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산 전망대서 바라 본 한강과 임진강 합류
지점
한국에서 일산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북한
리스크 때문입니다. 일산신도시가 속한 고양시는 최근에 고양평화누리길이란 산책로를 개통했습니다. 행주산성에서 한강변을 따라 호수공원과 킨텍스로
이어지는 길인데 한강변 구간은 철책선을 따라 걷습니다. 이 철책선에 일정 간격으로 군인 초소가 세워져 있습니다. 정말 전방같다는 느낌이 들지요.
남북관계는 일산신도시의 숙명입니다. 일산에서 매우 가까운 파주출판단지 뒷산인 심학산 정상에서는 북한의 개풍군과 개성시 그리고 그 뒤 송학산이
빤히 보입니다. 바로 이곳에 교하신도시가 있습니다. 일산에서 자유로를 타고 30분을 달리면 오두산통일전망대를 지나 노아 방주가 멈춘 아라랏 산도
아닌데 중턱에 범선을 세워 놓은 야산이 나옵니다. 우회전하여 그 야산 입구로 들어서면 범선은 식당이고 그 옆에 아쿠아랜드라고 하는 목욕탕이 딸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노천탕에 가보면 놀랍게도 북한이 눈 앞에 빤히 보입니다. 바로 앞에 너비 70미터의 임진강이
보이고 그 너머로 북한군 초소까지 보인다 이 말씀입니다. 이런 곳에 목욕탕을 게다가 노천탕까지 만들어 둔 주인의 용기 또는 심보가 참 용감하고
가상해 보입니다. 벌거 벗고 DMZ를 너머 북한을 바라 본다는 건 또 다른 야릇함입니다. 2012년 겨울
문닫음.
북한이 이렇듯 가깝기 때문에 일산신도시는 같은 시기에 생겨 나고도
분당신도시에 비해서 저평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집값이 싸지요. 그러나 남북대화가 잘 된다면 일산신도시는 이 나라에서 가장 호황인 도시가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일산신도시는 암울해 집니다. 필자는 일산에 이사를 한 후 강화도 북방, 파주 북방, 그리고 연천까지 아우르며
남한의 접경 지역 드라이브를 즐기곤 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연천으로 해서 철원을 가보았습니다. 철원에서 받은 인상이 컸습니다. 그래서 정리를
해둘까 합니다. 일산에서 철원까지는 100킬로미터쯤 됩니다. 철원을 뱅뱅 돌고 와도 총 300킬로미터를 주행할 뿐입니다.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임진각에서 바라 본 경의선 임진강 철교 망배단 앞의 나무 다리가
포로들이 돌아왔다는 자유의 다리
DMZ(DeMilitarized Zone)는 비무장지대를 뜻합니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DMZ는 1950-3년에 있었던 한국전(6.25전쟁)의 정전협정으로 생겨났습니다. 이 협정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1항은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각 2㎞씩 후퇴함으로써 적대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DMZ는 특정한 지역에 대해 비무장화를 선언한 국제법상의 조치이지요. DMZ 비무장지대는
국제법에 의해 설정되는 지역이며 이를 감시하기 위한 기구도 역시 국제법에 기초하여 창설되었습니다.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현실적인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잠정적인 평화를 담보하는 것으로 군비통제 내지 평화유지의 수단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DMZ의 비무장지대를 완충지대라고도 하는데,
비무장화, 일정한 완충적 공간의 존재, 군사력의 분리 또는 군대의 격리 배치, 감시기구의 설치 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전협정서에 따라 DMZ는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총길이 248㎞(155mile)의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를 지정하여 4㎞의 공간을 두고 이곳에서는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의 배치를 금지 합니다. 또한 DMZ의 공간을 구체적으로 획정하기 위하여 군사분계선 표식판 1,292개를
세우되 제0001호를 임진강 강변에, 마지막 제1,292호 표지판을 동해안 동호리에 세우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해해상 약
200㎞(125mile)에도 해상군사분계선(NLL)을 두기로 했습니다.
군사분계선표지판, 지금은 글자 철판은 삭아 없어지고 말뚝만 남아
있다.
DMZ의 면적은 육지를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 22만㎢의 1/250에
달하는 907㎢(2억 7천만평)입니다. DMZ일대는 군사적 충돌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므로 별도의 민간인 통제선을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민간인
통제선은 1954년 2월 미군 제8군단 사령관에 의해 설정되었으며, 휴전선 남쪽 5~20㎞ 구간을 말하는데 총 면적이 1,528㎢( 약 7억
평)입니다. 이 민간인 통제선 내에서는 민간인의 거주나 산업 활동 및 기타 활동이 제한되고 민간인의 무단출입이 금지됩니다. 그런데 DMZ 설치로
지난 50여 년 동안 DMZ와 민통선 북방지역에서 자연생태계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 결과 세계적인 자연생태계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파주
여행
일산의 '평화누리길'에서 시작하는 안보관광(?)은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으로 이어지는 DMZ 여행을 만들어 냅니다. 특히 강변북로에서 이어지는 자유로는 임진각까지 갑니다. 자유로가
문산에서 37번 국도로 이어 지는데 37번 국도는 임진강 남쪽 강변을 따라 적성과 포천까지 이어집니다. 2012년 11월 현재 적성까지 4차선
준고속도로가 나있습니다.
파주의 임진강에는 다리가 여럿 놓여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일대교'입니다. 통일대교는 1998년 6월 15일 개통되었는데 그 전에는 현재 기차가 다니고 있는 임진강 철교 위를
나무로 덮어 놓고 '자유의 다리'라 부르면서 그 위로 차량을 다니게 했습니다. 당시 이 다리는 폭이 좁은 편도 1차선으로 한쪽 차량이 통과하고
나서야 반대편 차량이 통과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경의선 '임진강 철교'라 부릅니다. 이 철교를 따라 임진강을 건너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나오는 기차역이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이라고 소개되는 '도라산역'입니다. 이제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려면
'자유의 자리'가 아닌 '통일대교'를 이용합니다. 통일대교 입구에서는 군인들에게 신분증을 맡기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친 후 민통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주영 소떼가 막 완성된 통일대교를 건너고
있다.
임진강을 가로 질러 4차선 도로로 넓게 펼쳐져 있는 통일대교는 그
첫 손님으로 소떼를 받았다고 합니다. 현대그룹 정주영 씨가 소 5백 마리를 이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것입니다. 개통 첫날 그 위를 지나간 것은
무장군인이나 군용차량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의 땅을 일구기 위한 누런 소떼와 북녘에 고향을 둔 정씨 일가였다는 것... 소떼는 '통일대교'를
통해서 임진강을 건넜고, 민통선 마을 '통일촌'을 지나, 비무장지대 공동경비구역의 '통일각'을 지나 북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때 정주영 씨는
고향 집에 들려 부친의 묘에 성묘를 하고 자신의 와이셔츠를 작은 어머니께 맡기며 "깨끗하게 빨아서 저기 걸어둬요. 다음에 와서 입게"라고 했고
9년 뒤 다시 방북했다고 합니다. 정주영의 1차 방북 뒤 1차 북핵위기로 남북관계도 악화되고 또 그 뒤에 들어선 김영삼 정부와는 현대그룹이
불편한 관계라 대북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햇볕정책이 실시되면서 정주영 명예회장은 바로 방북을
추진했지요. 여기서 하나의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는데 소떼와 그 일행의 군사분계선 통과가 문제였습니다. 이게 정전협정에 관한 사항으로
군사정전위에서 이야기되어져야 했지만 당시 군사정전위는 마비상태에 빠져 있어 그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91년 기존 관례를 깨고
유엔사 대표로 한국군 황원탁 소장이 임명되자 북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항의하고 북측 정전위를 해체시키고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해
놓고 북미 장성급회담을 요구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소떼 방북으로 북미가 한발씩 물러나 북미 장성급회담 대신 UN-북 장성급회담으로 그
형식을 바꿔 상설화하는 방안으로 타협을 했습니다. 소떼 방북이 대치상태에 빠져 있던 남북관계를 다시 이어
주었습니다.
임진강
리비교
통일대교 동쪽으로 연천까지 놓여져 있는
다리들은 전진교, 리비교(북진교), 틸교(2007년 철거되고 비룡대교가 건설됨), 화이트교가 있습니다. '전진교'는 이곳을 관할하는 1사단
전진부대의 명칭을 빌어 왔습니다. 전진교 남쪽에는 임진왜란 때 왕이 의주로 피난 가는데 어두워 마침 임진강변 언덕 위에 있던 전각을 태워 불을
밝혀 넘었다는 이율곡의 화석정이 있지요. 선조, 네 이놈! 북동쪽에 놓여 있는 다리는 '리비교'인데 우리 이름은 '북진교'입니다. 임진강을 따라
북동방향 연천군 쪽으로 틸교, 화이트교, 필승교 등이 있습니다.
판문점
방문
이른바 안보관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판문점 견학은 만 1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과 한국정부 기관 및 단체가 주관하는 정부초청 또는 추천에 의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고 방문인원은 회당 30명 이상 45명
이하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일반인이면 국가정보원에 신청을 합니다. 국가정보원 판문점 연락처를 연결하려면 전화 번호 111을 누르고
안내멘트가 나오면 5#(안보민원상담)를 누르고 안내 설명이 나오면 1번을 누르면 상담원과 연결이 됩니다. 상담 후 견학신청(통일부 홈페이지
판문점 견학 배너 참조)을 하는데 판문점 견학 시간은 1일 기준 09:45, 13:15, 15:15이며, 희망하는 견학 시간을 정해서 신청하면
됩니다. 아울러 주소지 담당 경찰서장이 방문인원에 대한 신원보증을 합니다. 공무원인 경우는 통일부에 신청하며 소속된 기관장이 방문인원에 대해
신원보증을 합니다. 방문 시 준수사항으로 청바지, 작업복, 반바지 및 노출이 심한 복장은 금지, 음주 및 주류 휴대 금지,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은 휴대합니다. 판문점 견학 소요시간은 90분이고 신청 양식은 통일부 홈페이지의 판문점견학방문를 참고하면
됩니다.
판문점 행은 통일대교를 지나 제1사단 시설을 통과하여 장단면의
대성동 마을을 지납니다. 이후 판문점 JSA 경비대대 즉 캠프 보니파스에 도착하여 신분증 검사를 합니다. 보니파스는 도끼만행사건 때 희생된
미군의 이름입니다. 이후 판문점으로 이동하여 벨린저 홀에서 현황 브리핑을 받고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T2)을 가보고 제3초소와 도끼만행사건
현장을 돌아보고 돌아오지않는 다리를 거쳐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가 JSA 경비대대로 돌아 옵니다. 우리나라에서 판문점 모자는 여기서만 살 수
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모자이므로 몇 개 사 두면 선물용으로 아주
좋습니다.
판문점 방문은 그 신청 절차가 좀 까다로워서 보편적이지는 않습니다.
대개 경원선의 임진강역에 설치된 도라산 및 제3땅굴 안보관광 부스에 신청하고 셔틀버스를 이용합니다. 도라산 기슭에 개성공단으로 가는 남북한출입국
시설물이 있습니다.
북한의
수꼴들
파주
두지리
파주시 적성면
두지리는 황포돛배를 타고 잡아 온 민물고기로 만든
매운탕이 유명한 동네입니다. 요즘에는 한우마을이 들어서서 한우숯불고기로도 유명합니다. 원래 「斗只」가 아닌 「頭者」로서 용마의 머리와 장등이
같다는 앞산이 쌀이 가득찬 견 뒤 모양을 한 견대형국(肩大刑局)이라 붙혀진 이름이고 이곳 주민들은 재산을 모으면 타지로 떠나야 그 재산을
유지한다는 징크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450여년 전 경주 최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고 이 후 각 성씨가 들어와 옹기를 만들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9월 9일 국사봉 뒷산 중턱에 올라가 소지를 올리며 산신제를 지내고 용머리산을 타고 내려 옵니다.
옛날 용머리산 아래 잘 부자 김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찌나 욕심이 많았던지 스님이나 걸인이 와도 쌀 한 톨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날
금강산에 산다는 도승이 찾아와 하루밤 쉬어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김 노인은 거절했고 도승은 당신은 뒷산 용마루 아래 선조 산소를 쓰면 더욱
큰부자가 될 터인데 쯧쯧...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김 노인 곰곰히 생각한 끝에 아버지의 묘를 이곳에 천묘하고자 용의 허리를
끊었더니 붉은 피가 솟아 나와 임진강으로 흘러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두쇠 김 노인은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피가
모여 있던 곳을 가리켜 피머리라고 부릅니다.
연천 한탄강
캠핑장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 입구에서 20분 정도 왕복 2차선의 37번
국도를 달리면 연천군 전곡읍이 나옵니다. 여기에 전곡선사시대유적공원이 있습니다. 그 앞에 한탄강관광지가 있는데 캠핑 트레일러로 구성된 캠핑장이
있습니다. 트레일러를 이용하려면 적어도 석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할 만큼 인기가 있습니다. 2만 원만 내면 하룻밤 텐트를 칠 수도 있습니다.
전기까지 들어오므로 전기담요를 사용할 수도 있지요. 전곡역 앞 식당에서 파는 빠가사리 또는 쏘가리 매운탕은 참 맛이 있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동막골 유원지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해발 832미터의 고대산 등산도 흥미거리입니다. DMZ 지대를 모조리 관망할 수
있습니다.
추가령지구대
DMZ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빗살처럼 내려갑니다. 이게 추가령지구대를
닮았습니다. 백두대간으로 보면 함경남도와 강원북부 지방의 높은 땅이 황해도와 경기도쪽으로 마치 인체의 갈비처럼 많은 산맥들과 계곡들과 강들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임진강이 함경남도 덕원군 두류산에서 발원하여 강원 북부를 거쳐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의 도감포에서는
한탄강과 합류합니다. 결국 임진강은 남서방향으로 254킬로미터를 흘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서 한강과 합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철원평야를 지나 연천군에서 임진강에 편입이 됩니다. 북한강은 강원도 금강군에서 발원하여 화천과 양구 사이를 지나
춘천을 거쳐 양평군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해 한강을 이루고 경기도 파주군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류합니다. 한반도 중부의 임진강, 한탄강,
북한강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아루르며 멋진 경관을 연출하지만 6.25 전쟁은 이 멋진 경관을 피로 물들게 하여 우리의 가슴을 지금도 시리게
하고 있습니다.
도로도 추가령지구대의 북동-남서의 특성을 따라 건설이 되었습니다.
