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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기고하신 능화 선생의 '우리나라의 역사적 이념갈등 조명'에서 논급된 '자유시 참변'에 대한 우리의 보다 정확한 이해와 통찰을 돕기 위해 '自由市 慘變에 대한 실상과 오늘의 回顧'를 主題로 설정하여 간략히 논급해 보고자 합니다.
Ⅰ. 개 요
1921년 6월 28일 발생했던 자유시(또는 흑하) 참변은 러시아 영토 스바보드늬이(자유시 또는 알렉세예프 시)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쁘까에 주둔중인 한인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또는 니항군)를 소련 적군 제29연대(빨치산 부대)와 한인 보병 자유대대가 무장을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비참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매우 복잡하여 한마디로 단언(斷言)할 수 없으나, 그 당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분열된 한인 공산당이 자유시에 주둔한 한인 무장병력에 대한 군권을 서로 장악하기 위해 벌린 싸움에 소련 내부의 싸움이 얽혀 발생한데서 찾을 수 있으며, 일제 하 한국 무장 독립 전쟁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인 공산당 운동의 기원과 함께 자유시 참변 배경 및 진전·결과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림> :북만주 흑룡강성의 아이훈에서 바라본 소련땅 브라코베시첸스크
※브라코비시첸스크의 북쪽에 있는 얄렉셰프스크(자유시)에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남.
Ⅱ. 한인 공산당 운동의 기원과 진전
한인 공산주의 운동은 러시아의 한인사회에서 기원되고 있다.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와 박진순 등이 중심이 되어 러시아화가 된 사람들로 구성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어졌으며, 그 이듬해인 1919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는 많은 한인들이 러시아로 귀화하였으나, 김철훈과 오하묵이 중심이 되어 귀화를 거부한 한인들로 구성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동휘는 한말에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각지를 순환근무하며 장교로 근무하던 중 경술국치 때 의분을 터뜨리다가 관헌에 붙잡혀 인천 앞바다 대의무도에 유배된 후 곧바로 석방되면서 간도를 거쳐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44세가 되던 해인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소식을 접하고, 거대한 짜리즘 체제를 전복시킨 볼셰비즘의 힘에 매료되어 볼셰비즘의 지원을 받는 것이 항일운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소련의 레닌 정부 또한 백군파와의 내란 상황에서 2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던 극동지역 한인들의 볼셰비키 혁명 지원을 기대하면서, 이동휘의 기대대로 한인들의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한인들이 결집된 극동지역에 볼셰비키 요원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는 이러한 볼세비키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볼셰비즘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볼셰비즘의 지도를 받아들이면서도 볼셰비즘보다는 민족해방의 큰 뜻에 더 충실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볼셰비즘은 민족해방 투쟁에 필요한 소련 정부의 지원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편일 뿐이었다.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을 발족시킨 뒤 곧바로 박진순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레닌 정부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한 결과, 적지 않은 자금을 지원받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자금을 받아 복귀하는 박진순에게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나 박진순을 위협하여 소련의 지원 자금을 탈취해 버렸다. 그 후 사회당 본부에 빈손으로 복귀한 박진순이 이르쿠츠크파의 지원자금 강탈 사실을 보고하자, 이로부터 ‘한인사회당’과 ‘이르쿠츠크 공산당 지부’는 지울 수 없는 대립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동휘는 1919년 3.1 만세사건 이후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동휘의 신분에도 변동이 생겼다. 임시정부의 지도부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이숭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그리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리하여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동휘는 자신의 활동무대를 시베리아에서 상해로 옮겨오게 되었고, 이번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총리 자격으로 박진순과 한형권을 다시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맹렬한 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박진순은 1920년 7-8월 중에 개최된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자 연맹 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유럽 코민테른의 역할 강조와 함께 “소련이 앞으로 조선 문제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소련 지도자들에게 많은 관심과 감동을 불러일으켰으며, 바로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공산주의, 즉 ‘한인사회당’이 정통 공산주의 조직임을 코민테른이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한인 공산당의 정통성 면에서 일단 이르쿠츠크파가 패배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레닌 정부의 이와 같은 인식은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공산당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한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되어진다. 그리하여 박진순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된 한형권은 레닌과 직접 면담하여 독립자금이라는 명목으로 100만 루블(그 당시 환율로 약 110만 달러)에 달하는 상당한 액수의 공작자금을 지원받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큰 탈이 없이 이동휘에게 전달하였다. 