹시 허당, 태만, 수다가 나아질 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지금으로서는 연필을 드는 것 이외에는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허당을 할 여유도 없이 그저 묵묵히 일을 하고 있으니 효과가 있었다는 것일까. 아, 하지만 또 깊이 맹세한 것이 있다. 되도록이면 생전 이 세상에서 좋은 일만 하여 지옥의 바늘 산에는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1993 10 10)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2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29. 절친에게 노래해 준 백룡
" '웃어도 좋고말고' 프로그램에 출연 축하드립니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모리(*タモリ1945~배우, 사회자) 씨가 수북이 쌓인 축전 더미에서 맨 위의 한 장을 집어든 순간 앗! 분명 내(우리) 것이다" 라는 예감이 적중했다.
어제 가슴 뛰며 보낸 축하꽃과 함께 보낸 전문이 읽혀진다. 숨이 멎을 것 같다. 또한 가득 채워진 꽃들 속에서 '경남 씨로부터'라는 이름이 읽혔다. 반갑다. 계속 가슴의 고동은 높아진 채로이다.
"그렇지, 두 사람의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았으니까." 나는 TV 화면을 향해 사진꽂이 속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진에는 프로그램 게스트인 백룡(白竜-ハクリュウ-1953~재일교포 배우, 가수)과 2년 전 암으로 타계한 절친이 나란히 담겨 있다. 그녀의 웃는얼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만남" 이라고 한다면 백룡과의 만남만큼 잊기 어려운 것은 없다. 최근에는 배우로 잘 알려져 있지만 10여 년 전 백룡은 록 싱어로 활약했다. 나의 절친은 그의 열렬한 팬으로 콘서트 때마다 달려갔다.
백룡이 배우 활동 쪽에 진력하면서 연주 활동을 그만두고 나서도 테이프로 그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유방암이 뼈로 전이돼 보행이 어려워져 집에 머물 때 그녀가 문득 내뱉은 한마디가 내 마음에 꽂혔다.
만약 백룡이 언젠가 다시 콘서트를 열게 되더라도 더 이상 나는 그곳에 갈 수 없겠구나, 하는 그녀의 깊은 체념의 말이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괜찮아. 백룡 콘서트를 여기서 하면 되니까”라고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지만 나에게는 아무 믿을 구석도 없었다. 그런데 그 한 달 후, 정말 우연히 한 파티장에서 백룡을 만난 것이다. 주저 없이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 절친한 친구를 위해 노래해 달라고 나는 정신없이 부탁하고 있었다.
백룡은 부질없는 제 소원을 "좋아요. 내일 가겠습니다" 라고 답하여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기타 하나를 들고 그녀의 방을 찾아준 것이다. "꿈만 같다"라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언제나 냉정하고 당찬 절친의 흥분과 기쁨이 전해져 온다.
백룡은 조용한 오후,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주었다. 천성의 맑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 퍼진다. 차례차례 그녀가 좋아하는 곡들이 기타 반주를 타고 불리면서 그야말로 꿈같은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박수를 친 뒤 "살아 있으니 이런 좋은 일도 있네" 라며 그녀는 감동하며 말했다. 이런 백룡의 마음가짐을 내 책에서 소개하자 백룡 CD가 없느냐는 문의가 많이 들어왔다.
곧 절친의 마음을 감동시킨 백룡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후지TV의 명프로듀서였던 요코자와 타케시(横沢彪1937~ 1911) 씨의 음반회사 "미디어 레모라스" 에서 10년 만에 백룡이 음반을 낸다고 한다. 꼭, 꼭 들어주세요. (1994년, 10월 21일 D 싱글 「사랑하는 게 아니야」발매) (1993 10 17)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30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30. 상냥한 엄마 말(馬)의 애정
천황상을 시작으로 국화상, 아리마 기념 등등, 드디어 경마의, 가을 GI 레이스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의 한때의 꿈을 빨아들인 수백억 엔이나 되는 마권이 술렁임과 함께 팔려 나갈 것이다.
