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대로 행하는 성실한 실천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대리
부녀지도자 제10기 정 택 희
5년 전만 해도 신대마을 50호 중에서 15호 가량이 절량농가였습니다. 우리 집도 절량농가의 한 집이었습니다. 봄만 되면 남의 집 고용살이나 장리쌀을 먹여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 되다 보니 조금이나마 있었던 땅덩이는 온데 간 데 없었습니다. 250명중 50 명가량이 헐벗고 굶주리며 한숨만 쉬고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나날이 계속 될 때 우리 신대리에도 새마을사업이 시작 되었습니다. 불만 먹고 노름만 하던 남자 분들과 세상물정을 모르는 부녀자들은 모두 반대했습니다. 나는 처녀였기에 시집갈 준비하느라 바빠 무관심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새마을사업이 진전 되었습니다. 이때 나는 마음을 달리했습니다. 세상물정을 모르고 남성의 예속물로만 아는 우리 여성들, 봉건제도와 남존여비사상을 타파하고 우리 여성의 힘으로 이상촌을 만들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모님의 승낙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았습니다. 신대리 새마을사업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는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에 참여했습니다. 교육을 받아가면서 의욕에 불타는 연수생 일동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습니다. 애국에 끓는 피- - - 사명감- - -나는 연수원교육이 끝나고 검소한 생활과 건전한 마음으로 새마을사업에 몸 바칠 것을 맹서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연수교육을 마치고 집에 오니 내 할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우선 부녀회를 조직해야 되겠다고 생각만 할 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말을 아로새기며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신대부녀회원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니 회의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경험도 없고 중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나, 추진력이 없고 통솔력이 없는 나, 대중 앞에 서면 말을 못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나는 면장님과 기관장님들과 이장님을 찾아가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협조를 얻어 2차로 회의를 또 소집했습니다. 50호 중에서 30호가 나왔습니다. 그 때 저는 연수원생활과 성공사례를 발표하시던 선배님들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용기를 내어 자초지종을 얘기했습니다.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남존여비사상을 타파하고 우리 여자들 손으로 이상촌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며 호소했습니다. 그 때서야 부녀회원들은 자초지종을 얘기 듣고 나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약간의 호응의 빛이 감돌았습니다. 그 때의 감격은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다음날부터는 가가호호 방문을 해가면서 우리 부녀들도 새마을에 참여합시다. 대한민국의 삼천리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는 새마을 소리가 안 들립니까? 잠에서 덜 깬 우리 부녀자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못살아요. 또 사치와 허영에 눈뜬 외화내빈 병에 걸린 여성들 때문에 못 살아요. 대통령께서 제창하신 새마을운동은 나 자신을 위한 길이요 우리 후손에 물려줄 길입니다. 서로 융화단결하고 협동하여 조국에서 필요로 하는 여성이 되어 조국의 딸과 어머니가 됩시다. 뚜렷한 국가관, 민족 관, 사회관을 가지고 애국하는 여성이 됩시다. 우리들의 훨훨 타는 애국의 마음은 소중한 자녀들에 행하는 모성애와 같습니다. 기어이 잘 사는 나라, 통일 된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되겠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녀회원이 되어 신대마을을 건설하자고 호소했습니다.
15일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3 번째의 회의소집에는 35 명가량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또 “혼자서도 살지 못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옛말과 같이 한국여성으로서 우리 이 난관과 불황을 우리 스스로 해결 지울 것을 우리 부녀들과 약속을 하고 회원명단을 작성하고 앞으로의 사업계획과 임원을 선출했습니다. 첫 번째로 기금조성을 위해서 토론한 결과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마침 국가보조 150만원, 마을부담 100만원을 들여 300m의 제방공사가 있었습니다. 35명의 부녀회원들은 자갈치는 공동 작업을 했습니다. 적으나마 3만원의 기금이 생겼습니다. 기금이 생긴 뒤로는 협동정신이 투철해졌고 솔선수범하며 희생정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서 국민학교 운동회 날 국밥을 팔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상인들과 짜고 한편의 남자 분들은 “다 큰 계집애가 시집갈 준비나 하지 무슨 짓이냐” “또 한편에서는 저 계집애 때문에 집안일도 충실하지 못한데 큰 일 났다.”는 등 욕설이 많았습니다. 나로서는 마이동풍 격이었습니다. “성공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고 중단하는 자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대통령각하의 말씀을 아로새기면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무사분주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던 젊은 청년들도 같이 호흡하기로 했습니다. 꼭 같은 작업복에 꼭 같은 수건, 꼭 같은 신발을 신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동회 날을 맞이했습니다. 반대하던 남자 분들도 또 부녀회원들도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나보다 모두 먼저 나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한결 부드러웠습니다. 실패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선 각 기관장님들과 각 이장님들 또 다른 주민들이 모두 다 협조해 줬습니다.
광시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야, 신대부녀회원들 이런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본 받아야겠습니다.”하고 모두들 칭찬했습니다.