이동휘는 레닌으로부터 받은 이 자금으로 무장투쟁 노선에 매진할 수 있는 공산당을 창당할 속셈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상해에는 이동휘가 소련으로부터 거액의 독립자금을 받아 가로챘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이 일로 이동휘는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고 사실상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1년 5월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후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지칭되는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이동휘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같은 시기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레닌을 면접했던 여운형 등 일부 인사들은 이동휘의 소련자금 관련 처신에 불만을 품고 상해의 ‘고려 공산당’을 탈퇴하여 이르쿠츠크에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으며, 1919년 김철훈과 오하묵 등에 의해 조직되었던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는 김철훈을 위원장으로 하고 코민테른의 이르쿠츠크 주재 당서기장 슈미야츠키(Boris Schumiyatzky)를 고문으로 한 ‘전러시아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었고, 1921년 5월 이동휘로부터 이탈한 여운형 등의 인사들이 설립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통합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후에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으로 지칭되었던 ‘고려 공산당’을 발족시켰으며, 상해에까지 그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오하묵·김철훈·여운형 중심의‘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으로 구분되어, 소련의 공산주의 조직들도 이 두 계파를 서로 달리 지원하는 상황이 초래됨으로써 한인 공산주의자들 간의 싸움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고, 그러한 결과가 바로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Ⅲ. 자유시 참변 배경 및 진전과 결과
자유시 참변이 발생할 당시 소련은 내전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Red Army)과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백군(White Army) 간에 치열한 교전상태가 이루어지지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극동지역은 한 마디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 지역으로 출병하여 백군을 지원하면서 독립무장 투쟁을 하는 한인 무장대를 소탕하고 있었다. 여기에 적군부대는 한인 무장 독립군을 가담시켜, 1920년 3월 12일 발생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 일본군과 백군을 전멸시키게 되었다.
니콜라예프 사건의 진상의 배경과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20년 2월 말 뜨랴빠찐 부대로 지칭되는 소련의 적군 부대는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있는 니꼴라예프스크 市로 입성하여 일본군 지원을 받는 백군과 시가지 전투를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2월 28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소련의 적군부대는 니콜라예프스크 시에 입성하고 난 후 3월 5일 백군의 무장을 해제한데 이어, 3월 12일 일본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였는데, 일본군이 이에 응하지 않고 적군부대를 공격하자, 적군부대는 곧바로 반격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뜨랴빠찐 적군부대는 1주일간의 소탕전과 철수 간 136명의 일본인 죄수들(포로 군인)들과 4천명이 넘는 러시아인(아동 포함)을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도시 전체를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이러한 잔혹성으로 인해 뜨라뺘찐은 결국 자신의 부대원(주동 :알렉세이)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여기에 분노한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하였고, 이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한인 의병대도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 후 우수리주 임시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즉각 보강 개편되면서 볼셰비키 세력도 그 힘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한인 무장부대들도 그동안 분산되어 있었던 독립군 부대들의 전력을 통합하여 단일 지휘조직 하에 대일 항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축출함으로써 자치주로 보장받기 위해 자유시(알렉세예프 시)에 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 가운데 주역부대였던 자유대대와 사할린 의용대 간에 독립군 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자유대대는 고려 공산당 중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사할린 의용대는 ‘상해파 고려 공산당’이 장악한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 정면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사할린 의용대를 지휘했던 박일리아는 군 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 공화국 원동부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사할린 의용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통보하였다. 그런데 당시 극동 공화국 원동부 내 한인부에는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와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 국민회의’와 자유대대 측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극동 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으로, 그리고리예프를 참모장으로 지명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 무장부대들을 사할린 의용대의 관할 하에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휘 측의 의도와 달리,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 행사에 실패하게 되었고, 이에 그는 총사령관 직을 사임하였으며,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한인 독립무장부대에 대한 부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사할린 의용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 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사할린 의용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 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사할린 의용대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과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하였다. 