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무술이 지닌 의술적 치료 효과에 대한 연구
Ⅰ. 서론
Ⅱ. 무술 1. 서양무술 2. 동양무술 1)중국무술 (1)도수무술 ①권법 ②금나술 ③각술 (2)병기무술 (3)중국식 레슬링 2)일본무술 (1)공수도 (2)유도 (3)검도 (4)스모 (5)유술 (6)인술 3)한국 전통무예 (1)택견 (2)합기도 (3)선무도 (4)고무도 (5)경당 무예 24반 (6)삼성궁의 선무 (7)씨름 (8)해동검도 (9)태권도
Ⅲ. 인류의 생존법칙인 무술과 의술 1.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서 무술과 의술을 필요로 하였다. 2. 무술이 의술과 더불어 갖는 중요성
Ⅳ. 동양무술과 한의학의 상관 관계 1. 동양무술의 의술적 효과 1) 동양철학 사상을 내포한 동양무술 2) 동양무술의 기(氣), 심(心), 체(體) 일치가 가져다주는 건강은 의 학적 효과와 같은 가치를 지님. 2. 동양무술과 한의학의 유사점 1) 동양무술이 한의학과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한의학의 역사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음 (1)고대국가시대 (2)삼국시대 (3)통일신라시대 (4)고려시대 ①전기 ②중기 ③후기 (5)조선시대 ①전기 ②후기 (6)일제강점기 (7)8·15해방 후 현재 2)한의학은 동양철학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점에서 동양무술과 유사함 (1)한의학(韓醫學) 용어에 대하여 (2)한의학(韓醫學)의 동양철학 사상 ①음양오행학 가.음양오행학설 나.음양오행 사상의 의학적 적용 다.음양오행 사상의 인체 적용 라.장기(臟器)의 한의학적 개념 마.무형적 음양과 유형적 음양 ②사상의학(四象醫學) 3)한의학에서의 의술은 동양무술의 수련과 원리적으로 같음 (1)사상의학(四象醫學)으로 본 체질의 문제점
Ⅴ. 동양무술이 지닌 의술적 치료 효과가 의학에 끼친 영향 1. 무술하는 도인(도사)들이 베푼 의술적 치료 행위 2. 동양무술은 과연 의술적 치료 효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3. 동양무술이 지닌 의술적 치료 효과에 대한 실증들.
Ⅵ. 결론
Ⅰ. 서 론
1. 연구의 목적
사람은 직립(直立)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두뇌와 수족을 써서 기술을 연마하고 습득하며 그 재주로 물건을 만들어 사용한다. 사람이 지닌 기술과 재주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생필품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 할 필요성을 갖고 때로는 방어(防禦)를 목적으로 필요시에는 공격(攻擊)을 목적으로 한 다양한 기술을 익히고 그 재주를 사용하기도 한다. 검술, 궁술, 창술 등을 사용하는 무술(武術)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무술은 단지 자기 목숨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목숨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존재해 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질병으로부터 이를 퇴치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며 연약한 몸의 상태에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 무술(巫術)과 무술(武術)의 필요성을 가져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술(武術)은 무술(巫術)에서 행해진 의술(醫術)과도 연관이 있으며 이에 따른 이론에서나 기술에 있어서 필연적인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현대에 있어서는 무술은 스포츠(Sports)의 개념도 띄고 있다. 즉 운동(運動)으로서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대에서 스포츠는 경기(競技)로서의 인식이 강하여 특정한 사람에 치중되어 있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건강(健康)으로서의 인식이 강하여 대중적이다. 그러니까 건강을 생각한 경기를 하는 것이며, 그래서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술은 운동이라는 생각을 갖기 때문에 무술을 배우러 간다는 말보다는 건강에 도움되는 운동하러 무술도장에 간다는 말을 아무런 이질감이 없이 사용한다. 이렇게 무술은 스포츠의 개념에서도 의술과 연관을 갖고 있다. 이에 본 논문은 무술(武術)과 의술(醫術)의 상관 관계에 대한 이해를 고찰함으로써 무술이 의술에 끼친 영향을 통하여 사람에게 얼마나 큰 이(利)를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2. 연구의 범위
본 논문은 무술이 의술에 끼친 영향을 무술과 의술의 상관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 것을 통해서 연구하는 것이기에 무술과 인류의 생존에서 무술이 의술과 더불어 갖는 중요성과 함께 한의학에서의 양생술을 다룬 후 무술이 서양보다 탁월하게 발달한 동양무술을 바탕으로 두고 한국의 전통무예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어떻게 의술에 영향을 끼치고 그 효과를 가져왔는지를 이론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무술과 의술의 상관 관계를 밝히며 무술이 의술에 끼친 영향을 연구한 논문이나 저술한 책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여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전통무술에서 도인들이 무술 속에서 인술을 베풀었던 것에서와 한의학에서 다루고 황제내경 등에서 도움을 받았다.