나는 이런 감격을 처음 맛보았습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습니다. 저녁에 모여 결산보고를 해보니 총수입이 11만원이었습니다. 물품구입 대를 제외하고 순이익이 6만원이 남았습니다. 원장님! 새마을운동에서 술과 국밥을 다룬다고 하시겠지만 저희들이 취급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상인한테 그 이익금이 넘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또 우리 신대부녀회 회원들에게 좋은 교훈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신념과 사명감”
저는 또 이런 교훈을 배웠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기는 날이 있다.” 그리고 “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자갈치는 공동 작업에서부터 운동회를 통한 이익금이 9만원이나 생겼습니다. 연수원교육을 거울삼아 20여 일 동안에 내가 바라던 이상의 꿈과 희망이 50%는 진전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4번 째의 부녀회에서는 신대리 47호 모두 다 부녀회에 가담했습니다. 신대리 부녀회원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내로써 가정의 화목을 유지해야 한다.
2. 모이는 시간을 잘 지키고 한 번 모이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가정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3.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한층 부지런하고 자녀교육과 가사에 힘을 쓴다.
<신대리부녀회 목표)
자조. 자립. 협동정신을 갖자.
근면. 성실. 검소. 절약하자.
희생정신을 발휘하자.
매사에 참여하고 솔선수범하자.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통솔력을 갖자.
는 목표를 걸고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새마을의 기수가 되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74 년까지의 새마을사업은 공동빨래터. 절미저축. 상수도시설. 구판장설치. 돼지도 1호당 2마리 꼴이 되었습니다. 또 한우도 1.5마리 꼴이 되었습니다. 지붕개량도 47호 중 44호가 완료 되었습니다.
300m의 제방사업과 담장개량. 변소개량도 되었습니다. 또 돈나무인 뽕나무 밭도 20,000평이
넘었습니다.
반공 및 승공사상계몽을 한 달에 한 번 실시하고 있고, 유실수와 장기수도 심었습니다.
오동나무 1,000주, 포플러 1,000주, 밤나무 500주를 식재했고 은사시나무 300주도 식재했습니다. 75년에는 농번기에 바쁜 일손을 덜기 위해서 또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탁아소도 설치할 계획입니다.
마을 묘포장에는 개나리 20,000주 은사시나무 10,000주와 구상나무 1,000주, 이태리포플러 5,000주도 심었습니다. 무궁화를 마을 안길에 심기 위해서 3,000주를 삽목 했습니다.
75년도 가을에는 야산과 하천부지에 유실수와 포플러 5,000주를 심을 계획입니다. 논보리도 13,000평을 파종했습니다. 농가 소득증대를 올리기 위해서 특용작물인 인삼과 고추 비닐하우스 5동도 늘었고 담배도 5,000평 심었습니다. 국기게양대가 집집마다 있고 30평짜리 새마을회관이 웅장하고 믿음직스럽습니다.
75년도에는 경지정리를 할 계획입니다. 이젠 신대리에도 다른 부락한테 뒤떨어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신대리부녀회 자금이 지금은 비록 200,000원뿐이지만 80년대에 가서는 200만원이 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때 가서 우리 신대리부녀회원들은 국가를 위해서 뜨고 또 동포애를 발휘해서 헐벗고 굶주리는 영세 농가를 위해서 쓸 예정입니다. 새마을에 대해서, 부녀회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반대하던 모든 분들도 이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새마을기수가 되겠다고 서로 발 벗고 나섰습니다. 또 젊은 청년들도 청년회를 조직하여 나를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후손을 위하여 일하겠노라고 발족되었습니다. 70년에만 해도 250면 중 50명이 헐벗고 굶주리던 신대마을도 새마을이 시작 되고부터는 중류층 못지않게 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또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도 내 땅 들어갈 때는 서운했지만 길이 넓어서 마실 다니기도 좋고 새마을운동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고 기뻐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저도 더욱 더 힘과 용기가 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공동 보온못자리 설치, 공동 모내기, 공동작업, 공동 객토작업, 공동 풀베기, 위생시설로 파리. 모기. 쥐 잡기운동 등 수 없이 많은 일을 했습니다. 81년도에는 상류에 속할 것으로 예상 됩니다.
원장님! 지금도 원장님의 모습과 말씀이 생생하게 활동사진처럼 나의 머리를 스쳐가는군요. 연수원교육만 아니었으면 어찌 제가 새마을기수가 되었을 것이며, 어찌 신대리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원장님과 영도자이신 박대통령 각하께 재삼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대한민국의 부녀자들이여!
먼저 가신 고 육영수여사님의 못다 하신 일을 우리 부녀자들이 스스로 해결합시다.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하면 된다.’는 신념과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투철하게 서로 손을 잡고 너도나도 새마을기사가 되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항상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를 위해서, 그늘에서 자라는 동포들을 위해서 서로 협동하고 융화 단결해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꽃을 피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