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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Book Review)
담당과목 : 기독교세계관관 치유윤리
담당교수 : 김경호 교수
제 출 자 : 정교화 (19254502)
<내용 요약>
사실은 두 면이 있다. 인생과 역사다. 인간생활의 근거가 되는 사실은 인생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 둘로 되어 있다. 역사 없는 인생도 없고 인생을 내놓은 역사도 없다.
살림의 두 원칙인 개인적 생활체험과 세계적 역사이해가 나온다. 생활체험이란 것은 개인의 자기의 존재를 한 개 저만으로, 갑을 가지는 인격적인 것으로 알고 파고들어 가고, 붙잡고, 나타나려는 데서 나오는 것이요, 역사이해라는 것은 자기를 뜻있는 발전으로 보는 세계의 체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보고 들여다보고 내려다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를 나무의 씨라면 하나는 숲이다.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하나는 영(靈)․육(肉)을 갖추고 지(知)․정(情)․의(意)의 활동을 하는 한 개 사람으로, 나서 자라고 죽는, 누구나 다 같이 걷는 인생로를 걷는, 일생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현실의 인간으로서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기 존재의 배경이 되고, 생활의 근원이 되고, 활동의 터전이 되고, 정신의 교섭자가 되는 이 세계를 영원에서 흘러나와 영원으로 흘러드는 이 생명의 행렬을 의미적으로 파악으로 정신으로서 하는 일이다.
하나는 주관적이라면 또 하나는 객관적이다. 주관이기 때문에 그것이 있고서야 살림에 심각미가 있고 열정력이 있고 자유가 있다. 객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있고서야 호대성(浩大性)을 띠고 엄숙미를 갖고 권위가 선다.
역사를 읽는 사람이 반드시 생각할 것은 먼저 좋은 책을 고름이요, 그 다음은 또 읽는 방법이다. 그러면 그다음에 마땅히 일어나는 문제는 어떤 역사책이 정말 좋은 책이요, 어떻게 읽는 것이 정말 바로 읽는 법이냐 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대답하자는 것이 여기서 말하려는 사관(史觀)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은 역사의 정의를 바로잡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째, 지나간 것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역사는 현대 안에 아직 살아 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새 세계관을 지어내는 풀무다. 역사에 적는 일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골라진 사실이요, 그 고르는 표준이 되는 것은 지금과의 산 관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 뜻의 문제다. 그다음은 기록이라는 말이다. 사실을 기록하되 서로서로 사이에 산 관계를 주어까지고 체계가 있게, 통일이 있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
역사는 보통 생각해온 것같이 다 먹고 난 생선의 뼈다귀 같은 사실이라는 것보다는 그 가지는 뜻의 풀이에다 그 생명을 둠을 알 수 있다. 사실에는 주관의 랜즈를 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이란 없다. 사실은 결국 사실이라고 알려진, 혹은 해석된 사실이다. 았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현재적으로 골라진 것이다.
역사의 생명으로 바탕으로서의 사실보다 사실의 뜻을 붙잡는 해석에 있다. 인생을 뛰어넘지 않고는 인생을 모른단 말이다. 역사를 알아봄도 그와 같다. 보는 자리가 변함에 따라 그 보이는 바가 서로 다르다. 사관이란 이것이다. 인생을 넘어뛴 자리에서 참인생을 볼 수 있듯이 역사를 넘어뛴 자리에서야 참역사를 볼 수 있다. 이런 사관 없이 쓴 역사는 참역사가 아니요, 이런 사관에 이르지 못한 역사 공부 또한 참역사의 읽음이 아니다. 사관을 말하면 여러 가지다. 유심사관, 유물사관, 민족사관, 계급사관, 생명사관 등등. 그 어떤 자리를 가지느냐 하는 데 따라 가지 가지의 역사가 나올 수 있다. 우주, 인생 속에 있으면서도 우주, 인생을 뛰어넘자는 것은 종교다. 그러므로 참역사는 종교적인 자리에 서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의 사관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 일은 곧 성경의 근본 뜻이 무엇이냐를 찾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한마디로 ‘아가페’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사관은 ‘아가페’ 사관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역사의 근본을 하나님에게 구한다. 하나님에서 나왔고, 그 하나님의 뜻 없이는 한 물건, 한 일도 없다고 본다.