임진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1번 국도(서울-사리원- 평양-신의주), 동쪽은 3번 국도(원산-평강-연천-동두천-의정부-서울) 나있습니다. 한탄강을
따라서는 43번 국도(회양-철원-포천-소흘-의정부)가 나있고, 그 동쪽에 이동, 일동 계곡을 따라 47번 국도가 나있습니다. 그리고 북한강은
파로호를 거쳐 화천으로 가고 양구와 인제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소양호를 이루고 춘천을 가쳐 북한강에 합류됩니다. 이게 또 계곡을 이루어 평강에서
나오는 5번 국도가 화천과 춘천을 거쳐 홍천 원주 제천 단양으로 갑니다. 이 5번 국도와 나란히 55번 고속도로가 나있습니다. 5번 국도의
지선인 56번 국도는 철원 근남에서 화천 사창을 지나 춘천, 홍천, 양양의 산악지대를 거쳐 동해안의 7번 국도와 연결이 됩니다. 56번 국도는
사창에서 75번 국도를 타면 가평, 청평, 설악을 거쳐 양평으로 갑니다. 국도가 대부분 남북으로 건설된 것은 추가령 지구대의 특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동서로 많은 국도가 건설이 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철원의 두 자리 숫자의 국도 사이에는 동서로 세자리
짝수의 지방도가 건설되어(고) 있습니다. 대부분 터널을 이용하게 되지요.
고대산 정상에서 철원 평강 평원을 내려다
봄
철의 삼각지대 (철원, 김화,
평강)
2013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입니다. 현충일은 1956년에
제정되었다고 하니 오늘은 58회가 되는군요. 6월 6일이 현충일이 된 것은 고려 현종 5년에 정부가 전사자들의 뼈를 집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때가 절기로는 망종이어서 보리를 추수하고 모내기를 시작할 즈음 제사를 지내기에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6.25가 6월에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1990년까지 6.25 전쟁 전몰장병들을 추모하는 날이었다가 이후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으로
범위가 확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6월 6일은 제 2차 세계 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이 고려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현충일 아침, 백마고지 역으로 가봅니다. 백마고지 역?
그렇습니다.2012년 11월 28일에 문을 연 현재 경원선의 마지막 역입니다. 이전 마지막 역은 신탄리 역이었습니다. 1호선 전철 동두천 역에서
6시부터 21시까지 매 시 정각에 북행 열차가 출발하는데 이 가운데 7, 8, 10, 11, 13, 15, 17, 18, 19, 20시 발
열차가 백마고지 역까지 갑니다. 동두천 역에서 백마고지 역까지는 54분이 걸립니다. 이 열차는 8분만 정차하고 신탄리 역으로 돌아
갑니다.
백마고지 역에서는 백마고지가 아주 잘 보입니다. 6.25 전쟁 중
가장 가슴 아픈 추억들 가운데 하나를 간직하고 있는 산입니다. DMZ에 면해 있어서 가볼 수는 없다고 하지만 평평한 산 위의 건물 하나가 기괴한
감흥을 자아냅니다.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서는 다시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백마고지 전투 때 헌병으로 독전임무를 수행한 박과채
장로님을 모시고 이곳에 가서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독전임무를 수행했는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백마고지가 들어 선 곳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입니다.
대마리에는 지금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째서 격전지였던 대마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정부는 1956년부터 이 곳에 정착할 사람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집을 지어 주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곳 땅을 개간하여 살게
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전쟁 통에 버려진 폭발물을 수거했고 아카시아와 잡초를 제거한 후 땅을 일구어 논밭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끔 땅
주인이 나타나 소란이 일기도 했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후 열 두 마을이나 생겨났다고
합니다.
참고로 철원에는 이런 이민 이식의 역사가 많습니다. 동송읍
장흥2리는 1927년에 경상도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살러 와 경상도촌으로 불리워 졌습니다. 동송읍 대위리는 1934년 평안도 용천에서 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라 ‘평양촌’이라고 불려 졌다고 합니다. 근남면 마현1리는 1960년 사라호 태풍 때 경북 울진에서 66가구가 이주해 왔고
이후 계속 가구가 불어 나서 1980년에는 128가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근남면 인구의 20% 이상을 경상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동당사에 앞에 나지막한 산 하나가 있습니다. 그냥 작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소이산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제 모내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60년 전에는 기슭에 텃밭이 딸린 집터와 논밭, 아담한 학교 운동장을
품고 있던 소이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야산입니다. 그러나 수 십 년 간 사람들의 손길을 타지 않아 원시림이 우거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산은 그 높이에 비해 기대 이상으로 철원평야와 북녘 땅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산으로
여겨 집니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팻말을 따라 노랗게 피어난 애기똥 풀을 바내려다 보며 옛날 신작로같은 흙길을 따라 소이산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이 길은 대마리로 넘어 가는 옛 길을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농사꾼들의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니곤
합니다.
노동당사에서 동송읍 방향으로 3분쯤 걸어가면 소이산 상태숲 팻말이
나타나고 여기서 꺾어져 한 10분쯤 흙길을 걸어 가면 정상으로 올라간다는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물론 둘레 길은 따로 나있습니다. 이 길은
2011년 11월 녹색길 조성과 함께 개방된 길입니다. 둘레길에는 접근을 거부하는 철책 너머로 지뢰밭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성한 원시림과 함께
비밀의 숲 같습니다. 그 숲으로부터 아까시(아카시아 나무의 바른 이름) 향이 묻은 바람이 불어 옵니다. 아까시 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연료용
나무로 심어졌다고 합니다.
산 중턱을 오르면서 산벚나무, 산뽕나무, 산밤나무, 상수리나무...
다양한 나무들을 만납니다. 원시림같은 숲을 이룬 그들을 그룹으로 말이지요. 여기에 소이산 생태계 복원을 위해 철원군은 토종나무인 구상나무,
회색빛 피부의 자작나무, 피나무, 보랏빛 열매가 참 예쁜 좀작살나무 등을 따로 식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암함 사건이 터지자 소이산
숲에서도 생태 조사와 지뢰제거가 중단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6.25전쟁 전까지 텃밭이 딸린 집들과 아담한 학교 운동장이 있었던
지뢰밭 숲과 경원선의 중간역이자 금강산 전기철도(철원-내금강, 116km)의 시발역이었다는 철원역이 있던 부지를 아래로 내려다 보며 숲 쉼터에
이릅니다. 철원평야 마을 대마리가 보입니다. 아울러 오대쌀로 유명한 철원평야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철원평야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들
세종, 손자 문종이 자주 찾던 사냥터였다고 합니다. 사냥이 끝나면 신하들과 인근지방 관료들을 임진강가의 정자
고석정(孤石亭)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철원평야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서
경원선이 놓이고 봉래호 저수지가 축조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리고 6.25전쟁 때는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이 되어 지금은 버들가지 무성한 황무지로
변했지만, 사람의 삶이란 참 징한 거... 마을 주민들이 지뢰를 파헤치고 팔다리를 잃어가며 개간해서 오늘의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철원군에는 1959년부터 1979년까지 철원평야에 총 14개의 민북마을 (민통선 북쪽 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가 입주했다고 합니다.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철원평야의 한 마을 대마리, 6.25전쟁 기간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가 건너편으로 비장하게 보입니다. 숲 어느 쉼터엔
일제가 학생들을 동원하여 수시로 참배를 강요한 신사가 위치했던 터도 있습니다.
원시림의 자연 상태를 간직한 소이산에는 뱀과 그 먹이인 맹꽁이가
자연스럽게 지나갑니다. 산자락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기슭에는 산개구리들이 모여 있습니다. 잡풀이 가득한 무덤도 있습니다. 전망대로 오르는
소이산 남쪽 길은 군인들이 머물렀던 그러나 언제나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군사 시설들이 즐비합니다. '봉수대 오름길' 팻말을 따라 소이산 정상에
오르면 눈앞이 확 트입니다. 주변과 표고 차가 200여m밖에 안 되지만 철원 평야를 보기에 더 없이 좋은
위치입니다.
소이산에 올라보니 백마고지는 철원의 서쪽 끝에 있는 야산이었습니다.
만약 백마고지를 적에게 빼앗겼다면 연천이 위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신철원이나 포천 방어에는 상관이 별로 없었을 듯 싶습니다.
아무튼 포격으로 산등성이 높이가 1m 낮아졌다고 하는 백마고지... 사람은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요? 그 뒤로 3개 봉우리가 이어진 피의 능선,
그리고 김일성 고지 즉 고암산이 보입니다. 고암산은 궁예가 태봉국을 세울 때 진산으로 삼았다고 하지요. 알고 보니 여기까지가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의 서쪽이었습니다.
소이산 정상에서는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모두 북한 땅입니다. 남한
땅은 눈에 보이는 몇 개 뿐입니다. 포격으로 산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렸다는 '아이스크림고지' (삽슬봉)가 정북에 나즈막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근방에 제2 땅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측으로 마치 둑을 쌓은 것 같이 높고 평평한 평강 고원이 보입니다. 구름이 끼어 더욱 신비해
보이는 평강 고원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동쪽으로 한없이 DMZ가 펼쳐져 있습니다. 김화에서 화천으로 넘어가는 말머리(마현)
고개도 보입니다. 여기에 승리전망대가 있습니다. 승리부대 소관이지요. 더 가면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이 있는 펀치볼이 나오겠지요. 여기는 양구
땅입니다.
철원의 소이산 전망대는 자유의 상징 같습니다. 마음대로 북녘 땅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 전망대를 세운 철원군도 대단한 결심을 했습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광활한 철원평야, 아니 철의
삼각지대 평원... 서울 면적(605㎢)보다훨씬 넓은 650㎢(2억 평)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걸을 수 있는 철원평야는 그 중 10%도
안된다고... 그 풍요로움이 6월의 화약 냄새와 함께 진한 아픔으로 느껴집니다. (2013년 6월 6일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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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가장 격렬했던 전쟁터가 철의 삼각지대입니다. 철의
삼각지대는 철원-김화-평강을 말합니다. 모두 강원도 서북방에 위치해 있는 군들이지요. 그러나 평강군 전체와 철원군 및 김화군의 땅 3분의 2가
이북에 있습니다. 현재 김화는 철원군에 속한 하나의 읍으로 전락이 되어 있습니다. 철의 삼각지대는 국군이 중공군과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철원-김화-평강이 이루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피아간에 4-5만 명의 청춘들이 생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격렬했는지 특히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국군이 '고기값이라도 하고 죽자'고 하면서 분사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덕에 거기를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철의
삼각지대 입구라 할 수 있는 철원은 일산에서 동북방 100킬로미터 내외 지점에 위치합니다. 자유로를 타고 문산IC로 나가서 37번 국도를 타면
연천군 전곡에 도착합니다. 요즘은 길이 좋아 일산에서 전곡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전곡에서 3번 국도를 타고 갈 데까지 가보면 신탄리를
지나 고개를 넘게 되는데 여기가 백마고지가 위치한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입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민통선 북쪽에 있어 함부로 가볼 수
없었던 곳입니다.
백마고지
6.25전쟁 중의 백마고지, 도시가 하나 날아가
버렸다.
강원도 철원읍 대마리 백마고지 기념공원에서 본 현재의
백마고지
연천군 전곡읍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북진하면 고대산 줄기를 넘자마자
철원군 대마리가 나타납니다. 이곳에 이르면 11시 방향으로 기괴한 모습의 언덕이 보입니다. 6.25 전쟁 중 가장 격전지였던 철의 삼각지대에서도
가장 극심한 전투가 벌어졌던 해발 495미터의 백마고지입니다. 백마고지는 DMZ에 접해 있어 들어갈 수 없지만 3킬로미터 남방에 만들어 둔
기념공원에서는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기념비에는 아군 전사자 84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관급 장교 1명,
위관급 장교 3명, 나머지는 모두 졸병들입니다. 1592년 10월 6일부터 6일 동안 12번의 전투로 844명이
전사…
격전 중의 격전이었던 백마고지 전투라는데… 생각보다 전사자 수가
적다…라고 생각하던 차에 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평북노회 서시찰의 강화도 야유회에서 서울 신흥교회의 박과채 은퇴 장로님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백마고지 전투 때 헌병으로 참전한 분인데 아른바 독전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독전임무가 뭐냐 하면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치는 군인들을 단속하는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백마고지 기슭에서 30미터 떨어진 곳에 길게 참호를 팝니다. 그리고 헌병대가 무장을
하고 도열해 있습니다. 백마고지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겠지요. 그러면 간혹 전투가 무서워서 고지를 내려와 도망하려는 군인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헌병들은 1차로 조명탄을 쏘아 고지로 올라가라고 독려합니다. 그래도 불응하면 2차로 다리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합니다. 한번은 독전임무
중인데 중령 계급장을 단 사람이 고지를 내려 오더랍니다. 그래서 헌병 하나가 조명탄을 쏘고 “중령님, 내려 오시면 안됩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뭐야, 이 새끼…”하면서 권총을 뽑아서 그 헌병을 사살하더랍니다. 그래서 다른 헌병들이 그 사람을 향해 집중 사격… 그
사람은 체포되었고 결국 군법회의에 넘겨져 총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모임이 끝나고 산책을 하다가 그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백마고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까?” “그럼. 내가 매일 시체를 싣고 내려가는 트럭의 수를 세서 보고를 했으니까… 어떤 날은 트럭이 스물
세 대나 내려간 적도 있으니까. 대략 따져 봐도 아군만 3천 명은 죽었을 거요.” “그런데, 장로님. 백마고지 전투 기념비에는 전사자가
844명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직접 트럭 수를
세었는데…”
2012년 11월 첫 번째 주일, 점심식사를 하면서 필자는 백마고지
전투 이야기를 교우들과 나누면서 전사자 숫자가 기념비에 표시된 것과 헌병이 보고한 것이 왜 틀릴까 했더니 우리 교회의 최고령 남자 교우인 우승환
할아버지께서 “그거 민간인들이 죽은 숫자까지 합친 거예요. 군인들이 전투하러 갈 때 민간인들도 다 데려가요. 부역을 시키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총알받이도 시켜요. 나도 한번 끌려 갈 뻔 하다가 삼촌이 대신 가주면서 쟤는 빼달라고 군인들에게 간청을 해서 안 끌려 간 적이 있어요.
백마고지전투 때도 모르긴 하지만 민간인들이 엄청 끌려 갔을 거예요”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 할아버지의 말씀으로 피아간에 적어도
12,000명은 죽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백마고지 전투 사상자 가운데서 아군 전사자는 고작(?) 844명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밝힐 수
있는 숫자가 844였다는 겁니다.
연천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다 백마고지가 보이면 대마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십시오. 백마고지 기념공원이 나옵니다. 여기서 백마고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백마고지는 DMZ에 접해 있어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대마리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3번 국도에서 우회전해야 합니다. 직진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게 국군 초소가 진행을 막기 때문입니다.