Ⅱ. 무술
1. 무술의 용어
우리는 무술(武術)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무예(武藝)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무도(武道)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모두는 다 같은 동의어이다. 중국에서는 무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일본은 무도라는 말로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사용하는 말은 무예이다. 무술이라는 말은 검술(劍術) 궁술(弓術) 창술(槍術) 등 무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기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무도는 무인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여 무예는 검술 궁술 창술 등 무술에 관한 재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중 어떤 용어로든지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나라가 사용하는 말인 무예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나 그럼에도 과거의 전통적 용어와 현대적 용어에서는 보다 널리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무술이기에 여기서는 무술이라는 말로 하겠으나 때로는 무예란 말이 무술이라는 말보다는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질 때는 혼용하여 쓰겠다.
2. 서양무술
무술(武術)은 각 모든 나라에서 그 나라의 독특한 기술로 만들어지고 발달되어 왔는데 유럽을 중심으로 이를 동양국가와 서양국가로 나누어서 볼 때 동양무술과 서양무술로 대분(大分)된다. 우선 서양무술로는 그리스-로마의 무술로서 격투기인 판크라치온, 스위스의 무술로서 레슬링인 슈빙겐, 터키의 무술로서 오일 레슬링인 얄 규레쯔, 프랑스의 무술로서 복싱인 사바트, 아이슬란드의 무술로서 레슬링인 그리메, 사모아의 무술로서 격투기인 리마라마, 이탈리아의 무술로서 고대 로마의 복싱을 지칭하는 케스터스, 브라질의 무술로서 손대신 발을 이용한 기술의 격투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무술의 특징은 힘과 스피드, 그리고 테크닉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 격투기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서양의 전쟁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서양사는 로마시대의 창병부대부터 시작해서 기술의 발달보다는 갑옷 또는 갑주의 발달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시대가 흐르면서 전장에서는 뛰어난 무술의 실력보다는 뛰어난 갑옷과 뛰어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이 그 전쟁의 주역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기술에 의한 무술 실력 그 자체보다는 힘과 스피드와 테크닉에 의한 격투기로 발달했다(네이버 지식iN, 지식Q&A, 동양무술 vs 서양무술)
3. 동양무술
서양무술이 힘과 스피트와 테크닉에 의한 격투기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동양무술은 기(氣), 심(心), 체(體)의 일치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때 동양무술은 아시아권에 있는 모든 나라의 무술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무술을 비롯하여서 중국 무술, 일본 무술, 몽고 무술, 러시아 무술, 인도 무술, 이스라엘 무술, 미얀마 무술, 태국 무술, 베트남 무술, 인도네시아 무술, 싱가폴 무술, 필리핀 무술 등이 있다. 그럼에도 동양의 무술이라 하면 동북아시아의 3국인 한. 중. 일의 무술로 집약한다.
1)중국 무술
중국은 대륙과 엄청난 인구를 가진 만큼 무술도 다양하고 그 수도 참으로 많다. 그 많은 무술도 대분(大分)하면 도수무술과 병기무술로 나누어진다.
(1)도수무술 도수무술에는 북파의 내가권과 남파의 외가권으로 되어 있는 권법, 금나술, 각술(던지는 기술), 양생술(기공, 내공, 외공)로 나누어진다.
①권법 권법은 보급되어온 지역과 기술 내용에 의해서 다르다. 북파 권법은 경(안팎의 에너지를 통일시킨 순발력)을 양성하며 경쾌한 발 움직임을 사용하고 도교신술의 호흡법을 채택하여 근육 단력보다 내장강화가 주목적이라는 점에서 유권 또는 궤권내공술이나 내공술이라 부른다. 이 북파 권법은 내가권에 속하는 것으로 태극권, 형의권, 태조장권, 필권 등이 있다. 내가권은 기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때문에 내장을 강화시키고 몸의 현상을 방지시킴으로 움직임이 부드러우며 천천히 행하기 때문에 노인이나 여성도 단련 할 수 있는 내공법이다. 중국에서 내공법이란 도인법을 말하는데 도인이란 기혈을 이끌어 그 흐름을 원할하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권은 무술과 도인법을 조합시킨 것이 특색이다. 남파 권법은 외가권인데 이것은 외공권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몸의 외면에 나타나는 피부, 근육, 뼈를 단련하는 것을 외공이라 하기 때문이다. 외가권은 내가 권법 이외의 것과 달마대사를 시조로 하는 소림사의 승려가 보급한 권법으로 소림라한권, 소림금강권과 같이 서두에 소림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가권은 내가권이 내공을 중시하는 반면에 근골의 단련을 중시한다.
②금나술 금나술은 반근(근육에 심한 고통을 줌), 배골(뼈에 고통을 줌), 절맥(맥을 끊음) 등의 기술로 구성된다. 또한 관절을 어긋나게 하는 방법인 착골법, 경혈을 자극하여 반신불수로 만들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인 흑용법 등을 포함하는 아주 위험한 무술이다.
③각술 각술은 메어치기를 주체로 한 도수무술의 일종으로 힘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몽고술각과 교묘한 기술을 사용하는 중국술각이 있으나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고대의 술각은 각저, 상박, 각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며 그 내용도 '때린다', '찬다', '쳐 붙인다'를 주체로 한 권법과 '메어붙인다'를 주체로 하는 술각으로 분립되었으나 서로 연관을 가지면서 발전해 왔다. 또한 권법이나 술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비튼다', '찍어누른다'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상대를 움직일 수 없게 하는 금나술이나 '움킨다', '찌른다', '압박한다' 등의 방법을 써서 공격하는 흑용술 등이 발전해 왔다.