역사의 근본이 하나님이라는 말만 가지고는 불완전하다. 그 하나님에는 인생과 인격적으로 교섭하는 하나님이라는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다. 역사의 근본은 신에게 돌리는 사상은 그 밖에도 있다. 그것은 범신론, 다신론이다. 그러나 만물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은 믿음이라기보다는 한 개의 철학이요, 다신론은 자연현상을 인격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
생명의 진화에서 가장 높은 단계가 인격이라면, 그 인격과의 교섭은 역시 인격으로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인격 신이라고 단언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으나 우리가 아는, 우리와의 의미적인 교섭을 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주와 인생은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본인 하나님이 자기 뜻으로 지어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의미의 시계를 말하자는 것이지 현상의 세계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상을 말하면 무한히 끝없는 변천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뜻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주는 자연발생적으로 된 것도 아니요,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같이 과학의 대상도 되지만 또 그것만이 아니다. 그 이상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가치의 세계다. 가치를 과학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뜻으로만 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 중에 이 종말관처럼 비과학적인 것은 없으나 또 이것처럼 독특한 사상은 없다. 이것은 참 놀라운 사상이다. 참 담대한 독단이다. 성경은 현실세계를 설명하자는 과학이 아니고 뜻의 세계를 말하자는 것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면 그 중간에서는 어떻게 번져나가는 것일까?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통치주다. 존재의 원인이 될 뿐 아니라 발전의 원리도 된다는 말이다. 가르치고 인도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아가페의 하나님은 우주 속에 자유의지를 넣었다. 자유하는 의지가 있어서만 참정신적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본 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기 때문에 지은 그 세계도 스스로 하는 생명에 이르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우리가 자라서 자기에게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 위에서 손을 펴고 일한다. 간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르고 보호하고 이끈다. 그러므로 아가페다.
성경은 인간을 역사에 대한 도덕적 책임자로 본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원하고 원치 않고 간에 도덕적 책임이 지워졌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 동무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주를 산 생명으로 완성하기 위해 그 가운데 도덕적인 인간을 두었다. 종같이 복종하는 것만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러나 자유의지만으로는 위험하다. 자유는 방종과 서로 멀지 않고 의지는 늘 고집, 교만에 빠진다. 그러므로 자유하는 의지와 함께 양심을 넣어 자유의 가는 것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생은 만물을 대표하여 우주역사의 도덕적 책임자로 서게 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말의 근본 뜻은 독재적인 권리 주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우주의 근본에 도덕적인 질서를 느끼므로 거기에 대한 책임감, 의무감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은 자유지만 또 넘을 수 없는 절대의 너에게 얼굴을 맞대인 자유다. 거기서 도덕이 나온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절대의 의지에 다 바치자는 의지다. 자유의 값은 제 마음대로 하는 데 있지 않고, 도리어 제 마음대로 하지 않는 데, 자진하여 하나님에게 바치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늘 세계의 한국, 우주의 한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주, 인생의 근본을 찾는 종교적․철학적인 마음의 태도를 내버리고 다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오가는 정치적․경제적 문제에만 정신을 빼앗기면서 나라를 하겠다는 것은 마치 높은 데 올라가지 않고 집터를 잡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 한국역사는 산 세계관, 인생관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씌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의 가슴으로만 읽을 수 있다. 인류의 길은 고통의 길이요, 역사의 나아감은 수난의 과정이다.
역사를 지어내는 것이 ‘아가페’라면 한국역사도 그 마지막 뜻이 ‘아가페’일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마지막 목적인 ‘아가페’가 우리 역사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졸가리로 번져나가는가를 찾아 붙잡도록 해야 한다. 그 근본되는 식, 혹은 그 졸가리를 나는 기조라고 부른다.