여기를 통과해서 DMZ 남방한계선에 붙어 있는 월정역까지 가보려면 백마고지역이나 고석정에 있는 철원군 안보관광 프로그램 접수처에 신청을 해야
합니다. 매일 4차례 신청을 받습니다. 화요일만 휴무.
우회전하면 87번 국도입니다. 이걸 타고 가면 기괴한 모습으로
파괴된 철원 노동당사가 나타납니다. 이 도로를 계속 타면 도피안사를 거쳐 포천으로 갈 수 있습니다. 철원에서는 조그만 도로들이 많아서 길 찾기가
다소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그만 지역이라 몇 번 왔다갔다 하다 보면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지도가 그려지게 되지요. 아무튼 일산으로 오기 위해서는
87번 국도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길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 오다가 37번 국도를 만나면 우회전해서 전곡을 지나면 일산으로 오게
됩니다.
팁) 3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고소성에서 87번 국도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좌회전 하여 87번 국도를 다시 타면 포천시내 인근 벌말에서 368번 지방도를 만납니다. 우회전하여 이 길로 들어서면 소요산
북동사면에 위치한 포천허브아일랜드와 신북온천에 갈 수 있습니다. 벌말에서 좌회전해서 368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채석장을 유원지로 만든
아트밸리도 볼 수 있습니다.
철원경찰서 청사? 뒤가
소이산
복구된
노동당사
이른바 안보관광에 편승하여 백마고지역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백마고지
기념공원을 거쳐 3번 국도를 막고 있는 국군 초소를 거쳐 월정리역으로 갑니다. 본래 철원읍이 위치했던 곳이라 길이 참 많습니다. 꼭 산업공단을
만들기 위해서 땅을 닦고 도로를 만든 것 같지요. 그러나 건물이 없고 군데군데 군대 막사가 있고 항공기 월북 금지 표지판이 있어서 여기가
최전선인 것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여기는 또한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으니 동물들이 몰려 드는
겁니다.
아이스크림 고지
서울 시의 면적보다 넓다는 철원 평야 정 가운데 조그만 산이 하나
솟아 있는데 해발 219미터밖에 안 되는 삽슬봉입니다. 하지만 전쟁 때 하도 폭탄이 많이 터져 그 모습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너덜너덜해져서
아이스크림 고지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전투가 심했으면 그 높이가 5미터나 낮아졌겠습니까? 백마고지는 1 미터 낮아졌다고 하는데 말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삽슬봉은 너른 철원 평야의 한 가운데 있는 봉우리입니다. 아무튼 삽슬봉은 철원읍 삽송리에 있어서 삽송봉이라 했는데 이게 구전으로
변형되어 삽슬봉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전쟁 때 이게 아이스크림 고지가 된 겁니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이스크림 고지 정상에 아군 초소가 하나 달랑 있고 넓은 철원 평야에는 무심한 재두루미들만 날아들 뿐입니다. 여기서 북상하면
철원 평화전망대와 제2땅굴을 볼 수 있습니다. 평화전망대에서는 DMZ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평강고원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저너머에 평강역이 있고 거기서 시베리아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니 내가 살고 있는 남한 땅이 좁게 여겨
집니다.
군사분계선
철원평화전망대에서 서쪽으로 본 DMZ. 백마고지는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연못처럼 보이는 것은 북에서 내려오는 개울. 인근 밀림이
궁예궁터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동북쪽으로 본 DMZ와 그 너머 북녘의
낙타봉
위 석장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온 것입니다. 철원평화전망대에서는
남쪽으로 향해서만 사진을 찍으라 합니다. 그래서 아예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불만이 많습니다. 인공위성과
인터넷이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잡아내는 놀라운 시대에도 무조건 통제하고 보는 군대문화의 일종이지요. 1-2월에 있는 두루미 관광 때는 자유롭게
사진을 찍으라 한답니다. 겨울에는 안보가 너그러워 지는 모양입니다.
군인들의 통제소를 지나 노동당사를 나오면 이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도피안사쪽으로 464번을 타고 계속 가면 제2 땅굴을 거쳐 김화읍으로 갈 수 있지만 당연히 통행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말읍
내대리로 나와야 합니다. 내대리로 나오는 동안 무수한 포부대들을 지나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 포부대들은 이북을 향해서 엄청난 양의 포탄을
쏘아보낼 것입니다.
철원관광
도피안사 인근에서 463번 지방도를 타면 철원 순담계곡의 한탄강
유원지로 갑니다. 여기서 유명한 게 고석정과 그 건너편의 대한수도원입니다. 경기도 연천의 전곡에 있는 오토캠핑장
등은 '한탄강관광지'라고 합니다. 넓은 철원 평야에 움푹 들어가 계곡을 이루는 순담 계곡은 강원도 평강에서 발원한
한탄강이 흐릅니다. 이곳에서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다는 용암 녹은 현무암과 주상절리를 볼 수 있습니다. 여름에 수위가 적절하게 되면 리프팅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이 계곡에는 김일성이 만들고 이승만이 완공했다 해서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을 딴 이른바 승일교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전상 통행금지 입니다. 바로 옆에 한탄대교가 놓여 있어 많은 차량들이 오고 갑니다. 한탄대교 주변은 유원지로 꾸며져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온천 호텔과 전쟁기념관이 있는 고석정입니다. 고석정의 정자가 아름답고 기암괴석과 맑은 한탄강의 흐름이 시리도록 아스라한 아픔을 만들어
줍니다. 전쟁기념관에 들어가서 등록을 하면 제2땅굴을 포함한 철원 일대의 전쟁터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고석정 건너편에 감리교 소속의 대한수도원이 있습니다. 일제가
한·일합방을 고착화해 가는 1940년 10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직된 비밀 기도팀이 말을 키운다는 의미의 양마장으로 이름을 붙여 시작한
기도의 집입니다. 조선수도원이었다가 대한수도원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 땅에 들어가서 존립자체의 위기를 겪였지만 6.25전쟁 이후 남한 땅이
되어 다시 수도원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한의 최북단 수도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자 원장이 들어 온 후 규칙이 매우 엄해
졌다고 합니다. 경내를 마음대로 돌아볼 수도 없습니다.
고석정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송대소란 주상절리로 유명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산책길이 나있지요. 주변에 팬션이 많아서 하룻밤을 오붓하게 즐길 수도
있습니다.
송대소 인근에는 태봉대교가 있습니다. 이 다라 중간에는 번지점프대도
있어 번지점프를 즐길 수 있습니다. 태봉대교 아래에 마치 작은 보처럼 길죽한 직탕폭포는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라고 합니다. 하지만 뻥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자연적인 게 마음에 들지만 나이아가라라고 하기에는 작아도 너-무 작아요. 직탕폭포 인근에는 민물매운탕집들이 운집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폭포가든이 유명합니다. 주소는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357입니다. 메기매운탕, 쏘가리매운탕, 장어구이 등이 있습니다. 한탄강 맑은 물에
사는 쏘가리는 정말 맛이 있지요. 그러나 솟자가 8만원이나 합니다.
한국의 나이아가라? 직탕
폭포
철원의 먹거리
고석정 가까운 곳에 있는 철원군 갈말읍 내대리 675-7의
내대리막국수는 유명합니다. 이와 함께 삼겹살 편육도 좋습니다. 8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보면 길가인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
685-36에 있는 철원오대갈비에서 수경재배한 고추냉이를 넣어 숙성시킨 돼지갈비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평리 570-29에 있는
옛고을순두부집에서는 순두부찌게와 순두부전골을 먹을 수 있습니다. 노동당사에서 고석정으로 가다보면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663-1에 서울식당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인장이 개발한 오징어 물회를 먹을 수 있습니다. 고석정에서 453번 지방도를 타고 한탄대교를 지나 철원군 갈말읍에서 우회전하여
43번 국도를 타고 포천쪽으로 한참 내려가면 갈말읍 문혜리 1206-6에 있는 민통선한우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할인된 값으로 한우를
사서 바로 옆 식당에서 숯불에 구워 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 오면 신철원인데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983-6의 철원막국수도
줄서서 먹는 맛집이라고 합니다. 고석정에서 453번 지방도를 타고 서면쪽으로 가다보면 문혜리 271-2의 대득봉 식당을 만납니다. 대득봉 아래
있다고 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산채정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더덕, 질경이, 두릅, 엄나무짱아찌 등을 먹을 수 있는 농진청
지정 농가맛집입니다
쉬리마을로 불러 달라는 김화의 소원은 평화
쉬리마을
철원읍을 거쳐 동송읍을 거쳐 갈말읍을 거치면 김화읍으로 갑니다.
본래 금화라고 발음을 했지만 요즘엔 김화라 합니다. 여기에 한탄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화강이 있습니다. 이걸 남대천이라고도 부르는데 주민들의
노력으로 최근에 화강이란 옛이름을 복원했다고 합니다. 이 화강에서 나는 다슬기와 쉬리가 유명하지요. 화강에서는 여름에는 다슬기 축제, 겨울에는
얼음 축제가 열립니다. 김화읍을 쉬리마을이라 하고 북한과 인접해 있다 해서 ‘더불어 사는 평화마을’이라고도 합니다. 철원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쉬리마을 즉 김화읍은 면적이 88.04㎢입니다. 서울과는 국도 43, 47호선(서울 동북부에서 1시간 30분), 춘천과는 국도 5호선으로
(1시간 20분) 각각 연결됩니다.
북한의 수리봉에서 발원한 화강은 김화읍을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분지를
만들었고 이 분지에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학사리(鶴沙里)는 김화읍사무소 소재지로 도농복합형 마을입니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국도 47호선을
중심으로 학사1리와 5리가 도로 양쪽에 위치하면서 작은 시가지를 이룹니다. 이곳이 과거에는 김화 새술막거리였습니다. 새술막은 ‘새로 생긴 술막이
있는 마을’이란 뜻입니다. 통천, 회양 사람들이 서울 가는 길에 들러 술과 음식을 즐겼다고 합니다. 1914년 학포리와 사기막리를 병합하면서
학포리의 ‘학’자와 사기막리의 ‘사’자를 따서 학사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쉬리마을을 '학포리'라고도
합니다.
생창리는 휴전선 접경마을이면서 1970년대 첫 번째
통일촌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2008년 초까지 오랜 시간 민간인통제구역 내에 있었던 생창리는 눈앞에서 분단의 역사와 흔적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로 오이와 토마토, 쌀 등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김화읍 서부 지역의 도창리는 경작지 대부분이 민통선
안쪽에 있고, 거주지는 민통선 바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도창리 민들레 들판에서 오리 우렁이 농법으로 생산되는 무농약쌀인 ‘철원민들레쌀’이
유명합니다. 김화읍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청양리는 화강의 중류와 하류에 걸쳐 하천의 가장 많은 구간과 접해 있어 다양한 생태환경을
엿볼 수 있는 마을입니다. 드넓은 청양 벌판에서 질 좋은 오대쌀을 대규모로 생산하고 있고, 한우와 돼지도 기릅니다. 특히 연동마을(청양2리)의
20년 전통을 지닌 한과가 유명합니다.
쉬리마을 다슬기 축제: 철원군은 지난 2007년부터 매년 8월
철원군 김화 남대천(화강) 쉬리공원에서 ‘쉬리마을 다슬기 축제’를 엽니다. 이 축제는 철원군을 대표하는 깨끗한 화강에서 다슬기, 농업, 먹거리를
소재로 다채로운 공연과 체험을 선보여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로 운영한다고 합니다. 볼거리는 3개 분야 15~18개로 퍼레이드 및 입장식,
다슬기와 치어방류행사, 개막식, 불꽃놀이, 청소년 어울마당, 거리공연, 새터민예술단, 연예인공연, 남대천영화제, 트로트공연, 에어바운스 쉬리,
어린이 동물원, 쉬리마을 개발도, 어린이 그림전 등이 있습니다. 즐길거리는 3개 분야 24~28개로 진흙탕 달리기, 노래자랑, 다슬기까기,
젓가락 옮기기, 다슬기 수중달리기, 고무대야 카누, 온가족 얼음버티기, 수중줄다리기, 다슬기 잡기, 한밤의 나이트, 천연염색, 아토피치료방,
도자기만들기, 로데오, 물풍선 투척, 병영체험, 다함께가족페스티벌, 마차타기, 어린탐험대, 다슬기액세서리공방, 전통공방, 나눔의 벽,
미니박물관, 비누방울만들기, 뗏목 등이 다채롭게 진행됩니다. 먹거리는 3개 분야 18~26개로 오대쌀인절미, 뻥튀기, 케이크, 막걸리, 국수,
오이, 토마토, 옥수수, 축산물, 김화읍 부녀회와 마을 중심의 싸고 순박하고 맛깔나는 음식과 시원한 수변카페, 신나는 야시장이
펼쳐집니다.
쉬리마을 얼음마당: 김화 쉬리마을은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추운겨울
가족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얼음마당을 운영합니다. 겨울철 방학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놀이로 구성된
쉬리공원 얼음마당은 눈썰매장, 스케이트장, 얼음썰매장, 얼음축구장 등을 설치합니다. 40일간 매일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운영되는 얼음마당에는
음식부스도 있습니다. 쉬리공원 얼음마당은 겨울철의 새로운 문화 가치와 의미에 대한 도전과 시도입니다. 2013년 현재 화천의 산천어 축제에
밀려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못합니다.
철원군 근남면의 복주산
김화에서 4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가 서면 자등에서
좌회전하여 신슬재 터널을 지나 도덕동에서 우회전하면 복주산 밑에 있는 국립복주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합니다. 김화에서 근남으로 나와 잠곡을 지나
463번 국도를 타도 됩니다. 해발 1152미터의 복주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휴양림이지요. 복주산은 철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사실 철원과
화천을 나누는 산입니다. 복주산의 서쪽 끝자락에는 복주산휴양림이 있지만 동쪽 끝자락에는 화천군 다목리 감성마을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설가
이외수의 문학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외수 문학관 이야기는 화천 편에서 하기로 하고... 국립 복주산 자연 휴양림은 숙박시설을 가지고 있어서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이 시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워 신청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산책코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탕폭포라는 가장 높은 곳을 다녀와도 운동을 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를 않지요. 그래서 근질근질하여 복주산 등산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이 나면
여기서 남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하오 터널로 가야 합니다. 그 아호 터널 위쪽으로 등산길이 나있습니다. 그러나 산불예방 또는
안보 차원에서 입산금지를 하는 수가 많으므로 알아보고 가야 합니다.
