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전쟁 11 - 필리핀(오랜 투쟁 끝에 세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하다)
필리핀은 섬 7천여개로 이뤄진 군도 국가로 북부 루손, 중부 비사야, 남부 민다나오의 3개 지역
으로 분류되는데, 인구는 1억명으로 세계에서 12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니 언어는
타갈로그어 5,200만에 세부아노어 1,600만과 일로카노어 1,500만등으로 국어는 타갈로그어
이고 공용어는 타갈로그어와 영어이며 1,100만명의 필리핀인들이 미국등 해외에 살고 있습니다.
국호 Philippines(필리핀)은 필리핀이 10여개 국가로 나뉘어져 있을때인 16세기에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로 부터 나왔으니, 루이 비얄로보스는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루손섬에 도달했는
데.... 그는 이 땅을 프랑스인들이 1847년에 세계 최초(?) 로 독도를 발견했다며 “리앙쿠르 암초
(Liancourt Rocks)” 로 불렀듯, 스페인 펠리페 2세를 기려 “펠리피나스(Felipinas)” 라 붙였습니다.
필리핀인들은 현지어로 '자유인'이라는 의미인 '마할리카(Maharlika)' 로 국호를 개명하자는
주장이 1978년 제기되었으며, 2017년 알레하노 하원의원 및 2019년 두테르테 대통령
도 국호 개명을 주장했지만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통해 여러 섬으로 이뤄진 지역이
하나의 로마 가톨릭국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쉽지 않아 보입니다.
9세기 상인 자본을 바탕으로 국가들이 출현하니 북부 루손섬의 마닐라(톤도)왕국은 시작은 인도계
국가였으나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과의 정기무역(공무역)권을
독점했으며 이슬람과의 무역 확대를 위해 마닐라국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한 오랜 전통을
가진 국제중계무역항 이었으니 스페인인이 도착했을때 도시의 화려함에 감탄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남부 민다나오 서부지역에 위치했던 술루 술탄국은 남중국해 동남부 해역의 해상 패권을 가진
이슬람계 해적왕국이었으니 말라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등과 교역을 했고, 이슬람
네트워크 안에 속해 있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해서는.... 네덜란드, 영국 및
스페인 함대를 상대로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스페인과는 300년간 오래토록 전쟁을 했습니다.
술루왕가는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 핏줄이 흐르는 하심 가문의 방계 후손이며, 태국왕가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남아 왕국들이 유럽 열강의 회유, 내부 분열, 군사적 굴복으로 인해 식민지로
넘어갈때, 서구열강들과 전쟁을 통해서 주권을 지켜낸 국가로 20세기에 미국에 의해 멸망했지만
현재도 이슬람 반군이 존재하는 내전 지역이고 역사적으로 해적 활동과 노예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남부 민다나오 동쪽 불교계 상업왕국 부투안 왕국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었고, 도자기 및 귀금속공예
가 발달해 부를 축적했으니 마젤란 원정대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에 따르면, 식기와
무기, 백성들의 집도 공예된 금이 도배되었던 것으로 유명하며, 16세기까지는 광동식 도자기를
일본 다이묘 들에게 판매했고 무기 제작기술도 발달하여수마트라, 말레이 반도에 걸쳐 있던
말라카 술탄국 보다 부유했는데 스페인에 우호적이라 세부 왕국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남부 민다나오 중부에 위치한 이슬람계 마긴다나오 술탄국은 술루, 라나오 술탄국과 동맹을 맺고
오랫동안 스페인과 전쟁을 하였으니 민다나오 북부와 남부 해안선을 따라 대규모 군대와 요새를
배치하고 방어선을 형성한지라 스페인 군대는 300년 가까이 이들과 긴 전쟁을 했지만 방어선을
제대로 뚫지 못했으며 마긴다나오 왕조는 민다나오 중부에대농장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을
몰아내기 위해 개신교 네덜란드, 영국과 손잡기도 했으며 수백년간 중국인과 평화롭게 공존했습니다.
중부 비사야제도에 있던 힌두교계 세부 왕국은 북부 루손섬과 남부 민다나오섬 사이를 잇는
교차로인 무역로에 위치했으니 각국의 상단들에게 통행료를 받았고 물류의 중계지
역할을 하였으니 금 보유량이 많았다는데 세부 왕국은 태평양을 건너온 스페인의
국력이 강성함을 눈치채자 스스로 신하이길 원하였고, 중부 비사야 지방의 다른
바랑가이들도 빠르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것으로 보아 지역의 맹주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막탄 섬의 라푸라푸 등 일부 비사야인들은 스페인 원정대와 전투를 해서 이긴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민통치 이전부터 스페인에 호감을 보이며 가톨릭으로 쉽게
개종하였고, 스페인의 북부 루손섬의 톤도왕국 회유를 성공시키고, 마닐라 왕국
을 공격시 원정에 참여하는 등 필리핀 도독령을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후 스페인이 남부 민다나오의 이슬람 술탄국들과 전쟁시 비사야인들과 함께 국경과 해안방어를
하였고, 침공해온 개신교계 유럽 함대 및 남중국해의 해적들과 전투시 참여하는등 뛰어난 선원
들과 전사들이 많아 스페인에 의해 자주 고용되며, 이후 250년 가까이 이어지는 갈레온 무역등
태평양 횡단에도 계속 참여했으니 식민통치 후반 까지도 대부분은 스페인의 충성파 세력이었습니다.