역사는 두 가지로 남는다. 하나는 뒤에 남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속에 남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역사라 할 때는 뒤에 남는 역사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조국의 흥망, 인민의 변동, 전쟁의 승패, 산업의 성쇠, 학문․예술의 유체들은 다 과거의 사실로 남아 있어, 혹은 기록으로 혹은 유물로 후세에 전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으로 남거나 유물로 전하게 되는 그것만이 아니다. 그 밖에도 현재의 산 사실로 생명의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마치 소화된 음식같이, 효과를 나타내는 신체운동같이 그 원형 그대로를 다시 볼 수 없으나, 산 생명으로 민족적 존재 안에 남아 있어서 그 체격이 되고, 얼굴 생김이 되며, 마음씨․성격이 되고, 풍속․신앙이 되는 것이다. 먼젓것은 종이나 돌․쇠 위에 기록이 되는 것이지만, 뒤엣것은 역사를 낳은 저 자신의 얼굴 위에, 그 심장의 육비(肉碑)에 기록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이 이 민족의 생명 안에, 우리 자신 속에 살아남은 역사다. 4천 년 고난의 역사가 그들이 이마 위에, 음성 위에, 마음씨 위에 어떤 기록을 남기고 갔는가 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역사의 높은 탑 위에서 하던 굽어보기를 그만두고 한걸음을 저의 얼굴 앞으로 다가들어 그 고난자의 얼굴을 한번 보기로 한다.
고난은 이기는 자에게는 옥을 닦는 돌 같은 것이다. 거기 져버리는 놈에게는 망하게 하는 재난이다. 천 년 고난에 그만 눌려버린 한국은 그 때문에 생명이 망가지고 말았다. 혼은 그 날뛰는 힘을 잃어버렸고, 마음은 그 고요함을 빼앗기고 말았고, 원기를 꺾이고, 용기를 떨어뜨려 버렸다. 곧 퇴영적이 되고, 소극적이 되고, 고루에 빠지고, 비속에 떨어졌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이래로 종교․문학․미술․풍속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줄곧 시드는 길을 밟았을 뿐이요, 삼국시대에서 보던 것 같은 생명력이 넘치는 웅장하고 우아한 사상이나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고난의 비통한 글자는 그들의 골격에도, 얼굴 모습에도, 음성에도 그리고 그 심장 위에도 칼로 새긴 듯이 깊이 새겨지고 말았다.
한민족이 숙명관의 종이 된 것은 생명의 일선에서 거듭 오는 고난의 습격을 못 견디어 퇴각하기를 시작할 때부터다. 퇴각을 시작한 것은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스스로 저는 불사신인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이 정신이요, 믿음이 불사신이다. 그것을 내버리므로, 혼이 스스로 죽으므로 갇혀버렸다. 갇혀버린 혼, 그것이 곧 운명이다.
한번이 사상이 생기자 전 민족의 혼을 타락시켜버렸다. 진취의 기상이 없어지고 경륜하는 의지를 잃었다. 운명이 우리 과거도 미래도 온통 가져가버렸다. 개인이 나고 죽고, 뜨고 꺼짐으로부터 나라가 일어나고 주저앉고, 흥하고 망함에 이르기까지 모두 운명으로, 천수로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의식을 제해버리고, 사회 개조의 정신을 말살시켜버리고, 천수니 운수니 하는 주문의 맷돌을 민중의 목에 달아매었다. 그리하여 민중은 그 간악한 지배자의 인위적인 고난을 불가항력의 운명으로만 알고 가라앉는 배와 같이 침침연(浸浸然) 쇠퇴의 바다 밑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예술은 비애의 예술이란 말을 흔히 한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삼국시대 이전은 그렇지 않으나, 적어도 고려 이후는 사실이다. 예술은 자기 실현, 생활의 반영이다. 그 생활이 수난이요, 그 마음이 아픈데 그 부르는 노래, 그리는 그림이 슬픔, 아픔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또 문화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예술품의 분량으로도 한국은 가난뱅이다. 그나마도 있는 것은 대개 고대의 것이요, 현대에 가까울수록 빈약해지니 어느 사실이 고난의 역사라는 증거 아닌 것이 없다.