한 번쯤 경마장에서 관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다. 기껏해야 TV로 보는 정도다. 경주만을 위해서 단련된 서러브레드(*경주마 품종명)가 화창한 무대에서 질주해 가는 모습은 생동감 넘치고 아름답다.
그 말들이 스타라면 시정 속에 파묻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빛나게 살고 있는 말(馬)이 있다.
작년 여름, 일 때문에 홋카이도의 히다카(日高)에 갔다. 일본 경주마 대부분이 이곳에서 탄생한다. 좌우로 드넓은 목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일명 서러브레드 긴자를 차로 달렸다. 여기저기서 풀을 뜯는 말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サラブレッド銀座: 국도 235호선에서 산간부로 향하는 지방도 209호선을 따라 약 8km에 걸쳐 이어지는 목장 거리는 1초메부터 6초메까지 있으며, 1000마리 이상의 서러브레드가 내일의 명마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서러브레드 긴자 입구에는 주차공원이 정비되어 목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와 말굽형 벤치, 레스트하우스 등 히다카 뷰 포인트로도 선정되어 있어 촬영 명소가 되고 있다).
그 유명한 오구리 캡이나 하이세이코도 어느 마구간에 있을 것이다. 곧은 길을 오른쪽으로 꺾어 목표로 하는 니이카프죠(*新冠町-にいかっぷちょう: 北海道の日高振興局中部にある町. 日本有数の軽種馬産地) 목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키우는 암말 미호아르단호(17세)를 만나는 게 목적이었다.
목장주 모리나가 마사시(森永正志) 씨가 고삐를 당기자 마구간에서 미호아르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에서 말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큰 몸집에 순간 주춤했지만 눈동자의 부드러움에 긴장이 풀린다. 고삐를 풀고 천천히 걸어 풀이 있는 쪽을 향해 가는 미호아르단.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지만 그 암말의 두 눈 모두 전혀 시력이 없다. 모리나가 씨는 25년 전 직장을 퇴직하고 목장을 열었다. 처음 구입한 번식 암말의 셋째가 미호아르단이었다. 말모습이 특별해서 기대를 담아 가와사키 경마장으로 보냈다.
데뷔전을 앞둔 어느 날 아무래도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보고가 왔다. 육성장에서 다른 말과 부딪혔을 때 시신경을 다쳤던 모양이다. 이런 경우 말은 ‘처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모리나가 씨는 차마 미호아르단을 처분할 수 없었다.
그 말과 모리나가 씨 일가와는 가족과 다름없는 삶이 시작됐다. 딱 한 번 짓궂은 말에 쫓겨 하수구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언덕이나 턱이 있는 곳은 조심스럽게 걸었고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은 전혀 없었다. 다만 사끼 낳기는 힘들어 여러 번 실패하고 포기할 뻔한 참에 수태에 성공, 미호 타이거가 태어났다.
다른 말들은 자기 새끼를 잘못하어 밟거나 차서 죽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미호아르단은
절대 새끼를 밟지 않았고, 아주 소중히 돌봤다고 한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새끼가 커서 곁을 떠나게 되자 걱정하고 으르렁거리며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계속 돌았다. 보다 못한 모리미즈 씨는 새끼에게 방울이 달았다. 항상 방울소리 뒤를 따라 걷는 엄마 말. 그 어미말의 애정에 보답하듯 미호타이거는 공영 홋카이도 경마에서 적수 없는 11승을 거뒀다.
보통 말은 자기 새끼 외에는 돌보지 않는다. 그런데 미호아르단은 다른 새끼말에 대해서도 상냥하게 돌본다. 모리나가 목장의 새끼말들을 돌보는 것은 미호아르단의 담당이다. 지금도
미호아르단은 그 고요한 눈빛으로 목장의 새끼말들에게 아낌없는 모성을 쏟고 있을 것이다.
