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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무나오기 원문보기 글쓴이: ohr
유식으로 관하는 인간과 세계 2부 7
((모든 법의 종자를 능히 집지(執持)하고, 그리고 승의근과 부진근을 능히 집수(執受)하며, 또한 결생(結生)과 상속을 능히 집취(執取)하기 때문에 이 식을 설하여 아타나식이라고 이름한다.))
아타나식은 아뢰야보다 한차원 높은 종자이라 모든 법의 종자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뢰야를 구성 요소로 하기에 해탈신인 근과 온을 몸으로 하기에 즉 승의근을 몸으로 하여 아라한 보다 높은 차원의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라한은 8식의 몸이지만 보살은 물질적 입자의 요소가 없는 8식으로 근과 나머지 신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7 8식이 행하는 생명 현상을 더 높은 차원에서 이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3가지 뜻으로 해석한다. 섭대승론에는 둘만 있고, 처음의 종자는 없다. 만약 종자에서 바라보면 곧 집지라고 이름한다. 종자를 잃지 않게 하지만, 각수(覺受)는 없기 때문이다. 색근과 의지처는 이름하여 집수라고 한다. 근을 무너지지 않게하고, 각수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에 결생하고 후에 상속하는 것이면 이름하여 집취라고 한다. 모든 존재(諸有)를 취착하기 때문이다.))
아타나식을 8식처럼 종자라는 입장에서는 9식의 종자를 가지고 이 종자를 계속 상속하여 잃지 않지만, 종자라는 입자의 형식을 취하여 각수의 깨달음은 없습니다. 주체적 관찰자를 염두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색근과 의지처인 몸을 같이 인정 한다면 각수인 깨달음인 지혜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결생과 상속이 선후가 있다면 집착이 되어 존재가 있는 결과이라 다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미 견도에 든 모든 보살들은 진실한 현관을 얻었으므로 이름하여 수승한 이(勝者)라고 이름한다. 그는 능히 아뢰야식을 깨달아 알기(證解) 때문에, 우리 세존께서 바로 열어 보이신다.))
공을 깨달아 견도에 든 보살들에게 여래님께서는 더 높은 경지인 아타나식은 열어 보이신다. 즉 말하자면 대승보살에 해당하는 경계입니다.
((이는 아뢰야라는 이름의 뜻을 바로 서술하는 것이고, 다음은(勝性)은 외인의 집착을 가려내는 것이다. 곧 이는 능장으로써 장식을 해석하는 것이지만, 오직 능장만으로써 아뢰야식을 해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8지 등의 후에는 장식이라고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는 (수론의)승성등에 대해서 논하므로, 다만 능장만을 들어서 藏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극락세계는 8지 보살을 근본으로 하여 승차하기 때문에 아라한의 수행법과는 다릅니다. 아라한 까지는 견도인 멸진정을 이루나 아타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승보살의 수행법이나 부처님 명호를 칭명하여 여래님의 가피인 타력으로 더 높은 차원인 극락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입지의 보살을 이름하여 승자라고 한다. 그들은 유식에 계합하기 때문에 능히 아뢰야식을 깨달아 알므로, 비방을 일으키지 않고 분별하여 자아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세존께서 바로 열어 보이신다. 자기의 지위를 이미 얻은 이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거듭 명정(明淨)케 하려고 지금 다시 이를 보이고, 후지(後地)를 아직 얻지 못한 이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진수(進修)하게 하려고 지금 여는 것이다.))