팡가시난, 민도로와 같은 거류 무역지에서는 많은 중국 상인들이 정착촌을 형성해 중국 내륙
과 사무역과 밀무역에 종사했으며 적지 않은 일본인들도 같이 거류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당시 필리핀 경제의 큰 특징은 토착화된 다국적 자본들의 중동, 인도와 중국 사이의 교역
에 중개인들이라 볼수 있는데 16세기 팡가시난 지역 성채도시 주변에 화교 인구는
2만 5천명 이었으니 일본 왜구들과 함께 원나라, 명나라 시기에 해적활동에 참여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이 도래할 시점에 필리핀에는 20여개 국가들이 존재했는데 상업적 질서
가 가미된 봉건제에 노예제가 함께 운영되고 있었으니... 노예계층을 제외한 왕과
신하, 백성들 모두 상인 및 해적이였고, 신하들은 사병을 보유하고 있어 여러
국가들의 왕들은 금전을 사용하지 않으면 군대 소집시 동원력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부유한 상인이 아니면 왕이 되기 어려운 시스템이니 금전 지불을 바탕으로한 쌍무계약적인 군사
체계로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통용되던 왕의 권위와 관료제에 입각한 징병은 아니었으며
고용이 보편적 개념으로 존재했으니 한 왕국 안에 왕이 두명이거나 네명인 경우도 있었으며
평민층(상인)은 소년 때 부터 무역품의 시세와 화폐의 가치를 배우는게 보편적 문화 였습니다.
15세기 이전부터 동남아에 상인, 왜구 및 용병으로써 진출했던 일본인도 필리핀에 자주 입항했다는데,
전국시대에는 필리핀에 금이 많다고 알고 있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만난 스페인측 사절단은
필리핀을 정복하겠다는 말을 듣고 보고하였으며 이후, 1637년 도쿠가와 정권 또한 필리핀을 정복
하려고 네덜란드를 설득을 했지만... 요새인 필리핀은 현실성이 없다며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스페인이 도착한 16세기 초중반에는 필리핀 전역에서 컬버린, 란타카 등을 포함한 화포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으며 화승총도 거래되고 있었고 일부는 화승총을 자체생산하기도 했으니 오래전부터
필리핀은 이슬람 네트워크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필리핀 제도 및 남중국해, 스플래틀리
군도, 인도네시아를 거쳐 말라카 해협까지 다국적 해적들 사이의 전쟁이 일상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필리핀 해적들로 인해 포르투갈 상선들도 털린 기록이 남아있으며.... 한 스페인 관료는
필리핀인들이 아이언 우드로 만든, 좌우에 윙을 달고 화포를 탑재한 가볍고 견고한
군선을 극찬한 기록이 있으며 또한 당시의 토착검술 중 이도류검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스페인 검술가들의 손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칼리 아르니스라고 불립니다.
필리핀 군선은 시속 15노트에 화살을 막는 방패물을 달았고 승선인원은 40명~150명이었으니
속도가 빠르고, 선회력이 좋은데다가 높이가 낮아 여러척이 각자 변칙 각도로 빙빙돌며
적선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원거리에서 정밀타격은 어려웠으며 각도 조절이 용이한
선회식 화포는 1~5문을 달았는데, 빠르게 접근해 적 선박 최하단부를 격발하면
침몰이 100% 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함대들도 모두 당했다고 합니다.
또 필리핀 제도는 일본에서 온 왜구들이 해적질을 할 때 혹은 동남아로 갈 때 통과하던 경유지점
이기도 했으니 무역에 있어 자유롭고 여러민족에 개방적이던 필리핀 제도에서 활동하니 실제
명나라때 중국을 휩쓴 왜구들은 중국인과 동남아인, 포르투갈인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여러 왕국 군대는 해적활동 이외에도 말라카, 동티모르, 시암, 미얀마, 브루나이 등에
용병으로 고용되었고 일본 왜구들과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으며 마닐라, 톤도 왕국 군대가
왜구들과 함께 태국 시암 왕가와 미얀마 사이에 전쟁이 있을때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도 있습니다.
1405년 영락제 때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침략을 시도한 적이 있으니 정화 수군 도독의 대규모 해상
원정시기와 일치하는데 마닐라지역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고, 점령후 얼마간은 지방관을 파견했다고
되어있으며 십수년후 마닐라는 회복해 힌두교 세부왕국과 마긴다나오 사이에 전쟁을 하는게 보입니다.