(1993 10 24)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3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31. 만남을 계속하는 소중함
"요즘 젊이들은..." 이라는 말을 들으면, "요즘 어른들은..." 이라고 반사적으로 생각해 버린다. 어른들은 언제나 단정짓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이는 젊은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변한 것은 없다(물론 시대에 따라 풍속, 취향의 차이는 있지만).
3, 4년 전, 우연한 계기로 라디오 프로그램의사회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 재일 외국인 문제, 국제화에 대한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자 젊은이들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한 좋은 편지가 많이 전해졌다. 그걸 남겨두고 싶어서 처녀작 '꿈이여!' 를 출판했는데, 그것을 읽은 친구사이인 한 신문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물었다.
"지금의 일본에 이런 제대로 된 젊은이가 정말 있어?" "당연히 있지. 어른이 전해야 할 말을 전하지 않았을 뿐 진정으로 대응하면 제자리로돌아오는 거니까." 많은 젊은 사람들을 만났고 지금도 그것을 실감하고 있다.
내 저작을 여름방학 과제 리포트에 다루어 준 명성대학교 사학 강좌에 초빙받아 다녀왔다. 3일 연속 네번의 수업으로 편도 두 시간, 다른 일을 포함하여 빡빡한 스케줄이기도 해서 솔직히 기진맥진했다.
"자, 자 다음 교실" 이라고 재촉하고 있는 담당 교수의 모습을 아귀! 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대학생들과의 만남은 라디오에서 젊은이들과의 교류를 떠올리게 해주고, 그들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기대를 새삼 안겨준 것 같다.
첫 번째 강의는 대교실. 학생들은 분산돼 있어 교단에 서면 맨 뒤에 앉아 있는 학생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공교롭게 마이크가 고장났다고 해서 교단을 내려와 가운데로 나갔다. 그리고 가까이 모여 달라고 호소했다.
"저기, 떨어져 있으면 목소리도 잘 않들리겠지만, 마음이 닿지 않는 것 같아요. 모처럼의 만남인데 다 같이 라이브처럼 해요." 뒤에 있는 남학생들에게는 이리 와라며 옆까지 가서 데려왔다. 다들 "이게 뭐야"하고 당황하면서도 내 기세에 눌렸는지 둥그렇게 둘러싸 주었다.
만남이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재미없다.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이기 때문에, 확실히 서로가 동료 일체감으로 대화하면 좋지 않은가. 이야기 내용에 따라 학생들의 얼굴 표정이 달라진다. 그것을 느끼면서 나도 이야기를 이어가고 마음을 주고 받는다. 말하기, 듣기라는 것은 공동 작업이라고 절실히 생각한다.
내 손에 듬뿍 전달된 학생들의 리포트를 읽으면 과거의 역사와 그에 이은 '지금'이라는 현실의 당면문제를 생각하고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든 만들어 나가자는 기개가 전해진다.
"이제 과거의 일은 도저히 취소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일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의 세대에게 진짜 사실을 알려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대를 초월해 계속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또 다시 알게 되었다. (1993 10 31)
● 언젠가 만날 수 있다 32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32. 멋진 낭만의 나그네
이렇게 멋지게 선입견을 뒤집은 적은 없다. 탐험가 세키노 요시하루(*関野吉晴1949~) 씨를 만났을 때 지금까지의 가치관이 뒤집힐 정도로 놀랐다.
히토쓰바시대학 시절 고무보트로 아마존강 6천km를 탐사한 이후 20년간 29회, 통산 9년 넘게 아마존 원류, 중앙안데스, 기아나 고지, 파타고니아 등을 답파해왔다는 프로필에서 자못 용맹한 산사나이 같은 사람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세키노 씨는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미남(!)으로 몸매도 호리호리하고 우락부락한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세키노 씨가 이달 중 무려 7년에 걸쳐 인류 4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파타고니아에서 인류 발상지 아프리카 중서부 오르두바이 계곡까지 도보로 5만km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인류 4백만 년이 뭐예요?"라고 첫마디로 먼저 물은 나의 질문에 세키노 씨는 학교 선생님처럼 알기 쉽게 순서에 따라 설명해 주었다. 연필로 받아 적는 나는 완전히 학생이 된다(이런 선생님에게 배웠다면 성적도 올랐을 것이다).
