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고사 둘째 날 생활지도 부서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 들었다. 낙동강 샛강 가락으로 나가 잉어찜을 앞에 놓고 가진 편안한 지리였다. 식후 갈댓잎이 세대 교체중인 둔치섬을 한 바퀴 돌아 인근 경마장까지 둘러보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콩밭으로 가 있었다. 집사람하고 강원도 인제에서 군복무 중인 큰 녀석 면회 출발시간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날이 저물기 전 창원에서 원주행 시외버스를 탔다.
명절 고향걸음 때 집을 비워도 이틀이면 돌아오는데 우리는 사흘 밤낮을 바깥에서 보내야 하는 먼 길을 나섰다. 사실 큰 녀석과는 하룻밤 같이 보내는데 가고 오는 길에서 두 밤을 보내야 한다. 내가 운전을 못해 이동에 기동성이 떨어져서이기도 했다. 큰 녀석이 부모와 보낼 외박을 신청하면 아침에 만나게 해주는 것이 상례라고 했다. 그 시각에 상봉하려면 하루 먼저 출발해 큰 녀석 부대 가까이 가 있어야 했다.
북행버스는 대구 지나 안동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어갔다. 안내소에서 북부경북과 강원도 여행 지도를 구해 살폈다. 원주에 닿으니 밤 아홉시가 지나고 있었다. 먼저 역으로 가서 다음날 밤 내려갈 무궁화호 열차 표를 예매했다. 하루 두 번 다니는 청량리역발 부산 부전역행 중앙선 열차였다. 시외버스주차장 근처로 되돌아와 숙소를 정했다. 군에 보낸 아들 면회 가는 길에 난생 처음으로 모텔이라는 곳을 찾아들었다.
겉으로 보면 나이 차가 나 뵈는 우리를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영락없이 불륜현장으로 보았을 것이다. 청소랍시고 해둔 모텔 방안 이부자리가 집사람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참에 우리는 유선방송에 성인전용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먼저 잠들고 아내가 이어 잠들었을 테지만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 다섯 시 반 속초행 시외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이었다.
잠결에 머리맡 휴대폰으로 시간을 서너 차례 확인하다가 네 시가 되어 일어났다. 간단한 세면을 하고 주차장으로 나서니 동이 희멀건 터 왔다. 시외버스에 오르니 손님이라곤 고작 다섯 사람뿐이었다. 창밖은 새벽안개가 뿌옇고 시간이 지겨워 집사람한테 문자전송 방법을 더듬더듬 배웠다. 겨우 입력했다싶더니만 손끝이 무뎌 몇 차례 실패하다 다시하길 반복해 까까스로 터득하고 홍천과 인제를 지나 원통에 내렸다.
큰 녀석이 복무하는 휴전선 가까운 서화로 가는 버스를 탔다. 서화는 중부전선 인제 최북단으로 남북분단 전에는 육로로 금강산 가는 길이 있던 곳이었다. 천도리 정류소에 내려 멀지 않은 곳에 큰 녀석이 근무하는 포병부대가 있었다.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이제야 지면서 잎을 달고 나오고 있었다. 길섶엔 점점으로 피어나는 민들레꽃에서 계절이 늦음을 실감했다. 그 옆에 애기똥풀이 역시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위병소 검문 병사는 씩씩한 모습으로 민간인 면회객을 맞았다. 신분 확인을 거친 후 큰 녀석을 기다렸더니 얼마 후 푸른 얼룩무늬 제복의 육군 일병이 나타났다. 다섯 달 만 상봉이라 무척 반가웠다. 신병훈련 끝내고 자대배치 받았을 때 몸이 아프다기에 생활관 준공식에 맞추어 병사 부모 초청으로 지난 연말 짧게 만난 적 있었다. 큰 녀석 군대 보내 놓고 두 번째 만남으로 이제는 제법 야무지게 단련된 군인이었다.
봄볕에 목덜미가 그을었고 손마디가 까칠해진 큰 녀석은 아침을 거르고 부모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 앞 식당에서 두부찌개 시켜 놓고 그간 묵혀둔 이야기를 나누었다. 셋으로 불어난 가족은 원통으로 나와 백담사 입구로 가서 숙소를 정했다. 거실에 방이 두 개 딸린 깨끗하고 펜션이었다. 매표소 근처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백담사행 마을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 뒷자리 한 아이는 청룡열차를 탄 기분이라 했다.
시멘트길 오르막을 굽이굽이 돌아 내설악백담사 일주문 지나 주차장에 내렸다. 들머리서 마음 닦으라는 수심교 건너 극락보전을 먼저 찾았다. 집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가 아미타부처님을 뵈올 때 나는 큰 녀석과 함께 절 마당에서 서성거렸다. 약수 한 모금 하고 만해기념관을 둘러보고 둥근 자연석에 새긴 ‘나룻배와 행인’ 시비 앞에 섰다. 나라 기울었을 때 이곳으로 찾아들어 겨레의 횃불이 된 우국지사를 만났다.
