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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碧松 金泰雄의 日曜 政論 : 자유시 慘變(黑河 慘變)과 오늘의 回顧
벽송 추천 0 조회 132 21.10.10 08:15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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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1.10.10 08:55

    첫댓글 벽송의 글로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배웠네요. 소설을 쓰는 중에 지난 봄 대한 광복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기록이 있어 광복회원이 된 분은 소수이고 이름도 없이 돌아가신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21.10.10 09:34

    구체적 내용 감사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개싸움에 늑대는
    부르지말라는 러시아 속담이
    상기됩니다.

    자유시 참변을 보면 소련 공산주의
    잔학상과 배신. 소련과 일본의 밀
    약으로 희생된 자유시 참변 그리
    고 상해 한인 공산당은 조국해방
    을 위해 싸운것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싸웠으며 자유시 참변에서
    생존자들은 나중에 북한으로
    돌아가 인민군 창설의 핵심세
    력이 되었다는데서 김원봉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재평가
    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 21.10.10 10:18

    우리가 좀 더 일찍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배웠더라면 하는 생각을 벽송이 일깨워주신 글이군요. 지금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김원봉 띄우기 현상 발생의 원인도 우리가 젊었을 때 좀 공산주인비판에서 좀더 체계적이고 사실적이며 이론적인 역사교육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솔직히 소인은 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현 정권의 수상한 역사관에 대해 논리적인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는 육사에 근무중인 후배 장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 집권 후 화랑대에서 들려오는 소식,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의 정부수립(1948년8월15일) 정통성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들이 간혹 스칠 때마다 우려스럽습니다.

  • 21.10.10 10:29

    무지했던 독립운동사의 한 사건인 <자유시 참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 21.10.10 13:14

    공산당 하면 그냥 같은 빨갱이로만 생각했었는 데, 중국과 쏘련의 공산주의 라이벌리, 그 틈바구니에서의 주도권 다툼, 임시정부의 활동, 민족 해방과 항일 투쟁이라는 여러 가지 시대적 혼돈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진 것이 이토록 잔인하고도 무서운 자유시 참변 사건이로군요!
    당시 20만명의 조선인이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해서살고 있었다구요? 1880년대에《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조선 여행기를 쓴 영국의 여류 인문지리학자 이자벨라 비숍은 많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연해주 지방 한인들의 모습에서 뛰어난 근면성과 능동적인 태도를 보고 극찬을 한 바가 있지요. 그곳이 이렇게 무서운 조선인들의 자치 영토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스탈린이 조선사람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도 이른바 NL주사파와 PD민중민주파 간의 대립이 그 당시 만들어진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반목과 투쟁에 뿌리를 두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조국해방은 이미 이루어졌는데, 역시 그들의 보다 중요한 목표인 공산주의 적화를 위해서요~

  • 21.10.10 13:40

    ㅎㅎ 오늘의 시야로 근 100년 전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 이지요~ 당시 개념조차 모른던 사람들이 다수였는데,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조국의 자주 독립이라는 미명하에 애국 운동을 했다고 평가를 한다면, 시대 상황을 고려치 않고 목숨바쳐 순국한 선열들이 섭섭하겠어요! 당면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한 것이 바른 길 이었는지는 어느 누구도 단정짓기가 참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역사에 대한 단정은 금물이며,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재평가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여하튼 밀양 사람들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약산이 출생한 지역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해방후 북으로 가지않고 남에서 활동했더라면 하는 행적이 매우 아쉽고 유감스럽지요!

  • 작성자 21.10.10 14:09

    제 글을 제대로 읽어보시기는 한 건가요? 아니면 혹여 이해력이나 통찰력이 부족하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건지요~~~(?)
    누구에게 섭섭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저에게 섭섭하다는 말씀~~(?) ~인가요?
    제가 드리는 말씀인 즉슨,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무력투쟁을 했으니, 공산주의 체제에서 유공자 대우를 받으라는 것이지요~! 이동휘가 레닌으로부터 그 당시 받았던 자금은 남당의 고향인 김제평야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지요! 그러한 자금을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받아 썼으니, 응당 김일성과 그 후예로부터 크게 환영받았어야 할 일 아닌가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으로 사형 선고된 독일의 괘링을 연합국의 이름으로 유공자 포상을 하라는 것과 같은 논리시네요~~~ㅎㅎㅎ 오호! 애재요, 통탄지사이옵니다~! 저는 문헌과 기록을 근거로 글을 쓴 것이라는 점을 밝혀드립니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수립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학술적 접근 차원에서 건전한 토의는 적극 환영합니다만, 'ㅎㅎㅎ' 하면서, 반대급부적이고 냉소적인 논의는 사양하오니, 남당은 유념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21.10.10 16:05

    비유가 지나치네요!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싸웠던 독립운동 그 자체까지 부정하면 곤란하지요~
    누구는 아무런 근거없이 말하나요? 어떤 역사적 인물을 너무 일방적으로 평가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차원의 말인데 그렇게도 이해가 어렵나요?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괴링까지 등장하니 비유가 좀 과도하군요.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궁금한 생각을 말하는데 건전한 답변과는 멀군요. 더 이상은 침묵코자 합니다. 잘 지내요!

  • 벽송친구의 글을 이제야 잘 보았어요.3일전에 부여에
    내려와 10일날은 친구부부 4쌍을 부여여행과 저희집 본가 선산에서밤줍기행사를 하였고,어제는 장모님 모시고 공주농막에 와서 처남.동서가족과 밤 늦게까지 파티를 했어요.
    자유시 참변은 우리역사에 한인사회당을 탄생시키고,
    공산주의 세력을 키우는 한편,레닌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새로운 사
    실을 알게 되었어요.이러한 정론을 육사에서 진작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좋은 글,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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