스페인 원정대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엔 다양한 재료와 여러 방식으로 가공
을 거친 갑옷들은 상상외로 단단하고, 창이나 단검으로 찔러도 꿰뚫지 못한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자신감에 넘친 전사들은 더 큰 민첩성을 위해서 갑옷을 벗고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갑옷들은 철이 아닌 만큼 뜨거운 햇빛에 가열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평상시 금으로 만든 칼집이나 손잡이,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평상복 차림으로 외국 무역선
들을 의전하였으니 금으로 장식된 필리핀 검은 센다이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의
골동품으로 발견되기도 했는데 크메르계 문자를 쓰던 태국, 중국계 인구의 우세속에
한자를 쓰던 베트남과 달리 필리핀 제도는 인도, 아랍계의 바이바이인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국제 무역 구조는 루손섬의 마닐라, 톤도 왕국이 독점적으로 중국 정부 및 상인들로 부터 도자기,
비단, 벨벳, 철광석, 장뇌, 백단향, 각종 사치품 등 중국산 제품들을 대량으로 구입해 필리핀제도
상업왕국 및 바랑가이 국가들에 판매 및 재분배 하였으니 각 국가들은 이걸 동남아, 중동, 인도
에서 온 상인들에게 재판매했고 향신료, 옥돌, 사치품들을 구입해 화교들에게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상업이 발달한 만큼 자연스레 도적들이 형성되기 마련이니 일본 왜구들과 비슷하게 정기적인
계절행사 처럼 함대를 구성하여 동남아 국가들의 해안가 마을이나, 무역선을 털러 가는
등 습격(Raid)을 통해 약탈경제에도 종사했고 사로잡은 포로들로 노예무역이 크게 성행
하면서 자연스레 상무정신이 발달했는데 스페인이 점령한후 노예제와 해적질을 금지시킵니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어업에 능숙한 어부들이고 수영의 달인들이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도 조상들
처럼 태풍 속에서 바다수영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으며, 최대 70m까지, 10분 넘게 아무런 잠수
장비 없이 잠수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니 대표적으로 바자우족이 있는데 정교하고 세밀한 문신을
했으며 이도학 교수는 백제의 담로중 한 곳인, 흑치상지의 출신지인 흑치국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15세기부터 상인인 아랍인이 영구정착을 하는등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니 술루 술탄국은 20
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 갔으며 전성기엔 말라카 술탄국, 브루나이등 말레이계 국가들과의 해상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마긴다나오(Maguindanao) 술탄국, 마닐라 왕국 등의 개종한
이슬람 도시 가들도 나타나니 스페인의 점령이 없었다면 필리핀 전체가 이슬람화 되었을 것입니다.
1529년 스페인은 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에 의거하여 필리핀과 괌,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차지하고, 포르투갈은 서쪽의 마카오와 동티모르를 차지하는 걸로 정리되어
필리핀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동양 무역권 확보를 위해 포르투갈과의 조약을 성사시켰습니다.
하지만 20여개의 필리핀 중소국가들은 콩키스타도르 몇백명으로 무너진 중남미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
등 인디언 문명과는 달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으니 1521년의 마젤란의 첫번째 원정으로 부터 1565년
까지 스페인은 공식적으로만 6번의 원정대를 파견하였는데 앞선 5번의 원정은 모두 실패하였고
이러한 지속적인 원정대 파견 또한 신대륙 광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황금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명나라 또한 영락제 시절, 필리핀 정복을 시도하여 잠시 마닐라 지역을 점령하고 도독부를 세우지만,
이것은 1세기 이내에 사라지면서 지방관 파견이 중지되고 화교 거류지로 다시 바뀌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먼저 상단으로 접근하여 지역 통치자와 우호관계를
형성한후 그의 정적을 제거해 주면서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으니 스페인
정예로 편성된 마젤란 원정대는 중부 비사야 제도의 세부왕국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나..... 세부에 소속된 막탄섬의 촌장 라푸라푸는 스페인에 적대적이었습니다.
라푸라푸와의 몇번의 전투 끝에 마젤란을 포함한 164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후 도주했고, 원정대
가 스페인으로 귀환 했을 때 남은 배는 1척, 생존자 숫자는 18명 이엇으니 그 뒤에도 스페인은
계속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50년간 파견한 다섯차례의 원정대는 실패하거나 패배해 귀환했습니다.
44년 만에 1565년 미겔 로페즈 데 레가스피 장군의 6차 원정대에 다른 토착국가들의
지원군을 받아 막탄섬 상륙과 전투에 승리했고 세부 섬에 영구정착지가 마련됨
과 동시에,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되었는데 막탄섬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스페인군은 여러지역에서 토착왕가 및 부족장등 기득권층 회유에 성공하게 됩니다.
세부 왕국과 부투안 왕국은 이미 마젤란이 왔을 때부터 스페인에 우호적인 관계였고 비사야
지방 대부분의 바랑가이들과 루손섬의 톤도 왕국등 다른 세력들도 대부분이 자금자족의
농업 보다는 교역등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유익한 협상이 빠르게 진행되었으니
스페인의 수준높은 전투력과 부유함을 보자마자...... 다들 쉽게 회유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회유된 국가들은 스페인의 신하이기를 자청했고, 스페인군이 구심점이된 연합군은 나머지 지역
의 정복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갔으니 스페인이 여러 국가들에 충성을 권유하는
동시에, 필리핀의 절반 이상의 국가들이 스페인의 통치를 자발적으로 청했던 것이니 스페인은 회유와
저항하는 국가들에 대해 정복활동을 병행하며 1571년 루손섬의 마닐라왕국을 전투 끝에 멸망시킵니다.