복주산 용탕계곡의 이무기
폭포
포천
약사계곡
김화에서 4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면 포천 일동쪽으로 갈 수
있는 명성산과 광덕산이 이루는 고개를 넘게 됩니다. 그 주변을 갹흘산이라 합니다. 발음이 좀 어렵지요. 이 고개를 넘으면 경기도 첫번째 마을
도평리가 나타납니다. 장준하 선생이 죽었다는 약사계곡이 있는 마을입니다. 흔히 장준하 선생은 약사봉에 등산을 갔다가 실족사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약사봉을 모릅니다. 다만 약사계곡이 있을 뿐입니다. 약사계곡은 산정호수를 끼고 있는 명성산의 동북쪽 사면에 나있는
골짜기입니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산천어가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곳에 두 번 방문했습니다. 국도 변에 있는
밤나무집캠핑장을 지나서 하늘산캠핑장이라는 곳을 찾아야 겨우 약사계곡 입구를 찾을 수 있는 오지입니다. 필자는 장준하 선생이 죽은 곳이라고 나무
말뚝을 세워 둔 곳까지 가봤지만 항상 음지일 수밖에 없는 이곳으로 성인 40여 명이 관광버스를 타고 등산을 왔다는 게 도무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등산을 할 데가 없거든요.
약사 계곡부터는 47번 국도가 곧은 왕복 4차선 도로로 엄청
좋아집니다. 47번 국도는 오른쪽으로 산정호수가 있는 명성산, 사향산, 관모봉, 왼쪽에 백운산, 국망봉, 강씨봉, 청계산, 운악산, 베어스타운을
두고 내려가 진접읍 내각리 퇴계원을 거쳐 동구릉 뒷길로 해서 중랑구 신내동을 지나 망우동에
이릅니다.
47번 국도로 이동에 이르면 이동갈비타운을 찾으면 좋습니다.
명성산의 산정호수에는 한화리조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 기갑부대의 훈련장도 있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지요. 일동에 이르면 일동사이판이나
온천지대를 돌아 볼만 합니다. 약사 계곡에서 인접한 백운계곡은 47번 국도에서 강원도 화천쪽으로 가는 372번 지방도의 출발점입니다. 이 도로를
타고 백운산을 넘습니다. 정상부에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파는 칡즙이 최고입니다. 백운산에서 캔 칡을 직접 짜서 낸 즙이지요. 매번
욕심에 몇 병을 삽니다. 대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쉬어져 버리게 되지만 처음 마실 때 그 향긋함은 정말
좋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포천은 물이 좋아 좋은 술이 빚어 집니다.
이동 막걸리가 그래서 유명한데 도평리 가까운 곳에 이동주조 술도가가 있고 그 남쪽에 이동갈비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37번이나 47번 국도를
타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 오다 보면 가산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할 수 있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산사원이라고 하는 배상면주가의 술도가 겸 술박물관이
있습니다. 베어스타운 근처입니다. 필자는 술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술도 음식의 하나로 보면 꼭 기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술 취한
모습이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경기도 포천과 강원도 화천을 나누는 백운산
정상
화천
백운산 정상을 넘으면 곧바로 강원도 화천군 반암산 유원지가 나오는데
백운계곡 유원지에 비하면 한산한 느낌입니다. 화천군은 인구 2만5천 명의 작은 마을입니다. 아마 그 인구 만큼의 군인들이 있겠지요. 아무튼...
반암산 유원지를 나와 좌회전하여 463번 지방도를 타면 철원군에 있는 복주산자연휴양림을 거쳐 김화로 갑니다. 우회전하여 사창리로 나가면 가평이나
춘천으로 갈 수 있지요. 사창리에서 56번 국도로 북상하면 명월리를 거쳐 이외수 문학관이 있는 다목리 감성마을로 갑니다. 그런데
복주산자연휴양림에서 묵고 다목리 감성마을로 가려면 사창리까지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오 터널을 지나자마자 화천 명월리로 가는 중간 도로가
나오기 때문이지요. 좌회전하여 이 도로를 타면 복주산을 왼쪽에 바라보면서
명월리로 넘어갑니다.
추억의 사창리
터미널
이름이 좀 이상한 사창리는 포천, 철원, 화천 등 전선에서 부상
당한 군인들이 와서 응급 처지를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치료가 곤란하면 춘천이나 가평으로 나갈 수 있고 그것도 안되면 서울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해 진 곳입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사창리로 오는 버스를 탈 수 있는데 포천 시내를 지나 일동과 이동을 지나 광덕산 고개를
넘어 사창리로 옵니다. 이렇게 귀대한 군인들이 아주 많아 추억의 사창리 터미널이
되었습니다.
사창리에서 30분 정도 북쪽으로 달리면 명월리를 지나 왼쪽으로
다목리 감성마을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이외수 문학관이 있지요. 화천군이 춘천에 살고 있는 소설가 이외수 씨를 데려다가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전체가 군비로 만든 문화 시설입니다. 이외수 씨는 여기에 살면서 소통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2012년 12월 현재 팔로워
150만 명을 거느린 한국의 트위터 대통령이지요. 필자도 팔로워이며 그 분이 쓴 140자의 단문의 내용에 감탄하곤 합니다. 화천군이 감성마을과
이외수 문학관을 만든 것은 경북 영양군이 이문열 문학관과 조치훈 문학관을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유지요.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 경제를 살려
보겠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감성마을이 DMZ와 그렇게도 가까운 줄은 몰랐습니다. 감성마을은 넓직한 주차장이 있는데 거기 딸려 있는
화장실인가 하는 시설이 산천어 살로 속을 채운 만두 등 지역 물산 판매대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주차장부터 문학관 입구까지는 자연석으로
만든 비석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돌마다 이외수의 단문이 그의 글씨체로 새겨져
있어 인상적입니다.
이외수 문학관은 현대적인 시설로 냉난방이 잘 되고 보관된 자료들도
풍부합니다. 이외수 씨는 문하생도 받아들여 문학수업을 시킨다니 아주 좋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외수 씨의 생활 공간은 안쪽에 있습니다. 가급적
생활 공간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예의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걸어들어가기가 마땅치 않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차를 몰고 들어 가면 생활
공간을 통해야 문학관으로 갈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제 다목리를 떠나 화천읍으로
갑니다.
사창리에서 56번 국도를 타고 용담계곡을 지나 춘천시 사북면을
거치다보면 5번 국도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회전,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절벽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이 나타납니다.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파로호를
거쳐 내려오는 북한강인데 화천 사람들은 이 강을 화천강이라 부릅니다. 강폭이 제법 넓습니다. 5번 국도를 타고 오다 만나는 화천의 첫풍경은
하남면의 화장장과 공동묘지입니다. 첫풍경으로는 좀 그렇습니다. 화천읍내는 산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물 위에 떠있다고 해야
할까... 조그만 도시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재미있는 도시입니다. 화천강 동쪽은 매년 1월 5일에 시작하는 산천어 축제로 유명한 곳입니다.
산천어 축제와 함께 얼음 조각 축제도 한다니까 1월 25일 이전에 한번 화천읍내에 들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밤을 지새야 이 축제를 제대로
본다니까 1박 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 피니스 랜드라는 게 있는데 조정 경기장입니다. 지붕에 제트기 한 대가 앉아 있는 조정 경기장은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그 앞에 떠있는 부교같은 곳은 강위를 걸을 수 있게 만든 시설입니다. 이곳에는 요트도 몇 척이 떠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2년 12월 17일 오후 2시에 피니스랜드 조정 경기장에서 찍은 화천읍
전경이지요.
화천의
먹거리
화천은 콩이 좋아서 콩요리와 두부가 인기 있습니다. 화천읍내 중리
178-17 솥 식당의 콩탕이 유명합니다. 읍내서 파로호로 가는 461번 지방도를 타고 조금 나가야 하는 대이리 271의 콩사랑 식당도 각종
콩요리로 유명합니다. 대이리 434-5의 파로호백가네칡냉면도 좋지요. 이 근처 간동면 구만리 62-1의 파로호횟집에서는 송어회와 산천어와
쏘가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쏘가리는 1킬로그램에 13만원이나 합니다. 화천읍내 하리 66-51의 본가산채골은 한식정식으로 유명합니다. 또 하리
34-9의 천일막국수도 유명하지요. 하리 45-6에 있는 성원 식당에 가면 두툼한 돼지고기를 묵은지에 넣어 끓여 주는 김치찌게가 맛있습니다.
하리 48-2의 옛골식당은 동태찌게와 생태찌게가 유명합니다. 하리 72-2의 명가 식당은 산천어 회와 매운탕이 유명합니다.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
457-1의 왕골가든은 향토음식인 산천어 순대가 유명합니다. 사창리에서 56번 국도로 화천읍쪽으로 간다면 한번 들러볼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겨울철에 가면 화천을 포함한 강원도의 많은 지역에서 밥을 사먹기가 참 힘듭니다. 손님들이 거의 없어 장사를 하지
않는 가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겨울철 강원도 여행은 비상식량을 준비해야 합니다.
화천 읍내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인공호수 파로호로 갑니다.
파로호(破虜湖)는 본래 화천호(華川湖)라 불렀습니다. 1944년 5월에 간동면 구만리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인공 호수지요. 화천읍
대아리가 구만리와 마주 보고 있습니다. 면적은 38.9 평방킬로미터로 10억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상류에는 문제가 많았던 평화의
댐이 있지요. 화천호가 생긴 지역은 본래 38선 이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수복했지요. 화천호가 '파로호'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은 6.25 전쟁 때문입니다. 화천 전투 때 북한군과 중공군 수만 명을 수장(水葬)한 곳이어서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그렇게 명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거기서 잡은 민물고기 회를 먹지 못하겠더라구요. 기분 좋은 관광을 위해서 화천호란 이름을 회복하는 게 어떨까요? 화천읍내를 지나
461번 지방도를 타고 파로호로 갑니다. 아래 사진은 파로호의 모습입니다. 참 아름답지요? 어딘가서 퍼온
사진입니다.
묘비명 없이 묻힌 4만 명 … 비목은 울고 있다
6·25 최후의 격전지 화천
가곡 ‘비목’ 작사가 한명희 “유해 발굴해 혼
달래줘야”
강원도 백암산 1158m 정상에 세워져 있는 비목. 이 지역을
관리하는 7사단 예하 부대가 지난해 기존에 설치돼 있던 비목 시비(詩碑) 옆에 가묘를 만들고 나무 십자가 위에 인근에서 발견된 녹슨 철모를
걸어놓았다. ‘초연(포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하는 가곡 ‘비목(碑木)', 비목은 나무비석을 말한다. 6·25 때 강원도
화천 부근에서 숨져간 4만여 명의 국군과 중공군. 그들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앞에 놓인 나무비석이 바로
비목이다.
30도를 웃도는 1일, 땡볕 더위 속 기자와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73·미시문화서원 좌장)씨, 6·25 때 월남한 이동표(81) 화백이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최전방 부대를 찾았다. 비목의 고향을 찾은
자리에서 한씨는 가곡 비목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를 상세히 들려줬다. “내가 TBC 출신이야. 서울시립대 음악과 교수로 옮기기 전 라디오
PD를 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노래 대신 가곡 편성을 건의했지. 시험 삼아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10분부터 가곡 프로그램을 내보냈는데 프로가
히트를 쳤어. 매일 방송하는 걸로 편성이 바뀌었지. 그러다 작곡가 고 장일남(TBC 악단) 선생과 ‘지나간 노래만 틀지 말고 새로운 가곡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 했어요. 1968년 말 어느 날 통금에 걸려 집에 가지 못하고 당시 중앙일보 5층 숙직실에 앉아 지은 노래가
‘비목’이야. (60년대의) 군생활을 회상하면서.“ 한씨는 60년대 중반 비무장지대 전투초소에서 소대장 생활을 했다. 한씨가 근무했던 부대
주변에선 중공군의 최후 공세로 불렸던 금성전투(13~19일)와 4·25고지 전투(20~27일)가 벌어졌었다. 사활을 건 혈투를 벌여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우리 군은 1만4373명의 피해를 보았다. 이 중 전사자는 2689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공군은 6만 6000여
명(3만8700여 명 사망)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오솔길 같은 순찰로 곳곳에 유골과 유해가 즐비했지. 신병들은
무서움에 고생을 많이 했어. 순찰로에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돌무지가 여러 군데 있었고 나무십자가 모양의 썩어가는 나무들이 보였어. 당시 전투가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죽은 전우의 시체를 수습하지 못하고 주변의 돌로 쌓아놓고 나무비석을 세웠던 거지.” 그때의 나무비석이 결국 가곡 비목이
됐다. 그러면서 한씨는 “순찰 도중 수습한 해골 두 개를 사무실에 가져다 놓고 전쟁에서 산화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며 “그만큼 참혹했던
전투였던 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한씨는 “작사가도 아닌 내가 노랫말을 쓴 게 창피해서 처음에는 한일무라는 가명으로 방송했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작사한 것이 알려져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이승준(44) 중령은 “당시 화천 수력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해 아군
측과 공산군 측이 끝까지 사투를 벌였다. 공방전 끝에 우리 측이 이 일대를 지켜내 화천댐과 발전소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르막 산악 도로와 녹음을 헤쳐나가길 7.1㎞. 흰 돌이 많은
백암산 자락에 위치한 해발 908m 백암소초(소대)에서 다시 1시간30분여 동안 쉬었다 오르기를 반복하며 1158m 정상에 올랐다. 부대
차원에서 ‘비목공원’으로 명명한 가로·세로 각 3m가량의 공간이 나타났다. 지난해 이 지역을 관리하는 부대가 새로 정비했다고 한다. 기존에
설치돼 있던 비목 시비 옆에 돌로 가묘(假墓)를 만들고 인근에서 발견된 철모를 나무십자가 위에 걸고, 녹슨 M-1 소총을 돌무지 위에 올려놨다.