원래 아프리카에만 살던 인류가 4백만 년이 걸려 지구상에 퍼져 나간 것, 1만 년 정도 전에 겨우 남미의 최남단 파타고니아에 도달한 것, 결국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의 기원까지 20억 년 전! 등의 스케일이 큰 이야기가 계속된다.
세키노 씨의 여행은 그냥 지나가는 것만은 아니다. 20년간 다닌 남미에서는 자연 속에 파묻여 살고 있는, 아마존 원류(源流) 지역인 마치겡가족이 살고 있는 곳에는 자주 다니며 함께 살았다. 구석기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이 아는 외지인은 세키노 씨뿐으로 마음속 깊은 곳까지 통할 수 있는 유대가 생겼다.
함께 생활하면서 혜택만 받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답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아이가 간단한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가까이서 보고 그곳 사람의 건강관리를 해주고 싶다며 의료를 익히기로 결심했다.
세키노씨는 대학의 의학부에 다시 들어가 외과의사의 면허를 취득한 후 병원 근무를 경험하고는 남미로 가는 생활 패턴이 반복됐다. 그건 그렇더라도 엄청난 활력과 낭만의 소유자다. 일상생활에 쫓기는 보통사람들에게는 꿈꾸기 힘든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인류에게 있어서 진보란 무엇이었는가" 라는 물음을 여행을 통해서 생각하고 싶다는 세키노씨. 이번 7년이라는 여행 예정이 늘어나 10년이나 15년은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여행하다 겅우에 따라서는 그곳에 정착해 버리기 때문이다. 세키노 씨 마음 속에는 시간은 느긋하고 태고의 흐름인 것 같다. 부인과 두 살짜리 장녀를 일본에 남겨둔 채 떠나는 여행. 정기적으로 일본에 돌아온다는 말에 안심이 된다.
선물한 졸저 "두둥실 달이 뜨면" 을 마젤란 해협 위에서 읽어 보겠다고 한다. 머나먼 해협에 오르는 달을 나도 함께 볼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고 있다. (1993 11 07)
● いつか会える 33 (在日 作家 朴慶南1950年生)
33. 통일에 대한 뜨거운 마음
무대 위에서는 곤도 도시노리(*近藤等則1948~2020) 씨가 땀을 심하게 흘리며 트럼펫을 불고 있다. 온 몸과 마음이 소리가 되어 터지는 듯한 강렬한 울림이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온 사물놀이패 네 명. 각자 민속악기를 리드미컬하게 치고 있다.
대지에서 솟아올라 하늘로 메아리치는 듯한 토속적인 박력이 대단하다. 그 옆에서 고도(鼓童
-こどう)에서 독립해 솔로 활동을 시작한 레나드 에토 씨의 일본 북의 북채가 춤을 춘다. 부딪치는 여러 소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단련된 그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 동작, 한 동작이 심장의 깊은 곳까지 울린다.
(*鼓童: 新潟県佐渡市小木を拠点に国際的な公演活動を展開するプロ和太鼓集団である。設立は1981年)
이 장면을 구로다 세이타로 (*黒田征太郎 1939~ 맨손화가) 씨가 큰 캔버스에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통째로 물감을 드리우고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반죽하듯 칠하는 모습은 그린다기보다는 장난친다는 느낌으로 생동감이 전해진다.
10월 17일 오사카 핫토리 녹지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원코리아 페스티벌’의 한 장면이다. 사회자로 단상에 있던 나는 연주가 듣고 싶어 객석으로 내려 갔다. 오후 3시 개막 후 4시간 이상이 지나 8시 피날레를 눈앞에 두고 밤의 정적은 뜨거운 흥분으로 휩싸여 있었다.