한편, 민다나오 중서부에 위치한 라나오, 술루, 마긴다나오 등의 이슬람 왕국들과는 이후 300여년간
스페인과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를 모로전쟁(Spanish-Moro conflict) 이라고 하는데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치한지 얼마안되어 60여명의 스페인군은 카가얀 전투에서 필리핀에
해적질하러 온 1000여명의 일본 왜구들을 화포와 유럽본토의 전술들을 사용하며 거의 전멸시킵니다.
이후 필리핀 도독령은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 부왕령에 속하게 되니 형식상 왕이
파견한 부왕이 통치하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간접지배를 받는 형태인 것은
스페인 본국과의 거리와 필리핀이 지구 정반대로 너무나도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초에 필리핀은 지역별로 언어, 문화, 민족이 다른데다가 서로 분리된 시간이 매우 길었던 관계로 통합적
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스페인인들이 도독령을 구성하고, 기존의 토착왕가, 부족장, 거류지 유력
상인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세금면제와 지역별로 자치권을 부여했으니 중남미
원주민들과는 다른 대우로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방식이니 이를 '엔코미엔다 제도' 라고 합니다.
오늘날 필리핀이 같은 식민지였던 중남미와 달리 각 지역별로 많은 언어가 남아있는 원인도 이러한
자치권과 연관이 있으니 식민지배 또한 스페인 본국에서 인력을 대규모로 파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지역은 토착 지배층들을 중심으로 행정이 돌아갔으니 이러한 부분은 스페인
본국은 물론 광대한 아메리카에 본적을 두고있는 멕시코령이라 하더라도 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된 후에도 스페인군과 식민지인들은 1574년 마닐라 전투를 포함해 남중국해
에서 온 여러 해적들, 이슬람 왕국들, 개신교계 유럽 함대들과 군사적으로 맞딱뜨리는데,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화승총을 포함해 무기와 방어구 무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바, 이는 식민지
인으로서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고 기존 지배층들이 각자의 사병을 그대로 보유했음을 뜻합니다.
각 엔코미엔다 자치지역은 폴로(Polo) 제도라는, 1년에 40일의 노동의무가 부과 되었는데 기존 국가들의
귀족계층, 관리들은 여기서 자동면제 되었으며 여러 주들은 돌아가며 노동자들을 중앙에 파견했고
부유층과 중산계층의 상인들은 7페소 은화를 지불해 면제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필리핀 식민지인들은
가혹하게 부려진 아메리카 흑인 노예들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고 사유재산 또한 보장된 사회였습니다.
멕시코 태생의 스페인인 크리오요와 혼혈 메스티소들을 이주시켜 장기적으로 스페인 혈통이
많아지게 했으며, 필리핀인들은 고대로 부터 유라시아의 다양한 상업집단들이 다녀갔습니다.
때문에 필리핀은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다르게 전염병에 면역이어서 심각한 인구감소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1571년 마닐라에 인트라무로스, 세부에 산 페드로등 스페인식 요새 및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1589년 필리핀에 아시아 최초 유럽식 대학들이 설립되었습니다.
필리핀 도독령 마닐라항에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멕시코)의 아카풀코항, 그리고 스페인 본국의
세비야항 까지 이어지는 무역루트는 300년 넘게 이어졋으니 1453년, 이슬람 군대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스페인의 레반트 무역권 상실로 동방과의 무역이 차단된 이후 지구 한바퀴를
돌아 100여년에 걸쳐 이루어낸 성과였으니 자본주의 발달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를 경유하여 중국에 유입된 화폐는 금화 보다는 은화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갤리온 무역
이라 불리는 교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필리핀 제도는 스페인 제국의 재정에
한몫하는 대 아시아 무역기지로 쓰였으니 푸젠성, 광둥성에서 온 200t급 중국 정크선들로 마닐라항
이 득실거렸고 정기적인 공무역만해도 해마다 두 번이상 비단과 도자기들을 가득싣고 이곳을 찾았습니다.
스페인의 신대륙 광산에서 유발된 유럽 전역의 금, 은 인플레이션 현상은 중국 및 아시아에서 도자기와
비단, 향신료등을 대량 거래하면서 해결되기 시작했으며 중국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인도, 일본,
자바, 수마트라, 캄보디아, 실론섬, 벵골만 등의 향료,계피,후추, 상아, 카펫, 도자기, 향신료, 비단,
차 등을 포함했고 필리핀인 장인들이 생산한 귀금속 공예품은 유럽에서 인기높은 사치품에 속했습니다.