여기에 동양 비서부는 이를 받아들여 고려 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트로 칼란다리시빌리를, 그리고 부사령관에 오하묵을, 군정위원에 김하석과 채성룡을 임명하게 되었다. 그러자 박일리아 등은 한인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시빌리는 6월 7일 자유시의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 군정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6월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출두하였으며, 박일리아는 고려 군정회의에 대해 계속 반항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도 칼란다리시빌리에 투항하자, 칼란다리시빌리는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6월 28일 자유시 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장은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 의용대는 무장해제 종용에 불응했고, 자유시 수비대 제29연대는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하였는데, 교전 당시 1,000명에 이르렀던 사할린 의용대는 무장해제 전투과정에서 많은 목숨을 잃게 되었고,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으며, 그 후 붉은 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Ⅳ. 자유시 참변에 대한 회고와 평가
1. 자유시 참변의 결과 및 평가
자유시 참변은 외부적으로 사할린 의용군이 볼세비키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참변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과 상해 고려 공산당 간의 대립 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평가 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독립 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 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2개월 후 자신이 대한독립 군단을 재편하여 조직했던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당시 이범석 및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이르쿠츠크로 가지 않고 만주에 잠복하고 있었고, 이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으며, 김좌진은 이르쿠츠크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 왔다. 그리하여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군의 대부분은 상해파 고려 공산당으로 편입되었다.
2. 자유시 참변에 나타난 시사점
자유시 참변은 일제 하 독립운동사에서 좌익 세력들의 씻을 수 없는 대과오에 의해 수많은 독립 운동지사들이 억울하고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대참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조국의 독립이라는 한민족의 염원이자 대명제가 공산주의의 책동에 의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비극으로 끝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더욱 중요하고 유의미하게 살펴보아야 할 자유시 참변의 이면에 숨은 또 하나의 사실은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잔인무도하고 반애국적인 책동에 의해 자유시 참변 사태가 독립 운동사에 치욕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당시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조국의 자주 독립이라는 미명 하에 일본과 전개하였던 무력투쟁 과정에서 활동한 김원봉과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지사로 추대·부각시키는 大아이러니가 연출됨으로써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체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에 대한 정체성과 정통성을 지대하고 치명적으로 훼손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는 늘 문헌과 자료들에 의해 기록·보존되고 있어, 역사에 대한 훼손과 오류, 나아가 폄훼는 한 치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제자리를 찾아 복원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2021. 10. 10)
첫댓글 벽송의 글로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배웠네요. 소설을 쓰는 중에 지난 봄 대한 광복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기록이 있어 광복회원이 된 분은 소수이고 이름도 없이 돌아가신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체적 내용 감사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개싸움에 늑대는
부르지말라는 러시아 속담이
상기됩니다.
자유시 참변을 보면 소련 공산주의
잔학상과 배신. 소련과 일본의 밀
약으로 희생된 자유시 참변 그리
고 상해 한인 공산당은 조국해방
을 위해 싸운것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싸웠으며 자유시 참변에서
생존자들은 나중에 북한으로
돌아가 인민군 창설의 핵심세
력이 되었다는데서 김원봉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재평가
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우리가 좀 더 일찍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배웠더라면 하는 생각을 벽송이 일깨워주신 글이군요. 지금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김원봉 띄우기 현상 발생의 원인도 우리가 젊었을 때 좀 공산주인비판에서 좀더 체계적이고 사실적이며 이론적인 역사교육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솔직히 소인은 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현 정권의 수상한 역사관에 대해 논리적인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는 육사에 근무중인 후배 장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 집권 후 화랑대에서 들려오는 소식,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의 정부수립(1948년8월15일) 정통성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들이 간혹 스칠 때마다 우려스럽습니다.