올해로 9회째를 맞는 이 페스티벌의 실행위원장은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교포 3세 정갑수
(鄭甲寿1954~)씨. 남북으로 분단된 채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노래와 음악 연주를 통해 먼저 일본 땅에서 하나가 되고자 기획된 행사이다.
지금까지도 출연자는 남북 양측의 음악가들, 재일교포 2세, 3세의 뮤지션, 그리고 일본인 연주가들과 다채로운 면면이 모두 도시락을 싸들고 달려와 무대를 고조시켜 왔다.
나는 이번이 첫 도우미 활동이었다. 학교축제같은 아마추어 스태프가 '원코리아'라는 기치 아래 이렇게 큰 이벤트를 성공시키는 것에 무엇보다 감탄했다. 뭐든지, 노력하면 할 수 있다.
가슴을 뜨겁게 달군 것은 이를 위해 한국에서 온 여의도 어머니 합창단과 오사카 거주 어머니 합창단이 함께 "우리의소원"을 합창했을 때다. 통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멜로디를 타고 퍼져 나간다. 노래가 끝나고 서로 껴안는 어머니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지막은 특별 이벤트로 마술이 진행되었다. 무대 위의 철창에서 언제 빠져나왔는지 객석 뒤에서 불쑥 나타난 마술사 안성우(*安聖友제일교포2세) 씨가 하나가 된 한반도 깃발을 휘날리며 무대로 뛰어올랐을 때는 큰 갈채를 받으며 열기도 극에 달했다.
피날레는 박주리(朴珠里) 씨가 부르는 이 페스티벌의 테마송 '하나의 마음'을 모두가 합창하며 하나라는 말에 간절함이 담긴다.
마지막 인사에서 "내년 1944년의 제10회..." 라고 연도를 잘못 말해 해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역시 허당으로 끝맺어버린다. 1994년 명실상부한 원 코리아가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1993 11 14)
● いつか会える 34 (在日 作家 朴慶南1950年生)
34. 미호 아르단호의 기적
독자로부터의 소식은 기쁘다. 장님 암말, 미호아르단호의 육아기(10월 3일자)에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는 엽서를 받았다. 칠십대 부인으로부터인데, 그분도 사십대 때 백내장을 앓아 괴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에 미호아르단의 마음을 가슴아플 정도로 안다고 쓰여 있었다.
이 ‘안다’는 감정은 신기한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도 모르는 게 있다. 경험을 통한 체득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소중히 하고 싶다. 그러한 이해 방식은 슬픔, 괴로움을 치유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미호아르단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첫 새끼말 미호타이거를 무사히 키우고 이후에도 출산을 반복한 미호아르단은 네 번째 새끼를 생후 40일 만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잃고 만다. 모리미즈 목장에서 수말 리드 원더와의 사이에 생긴 수컷 새끼였다. 어미 말은 새끼 말이 죽으면 젖이 차서 유방염 등의 병을 일으키거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진다고 하는데, 미호아르단이 받은 정신적 충격의 크기는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새끼말이 죽은 다음날부터 극심한 복통 발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수의사는 신경성 위염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몸부림치고 날뛰다가 벽에 퍽퍽 몸을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된 미호아르단에게 주위에서는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쇠약함에 "이제는 포기하세요"라며 수의사도 마침내 치료를 포기하며, 겨우 진통제를 주사해 미호아르단을 잠들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목장주 모리나가 마사시 씨의 말을 빌리면 "기적이 일어났다!" 는 것이다. 기적을 일으킨 것은 모리나가 씨의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었다.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아 찾아 헤매고 있는데, 누워 있는 미호아르단을 베개 삼아 껴안듯 함께 잠들어 있었다.
걱정한 나머지 옆에서 계속 쳐다보고 있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아들의 미호아르단을 걱정하는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니면 그의 마음이 미호아르단의 슬픔을 녹였는지 미호아르단은 멋지게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병다운 병을 전혀 앓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7년의 세월이 흘러 어엿한 젊은이가 된 아들은 내가 목장을 찾았을 때도 미호아르단이 풀을 뜯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다가 전쟁 중 군마로 전쟁터로 끌려간 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라고 적힌 투서에 눈길이 갔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대륙으로 끌려간 많은 말들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버려지거나 살해되었다고 한다.