아시아 로마 가톨릭 선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예수회는 필리핀 각지의 식민지인들은 물론, 일본의
일부 다이묘(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와 중국에서의 선교 또한 할 수 있었고, 천주실의와
같은 책은 이후 중국을 거쳐 조선에까지 전해지며 스페인은 칠리핀인들을 갈레온 무역에 적극적
으로 참여시킨 결과 오늘날 멕시코 인구의 12% 정도는 필리핀인 혈통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16세기 필리핀인들은 멕시코 지역 외에도 괌, 하와이, 루이지애나, 캘리포니아, 텍사스에도 정착촌을 형성
했고 아메리카 개척에 참여했으며, 스페인령 아메리카 전역에서 모집된 정착민들과 군인들은 멕시코와
페루에서 훈련되고 그 중 엄선된 자들이 아카풀코에 집결하여 필리핀에 있는 요새로 파견되었고 선원
들은 세비야, 멕시코, 마닐라에서 모집되었는데 3분의 2는 해양 경험이 많은 필리핀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태풍에서 살아남고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자라는 염분과 습기에 강하면서도 질기고 가벼운 나무가 유럽
보다 배를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마닐라에 대규모 조선소를 건설하고 아웃소싱을 시작하니....
1700~2000t 급의 마닐라 갤리온들이 이곳에서 생산되었으니 유럽 선박 중 가장 거대한 크기 였습니다.
스페인은 일본과는 상업으로 단기간에 친밀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서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무역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사쓰마 번이나 센다이 번 등 지방
다이묘들과 밀무역을 하면서 해결된 것으로 보이는데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제작한
사쓰마 도자기가 유럽에서 인정 받았고 중남미 원산인 고추와 고구마가 필리핀 도독령과 밀무역
을 하던 사쓰마를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어 종래의 백김치가 빨간색, 매운맛으로 변하는 계기가 됩니다.
무역을 마닐라로 일원화 시키는 한편 펠리페 2세가 노예제를 폐지하니 기존 토착지배층들의 사유재산
인 노예들이 해방되면서 도독령 소속의 자유민이 되고 세금납부를 하게되었으며, 기존토착 지배층
들이 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되자 권력이 약화되어 불만으로 지방에서 반란이 자주일어났습니다.
1815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했지만 필리핀은 식민지로 남음으로써 정치외교적 문제로 인해
태평양으로의 바닷길이 적자가 나기 시작하니 250년간 행해진 갈레온 무역이 쇠퇴하면서, 스페인은
이곳에서 아시엔다(Hacienda) 제도라는 플랜테이션을 운영햇으며 노예제가 폐지된후 반란이 진압
되면서 기존 지배층들의 권력은 박탈되었지만, 대다수의 자영농들은 토지를 소유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시대 중반을 넘어가며 필리핀은 치안을 위한 보병위주의 군대 이외에는 고급무기
를 대량으로 보유할 수 없었던, 식민지로써 군사력이 엄격히 약화된 상태였으며
해군력은 스페인에 완전히 의존했으니 독자적인 해군력을 보유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상태는 미국 식민지를 거치면서 반세기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도 이어집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 전쟁을 주도한 현지 지주들의 식민지 자치권 확대에 대한 요구, 그에 대한
스페인 본국의 거절로 식민지들이 반발해 독립해 나가면서 아시아-태평양-유럽 사이의 바닷길이
정치외교적 문제로 인하여 가치가 흐지부지 되었고, 필리핀 또한 독립을 원하는 흐름을 타게 됩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침공한 이후 스페인이 휘청거리게 되자 식민지들로 부터 과세가 이전
보다 가중되었고 그렇게 거둬진 세금은 스페인 본토의 내정 위주로 쓰이면서 정작 식민지
들의 안보와 정치적 균형이 위태로워져 각 지역의 토착 지배층들의 재산으로 현지 문제
를 해결하게 되니 구심점이 약해져 차라리 독립하는게 낫다는 인식이 팽배해 집니다.
독립에 대한 열기는 예수회가 오래전부터 만들어 놓은 가톨릭 해방신학을 말미암아 촉진되었는
데.....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유럽 내에서도 독립해나가는 지역에 대해서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카탈루냐, 벨기에, 이탈리아 일부지방 등 모두 군사적으로 매우 강경한 진압을 합니다.
스페인에서 독립해 나가려 하면서 많은 유혈사태가 났던 지역들이니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와 필리핀 또한 적용되었으니 남부 민다나오섬과 서부 술루제도에 있던 2개의 이슬람 왕국이
브루나이와 연계해 마닐라를 일시 점령하는등 강력히 저항하지만 스페인군에 의해 격파됩니다.