비목엔 주황색 리본에 유성펜으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고혼이 된 전우들의 명복을 눈물로 빕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우들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부대 관계자는 “6·25전투에 참전했던 분이 얼마 전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달아놓고 가셨다”고 전했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오지 중 오지인 이곳은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서명되던 그 순간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6·25 전쟁의 가장 참혹했던 마지막 격전지로 기록된 곳이다. 이 일대에서는 지금도 유해가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다. 부대 관계자는
“올해에만 44구의 유해와 1800여 점의 유품이 발굴됐다”며 “땅만 파면 유해가 나오는 곳”이라고 전했다. 한씨는 “60년대 중반에는 유해를
발굴한다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정전 60주년을 맞아 이곳에 와 보니 전쟁에서 산화한 죽음의 의미와 살아 있는 자의 시대적 소임을 되새기게
된다”며 “북한이나 중국·유엔사와 협의해 대대적인 발굴을 통해 죽은 영혼을 달랬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남은 생을 6·25문화재단을
만들어 이들의 영혼을 달래고 후세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전 60년,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비목의 상흔은
아물지 않고 있었다. (2013년 7월 3일 중앙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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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
등정
83세의 등산인 박영근
옹이 2,000번째 산을 올랐다. 1989년부터 산행 횟수가 아닌 산행지를 헤아리기 시작해 2,000개 산을 채운 것이다. 2,000번째 산행지로 군부대 특별허가를 받아 민통선 지역의 백암산을 올라 화제다. 백암산 부근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격전의 장소였다. 그의 구술을 토대로 참전기를 소개한다. (월간 산 2013년 7월
호)
손톱·발톱, 머리카락을 봉투에 넣고 관등성명 적어
우리 부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로 간다는 건 허황된
꿈이었다. 출동 방향은 북진, 야전천막을 치고 대기하는데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바닥에는 물이 고이고 천막 속에서는 밤새도록 눈물 파티가 열렸다. 고참들은 “우리가 또 351고지냐. 그렇게 많이 죽은 곳에 우리가 왜 다시 가야
하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고지를 지키던
중대원의 8할이
전사했으므로 재공격에 대비하려면 강한 중대가 가야 했기에 우리 중대가 가는 걸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군대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살기에 불평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싸워서 이기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1952년 10월 소고기 부식이 나오고 동계용 가죽군화를 지급 받는
특별예우와 함께, 중대원들은 자기
손톱·발톱, 머리카락을 봉투에 넣고 관등성명을
적었다. 그리곤 1인당
가족친지에게 5통 이상의 편지를 쓰게 했다.
“M1소총, 멜빵탄띠 총탄 8케이스, 수류탄 2발, 야전곡괭이, 수통 외 모든 관물은 반환할 것! 이상!”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적들은 351고지를 ‘죽음의
고지’라
불렀다. 이번
전투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초조가 행군 내내 떠나질
않았다. 칠흑
같은 밤, 후방
사면 참호엔 아군들이 총기름으로 켠 불이 보였다. 순간 고향집 호롱불이 그리워지며 식구들과 호롱불 밑에서
오순도순 이야기할 날이 올까 하는 망상을 하며 걸었다. 진지가 다가올수록 발밑으로 뭔가 물컹한 것이 밟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진지에 도착해 교대하러
나오는 1개
분대 병사는 9명이 아닌 2명이었다. 살아남은
병사는 “살고
싶으면 수류탄이나 자주 까 던져요” 하고 말했다. 순간 나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3일 전 인민군 공격에 육박전이 벌어져
쌍방 전사자가 진지에 널려 있었다. 어제 내가 밟고 온 물체는
시체들이었다. 시신들은 모두 부릅뜬 눈이 파랗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군은
스포츠머리, 인민군은 박박 깎은
머리, 장교는
약간 긴 머리로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도 몸이 안 좋을 때면 밤에 잠잘 때 악몽에 그때의 광경이 나왔다. 잠결에 몸서리치며 고함을 지르면 아내의 손길로 이성을 되찾곤 했다.
물이 부족했기에 소변을 받아 총의 진흙이 묻은 부위를 닦고 마지막에
총기름으로닦아야만 했다. 부서진 참호보수 작업은 밤에만 할 수 있었다. 작업이 끝나면 참호 시체 위로 포복해 후사면으로 이동해 젖은
옷을 말리고 잠이 들었다. 부분대장이었던 나는 낮에 먹을 주먹밥을 철모에 담아 우의로
덮어두고 가장 늦게 잠이 드노라면 “쉬익, 쿵,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흙이 공중에서 우수수
떨어졌다.이럴
때면 한결같이 “윽”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와 가슴을 한 번씩 손으로
만져보았다. 파편이 박히지
않았나, 피가
나지 않았나 하고 만져보고 멀쩡하면 ‘살았구나’ 안도감을 가졌다.
949고지 참호에서 허리도 못
펴고 25일 버텨
적진에선 적막을 깨는 확성기 소리가 자주
들렸다. 가냘픈 여자 목소리였다. “36연대
사병 여러분,당신들의 목숨은 누구를 위해 개죽음으로 끝나야
합니까. 목숨은
하나뿐이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지금 M1총을 거꾸로 메고 모자를 흔들면서
암호에 ‘부산’이라 답하고 오시면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공부를 원하면 공부를 시켜드리고 기술을 원하면 기울을 배우게
하여 먹고 살 걱정 없이 해줄 것이니 주저 말고 넘어 오십시오.” 확성기 소리에 병사들은 양손의 힘이 빠지며 향수에 젖게
되었고, 혹해서
넘어간 병사도 있었다. 행여 적들의 방송에 분개해서 욕지거리로 대응하면 소리 나는
곳으로 직사포가 날아와 희생자가 생겼다. 그럴 때면 동해안에 있는 미군 함포와 후사면의 곡사포는 몇
배의 발포로 적을 제압했다. 351고지는
백마고지, 김일성고지와 함께
중부전선 3대
격전지로 꼽혔다. 월북 사병이 있는가 하면 월남 귀순병도 있었는데 이 첩보에
따르면 적이 땅굴을 파오고 있었고 불과 300m 전방까지 작업 완료된 것을 알게
되었다. B-29 폭격기가 출격해 땅굴을 폭파하려 했지만 아군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폭격이 무산되었고, 결국 공병특공대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에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희생을 내며 지켰던 351고지는 지금은 북한 땅이 되었다.
1953년에는 강원도 화천
북쪽의 949고지로 갔다. 중공군과 대치
중이었기에 2인 1조로 참호생활을 해야
했다. 앉아서
고개도 못 펴는 기구한 신세였다. 교통호 안에 있어야 할 호가 적의 포탄 세례를 피하기 위한
위장전술로 교통호 밖에 있었다. 밤이면 연락병이
주먹밥 6개와
두 명당 수통 한 개를 전해 주고 갔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대변은 토끼똥 같아서 손으로 주워 밖으로
던지고, 편지를
달빛에 비춰 읽으며 보냈다. 하루는 포탄 한
발이 30m 앞에 떨어졌다. 신병이 규칙을 무시하고 변을 종이에 싸서 전방에 버린 것이
적에게 관측되었기 때문이었다. 모진 목숨 용케
살아 25일
만에 굴을 빠져 나오는데 처음엔 걸을 수 없었다. 엎어지고 걷다 기다를 반복하며 밤새도록
걸었다. 그때
우리 중대는 2명만 전사했지만 우리와
교대한 9중대와 10중대는 중공군에 완전 포위되어
중대원 100명
중 10명과 30명만 살아남았다.
이후 우리는 화천 하대리 북방 무명고지 공격에
나서 8부 능선까지 진격 후 돌격대기 중 곡사포 공격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나는 그때 포탄 파편에 팔을 맞아 전선을 내려왔고 당시 고지는
불바다가 되어 포탄 소리가 천지에 진동을 일으켰다. 내가 부상으로 전선을 빠져나온 후 무명고지를 공격했던 나머지
부대원들은 육박전으로 대부분 전사했다. 이후 나는 원주병원과 부산육군병원을 거쳐 육군본부에서 복무 후
제대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연들이
있다. 한 번은
낮에 초소에서 근무를 서다 잠깐 용변을 보러 갔는데 그 사이에 포탄에 초소가 박살이 났다. 어느 날은 적의 공세 기미로 급히 비상배치 근무를 서고 참호로
돌아오니 포탄에 참호가 박살이 나 있었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병사들에게 ‘빼갈’(술)을 먹여 일렬종대로 진격해
왔다. 앞에서
쓰러져도 뒤에서 계속 진격하는 인해전술이었다. 949고지에서 달빛에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는데 소쩍새 우는 소리가 어찌나 슬프던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60여 년 만에 받은
화랑무공훈장
박영근 옹은 지난 4월 29일
육군본부의 ‘훈장 찾아주기
운동’ 일환으로 949고지 방어 수훈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수상했다. 제대
후 그는 20여
년간 소금 도소매 일을 했고 이후 20여 년간 부동산 중개업을
했다. 그가
처음 등산을 시작한 건 1989년이다. 위장이 안 좋았던 그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등산을
시작했다. 그는 100개 산을 오르자고 목표를
세웠다. 매주
거르지 않고 산을 찾아 2년 만에 다
올랐다. 몸이
많이 좋아진 걸 체험한 그는 1,000개 산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노력
끝에2007년
태백의 백병산을 1,000번째 산으로
올랐다. 이후 2011년 81세에 봉화
청옥산을 1,500번째로 올랐으며
지난 5월 2,000번째 산을
올랐다. 이
과정을 ‘등산일지’에 모두
적었다. 산행
순번과 날짜,산
이름, 높이, 소재지, 산행 소요
시간, 코스
등을 빼곡히 적은 것이 2,000개에 이른다. 노트를
열자‘1178번, 2008년 1월 17일, 약재산,
540m, 전남 장흥군
용산면, 6시간30분, 운주리~남릉~서릉(소나무군락)~오도재 갈림길~정상…’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이를
책으로 펴내 1,000산 기록,
1,500여 산을 오르고 자서전 성격의
회고문을 냈으며, 2,000산 기념집을 자비출판으로 제작
중이다. 메모가
생활화되어 있어 80여 년의 세월을 날짜까지 꼼꼼히 기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암이 완치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큰 수술을 세 번
했죠. 1975년에 갑상선암 수술을 했고, 8년 전에 위암 수술을 했고, 작년 12월에 전립선암 수술을
했어요. 전부
초기에 발견해서 이렇게 산을 타고 있습니다. 암은 수술 뒤 사후관리가
중요해요. 저는
계속 등산을 해서 극복했어요. 수술 후 5년 뒤에 검사해야 완치 여부를 알 수 있는데 위암까지 완치된
상태입니다.” 4월에 훈장을 받은 그는
마침 2,000번째 산을 앞두고
있었다. 의미
있는 산행을 하고 싶었던 박 옹은 949고지를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2,000 산을 마지막으로 산을 세는 걸 그만두고 죽을 고비를 넘긴 산을
가보자”고
생각했다. 화천의 전방에 있는 부대에 전화를
걸었고, 사단
사령부 최금준 소령에게 사연을 얘기했다. 최금준 소령은 박영근 선생의 말에
공감해 949고지를 찾았으나 북한 땅으로 확인되어 대신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철원군 원동면 백암산(1,179m) 산행을 허가해
주었다. 박영근
옹은 5월 25일 2,000번째 산인 백암산을
올랐다. 최
소령의 배려로 아들, 딸, 며느리, 손자 9명이 함께
갔다. 그는 5월 25일에 산행을 할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그날은 949고지 진지 교대를 하던 날로 죽음의 고지에서 살아내려 온 날이었다. 최 소령의 노력으로 24일 최종 허가를 받아 산행이 성사되었다.
전우들 생각에 목이 메고 울컥 눈물
나와
산행을 위해 군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통제구역 내 비포장길로
들어갔다. 순간 피 흘리며 차를 타고 후송되던 때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적군 몇 명을 죽였냐고 물어보는데, 수류탄 막 던지고 닥치는 대로 쏘다 보니 누가 누굴 죽였는지 몰라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거였죠.”
통제구역이기에 현역 사병들과 함께 산행을
시작했다. 부대 측은 여든 넘은 노인이 과연 험한 백암산을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허나 그가 빠르게 산을 치고 올라가자 눈이 동그래졌다고 한다. 그는 “산에 가면 정상을 목표로 빠르게 걷는
스타일이며, 8년 전만 해도 안내산악회 따라가면 늘 선두로 치고 나갔다”고 한다.
여자와 아이들은 남고
남자들만 3시간을 걸어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트여 있어 경치가 시원했다. 눈을
멀리 두자 정면으로 949고지가 보였다. 뾰족하면서도 능선이 힘 있게 뻗어
있었다. 순간
거짓말처럼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팔 다리가 뜯기고 창자가 튀어나오고 피를 토하며 죽어간
전우들이었다. 문득 목이 메고 눈이 매워지더니 울컥 눈물이
났다. 전우들의
육신은 썩어 뼈다귀가 그대로 저곳에 뒹굴고 있을 터였다. 그는 종교를 갖지
않았지만 “부디
평온한 하늘나라에서 고이 잠드소서”하고 기도했다. 그들은 죽음이 억울해서 아직도 귀신으로 떠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기념사진을
찍고 2시간을
걸어 2,000개 산 산행을 마쳤다.
83세의
나이로 25년
만에 2,000개 산을 오른 그의 노력은 땀에 배인 걸음걸음을 모아 쌓아올린
거탑인 것이다. 그는 “백암산 산행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며 말을
하는 와중에 금세 눈물을 그렁거렸다. 박
옹은 “화랑무공훈장을 주신 육군본부에 감사하며, 백암산 산행을 허가해 준 최금준 소령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을 마쳤다.
화천 산양리 승리전망대에서 본 DMZ와 북한. 오른쪽 아래가
백암산. 앞쪽 계곡을 북한 안남댐에서 나온 물이 금성천을 이루며 평화의 댐으로 흐른다. 백암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계곡 너머 북한 땅에
949고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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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아리 부근에서 460번 지방도를 타고 계속 북쪽으로 갑니다.
해산터널을 통과하면 평화의 댐이 나타납니다. 평화의 댐은 파로호 상류에 위치한 댐으로, 길이 601m, 높이 125m이며 최대저수량은 26억
3000만t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대비하여 전두환 시절에 만들어진 댐으로 건설을 위하여 국민모금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86년 10월 착공하였고 1988년 5월에 1단계 공사를 완료하고 2002년 9월에 2단계 공사에 착공하여 2005년 10월 완공되었습니다.
현재는 화천과 양구 펀치볼 전적비와 고성 통일 전망대 등을 잇는 통일 안보관광지로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이 일대를 비목공원이라고도 합니다.
평화의 댐을 지나면 전국에서 가장 작은 군인 양구군이 나타납니다.
양구
화천에 소설가 이외수가 있다면 양구에는 화가 박수근이 있습니다.
그는 1914년에 태어나 1965년 5월에 죽었는데 서민적인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양구군은 그의 탄생지인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에 박수근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그의 묘도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2001년 11월 착공해서 2002년 10월 25일 개관했다고 합니다. 전시품은
박수근 유족이 기증한 미공개 스케치 50여 점과 수채화 1점, 판화 17점과 박수근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린 동화책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엽서
모음과 스크랩북, 생전에 사용하던 안경·연적, 편지와 도서 등 200여 점 외에 화가들이 박수근을 기려 기증한 작품 70여 점 등 입니다.