입지보살은 뜻을 일으켜 세워진 경계이라 바라밀의 지혜가 현전하는 6지 7지로 간주한다면 아라한이 멸진정으로 공의 체득이라면 보살의 현전지는 자타가 함께 어울리는 것으로 방편을 세울 수 있는 경계입니다. 말하자면 아라한은 모두 공이라는 지혜로 해결하지만, 보살은 개개인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상황에 대처하기에 바라밀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살에게 세존께서는 부동의 확고한 지혜인 아타나식을 열어 보이신다. 왜냐하면 8식에는 현상계를 열수 있는 입자와 공간의 기능을 가진 8식과, 멸진정의 아라한의 경계인 8식과, 보살의 부동지인 9식의 경계인 아타나식을 나타내는 8식으로,
이 8식이 여러 개가 겹쳐있어 여래님은 아뢰아나 아타나를 잘 여실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란을 일으켜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살이 수행으로 바라밀을 얻을 때 명확히 하기 위하여 차례대로 지혜를 보이어 전개하신다. 그러나 여래님은 자비로 지혜를 완성하셨기에 타력의 보살도를 통하면 8식의 경계를 초월하여 아타나식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붓다님이 될 수 있습니다. 후지보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타나식을 알아야합니다.
((무성(無姓) 유정은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우 깊다고 말한다. 취적(趣寂) 종성은 통달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미세하다고 이름한다.
범부이라 함은 곧 무성이고, 어리석은 이라 함은 곧 취적이다.
5종성 중 무성의 유정은 그 근원을 끝까지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깊다고 설한다. 이것은 오직 범부이다. 나머지 2승의 종성으로 결정된 자는 통달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증득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미세하다고 이름한다. 통달이라 함은 무루도로써 진실로 이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범부는 성도가 없기 때문이고, 어리석은 이는 성도가 생겨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 한쪽 뜻으로 설한 것이다.”
법성을 모르는 유정은 현상계을 그대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 법성의 진리는 매우 깊습니다. 2승 종성은 소승의 수행자이라 현상계를 떠나는 공성 까지는 체득할 수 있으나 여기서 부터는 대승이라 종자가 매우 미세합니다. 범부라 함은 불성이 없는 무성입니다. 불성은 모두 에게 있으나 법성의 존재를 믿지 않아 세속에 매달려 집착하기에 불성이 없는 무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소승은 현상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공을 체득하여 아라한이 최고의 경계라 하기에 범부처럼 집착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즉 소승과 대승은 수행 방법에서 다르기 때문에 법리에서 차별이 있습니다.
범부는 거룩한 도의 믿음이 아예 없기에 무성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대승의 거룩한 도가 생겨 날 수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이 설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다. 오색근과 경계는 식온이 아니기 때문이고, 5식과 같이 역시 외부를 반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의식과 같이 공통의 경계를 반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고’‘’‘ ,“ 이것은 안혜의 설이다. 바로 앞의 논사를 비판하는 것이다. 논에서 그 아뢰야식을 반연한다고 말한 것은 곧 식온이다. 그 경계(상분)를 반연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곧 색온에 통한다. 그런데 이 색온은 식온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식온을 반연한다고 하면서, 또한 색온을 포함할 수 있겠는가?))
안근 이근 비근등과 그 외부의 경계는 식별할 수 있는 주체적 관찰자가 아니며, 여기서 식온은 5근이 모여서 식온을 형성하기에 이 식온은 식별할 수 있는 주체자입니다. 즉 6식은 5근을 통하여 존재하는 6식으로 겉으로는 사람이며 5근은 8식의 종자인 입자로 형성된 6내입처 입니다. 여기서 5식은 외부의 경계인 색성향미촉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외부 경계는 외입처입니다. 5식과 6식은 의식과 같이 똑같은 경계입니다.