필리핀 독립운동의 계기는 곰부르자 사건이니 1872년 카비테의 산 펠리페 요새에 위치한 무기고
에서 과중한 조세에 대해 노동자들이 집단 봉기를 일으키자, 스페인 당국이 개혁 성향의 가톨릭
신부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에게 반란 사주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한
사건이니 마닐라 대주교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 신부들의 사제직을 박탈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교회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라는 이유였는데, 사주혐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독실한 가톨릭
문화가 지배하는 필리핀에서 스페인 지배에 대한 반란을 대주교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라고 간접적으로 인증한셈이 된것이니 이 사건 이후필리핀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호세 리살은 지주로 필리핀 민족동맹을 조직한 반면에, 빈민 출신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는 1892년에 원주민 중심의 급진파 독립운동단체인 '카티푸난' 을 결성하여서는
1896년에 봉기를 일으켰는데, 쿠바등 스페인 식민지 곳곳에서 독립투쟁이 일어나자
놀란 스페인 정부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카티푸난 중심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합니다.
심지어 온건주의자 리살까지 카티푸난과 엮어서 그해 12월 30일 총살해버렸으니 필리핀에는 리살
이 사형당할 때를 생생하게 청동으로 만든게 전시되어 있으니 같은 필리핀인(스페인군 소속)
의 총에 죽는걸 보고 싶지 않다며 일부러 등을 돌려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스페인 해군은 옛날처럼 압도적인 위용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영국의 패권이 점차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던
시대였는데 마닐라만 전투에서 스페인 해군은 미국 해군에게 패배했으며 무장투쟁을 하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자 1899년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해 제1공화국
초대 필리핀 대통령이 되었지만 미국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를 수중에 넣고 필리핀 마저 지배하려 합니다.
필리핀 제1공화국의 운명은 허무하게 끝났으니 미군정이 실시되었는데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이슬람 지역은 여전히 기독교계 국가인 미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였고, 온갖 시위와
사회적 문제가 폭발하여 제대로 국정이 이뤄지지 못했으며 또한 카티푸난과 같은 무장독립
투쟁 단체들의 아기날도에 대한 지지와 게릴라 및 반정부활동으로 필리핀 정국은 혼란했습니다.
미국은 미국- 필리핀 전쟁을 일으켜 독립군들을 공격하니 전쟁, 학살과 기근, 질병까지 겹쳐
20만명 이상의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이 사망했고, 심지어 민간인들에게도 훗날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한 것 처럼 "함포 사격" 으로 학살하는 짓까지 저질렀으며 대부분의 공격은
남부 민다나오의 무슬림지역과 무장독립 단체 카티푸난, 과격 시위대를 향해 이루어 졌습니다.
미군은 필리핀 독립군을 무수히 사살하는 외에 민간인 수십만을 강제수용소에 가두는데, 미군이
필리핀 독립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인근 마을로 들어가 훗날 프랑스군이 알제리에서 한
"10배 룰" 처럼 죽은 미군의 10배의 해당하는 주민을 죽이는 학살을 벌이니.... 우린 일본군이
조선인에게 잔인하게 대했다지만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와 미국은 훨씬 더 잔인무도 했었습니다!
필리핀 독립전쟁은 1902년에 사실상 진압되지만 밀림으로 쫃겨간 잔존 독립군은 1913년에야
최종적으로 진압되는데.... 당시 일본에는 중국의 손문, 버마의 아웅산, 인도 독립운동가
를 비롯해 베트남과 말레이에 필리핀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망명했으니 미군은 일본이
필리핀 식민통치을 도와주는 댓가로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는데 동의하니.....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맺어지고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으로 나와서 "을사조약" 을 체결합니다.
이와는 별개로 지방에 기반이 있던 대지주들은 마지막에는 미국의 지배를 옹호했는데,
이는 스페인이 들어주지 않았던 실질적인 자치권을 미국이 허락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으로 미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자치권이 확대되고 수출확대와 기술혁신,
시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기도 하는등 여러 계층에게 스페인 지배보다는 나아졌습니다.
아기날도 필리핀 대통령 체포를 기점으로 필리핀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화되었으니 미국은 필리핀
에서 실시하던 군정을 민정으로 전환하여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를 수립하였고 1907년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1914년 양원제 의회를 도입했으며 영어를 널리 보급했으니그 의도에 관해
서는 민족의식 희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으니 현재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는 사라져버렸습니다.
1902년 미국-필리핀 전쟁이 끝난 후 필리핀은 완전히 미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고 필리핀에 정국혼란
이 찾아와 정치구조가 지방 대지주들 중심으로 개편되기 시작했는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면서 유럽이 쑥대밭으로 변하고 영국을 위시한 유럽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 또한 발발하면서 필리핀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던 중요한 무역파트너를 잃어버립니다.
1912년 우드로 윌슨의 민주당 정권은 필리핀 독립에 긍정적이었으니 필리핀을 관할하는 공공
업무를 빠르게 필리핀인들로 대체하는 한편, 필리핀 상원을 발족시켜 입법권한을 나누어
주었고 1918년에는 필리핀 독립위원회가 수립되고 1934년에 자치법안 통과후 다음해
케손이 "자치령 대통령" 에 당선되니 타갈로그어를 영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를 지정합니다.
스페인에 속했던 필리핀 땅에 16세기말 부터 개종한 유대인들이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하였는데
19세기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유럽 유대인들의 왕래가 많아졌는데 필리핀은 인권, 자유
등 가치를 실현하고자 나치에게 홀로코스트를 겪던 유대인들에게 난민 비자 10,000 개를
발급하였고 그중 1,300명을 구출했으니 이는 구 스페인제국 식민지였던 국가들중 유일했습니다.