미술관 인근에는 관람객들을 위한 4,500평 규모의 동산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6.25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 노동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따위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 힘들고 고단한 삶속에서도 그는
삶의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무던한 마음을 그렸다고 합니다. 절구질하는 여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길가의
행상들, 아기를 업은 소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김장철 마른 가지의 고목들... 그는 예술에 대하여 거의 언급한 일이 없고 또 그럴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가 쓴 '아내의 일기'를 보면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을 그려야 한다는 극히 평범한 예술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일산에서 설악산에 가려면 대개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으로 가서
44번 국도를 타고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거쳐 오색약수로 가곤 합니다. 올 때도 갈 때의 역방향으로 옵니다. 그러나 44번 국도를 타면 나타나는
원통에 31번 국도가 나 있는데 이 길을 이용해도 춘천을 거쳐 경춘고속도로를 탈 수 있습니다. 요즘 31번 국도는 직선화가 되어 있어서 아주
편리합니다. 31번 국도를 타고 30분쯤 가면 광치터널입니다. 이 터널을 나오면 양구군 남면 가오작리입니다. 바로 이곳에 광치자연휴양림이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휴양시설인데 운치가 있습니다. 이 근처 맛집으로는 가오작리 1051-1의 광치막국수가 있습니다. 막국수,
편육, 손두부가 유명합니다.
광치휴양림에서 하룻밤 자고 453번 지방도로를 찾아서 해안면에
있는 펀치볼로 갑니다. 접경지인 해안면은 양구 읍내에서 약 20km 북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이 있습니다. 6.25전쟁
때 '해안면 분지(펀치볼)를 차지하기 위해서 남북이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한국군과 미군은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북한군 제1사단을 격퇴했다고 하는데 모두 3000여 명의 군인들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동면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서
5km를 더 달리면 돌산령 터널이 나옵니다. 과거에는 돌산령을 넘어가는데 차로 20분이나 걸렸지만 이 터널 덕분에 2분이면 산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터널을 나오면 해안면입니다. 해안면은 6개 리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고 현재 582세대 1485명이 거주합니다. 면소재지에는 곳곳에
분대 병력 정도의 군인이 배치돼 있는데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을지전망대, 제4땅굴 출입 확인서를 받으려면 신분증을 재출하고
신분확인서에 주소, 전화번호, 주민번호도 써야 합니다. 제4땅굴에서는 준비된 영상을 관람하고 안내를 받이야
합니다.
땅굴 인근에는 인삼밭이 많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짓는 농사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인삼을 재배하던 사람들이 새 경작지로 양구를 선택한 거라고
합니다. 해안면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인삼은 특용 작물이기 때문에 농부라 하더라도 기술과 자본이 없으면 재배할 수 없다"며 "경험과 자금력이
풍부한 다른 지역 농민들이 양구에서 땅만 빌려 인삼을 재배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을지전망대로 갈 때는 아주 가파르기 때문에 저단 기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을지전망대가
가까워지면 철조망이 길 옆으로 이어집니다. 을지전망대에서는 북한 쪽을 향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움푹 패인
분화구에 건설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펀치볼의 볼은 ball이 아니고 bowl입니다. 사발이란 뜻이니까 움푹 파인 분지란 뜻이지요.
펀치볼은 대암산(1천304m) 줄기인 가칠봉(1천242m), 대우산(1,179m), 도솔산(1,148m)을 잇는 남북방향의 분수령 안에 들어
있습니다. 분지 바닥에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방사상의 작은 하천들이 동쪽으로 인제군 북면 방향의 소양강으로 유입돼 북한강으로
흘러갑니다.
펀치볼의 모습은 남북방향으로 길쭉하며 남쪽으로 좁아진 접시와
같습니다. 이처럼 특수한 지형을 이루게 된 데 대해서는 `운석 충돌설'과 `차별침식설'이 있으나, 충돌설은 분지에서 운석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아서 신빙성이 낮고 분지 바닥이 주변에 비해 무르다는 이유에서 차별침식설이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펀치볼은 또 옛날 호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지금도 산 중턱에서 조개껍질이 발견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펀치볼의 면적은 23평방㎞, 동서의 길이는 약 3.5㎞여서 백두산 천지(둘레
11.3㎞, 면적 7.8평방㎞, 깊이 320여m)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펀치볼은 6.25 전쟁의 격전지로 펀치볼전투, 도솔산전투,
가칠봉전투 등을 기념하자는 전적비가 여러 개 세워져 있습니다. 지금도 곳곳에 `지뢰밭' 푯말이 있고 지난 해 산나물을 캐던 주민이 지뢰를 밟아
죽었다고 합니다. 전후 이곳 일대는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자연환경이 잘 보존돼 왔기에 천연기념물 열목어, 개느삼, 금강초롱, 날개하늘나리,
해오라비난초, 끈끈이주걱, 산양 등 많은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또 해발 1300m의 대암산 꼭대기에는 남한 유일의 고층 습원인
`용늪'이 수천년의 생태계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미군과 중공군이 혈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여기서 농부들이 더덕,
치커리, 배추, 감자, 포도 등을 재배하고 있답니다. 이 동네서 시래기가 많이 생산이 되는데 그래서 시래기에 고등어를 넣고 끓인 찌게가
유명합니다. 해안면 후리 728번지에 있는 정주골 식당 참고.
이후 453번 지방도를 타고 남하하면 인제군 북면의 원통리에
도달합니다. 인제에서 원통으로 가면 양구의 펀치볼로 가기 십상... 그래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다...란 말이 나왔을까요?
고성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다루고 강화도는 서해 5도와 함께 다루면 일산 파주에서 시작한 우리의 DMZ 여행은 얼추 끝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토요일 밤이예요.
2013년 1월 하순의
여행
강원도 양구 가오작리에 있는 군립 광치휴양림입니다. 양구군청
산림과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305호 은행나무 방에 들어 왔습니다. 방안 온도가 방금 10도로 올랐습니다. 예고 없이 와서 방이 차갑다고 직원이
미안해 합니다. 방이 없으면 집으로 간다는 생각으로 무대뽀로 왔거든요. 계곡이라 그런지 바람이 몹시 차갑고 셉니다. 직원 말이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1월 23일 그것도 저녁 7시입니다. (경험 후... 군립 광치휴양림 은행나무실은 보일러 때고 5시간만에 따뜻해
집니다. 겨울철엔 필히 미리 연락을... 여기서 추울 때는 방 가운데로 자리를 펴고 인덕션에다 물을 끓일 것. 이층은 온돌 장치가 없음!)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는 강원도의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을 맛볼 수 있는 건가요? 여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으니 양구의 해안면 즉 펀치볼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지금 초저녁인데 여름같으면 아직 해가 있을 시간인데, 혼자있으니 좀 쓸쓸하군요. 물론 여기도 티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티비를 보는 건 자연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 같아서... 바람 소리와 보일러 소리와 창문
흔들리는 소리. 물론 새나 개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감각은 인간보다 예민한 저들이기에 추운 건 우리보다 더 잘 알겠지요. 10인용이라는 방에
혼자 드니 좀 아깝고 아쉬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마루방이 복층으로 있고 칸이라곤 화장실 밖에 없으니 가족이 아니면 프라이버시에 신경 좀
쓰이겠네요. 멀리 산등성이를 31번 국도가 휘감아 돌고 있군요. 저 국도가 저렇게 닦이기 전에는 이곳 휴양림 앞을 지나 힘겹게 광치령을 올라가서
원통으로 갔다고 합니다.
광치령은 고층습지로 유명한 대암산 남쪽에 있는 고개입니다. 이 산의
북쪽에 해안면 즉 펀치볼이 있습니다. 면 전체가 움푹 들어간 기괴한 모습의 지형인데다가 민통선 지역이라 합니다. 김화에서 화천으로 가려고 5번
국도를 탔는데 음산한 말고개 정상을 지나자 초소가 나타나고 경비병이 나오더니 서약서를 쓰랍니다. 2부를 작성하라 해서 해주니까 1부는 지가 갖고
1부는 다음 초소에다 내랍니다. 전화 번호를 대라해서 댔더니 어디로 전화를 걸랍니다. 전화를 걸었더니 스피커로 내 번호가 흘러 나오고 그제서야
가랍니다. 군인들 앞에서는 그들이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진실만 말하세요. 이게 민통선 지역에서 민간인이 통행하는 방법이군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불필요한 절차 같습니다. 노크 귀순이 가능한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산을 돌다 보니 네비게이션에 승리전망대라고 나오더군요. 산너머가
이북인 모양입니다.
아무튼 바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오고 있는 305호 은행나무 방에서
추위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거 하룻밤 제대로 자고 일어날 수 있으려나? 내일 자동차 시동은 잘 걸릴까? 핸드폰 배터리가 1분에 1%씩 줄어 들고
있는데... 걱정이 많아 집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 오후 10시가 되었습니다. 방안 온도가 14도가 되었습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는
요란하게 들리는데 아직 외투 벗기가 어려운 온도입니다. 6만5천원을 내고 든 방입니다. 고성 현대콘도를 7만원에 들었었는데 너무 비교가 되는
바입니다. 그나저나 강원도 요쪽은 왜 이렇게 바람이 심할까요?
이번 강원도 여행은 작년 2월에 고성에서 시작한 DMZ 지역 여행의
하나입니다. 나의 여행기는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꼬박꼬박 올리고 있지요. 참고. 특히 이번 여행은 화천의 산천어 축제를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25일에 끝난다고 하기에, 그러고 보니 내일이네, 오늘 정오쯤 가볍게 일산을 떠났습니다. 화천으로 오다가 김화에 잠깐 들렀습니다. 그곳
남대천에서도 2월 7일까지 겨울 쉬리 축제를 한다기에... 여름에는 다슬기 잡기를 했고 겨울에는 얼음 놀이를 한답니다. 그러나 남대천 또는
화강은 휑했습니다. 마을 사람 말이 다들 화천으로 갔답니다. 처음에는 관광객들이 화천으로 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화천에 와보고 김화의
장사꾼들이 갔다는 말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쉬리 축제에 대목을 기대했던 장사꾼들이 산천어 축제로 몰린 겁니다. 먼젓번 강원도 겨울 여행
때 보니 식당들이 장사를 안 하더군요. 저녁 예약 때문에 안된다, 전날 예약을 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렇거니 했지만 집집마다 그러니 나중에야
이해가 되더군요. 손님이 없어 준비를 안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겨울에 강원도 여행을 할 때는 반드시 음식과 간식과 물을 챙겨야 합니다.
이게 이번에도 주효했습니다.
산천어 축제에 왔는데 산천어를 먹어 봐야지. 얼음판에 산천어 구워
주는 곳이 있더라구요. 고기를 잡아오면 한마리에 1,500원씩 받고 구워 준답니다. 그냥 사먹으려면 7,000원 내랍니다. 작은 고등어 크기인데
7,000원! 맛있는 막국수가 6천원인데? 밖으로 나가보니 산천어 축제 공식 먹거리 장터가 있더라구요. 호객 행위를 하는 가게는 들어 가지
마세요!라고 써붙였기에 들어가 봤더니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 가게가 없었습니다. 도로 나와 맛집으로 기록된 가게에 가봤더니 산천어 매운탕이
35,000원이랍니다. 혼자라 했더니 20,000원 내랍니다. 산천어 축제 자체는 모범적이었습니다. 노란색 표지판을 가슴에 단 안내요원들이 매우
친절했고 인사도 잘했습니다. 주민들도 그랬습니다. 야산에 그려진 산천어 모습이 재미있었습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상을 줘야 합니다. 하늘
가르기도 멋졌고 5시까지 진행이 되는 얼음 낚시도 재미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한 마리도 건지지 못했지만 어떤 아저씨는 팔뚝만한 산천어를 비닐
봉지 하나 가득 잡았습니다. 구획을 나누어 하는 썰매 타기 등도 질서 정연 했습니다. 둑에는 차를 세울 수 없을 줄 알고 화천초등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무료 주차장에 주차한 게 좀 억울하기는 했었지요. 문제는 비싼 음식값입니다. 축제다운 먹거리를 싸게 팔아야 합니다. 이번에 대목이다!란
생각을 가지면 미래가 없습니다. 겨울철에 어차피 장사 못할거 축제 때문에 기회를 가졌으니 감사하는 의미에서 적정 가격을 붙이란 말이지요. 산천어
한 마리 오천원 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매운탕이나 회는 생선 값만 받고 거저 해줘야 합니다. 이게 축제지요. 부자들은 이런 축제 안옵니다.
서민들과 서민의 자녀들이 오지요. 비싼 회 먹을 바엔 가까이 있는 파로호 회타운에
갑니다.
화천댐에서 우회전하면 파로호 남쪽 산등성이를 타고 춘천 지역으로
나옵니다. 좌회전하면 파로호 북쪽으로는 460번 도로를 따라 평화의 댐을 거쳐 방산면을 거쳐 해안면으로 갑니다. 사실 이번에는 이 길을 택하고
싶었지요. 그러나 날도 어둡고 빙판이 많을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춘천 지역을 나와 46번과 31번이 겹치는 국도를 만나면 좌회전 하여 동쪽으로
갑니다. 양구읍으로 가는 도로를 통과하면 곧 46번을 타면 곧장 인제로 가지만 31번을 타면 광치터널로 해서 원통으로 갑니다. 여기서 백담사가
있는 용대리가 가깝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만 해도 46번과 31번이 교차하는 국도는 엄청나게 꼬불꼬불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어 그때보다 3배 이상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역시 길이 좋으면 빠릅니다. 하지만 재미는
없지요.
31번 국도 왼편에 광치휴양림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길을 따라
끝까지 들어 가면 익숙한 차단기가 나오고 휴양림의 안내소가 보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자기로 합니다. 직원이 연락도 없이 왔다고 불평을 합니다.
문제는 히팅이랍니다. 정말 춥습니다. 게다가 강원도의 그 모진 바람이 붑니다. 고성 한화콘도에 머물렀을 때를 잊지 못합니다. 2009년
5월이었을 겁니다. 바람이 너무 불었지요. 콘도의 바깥 유리창이 불룩해져 왔습니다. 곧 파손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가오작리에서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심하게 바람이 불어도 괜찮아요?란 질문에 바람이 세죠?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라고 직원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5월 바람에 비해 1월 바람은 차갑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자동차 엔진이 얼어 터져 버리면 어떡허나...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그리고 ... 하지만 나는 낙관론자가 아닌가... 이 지역에 많은 산들이 있습니다. 계곡이 이렇게 추운데
정상은 얼마나 더 추울까요? 지금 초소에서 보초 서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 춥다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니지요. 하지만 정말
차가운 바람입니다.
가오작리 광치휴양림의 밤은 깊어 가고 있습니다. 바람이 세게...