고난의 짐을 지는 자들아, 오라. 헤매기를 그만두고 이 비장한 곡조로 높이 우는 고난의 냇가로 오라. 와서 그 무거운 짐을 이 높은 바위 끝에 내려놓고 이 고난의 뜻을 시원하게 이야기 하자. 번뇌의 몸을 보리수 그늘 아래 던져 금강좌를 굳게 겯고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아니 일어난다고 맹세하고 않았던 싯다르타처럼 이 자리에서 이 고난을 극복하고야 말겠다고 결심을 하고 오라. 나와 내가 수난의 비렁뱅이니라.
가슴속에는 말할 수 없는 항상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품고, 마음은 형용할 수 없는 것에 목이 말라 하며,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디로 모색을 하는지, 그러나 몸은 구르면서, 걸리면서, 넘어지고는 또 일어나며, 일어났다간 또 넘어지는 것이 사람이다, 역사다.
고난은 결코 정의(情義) 없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잔혹한 운명의 장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우리는 고난 없는 생을 상상할 수 없다. 죽음은 삶의 한 끝이요, 병은 몸의 한 부분이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써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에게로 이끈다. 궁핍에 주려보고서야 아버지를 찾는 버린 자식같이, 인류는 고난을 통해서만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았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
우리의 생명을 마비시키는 숙명철학을 몰아내기 위하여 최후의 반발을 찔러 일으키는 지독한 고통이 필요하다. 장차 올 새 역사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하여 고난은 절대 필요하다. 보다 높은 도덕, 보다 넓고 진보적인 사상의 앞잡이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낡은 모든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가는 고난의 좁은 문이 필요하다.
살았다 함은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생(生)은 명(命)이다.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이 삶이다. 삶은 함이다. 인생이 물질의 종 아닌 것이 우리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권력이 정의 아닌 것, 종내 권력이 정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생을 멸망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사랑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고난당함으로 인류를 구한다는 말이 거짓 아님을 증거하여햐 하고, 죄는 용서함으로만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천하 앞에 증거하여야 한다. 온 인류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목이 자라려 할 때 우선 그 생명의 배아가 있는 것이요, 민중이 깨려 할 대 그 핵심 단체가 있는 것이다. 이 핵심이 될 자가 눅일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역사는 종교적인 믿음의 눈을 가진 자가 아니고느 알 수 없을 것이다. 미래의 싸움은 진리로 싸우는 싸움이요, 믿음으로 이기는 싸움이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가지를 돌아볼 줄 아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화가 된 끝을 의식이라 할 것인데, 의식은 생명이 스스로를 돌아봄 곧 자기 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행동하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생각의 초점 혹은 중심이 자아다. 낱 사람이 그런 것같이 국민도 스스로를 반성할 줄 알아야 국민이라 할 수 있다.
자기를 아는 사람, 우주 만물의 중심으로서의 자아, 그 자아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나를 깨우쳐 아는 사람이 어진 것같이, 한민족도 제 역사, 그중에서도 현대사를 바로 알아야 어진 민족, 어진 국민이라 할 수 있다.
<느낀 점>
1. 저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한국의 역사를 보고자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말기 당시 사회주의 영향을 컸던 역사학계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역사를 정신사적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근대사회에서 개신교는 정신사적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성경의 사관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 일은 곧 성경의 근본 뜻이 무엇이냐를 찾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한마디로 ‘아가페’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사관은 ‘아가페’ 사관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역사의 근본을 하나님에게 구한다. 하나님에서 나왔고, 그 하나님의 뜻없이는 한 물건, 한 일도 없다고 본다.”라고 주장하면서 개신교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성경적 종교사관(기독교 세계관적 역사관)을 주장했다.
2. 저자는 한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이해했다. 그러면서 그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자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난은 인간을 숙명론자로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난은 이겨내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삶은 새 역사를 만들어 간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낡은 모든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가는 고난의 좁은 문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고난은 낡은 것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들에 대한 희망에 차게 만드는 힘이자 능력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