교황청은 나치가 벌이는 짓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고 수수방관 했기 때문에 이후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크게 비판받았으며 1,2차 대전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한 교황청은 유럽의 민심에 따라 권력을 내려놓고
유럽정치와 정교분리를 선언하게 되었으며 2차대전 당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 라이플 총기를
제외하면 중무기를 대량보유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필리핀인들의 반란위협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은 1900년 의화단사건 때 베이징으로 진격한 8개국 군대의 절반을 파병했으며 1904년
러일전쟁때 영국과 동맹국에 미국과는 우호국이었고 1914년 1차세계대전에 미국과
연합국이었고 1918년 볼세비키 적군과 싸우는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서양 열강은
유럽에서 러시아로 파병하는 외에 극동에서도 여러나라가 파병할때 일본군 숫자가
대부분이었으니 모두 4차례에 걸쳐 미국, 영국과 같은편이었지만 2차대전때는 적국이 됩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차지할 때 세계 모든 열강이 이를 지지하였고 만주를 차지할
때는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그후 기정사실로 눈감아 주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영국, 프랑스 및 미국의 시장인 중국을 차지하려고 하자 무역과 투자 이익을 빼앗긴
미국은 반발했는데 일본이 북베트남에까지 상륙하자 미국은 석유등 자원 금수에 들어갑니다.
일본은 석유재고가 2년치 뿐이니 항복하던가 아니면 싸울려면 저 재고가 떨어지기
전에 결행해야 하니 1941년 12월 일본 항공모함이 하와이 진주만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습하면서 태평양 함대 미해군은 효과적인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궤멸되는데 다만 미국 항공모함은 필리핀에 보급차 출항했기에 무사했습니다.
일본군은 1941년 12월 9일 하와이 습격 9시간 후에 미국의 식민지라는 구실로 필리핀을 기습 공습
했으며, 이후 영국 식민지인 홍콩과 태국, 괌 등을 공격하는데 필리핀의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미군
과 필리핀군 또한 막심한 피해를 입고 무기와 장비들 또한 파괴되었으며 물자와 장비부족에 시달리
면서도 조나단 웨인라이트의 지휘아래 반격해 버티지만 결국 미군과 필리핀군 다수는 포로가 됩니다.
마닐라를 방어하는 바탄전투에서 미군 킹소장의 13,000명에 필리핀 자치령군대 6만명등 8만명
은 1942년 2월부터 3개월간 일본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다가 결국에는 5월 8일 함락됩니다.
필리핀군 일부는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산속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게릴라전투로 맞서다가 1944년
10월 20일 미군이 레이테섬에 상륙하고 1945년 1월에 루손섬에 상륙해 진격하자.... 필리핀
군도 산에서 내려와 미군과 함께 25만 일본군을 공격해서 80%를 죽이고는 마닐라를 해방시킵니다.
필리핀 자치령 군대는 일본군과 여러 전투를 치러 1951년 8월 샌프란시스코강화회담에 승전국 자격
으로 참석했는데... 한국인들은 일본군에 쌀등 물자를 공출하고 광산과 공장에서 총탄등 군수물자
를 생산하며, 미군 함대를 공격할 군용 활주로를 건설하고 또 10만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입대해 미군 및 중국군과 싸웠으니 일본편에 참전한지라 저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마닐라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다가 일본에 의해 1943년 괴뢰 정부인 필리핀 제2공화국이
세워지는데, 총기도 없는 절대다수의 필리핀 민간인들은 일제와 괴뢰정부에 격렬히 반항했지만 전쟁중
일본군은 마닐라 대학살 등의 참극도 저질렀으며 전쟁중 민간인 100만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 당합니다.
도주한 미군과 필리핀군 그리고 민병대들은 맥아더가 상륙하기 전까지 총기를 들고 필리핀 제도 곳곳
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였는데 이들은 일본군에 비해 열악한 장비들을 가지고 일본군과 비등한 호각
을 이루고 있었으니 일본 침략을 단기간 내에 물리칠 수 없는 일진일퇴의 전선교착 상태가 이어집니다.
마침내 맥아더장군과 군사장비를 다량 보유한 미군 본대가 중부 비사야 제도 레이테 섬에 상륙하면서
전황이 크게 뒤집히니 이후 필리핀 탈환전이 이어지는데.... 1944년 6월 19일 필리핀해전이 발발하니
미국은 항공모함 15척, 전함 7척, 순양함 21척, 구축함 58척, 잠수함 28척에 항공기 956대를 동원합니다.
일본은 항공모함 9척, 전함 5척, 순양함 19척, 구축함 27척, 잠수함 24척에 항공기 750대를
동원해 이틀간 해전에서 미군은 전함 1척이 파괴되고 항공기 123대가 피해를 입은
반면에, 일본은 항공모함 3척이 침몰하고 항공기 476대가 격추되는등 참패했는데 아직
까지 항공모함을 정규 해전에 동원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과 일본 단 두나라 뿐 입니다.