세도 너-무 세게 불면 방안에 바람이 들어 옵니다. 이중샤시도 별볼일 없나요? 내 아이패드 어플 AccuWEATHER에 따르면 오후 11현재
영하 9도 입니다. 내일 아침 8시가 가장 추운데 영하 19도나 된다고 합니다. 다행히 방바닥은 뜨거워 지고 있습니다. 우풍은 여전하지만 바닥이
더우니 견딜만 합니다. 바람만 불지 않으면 아주 조용하고 적막할 텐데...이건 워더링히이츠도 아니고 워더링 밸리인가? 그나저나 먹을 건
앨리게이터 두 개와 골드 레이블 커피 두 개. 강원도 여행 때는 라면과 햇반은 필수품으로 챙겨야 낭패를 안보는데 광치휴양림 방갈로의 아름다운
겉모습에 반해 들어오고 나니 나가기 싫다! 사람도 별로 없으니 구내매점이 있을 리 없지요. 하지만 나의 몸무게는 82대로?
흐흐흐.
지금 새벽 2시 38분. 방 안 온도는 18도가 되어 어느 정도
견딜만 하고... 무릎은 여전히 시리고.. 아이패드 배터리는 11%가 남았으니 곧 방전이 되겠네요. 차량용 충전기는 가지고 오면서도 가정용
충전기... 그걸 빠뜨리다니... 아이패드가 내장 키보드가 있어 편리하지만 다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할 때 글 쓰기에 참 편리합니다.
오타 수정도 해주니... 그리고 그대로 카피해서 트?이나 페이스북에 올릴 수도 있고...이번에 산 니콘 하이브리드도 실험을 해봅니다. 요게
광각을 찍을 때는 아주 편리하군요.
아침 7시... 영하 20도라더니 영하 12도로 고정이 되어
있습니다. 바람 소리, 보일러 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설쳤지만 그래도 깨끗한 광치의 공기가 피곤을 싹 풀어 주었습니다. 밤새도록
보일러를 때 바닥은 뜨거운데 실내 온도는 17도입니다. 바깥이 워낙 추워서 그런가요? 어제 남겨 둔 비스? 두 개와 봉지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휴대폰을 끄고 잤더니 배터리 잔량이 아직 30%입니다. 옳다구나 싶어 윙스푼맛집 어플을 찾아보니 해안면 후리의 정주골 식당이
아침식사를 하게 해준답니다. 메뉴는 시래기고등어찜! 그러나 강원도에서 음식 기대 하지 말라는 나의 신조는 이번에도 여전히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주골 식당 아줌마 말이 우리는 아침 식사 안합니다! 그럼 어플 정보는 뭡니까?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강원도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불친절하고 책임의식이 없는가 했더니
인구의 60-70%가 외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북에서 피난왔다가 대책없이 거주하게 된 사람들... 군인들 보고 장사하러 들어 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과반수가 넘으니... 강원도의 삶은 안정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게 식당이라... 소위 접경 지역에서
왜 여당 표가 많이 나오나 했더니 그들의 바람은 오로지 안전... 돈이 없어 안전한 곳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소양호가 생길 때 보상을 받은
원주민들은 거의 다 서울로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룻밤을 안전하게 보낸 군립광치휴양림 503호 은행나무실을
나와 차의 시동을 켰습니다. 긴장! 그러나 시원하게 시동이 켜졌습니다. 눈길을 살살 몰고 나왔습니다. 기온은 쌀쌀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습니다. 아, 이제는 뭔가 먹을 수 있다... 곧 동면이 나왔고 31번 도로를
탔습니다.
월운에서 좌회전 하라고 합니다. 직진하면 비아리까지 간다는 푯말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31번 도로가 향하는 머지 않는 곳에 거대한 댐이 보였습니다. 31번 국도는 내금강을 지나 통천을 지나 원산을 지나
함경도 끝까지 갈 수 있게 하는 긴 길인데... 월운에서 좌회전 하면 453번 도로를 만납니다. 해안면으로 가는 도로입니다. 15분쯤 달렸을까?
산으로 오르는가 싶더니 돌산령 터널이 나타났습니다. 도솔산에 난 터널이었습니다. 터널을 나가자 아니 해안면으로 들어오자 하얀색의 아늑한 분지가
나타났습니다. 소위 펀치볼입니다. 6.25 전쟁 때 여기서 육박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펀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볼은 공이
아니고 접시를 말하는 보울입니다. 그래서 펀치볼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펀치볼, 아니 해안면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시래기나
각종 특용 작물을 판다는 안내문을 적어 놓은 농가였습니다. 여기도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서 인삼이나 기타 귀한 채소 농사를 한다고
합니다.
면 소재지 직전에 본 마을... 빨간색 깃발을 내다 걸었습니다.
하얀 눈, 파란 하늘, 그리고 빨간 깃발... 그 깃발에는 산불예방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 색깔들이 이상한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안면을 둘러싼 1000미터 이상의 산 위에서 망원경으로 나를 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
정주골 식당을 찾았다가 무안만 당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와서 밥달라는 사람이 어딨냐는 투로... 어플보고 왔다니까 어플이 뭐냐고... 아무튼
강원도 여행을 할 때는 햇반, 라면, 버너, 코펠... 반드시 지참! 안 그러면 정말 낭패본다니까... 시래기나 사갈까 했지만 문을 연 곳이
없다! 잘 됐지 뭐 돈 아끼고... 필요하면 전화해서 부쳐달라고 하자... 안내문이나 찰칵찰칵! 하기야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에 눈을 헤집고
온 내가 문제지... 해안면을 한바퀴 돌고 왔던 길로 다시 나와 460번 도로를 타러 감. 453번 도로를 계속 타고 가면 원통이 나옵니다.
거기서 직진하면 인제 그리고 동홍천... 곧장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재미가 없지요. 원통에서 31번 도로를 타고
오른쪽으로 가면 광치 터널이 나오고 곧 내가 하룻밤 묵었던 광치휴양림이 나타납니다. 근처에 광치막국수가 유명하다는데... 반질반질한 돼지고기
편육은 어떻고... 그러나 지금 갔다가는 이 추운데 무슨 막국수냐... 할 것
같아서...
460번 도로는 양구읍 북쪽 항령에서 시작하여 화천읍 동쪽 풍산리
뱀머리 고개까지 입니다. 동면에서 양구읍 북쪽을 살짝 거쳐 항령 터널을 통과하면 북한에 땅 일부를 걸치고 있는 방산면입니다. 항령은 학령이라고도
하는데 6.25 전쟁 때 유엔군이 크리스마스에 점령했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고지라고도 부릅니다. 한편 풍산리 뱀머리 고개는 6.25 전쟁 때 죽은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불도저로 이것을 밀고 사람이 통과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양구와 화천은 마을 수보다 전투가 있었던 고지들의 수가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양구군의 방산면 현리의 피의 능선과 그 북쪽에 11킬로미터 정도 도열해 있는 단장의 능선은 460번 도로의 북쪽
벽이 되는 셈입니다.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에서만 5만 명의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양구읍과 방산면을 이어주는 성곡령은 유엔군의
희생이 특별히 커서 유엔고지라고도 부릅니다. 아무튼 이런 희생 때문에 우리는 460번 도로를 갖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도로는 휴전선
바로 아래 버티고 있는 산봉우리들의 남쪽 중턱을 깎고 이어서 만들어 졌습니다. 파로호에서 보면 바로 북쪽의 산맥 중상층부를 깎아 만든 동서 횡단
도로입니다. 한국의 길들은 반도적 특성에 따라 남북 종단 도로으로 만들어진 게 많습니다. 국도의 번호를 봐도 남북 종단을 일리는 홀수 번호가 더
많지요. 남북 종단 도로들은 계곡을 따라 만들어 졌기 때문에 고개가 있어도 터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만들어진 동서횡단 도로들은 긴
터널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이 터널을 통과하여 금새 산 너머 지역으로 가게 되지요. 양구 화천 쪽이 특히
그렇습니다.
460번 도로는 양구와 화천 경계에 있는 소위 평화의 댐 위를
지납니다. 평화의 댐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평화의 댐 양구쪽에 비목공원이 있습니다. 비목은 비석 대신 세우는 나무를
말합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14킬로미터 떨어진 DMZ에서 1960년대 초반에 근무를 했던 한명희 소위가 비목이 세워진 돌무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비통한 마음으로 시를 한편 썼고 이 시에다 장일남 씨가 곡을 붙였는데 그게 요즘 유명한 비목이란 이름의 가곡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목
공원이란 무명용사의 희생을 기리자는 의미의 공원입니다. 그런데 그게 평화의 댐 위에 세워진 것은 아이러니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기나
전쟁이나 허무한 건 매 한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목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짓을 하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460번 도로는 해산터널을 지나면서 급경사를 만납니다. 이번에 눈이
많이 와서 스키타는 기분으로 차를 몰고 내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양구쪽에서 올 때 해산터널 앞에 있는 휴게소에서 쉬면서 숨을 좀 돌려야 합니다.
만약 날씨가 좋고 시간이 있다면 그곳에서 가까운 비수구미 마을이나 955.4미터의 재인산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해산은 재인산 남쪽에
우뚝 솟은 1,190미터의 일산을 말합니다. 여기서 일 자는 해를 말하거든요. 2008년 5월인가... 고성 한화콘도에서 있었던 교육부 수련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다가 양구읍을 거쳐 평화의 댐에 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460번 도로가 없었습니다. 덩그러니 댐만 있어서 삭막하기
그지 없었지요. 지금 가보니 엄청난 돈을 들여 유원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유원지에서 숙박도 할 수 있답니다. 비수구미 마을에서는 오지
체험도 할 수 있다니 구미가 당깁니다. 그러나 파로호... 오랑캐를 파멸시킨 호수라는데 거기서 잡힌 민물고기는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다.
다시 화천읍으로 왔습니다. 밥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파 명문식당으로
갔습니다. 산천어 매운탕을 해달라고 했더니 2인분 이상 한답니다. 그럼 2인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많다면서 안판다고 하는 겁니다.
남기면 될 거 아니냐고 했더니 미안해서 그렇게는 못한다는 겁니다. 길 건너 한식당이 있으니 가보라는 겁니다. 나는 산천어 매운탕이 먹고 싶다,
한식당이야 화천이 아니라도 많다... 하지만 안판다는 겁니다. 뭐 이런 짱구들이 다있어... 에이 빨리 철원에 가서 와사비갈비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56번 도로를 탔는데... 5번을 타면 또 서약서 써야 하니까... 56번 도로를 타면 길가에 산천어를 순대에 넣어 순대국을 만드는
왕골식당이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들렀더니 축제 기간이라 역시 문을 열었더군요. 그래서 순대국을 시켰더니 자기들이 직접 순대를 만들기 때문에
맛있다네... 그래서 달라고 했더니 순대국하고 순대하고 둘 다 드시기에는 너무 많을 거라고... 알았다고! 싸가면 될 거 아니냐고! 그래서 겨우
순대국 얻어 먹고 순대 포장해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오후 2시가 넘었습니다. 돌아오다가 철원에 들러 와사비갈비를 7인분 사가지고
일산으로 돌아왔지요. 끝.
강원도 고성
여행
남한의 최북단은 강원도 고성이다. 고성은 황해도 사리원과 같은
위도에 있다. 남북한 경계가 본래 위도 38도선이었는데 북방 어장으로 치면 38.35도선까지 올라갔다. 이것은 6.25때 고성쪽에 투입된
군인들의 희생 때문이다. 지금도 고성 북쪽에 군인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6.25때 고성 탈환을 위해 전사한 군인들의 손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국도 7번을 타고 북상하다보면 명파리의 민통선 검문소에서 막힌다. 민통선... 민간인은 통제 받는 선... 나도 민간인... 그렇다면
더 이상 못간다는 얘기다. 물론 민통선 11킬로미터 전방에 있는 통일전망대 관리사무소에서 절차를 밟으면 민통선 북방의 통일전망대에 갈 수 있다.
그리고 금강산 여행이라도 나서면 휴전선을 통과해 금강산까지도 갈 수 있다. 하지만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간다고한들 통제를 받고 다닌다면 그것은
여행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이 민통선에서 남쪽으로 가기로 한다. 국도
7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통선 검문소에서 만난 군인들은 싹싹했다. 앳된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다. 고마워서
카라멜 한 봉지를 건넸다. 아주 좋아했다. 한창 때의 청년들... 아무리 국가를 위한다고 하지만 무료봉사를 하고 있다. 이런 청년들에게 아버지
빽으로 군대 안가는 녀석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그런 녀석들이 출세를 해서 국방 문제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한다면?
검문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길 양 옆으로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다. 소위 명파리 상업지구... 수 많은 청색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한나라당의 무슨 대회 같다. 그런데 구호가 적혀 있다. 설악권 관광지
편입 반대! 우리는 금강산이다! 금강산 관광으로 호황이었던 시절을 그리워 하면서 그걸 재개하라는 구호다. 요즘 금강산 관광이 끊겨서 이 지역
경제가 말이 아니라고 한다. 척박한 고성 땅에 금강산 관광이 생겨서 아주 좋았는데 요즘에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단다. 금강산 관광...
그것이 북한 정권의 핵무기 개발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유롭게 창조된 인간을 제멋대로 통제하려는 권력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 글의 전개에서 조금 벗어나기는 하지만... 현재 고성은
을지부대가 방어를 맡고 있다. 특히 을지부태는 진부령 정상에서 접근할 수 있는 향로봉 방어를 맡고 있기도 하다. 해발 500여 미터의 진부령
정상에서 고성 방향 왼쪽으로 난 백두대간 길을 따라 가면 금강산의 한 봉우리인 해발 1200미터의 향로봉으로 갈 수 있는데 군사분계선 남방
한계선 위에 위치한다. 당연히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다. 향로봉은 남한에서 가장 추운 지역에 들기도
한다.
명파리에서 화진포에 이를 때까지 DMZ, 안보전시관, 금강산 뭐뭐
라는 단어들로 그려진 간판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자가용 차들이 마음을 즐겁해 해주었다. 금강산콘도라 이름붙은
큰 건물도 있었다. 그 주변의 펜션들... 요즘에는 콘도 회원권이 예전처럼 각광을 받지 못한다. 더 경치 좋은 곳에 더 싸고 더 편한 숙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맛집이라고 인터넷에 나오는 가게들마다 차들이 서 있는 모습도 즐거운 풍경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여유로워졌다는 의미가 된다.
화진포에 도착하기 이전에 대진항, 초도항이 나타난다. 대진항은 아마도 최북단 항구일 것이다. 그러나 휴전선 가까이 이런 항구가 있을까 할 정도로
큰 항구다. 대진항에 잠깐 들렀다.