다만 6식은 색온을 통하여 6식이 성립되므로 색온은 8식의 종자로 형성되어 6식은 8식의 종자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6식은 물질계에서 주체적 관찰자이며 7식은 생명계에서 주체적 관찰자입니다. 여기서 색온은 물질을 이루는 집합체이나 여기에서 식온의 주체자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외부의 색계는 없는 것이나 우리 몸속의 색온에 의해서 외부의 경계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사람들이 모두 현상적으로 느끼는 것으로 마음의 작용이며 유식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반연한다는 것은 6식과 8식, 7식과 8식의 관계입니다. 즉 6식은 현상계의 물질로 나타나고 7식은 8식의 종자로 입자와 공간의 2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5식은 5진(塵)을 반연하므로 5식은 외부를 반연한다고 한다. 말나도 5진을 반연한다면, 역시 외부경계도 반연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내부를 반연해서 나를 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내부의 색법을 반연하므로 내부를 반연한다고 이름한다면, 5식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니, 동류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색법경계의 출발선은 4大인 지수화풍입니다. 식경계의 출발은 5境인 색성향미촉입니다. 색법은 물질이라 공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즉 법계입니다. 한편 識의 요별과 사량 작용은 생명으로 색으로 즉 형태를 갖춘 것으로서의 생명을 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은 공으로 하고 생명은 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생명이란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간은 바로 시간입니다. 생명이나 물질이 시간적으로 한계성에 매여 있다는 것은 둘 다 물질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식인 생명이 색인 물질의 형태를 취하여서 물질의 속성인 공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현상계 물질의 기본 요소는 지수화풍이며 理界인 연화장세계는 풍륜 수륜 금륜이며 화륜은 연화장세계의 에너지를 뜻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성질인 지륜은 금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5식의 5경인 색성향미촉이 생명의 형태를 취함이 없기 때문에 향미촉이 자체로서 외입처가 됨으로 이것이 6식에 편입됨에 의해서 6식에서는 내입처가 되어 5식이 6식에 식온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6식의 현상계는 7식의 광대한 법계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7식은 우리들의 몸 안에 있기에 밖에 있는 우주 현상계는 우리 몸의 색온과 식온에 다 소속되어 있습니다. 말나가 내부를 반연해 나를 일으키는 것은 6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5식이 외입처로 외부를 반연하나 6식에서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 뜻은 종자가 모두 8식이기에 차원에 따라서 저차원의 8식 종자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품는 다는 것은 에너지의 입장에서는 더욱 증대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나는 아견 아만 아애 아치의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我를 의미하며 촉 작의 수 상 사 이것도 개인적 我에 해당 사항입니다. 혼침 도거 불신 해태 등의 수번뇌도 7식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분노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므로 7식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의식은 5진을 반연하는 것이 5식과 같이 때문에, 공통의 경계를 반연한다고 이름한다. 제7식도 5진을 반연한다면 역시 의식과 같이 공통의 경계를 반연한다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5식은 색성향미촉법으로 5진으로 될 때는 현상계이라 모두가 법인 티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의식은 6식이므로 5식은 외입처이고 6식은 내입처입니다. 의식의 입장에서는 공통의 같은 것이나 7식에 와서는 8식의 종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한편 5식과 6식 그리고 8식을 아우르는 입장이라 특히 6식의 세상을 관하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7식을 통하여 아견 아만 아애 아치라는 인견(人見)과 법견(法見)에 사로잡혀 구속되게 되었습니다. 즉 7식이 자아입니다. 말라는 8식을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하는 常입니다.
아뢰야는 항상 폭류처럼 상속하여 흐르며 이것을 취하기 때문에 우리들 자아의 몸은 죽지 않습니다. 한편 6식과 함께하기에 끊어지는 단견입니다. 6식은 물질이라 구성인자 하나하나의 종자가 소멸하기에 나중에 공으로 돌아가 없는 상태입니다. 常 斷은 앞뒤 선후가 없이 일시에 성립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은 영원하기도하고 일시적으로 살다가 죽는 존재이기도하는 2중성입니다.
((종자는 그 현행의 식의 공능이므로 실재의 사물이 아니고 체가 가유이다. 논에서 식을 반연한다고 말하는 것은, 종자와 현행을 모두 식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니, 제론 중에서는 현행과 종자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자도 반연할 수 있다.))
종자는 8식이며 영원히 유전 상속되는 자성이며 그래서 항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현행의 식은 7식으로 7식과 8식이 서로 교감하는 것으로 현행이 성립되며 공능으로 나타나 우리가 느끼는 현재입니다. 8식의 종자는 자성이라 실재의 존재로서의 사물이아니라 이루는 바탕인 체는 공으로 가유입니다. 외부에 존재하는 환경인 우주는 7식의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입처입니다. 6식은 현상계 환경으로 관찰하는 것이며, 7식은 자성인 종자로 관찰하기에 7식의 몸은 즉 구성 요소가 종자라는 理界의 입자이라 7식의 몸은 물질이 아닌 자성의 종자로 구성되어 죽지 않습니다.