선생은 그 시절 인적 없는 심산유곡 절간에서 도를 닦으면서 고립과 어둠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국권회복의 웅지를 키웠던 곳이다. 백담사는 근대사의 만해와 현대사의 일해가 공존하는 절이었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 봇물이 터지자 퇴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감옥 가기 전 이곳에 얼마간 유폐된 곳이기도 했다. 화엄당엔 당시 전대통령과 부인이 쓴 플라스틱 목욕간통과 화장거울이 역사기록물로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가족은 대청봉에서 흘러내린 맑은 개울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이후 백담사 탐방숲길을 잠시 거닐다가 용대리로 내려왔다. 정해둔 숙소는 차가 없는 우리 가족에겐 안성맞춤으로 절까지 근접성과 식당 이용이 편했다. 가까이 인제군청에서 돈을 들여 꾸민 습지생태공원과 관음두레공원이 있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주인 부부는 손자들과 널따란 텃밭에 들꽃을 가꾸고 있었다. 깊은 골짝이라 할미꽃이 이제 피고 있었다.
숙소 가까운 식당에서 황태구이로 저녁을 들면서 큰 녀석과 동동주 한 사발을 같이 나누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볍씨못자리로 흘러드는 물길에서 개구리가 울어댔다. 집사람과 큰 녀석은 무슨 할 이야기가 더 있는지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었고 나는 건너 방에서 먼저 잠들었다. 새벽녘 창밖에서 들려온 종알거리는 산새소리에 잠을 깨었다. 나는 백담사에서 흘러온 개울을 따라 산책 나서 외가평교 지나 구만동까지 가 보았다.
부산에 머무는 작은 녀석까지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한동안 헤어져 있던 큰 녀석과 보낸 오붓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숙소 앞 식당에 들러 더덕구이와 순두부로 늦은 아침식사를 했다. 멀지않은 곳에 있다는 만해 마을과 진부령 자연휴양림은 대중교통으로는 이동이 불편해 마음을 접었다. 숙소로 돌아와 좀 쉬면서 느긋하게 배낭을 꾸렸다. 다시 원통으로 내려와 서하로 들어가니 오후 세시 무렵으로 점심때가 늦었다.
집사람은 군인가게에 들러 큰 녀석 속옷 몇 벌을 사 주었다. 어제 맡겨둔 군복은 큰 녀석 몸 치수에 맞추어 고쳐 놓았다. 절 가까이서 하룻밤 묵으면서 채식만 했으니 큰 녀석이 고기 한 점 못했다기에 고깃집에 들렸더니 갈비는 없고 삼겹살만 있다고 했다. 얼린 삼겹살이지만 큰 녀석은 맛있게 먹었다. 나는 주인이 덤으로 내어준 야채가 좋았다. 향로봉에서 채집했다는 곰취와 쓴맛이 나는 이름 모를 약초 풀잎이었다.
식후 휴전선 너머 북녘에서 발원한 북천 둑으로 갔다. 겨울 강바닥 얼음에서 빙어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여름엔 열목어나 산천어들이 띄는 시내라고 했다. 큰 녀석은 이곳 전방은 사계절이 아니라 삼계절이란다. 여름에서 바로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에 오는 빙하기엔 체감온도가 영하 이십도 전후까지 내려간다고 했다. 여름은 여름대로 덥다고 들었다. 그래도 농부는 농사짓고 군인은 군인대로 맡은 바 직분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이 근무 부담 없는 어린이날이라 내려가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큰 녀석과 부대 앞 천도리 버스정류장에서 오후 여섯시에 헤어졌다. 우리 부부는 차창 밖 큰 녀석 뒷모습을 보고 코끝이 시큰했다. 앞으로 여기까지 면회 올 일 없이 휴가 나올 때 보면 되지 싶다. 복무기간 24개월 가운데 7개월 지났으니 17개월 남았다. 남은 인고의 세월 속에 내공을 잘 쌓아 사회로 복귀하면 더 의젓하고 성숙한 청년이 되지 싶다.
우리 부부는 원통으로 나와 원주행 시외버스를 한참 기다려 탔다. 연휴라 길이 막히고 뚫린 속에 원주에 닿으니 밤이 이슥했다. 우리는 역 앞에서 늦은 저녁을 때우고 열차에 올라 좌석을 뒤로 젖혀도 불편하게 잠을 청해 뒤척였다. 청량리에서 시발한 열차는 원주에서 제천 단양 죽령터널을 지나 영주 안동 영천 경주 울산 해운대에 네 시 반에 도착했다. 우리는 낭만으로 해운대에서 새벽바다를 구경할 요량이 아니었다.
사흘 밤과 이틀 낮을 보낸 여정의 종점에서 맞은 새벽이었다. 부전역에서 지하철로 사상시외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하기보단 해운대역 앞에서 출발하는 창원행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 수월해서다. 다섯 시 반 첫차로 창원 집에 닿으니 몸은 파김치였다. 어린이날 휴무라고 한나절 조용히 쉴 수 없었다. 이미 휴대폰에 세 건의 문자가 반복해 찍혀 있었다. 여태 내 삶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소풍을 가고 있었다. 쓴 세숫대야는 씻어 두라는 당신이었습니다.
첫댓글 참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자식 사랑이 철철 넘치는군요. 이제 '큰놈'도 어엿한 군인이 되어 당당히 휴가도 오고 곧 제대를 할 것입니다. 크게 염려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 멀고 먼 인제, 원통을 다녀오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