대진항에 들어서면 수 많은 소형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다. 배의 크기로 짐작하여, 그리고
너무 많은 배들이 쉬고 있는 모습에서 어부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어떤 나뭇배 갑판과 고물에는 가마솥을 걸어 놓았다. 신기하게 장작을 때도록
되어 있다. 선원들에게 주려고 국을 끓이려는 것일까? 무얼 하기 위해서일까? 물어보고 싶어도 사람들이 없다. 추운 바다 위에서 작업을 하려면
이렇게 장작을 때는 시스템이어야 되겠지...라고 추측할 뿐... 새벽에 가면 그들의 삶을 직접 볼 수도 있는데 새벽에 그곳에 가기가 그렇게
쉬운가 말이다. 싱싱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그들에게 감사할 따름... 대진항에서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커다란 등대가 유명하다.
등대지기들의 숙소가 제법 큰 것으로 봐서 등대의 규모가 크다. 수산시장을 비집고 들어가면 파출소가 나타나는데 그 파출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그러면 머리 위로 등대가 보인다. 휴전선 때문에 이처럼 큰 등대가 필요했을까? 이채로운 것은 등대쪽으로 산책로가 나있다는 점이다. 참
고맙다. 이 산책로를 따라가면 대진항 전체를 볼 수 있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마다 제 고향 꾸미기에 열심을 내고 있는데, 고성군의 경우도 그
열심이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조금 더 자연친화적이라면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있다. 등대 옆에는 공군 파견대가 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면 엄청
춥겠다... 등대 밑 비탈에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 있고 그 아래는 조그만 전복 양식장도 있다. 바위로 둘러 싸인 전복 양식장이 아주
귀엽다. 나이 든 아주머니가 열심히 바다에 드나들며 뭔가 관리를 한다.
대진항 언덕 위 등대에서 내려다 보면 바로 아래 큰 방파제가 있다.
테트라포트로 만들어진 방파제라서 매우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낚시꾼들이 많이 모인다. 테트라포트에는 여기저기 음식점 광고글이 붙어 있는 게
여기가 낚시 포인트라는 걸 알려 주고 있는 것 같다. 광고 글 중에서 제일 많은 게 홍콩반점의 것이다. 페리카나 치킨도 보인다. 전화를 하면
즉시 배달이다. 멀리 해경 순시선이 보인다. 사진을 조그맣게 해 놓으니 잘 보이지 않는데 사진 위 중앙에 희끗한 게 그것이다. 어로한계선을
지키는 배다. 이런 배를 보면서 짜장면이나 치킨을 먹으며 낚시를 한다... 자극적이다.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불면? 한 발 삐끗하면 3미터가 넘는
테트라포트에 빠져 버릴 것이다. 나같으면 여기서 낚시하지 않을 거다.
다음은 초도항이다. 대진항에서 아주 가깝고 작은 포구다. 2012년
2월 5일 오후... 배들의 움직임은 전혀 없고 조용한 포구의 물 위에는 갈매기 수 백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 울음소리? 또는 노래소리?가
조용한 포구의 정적을 깼다. 이것도 한 겨울 포구의 정경이다. 초도항은 성게알젓으로 유명한 포구라고 한다. 초도항 방파제에는 해녀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일했던 분들의 얼굴로 짐작이 된다. 잘 그렸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얼굴에 잘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초도항에만
있는 건 아닐 거다. 이 나라 전역에, 특히 휴전선 이북에도 있을 것이다.
초도항은 화진포에 거의 붙어 있다. 화진포는 호수를 중심으로 마치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화진포 호수를 석호라고 한다. 석호란 바닷물의 퇴적 작용으로 형성된 자연적인 호수다. 바다와 바다를 퇴적 모래가 갈라
육지 쪽이 호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화진포하면 소위 김일성 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별장을 빼앗긴 김일성이 얼마나 배가 아프겠는가
하기도 했다. 화진포 해수욕장 뒷편 야산 중간에 지어진 돌 집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6.25 이전에 여기에 와서 하룻밤 잤을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 별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6.25 때의 수복 지구라서 감격스런 나머지 그런 이름을 붙이고 이런저런 전설을 만들어 붙이지
않았나 싶다. 이 돌 집은 본래 선교사들이 지은 집이다. 선교사들... 지리산에도 금강산에도, 화진포에도 휴양소를 참 많이
지었다.
위 사진은 화진포의 해양박물관 옥상에서 찍은 것이다. 왼쪽이
동해쪽인데 모래사장을 화진포 해수욕장이라 한다. 오른쪽은 민물 호수인데 이름하여 화진포 호수다. 화진포 해수욕장 건너편 언덕 가운데 희끗한 점이
소위 김일성 별장이다. 그리고 부근에 이기붕 별장이니 이승만 별장이니 하는 게 있다. 냉전 시대와 독재 시대의 산물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허전할 뿐이다. 그 오른쪽 기슭에 군인들을 위한 휴양 시설이 있다. 화진포 해양박물관에는 조개 전시실과 수족관이 있는데 입장료가
5,000원이다. 수족관을 운영하려면 이 정도 입장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수족관에는 제법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동해에서 사는
물고기들과 열대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나누어 보관하고 있는데 1층에 있는 수족관 터널이 재미있다. 규모가 작은 게 흠이다. 화진포에는 금강산
관광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위한 집결지가 있다. 여기서 휴전선을 통과해 금강산으로 가는 버스들이 대기한다고 한다. 그래서 알려진
박포수가든과 화진포막국수라는 음식점이 있다. 여기서 파는 동치미막국수와 돼지고기편육이
맛있다는데...
화진포에서 남쪽으로 10분만 달리면 거진읍이다. 거진읍에서는 거진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성진회관이 맛집으로 소개되어 있다. 생태지리와 도루묵찌게, 그리고 도치알탕을 낸다. 도루묵찌게는 12월 어간에만 판매하기
때문에 시기를 맞추어 가야 한다. 생태지리는 거진 앞바다에서 잡은 생태를 사용해서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작은 것 한 마리를 2인분 지리탕으로
만들어서 2만원을 받는다. 맛은 깔끔했지만...
거진읍에서는 해안 도로가 멋이 있다. 항구로 들어가서 회센터를
오른쪽에 끼고 돌면 인공 암벽과 함께 해안 도로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해맞이 장소가 여기저기 마련이 되어 있다. 언덕 위에도 마련이 되어 있다.
거진읍에서 북천을 따라가면 46번 국도가 나타난다. 46번 도로를 타고가면 그 유명한 소똥령 마을이 있다. 진부령을 넘으면 용대리를 거쳐
원통으로 해서 양구와 춘천으로 간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렇게 가지 않고 44번 도로를 갈아 타고 인제를 거쳐 동홍천으로 가서 동홍천-서울
고속도로를 탄다. 2014년 말에는 양양까지 고속도로가 뚤리기 때문에 46번 도로도 한가해지지 않을까
싶다.
거진읍은 북천을 경계로 간성읍과 마주한다. 간성읍은 북천과 남천
사이에 들어선 고성의 수도다. 여기에 군청, 의회, 경찰서, 종합운동장과 체육관 등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뭐 이런 것들을 보려고 고성에 온 건
아니기 때문에 간성읍은 가볍게 제껴 버린다. 간성읍에서 가까운 곳에 가진항이 있다. 가진항 주변에서 추천할 만한 맛집은 가진리 42번지에 위치한
광범이네 횟집이다. 여기서 파는 물회는 값이 1만원이지만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의 물회에다 국수를 말아 먹는데 매우 새콤한 게
인상적이다. 시큼하다 해야 할까? 그런데 왜 물회는 다 새콤 또는 시큼해야 하는가? 좀 더 은근하고 맛이 있으면 안되는가? 생선은 초장에 찍어
먹는다는 관념을 좀 버리란 말이야! 하지만 이곳에서 먹는 자연산 회의 값은 충청도 특히 대천에 비해 엄청 비싼
편이다.
가진에서 남천을 건너면 곧바로 송지호라는 누구 이름같은 호수가
나타난다. 송지호도 화진포의 호수처럼 생긴 석호다. 송지호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많다. 아름들이 해송이 장관을 이룬다. 송지호에는 고기들이
많아서 철새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찾아간 때가 한 겨울이라 호수는 꽁꽁 얼어 붙어 있었다. 하지만 호수 정면 언덕 위의 정자와 그
뒤의 삼각형 산은 진정 그림과도 같은 자연친화적이다. 안동의 도산서원 앞의 풍광도 생각이 났다. 호수를 건너가서 정자에 앉아 한잠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에 비하면 철새관망타워는 너무 현대적이다. 꼭 우주 정거장 같다. 하긴 저기 올라가면 사방이 잘 보일 것 같다. 아이들이
좋아하겠다. 송지호 주변에는 4킬로미터에 달하는 산책로도 있다고 한다. 한겨울이 아니면 걸어도
봄직하다.
송지호에서 차로 조금만 가면 송지호 교차로 부근에 수성반점이라는
중국 음식점이 있다. 주소는 죽왕면 공현진리 82. 여기서는 고성에서 유명한 짬뽕을 판다. 홍합과 오징어 등을 엄청나게 얹어 준다는 얘기. 중국
음식점이지만 점심 시간에는 짬뽕말고 다른 걸 시키면 욕먹는다고 하고 점심 시간 후에는 문을 닫기도 한단다. 군산의 복성루와 비슷하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해저심층수 연구개발 단지가 있다. 해저심층수나 몇 병 살까 해서 갔더니 문이 굳게 잠겨져 있었다. 해저심층수는 동해안 곳곳에서
채취해 팔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마셔 봤던 일본 것보다 맛이 밍밍하다.
청학정, 청간정이라는 정자도 멋이 있다는데 밤이라 오르지 못했다.
그 대신 백촌막국수를 먹으러 갔다. 토성면 백촌리 162에 위치하는 백촌식당으로! 네비게이션을 따라 가다보니 잘못 들어간 게 아닌가, 이런 곳에
그 유명한 식당이?라는 의문이 들 때 쯤 식당 간판이 나타났다. 고바위가 만만치 않다. 백촌막국수는 국수 자체가 거의 메밀이었다. 그래서 툭툭
끊어졌다. 이런 면에다 동치미국물을 붓고 명태식혜를 얹고 스스로 간을 해 먹는다. 그런데 묘한 맛이다. 어른들이 좋아할 맛이다. 아닌게 아니라
갑자기 두 분의 할아버지들과 여섯 분의 할머니들이 들어 오셨다. 대화로 미루어 짐작컨데 덕장에서 일하는 현지 분들로 추정이 되었다. 그 분들은
백촌막국수를 참 잘도 드셨다. 이런 분들의 입소문으로 결국 백촌막국수가 일등 막국수가
되었다.
이후 속초를 거쳐 아이파크 콘도로 왔다. 아이파크는 설악산 울산바위
밑에 있는 콘도촌에 입주한 여러 콘도들 가운데 하나다. 울산바위 아래에 있는 구릉지대를 일컬어 학사평이라 한다. 학들이 노닐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학사평도 고성 땅에 들어간다. 그래서 학사평 콘도단지는 고성땅 최고의 숙박지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국 최고의 숙박지다. 여기서
발견된 온천이 투숙객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학사평에 자리한 노학동은 두부 동네로 유명하다. 여기서 먹는
순두부나 두부 요리는 전국 최고의 맛이다. 이에 더하여 한우 고기를 파는 정육식당들도 있다. 이들 식당 가운데서 한 곳에 들어가 한우 고기를
좀 사서 콘도에서 구워 먹었다. 등심 100그램에 7천원이다. 결론은 노학동에서 파는 한우는 진짜다!라는 것. 아이파크 콘도에서는 울산바위가 잘
보였다. 울산바위 뿐만 아니라 대청봉까지도 보인다. 아래 사진은 아이파크 12층에서 찍은 울산바위다. 스위스 다보스도 저리가라는 경치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고소득의 포럼이 열리지 못할까?
학사평은 바람이 불 때 정말 지독하게도 심하게 분다. 4-5월에는
몇 날 몇 일이고 창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불어댄다. 그러나 바람이 그치면 더없이 포근한 곳으로 변한다. 학사평의 두 얼굴이랄까? 학사평에서
미시령을 넘으면 용대리가 있다. 미시령을 넘는 방법은 새로 생긴 터널을 이용하면 가장 빠른데 통행료가 자그마치 3,000원이다. 그리고 재미도
없다. 옛미시령 길을 선택하려면 잘 찾아야 하는데, 필자는 항상 실패를 한다.
용대리
용대리는 명태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지형이 명태를 황태로
만들기에 아주 적절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명태는 모두 북양산이다. 동해에서 잡은 명태는 한 마리도 없다. 그러나 북양 산 명태라 해도
용대리에서 말리면 그게 최고가 된다. 참고로... 명태를 배를 갈라 석 달 정도 바짝 말려 살이 누렇게 된 것을 황태라 한다. 그게 제일
비싸다. 명태를 통채로 말린 것을 통북어라 한다. 북어채도 북어라 하기 때문에 채를 썰지 않은 것을 통북어라 한다. 통북어를 통채로 삶아 먹으면
간에 아주 좋단다. 북어도 황태처럼 완전히 말린 것이다. 그리고 덜 말린 채 파는 것을 코다리라 한다. 서울에서 파는 코다리는 대개 명태를
얼렸다가 그 상태로 둔 것들이라 한다. 그래서 요리를 만들면 물이 흥건히 나오고 맛이 없다는 것! 명태새끼를 말린 것을 노가리라 한다. 그런데
용대리에서 말린 것들의 맛이 확실히 다르다. 같은 조기라도 전라도 영광군 법성포에서 말리면 그 맛이 탁월해 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이태리
파마산 치즈나 스페인 하몽이 맛있는 것도 그 지방의 특별한 자연환경 때문이다. 명태도
그러하다.
일산으로 돌아오는 길은 46번 국도를 이용했다. 46번 국도는
소양강 북쪽을 달려 춘천으로 간다. 이게 결국은 중앙고속도로로 이어지고 동홍천-서울 고속도로와 만난다. 아무튼... 춘천시의 뒷산인 배후산을
내려가면 유포리가 나타난다. 유포리에는 유명한 막국수 집이 있다. 유포리막국수라고... 백촌막국수와 유포리막국수 그리고 춘천의
실비집막국수를 강원도 3대 막국수라 한다. 유포리 막국수 집은 춘천시 신북읍 유포리 154에 위치한다. 동네 안으로 외길을 타고 한참 들어가므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 집은 백촌과 달리 밀가루가 많이 든 메밀을 쓴다. 그래서 면발이 쫄깃하다. 하지만 맛있다. 두부나 감자전도 맛있다.
하지만 아이들 용은 아니다.
유포리 막국수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행군 중 잠깐 쉬고 있었다.
화장실이 난리북새통이다. 이들도 막국수가 얼마나 먹고 싶을까? 멀거니 그들을 바라 보다가 마음을 결정했다. 나만 먹겠다! 너희들은 제대하고 많이
먹어라. 방법이 없다.
2012년 2월
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