가족처럼 살던 애마를 나라를 위해서라며 강제로 빼앗겨 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일본 곳곳에서 보였다는 이야기와 미호아르단의 에피소드가 겹친다. 서로 안다는 마음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전쟁이라는 터무니없는 괴물임에는 틀림없다. (1993 11 21)
● いつか会える 35 (在日 作家 朴慶南1950年生)
35. 달빛가면의 아저씨
내가 구로다 키요시(黒田淸1931~2000언론인)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의 일로, 한 출판사의 편집실에서였다. 미팅을 하고 있는데 눈앞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표표히 들어왔다. 덥수룩한 머리(실례)에 육중한 체구, 에비스(*칠복신)님 같은 웃는 얼굴이다. 신기한 존재감과 포용력이 확 퍼지면서 어느새 주변 공기가 부드럽게 변해갔다.
사실 오래전부터 나는 구로다 씨의 팬이었다. 동경하는 사람 앞에 서면 나의 대응은 분명 두 가지로 나뉜다. 열광하여(?) 자제를 못하고 엄청난 기세로 지껄이던지(나중에 심한 자기혐오), 실어증처럼 돌처럼 굳어버리던지 둘 중 하나다.
구로다 씨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전자였다. 덕분에 이후 "수다 경남 씨"으로 불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자업자득으로 생각된다. 구로다 키요시 씨는 1952년부터 35년간 요미우리신문 오사카 사회부에서 활약했다.
부정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이 사회부는 "구로다 군단"으로 이름을 날렸다. 장기 연재되는 "전쟁"을 바탕으로 여름에는 8년에 걸쳐 "전쟁전(戦争展)을 오사카에서 열어왔다. 이 기사를 읽고 싶어서 친구에게 부탁하여 스크랩한 것을 받아 보고 있었다. 또 다른 명물 칼럼 "창
(窓)"도 출중했다.
시정의 한 구석에 사는 사람들의 슬픈 사연이 쓰여지고, 그 밑바닥에는 불합리한 것에 대한 구로다 씨의 강한 분노와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가득했다. "강자를 꺾고, 약자를 돕는다", 마치 달빛 가면(*1950년대의 어린이용 TV프로그램)의 아저씨구나, 하고 나는 계속 동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구로다 저널"을 만들어 폭넓게 활동하고 있지만 구로다 씨의 일관된 자세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전쟁, 그리고 차별, 인간을 짓밟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관점은 언론인의 기본이라는 것을 나에게 계속 가르치고 있다.
그런 구로다 씨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받았다. "만나서 좋았다"(삼오관)는 제목의 이 책은 구로다 씨가 오랜 기자 시절 만난 사람들의 25편의 삶이 담겨 있다. 전철 안에서 읽어 보다가 가슴이 메여서 콧물을 훌쩍이게 되어 주위를 둘러보곤 하기를 반복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사람만의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있다. 좋은 일이 있는 반면 누군가가 불행을 짊어진 채 어떻게든 그것을 물리치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도 곤경에서 필사적으로 일어나 행복을 잡아가는 등장인물의 모습이 나온다.
어쩔 수 없는 차별로 결혼을 반대 당하던 커플이 구로다 부부가 중매인으로 나서서 멋지게 성사시킨 이야기에서는 감동되어 축복해 주는 마음을 가지고 만다. "진심으로 감동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고, 멋진 이 세상을 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구로다 씨의 말에 공감한다.
그런데 본모습의 구로다 기요시씨는, 노래방에서 미야코 하루미와 모리 신이치의 노래를 열창하고, 술을 매우 좋아하는 오사카의 재미있는 아저씨이다. 그 점이 또한 좋다. (1993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