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현과 김시습으로 대표되는 청평산은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이황의 시 「청평산을 지나다 느낌이 일어」는 이자현의 명성에 향기를 더하였다. 그는 ‘이자현처럼 명성과 부귀를 신을 벗듯 떨치고 화려한 생활에서 몸을 빼고 원망하거나 뉘우침이 없이 끝까지 변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없거나 아주 드물 것이니, 역시 높일 만하지 않겠는가’라며 시를 지었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이자현의 청빈을 찬양하였고, 김시습의 절의에 고개를 숙였다. 춘천 부근을 지날 때면 반드시 청평산을 찾아 시를 지었다. 시뿐만 아니라 청평산을 유람하고 유산기를 남겼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청평록(淸平錄)」이 대표적이다.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은 1651년 8월에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를, 그해 12월에 「중유청평기(重遊淸平記)」를 지었다. 서종화(徐宗華, 1700~1748)는 「청평산기(淸平山記)」를 남겼다.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의 작품으로는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가 있으며,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의 유산기록은 「청평산기(淸平山記)」이다.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은 1572년에 지은 「금강산기행록(金剛山紀行錄」 속에 청평산 유람을 삽입시켰다.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山中日記)」와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1696년에 지은 「동정기(東征記)」 안에도 청평산 유람을 찾을 수 있다. 서종화의 「청평산기」는 산의 구석구석을 다루고 있다. 유산기 대부분은 식암까지 기록하였으나 서종화의 발길은 천단과 소요대, 정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18세기 학자인 서종화의 자는 사진(士鎭)이고, 호는 약헌(藥軒)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1729년(영조 5)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그의 글은 『약헌유집(藥軒遺集)』에 실려있다. 정상에 오른 서종화의 글은 이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