1941년 12월 일본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을때만 해도 항공모함 숫자는 미군이 4척인데 비해
일본은 8척이었고 제로전투기 성능과 일본 조종사 전투기술이 미군 비행기와 조종사를 능가했으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주력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고 숙련된 조종사들이 전사했으니
장기전, 총력전이 되자 인구와 기술및 자원이 풍부한 미국에 비해 자원이 빈약한 일본이 밀린 것입니다.
필리핀 해전 승리로 이후 괌과 사이판을 점령한 미 해군의 전폭기에 의한 도쿄 대공습 및 원자
폭탄 두 발을 투하하는데, 전쟁기간 동안 일본인 300만명이 사망하였고, 막바지에
이르게 된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왕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선언을 하게 됩니다.
미국- 필리핀 연합군이 마닐라를 재점령했고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었으니 이로써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명실상부한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고 1년후 1946년에 오랜기간 독립
을 준비 해왔던 필리핀 자치령은 미국의 승인 아래 완전한 독립에 성공해 4세기간의 외세
지배가 끝남과 동시에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필리핀 제도 전 지역을 통합한 주권국가가 됩니다.
한편 일제에 투쟁해오던 필리핀의 공산주의 단체인 후크발라합(Hukbalahap)은 이 독립은 진정한
(경제적인?) 독립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토지 개혁 등을 요구하고 반미 무장투쟁을 개시해
1950년에는 단원이 무려 7만에 이르렀으나....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에 의해 거의 진압되었습니다.
필리핀은 1946년 7월 4일 독립하여 제3공화국이 수립됐으나 공산군도 좌익 무장투쟁을
개시하는가 하면 군부세력도 같이 대두해 정치상황은 혼란 일색이었으니.... 이는
세계적 흐름으로 냉전기 좌우익 투쟁은 당시 많은 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된 문제
상황이었으며 필리핀만이 가지고 있던 산업 구조, 지주 세력, 분열 위험 등도 많았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은 공산반군과 내란으로 국가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국가인 미국과 영국에 이어 3번째로 파병됐는데... 전차 17대와 5개 대대 7천명으로 연천
율동전투에서 중공군 34사단의 공격을 방어하는등 여러 전투를 치뤘으니..... 비 서양 국가로는
1개 대대를 보낸 콜롬비아와 단 두나라이니 공교롭게도 구 스페인 식민지였던 가톨릭 국가였습니다.
필리핀은 1950~1960년대에 아시아에서 일본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로 당시 GNP 80$(현재는 32,000$)인
한국보다 3배가 더 높았는데 한국은 늦봄 보릿고개에 사람들이 굶어죽던 세계 최빈국에다가 돔식
건축물을 지을 기술이 없었으니 필리핀은 돈과 기술진을 보내 1963년에 "서울에 장충체육관" 을 지어
주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등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기도 했지만 기술 지원만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은 1965년에 원수놈인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고 당시 일본이 보유하던 외환 보유고의 3분지
1인 6억달러를 가져와 일본 기술자들이 와서 포항제철을 지어주고 또 저 돈으로 울산공업단지, 경부
고속도로, 소양감댐을 비롯 항만, 비료공장등을 건설하고 40% 돈으로는 석유, 철광석, 석탄, 나무, 구리,
고무, 석유화학 중간제품들을 수입해 공업화를 이룩했으니 지금은 한국 GDP 가 필리핀의 9배에 이릅니다.
월남전에서 군인과 한국인 사업가들이 현지 여인과 결혼이나 동거해 낳은 라이따이한이1만명에 이른다는
데... 패망후 곧 다시오마 헛 약속을 하고 도망쳐온 이래 정작 국교가 열려도 자식을 찾아 갔다는 아버지
는 언론에 전혀 안보이니... 없는가 보네요? 마찬가지로 사업이나 파견 근무 또는 유학 및 어학연수로
필리핀을 찾은 한국인들이 현지 처녀와 결혼(동거) 해서 낳은 "코피노" 가 무려 3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만 낳게되면 나몰라라하고 한국으로 도망쳐 와서는 부인과 자식을 찾지않는 비정한 한국인들이
수만명이니 우리나라 도덕심과 국제적 위상은 어찌되는 것일러나? 서울 가정법원 김수정 판사는 한국인
아버지에게 양육비로 30만원을, 그리고 수원지법에서는 필리핀 여성과 두 아들에게 성년이 될 때까지
매달 양육비를 50만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하는데.... 3만명 중에 서너명이니 나머지는 어이할꼬?
프랑스와 미국은 적성국 베트남에서 자기나라 남성들이 낳은 아이들은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에도
교섭해서 돈을 주고서라도 무조건 다 찾아서 데리고 가서는 지국인에게 "입양" 을 시켰다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하기사 6.25 이래 수십년간 지속되어오던
고아 수출국 1위 불명예를 벗은게 불과 10여년 전인데... 누가 저 아이들을 입양하려고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