8식 종자의 성격은 理事로 나뉘어 있기에 事인 현상계에 소속되어 있으면 죽거나 소멸되어 없어지는 종말이 있는 상태입니다. “종자와 현행을 모두 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8식과 7식이 같이 있어 함께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수번뇌라는 것은 8식 종자의 성격에 따라서 그 간격이 발생하기에 그 사이에 번뇌가 발생하기에 수번뇌입니다. 理界에서는 7식이 인지할 수 없기에 번뇌가 계속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현상계에서는 6식에 의해 감지되기에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라한위에서 아집(我執)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견 아만 아애 아치의 7식에서 이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6식의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8식으로 볼 때는 종자가 아직 남아 있기에 법집(法執)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일종의 소지장(所知障)입니다.
((색법 등의 종자는 식온이 아니기 때문이고, 논에서 종자는 실재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가유는 없는 것과 같아서 인연이 아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의 색법등은 연기법의 결과로 이루어진 식온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색온으로 여기에 식온이 함께 있습니다. 색온을 이루는 종자는 자성으로 이루어진 공으로 가유이나 식온의 상대이기 때문에 실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계를 유지하는 입장에서는 실재로서 작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기법으로 성립되는 것이라 식에게는 실재입니다.
((또 이 식과 함께하는 살가야견은 임운하여 한 종류이고, 항상 상속하여 일어난다. 어찌 별도로 나와 내 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용납하겠는가? 한 마음 중에서는 단상(斷,常)등의 2가지 경계가 있어 별도로 집착하여 함께 전전하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2가지 집착이 전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무시로부터 한 맛(一味)으로 전전하기 때문이다.))
7식과 함께하는 살가야(아견)는 8식 종자와 임운하여 현행을 이루어 마음의 현재 상태를 항상 유지하고 있습니다. 6식의 입장에서는 연기법으로 공과 색이 분리된 상태이라 6식과 8식이 따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즉 6식이 8식을 바라봄으로 상대인 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실재로는 5식의 작용이나 5식은 6식의 내입처라 6식이 8식을 관하는 형국입니다. 한편 사물의 진실은 항상 상속하여 현재를 유지하는 7식과 8식의 관계이라 단상(斷,常)의 구분이 없습니다.
((‘임운하여 한 종류’라고 함은 무시로부터 서로 비슷하고, 분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상속하여 일어난다‘라고 함은 중단됨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만약 제6식과 같이 상속하지 않고 중단되는 때가 있다면, 별도의 집착을 일으키는 것을 용납할 수 있지만, 이것은 이미 항상 일어나고 한 부류여서 미세한데, 어찌 별도의 집착함을 일으키겠는가?))
무시(無始)라 함은 시작되는 출발선이 없기에 끝나는 마지막도 없습니다. 8식의 종자는 분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항상 폭류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6식은 생활하고 살아가는 환경으로, 생명과 환경으로 나누어 져있습니다. 무시는 원래 시간의 개입이 없으나 자성 자체의 특성으로 인하여 무한데 라는 시간을 스스로 품고 있습니다. 즉 세상의 전개를 의미하고 성주괴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일법일시(一法一時)의 진리에서 연기라는 관계성을 항상 유지하기에, 한량없는 변화를 동시에 연출하고 거기에 수반하는 각각의 환경적 영향과 결과는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7식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항상 상속하는 입장이고, 6식의 신체는 물질로서 종자가 개별화되어 업보의 진행되는 순서가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7식은 시간적 간격이 없고 6식은 시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유식으로 관하는 인간과 세계 3부
첫댓글 「나는 당신네를 가벼이 여기지 않노니,
당신들은 도를 행하여 모두 마땅히
부처님을 지을 것이오.」
묘법연화경 제 이십 상불경보살품
나무 석가모니 비로자나 부처님 ()
나모 삳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람 ()
나무 본화지용 무변아승지 보살마하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