무지했던 독립운동사의 한 사건인 <자유시 참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산당 하면 그냥 같은 빨갱이로만 생각했었는 데, 중국과 쏘련의 공산주의 라이벌리, 그 틈바구니에서의 주도권 다툼, 임시정부의 활동, 민족 해방과 항일 투쟁이라는 여러 가지 시대적 혼돈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진 것이 이토록 잔인하고도 무서운 자유시 참변 사건이로군요!
당시 20만명의 조선인이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해서살고 있었다구요? 1880년대에《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조선 여행기를 쓴 영국의 여류 인문지리학자 이자벨라 비숍은 많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연해주 지방 한인들의 모습에서 뛰어난 근면성과 능동적인 태도를 보고 극찬을 한 바가 있지요. 그곳이 이렇게 무서운 조선인들의 자치 영토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스탈린이 조선사람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도 이른바 NL주사파와 PD민중민주파 간의 대립이 그 당시 만들어진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반목과 투쟁에 뿌리를 두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조국해방은 이미 이루어졌는데, 역시 그들의 보다 중요한 목표인 공산주의 적화를 위해서요~
ㅎㅎ 오늘의 시야로 근 100년 전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 이지요~ 당시 개념조차 모른던 사람들이 다수였는데,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조국의 자주 독립이라는 미명하에 애국 운동을 했다고 평가를 한다면, 시대 상황을 고려치 않고 목숨바쳐 순국한 선열들이 섭섭하겠어요! 당면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한 것이 바른 길 이었는지는 어느 누구도 단정짓기가 참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역사에 대한 단정은 금물이며,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재평가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여하튼 밀양 사람들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약산이 출생한 지역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해방후 북으로 가지않고 남에서 활동했더라면 하는 행적이 매우 아쉽고 유감스럽지요!
제 글을 제대로 읽어보시기는 한 건가요? 아니면 혹여 이해력이나 통찰력이 부족하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건지요~~~(?)
누구에게 섭섭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저에게 섭섭하다는 말씀~~(?) ~인가요?
제가 드리는 말씀인 즉슨,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무력투쟁을 했으니, 공산주의 체제에서 유공자 대우를 받으라는 것이지요~! 이동휘가 레닌으로부터 그 당시 받았던 자금은 남당의 고향인 김제평야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지요! 그러한 자금을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받아 썼으니, 응당 김일성과 그 후예로부터 크게 환영받았어야 할 일 아닌가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으로 사형 선고된 독일의 괘링을 연합국의 이름으로 유공자 포상을 하라는 것과 같은 논리시네요~~~ㅎㅎㅎ 오호! 애재요, 통탄지사이옵니다~! 저는 문헌과 기록을 근거로 글을 쓴 것이라는 점을 밝혀드립니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수립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학술적 접근 차원에서 건전한 토의는 적극 환영합니다만, 'ㅎㅎㅎ' 하면서, 반대급부적이고 냉소적인 논의는 사양하오니, 남당은 유념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비유가 지나치네요!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싸웠던 독립운동 그 자체까지 부정하면 곤란하지요~
누구는 아무런 근거없이 말하나요? 어떤 역사적 인물을 너무 일방적으로 평가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차원의 말인데 그렇게도 이해가 어렵나요?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괴링까지 등장하니 비유가 좀 과도하군요.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궁금한 생각을 말하는데 건전한 답변과는 멀군요. 더 이상은 침묵코자 합니다. 잘 지내요!
벽송친구의 글을 이제야 잘 보았어요.3일전에 부여에
내려와 10일날은 친구부부 4쌍을 부여여행과 저희집 본가 선산에서밤줍기행사를 하였고,어제는 장모님 모시고 공주농막에 와서 처남.동서가족과 밤 늦게까지 파티를 했어요.
자유시 참변은 우리역사에 한인사회당을 탄생시키고,
공산주의 세력을 키우는 한편,레닌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새로운 사
실을 알게 되었어요.이러한 정론을 육사에서 진작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좋은 글,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