(2)병기무술
병기무술에는 장병, 단병, 암기, 좌조기, 사공, 낙법으로 나누어진다. 병기는 기원전 1500년경 은나라 시대에 청동제창, 도끼, 칼 등의 무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발굴품에 의하여 증명되었으니 만큼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그후 병기는 전국 시대에 더욱 발전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잇다. 암기는 사필무기인데 옛날 무술기술이 없는 부녀자나 여행자가 여행할 때 호신용으로 사용하던가 또는 암살자나 도둑들이 사용했다. 대부분의 암기는 상대에게 던지는 것이나, 품안에 간직할 만큼의 소형이나 그 중에는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있다.
(3)중국식 레슬링 중국의 무술이라고 하면 대부분 앞에서 다룬 도수무술과 병기무술로 생각하지만 중국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레슬링이 존재한다. 이 레슬링을 다른 나라의 레슬링과 구분하기 위해서 중국식 레슬링이라고 부르는데 고된 수련과 끊임없는 연구에 의한 결과로 정교한 기술을 가진 우수한 무술로 발전해 왔다. 중국식 레슬링은 초기에는 타격계와 접근계를 병행한 무술로 발전하였는데 후에 타격계와 접근계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명.청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로 통합되었다. 중국식 레슬링은 중국무술 격언에서 "손 기술보다는 발 기술이 낫고, 발 기술보다는 꺾고 조르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중국에서도 접근계의 기술에 대한 위치를 탁격계 기술보다 우위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식 레슬링은 크게 두 가지의 힘 즉, 발경과 화경을 이용하지만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을 보다 더 탁월하고 뛰어난 기술로 여기고 있다. 전통적인 중국식 레슬링은 힘과 속도, 유연성, 그리고 균형 감각의 네 가지를 기본으로 삼는다.
2)일본 무술
일본 무술로는 공수도, 검도, 스모, 유술, 인술을 들 수 있다. 한편 한국 전통의 고유 무술이지만 이것이 일본에 들어가서 일본의 무술화 되어서 일본을 대표하는 무술이 된 것도 있다. 유도가 그것이다.
(1) 공수도
공수도란 일본을 대표하는 타격계 격투술로써 일반적으로 '가라데'로 불리고, 세계적으로는 'karate' 라고 표기한다. 공수도가 일본을 대표하는 무술이지만 원래 일본 본토에서 발생한 무술이 아니었고, 중국남권과 일본에 흡수되기 전 현재의 오키나와 지방의 고대국가인 류쿠왕국의 토착무술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오키나와 무사집안 태생의 '기친 후나코시'(Funakoshi Gichin)가 명치시대에 일본 본토에 처음으로 공수도(당시 이름 당수(唐手))를 소개하면서 체계화 시켰고, 1929년에 가라데(空手)로 이름이 바뀌면서 일본무도로 내세워지기 시작하였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가라데'). 공수도(空手道)는 고대로부터 당수(唐手), 권법(拳法), 골법(骨法), 아데미(當身)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었다. 류큐 왕국은 1372년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가졌으며 그로 인해 중국의 호신술을 배우게 되었다. 공수의 형상은 1456-1526년 사이 일상에서의 무기 휴대를 금지한 상진왕 시대에 이르러 무기 없이 맨손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로 보여진다. 이러한 공수도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1920년대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으로 공수도를 가지고 왔던 키친 후나코시에 의해서 공수도로 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공수도는 충승수라는 무술로서 불리어 오다가 1925년(대정 14년)에 도라는 명칭으로 바뀌어졌으며(촌상스미 저, 술도 공수, 성미당출판, 1975, p.8), 1929년에 공수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공수도는 일본의 원래 무술이 아니고 고대국가인 류큐왕국의 토착무술인데 중국 남권의 영향을 받을 받았다. 공수도는 각 지역에 따라 수리수, 박수 등으로 분류되는데 수리수의 형은 소림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소림권은 하체를 많이 사용하여 골격이 작고 체력이 약한 사람에게 적합하며 기민한 동작의 수련에 의해 적을 무너뜨리는 특징이 있다(반산화응, 공수도의 역사, 1974, 일동서원, p.13) 공수도는 또한 인도의 요가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공수도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서기 기술들은 인도 요가에 존재하는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전통적인 공수는 방어, 공격, 회피, 던지기, 꺾기의 다양한 기술을 포함한 격토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공수도는 대도숙을 제외하면 던지기 등의 접근계 기술은 배제하고 있다.
(2) 유도
현재 '유도'하면 일본 유도를 떠올리게 되며 일본의 대표적 무술로 여기고 있다. 이는 일본에 의해서 현재의 유도로 체계화되고 올림픽의 공식 운동 경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유도가 사실은 한국 전통의 고유 무술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국 유도의 역사는 기록상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3세기경의 고구려 고분 각저총(角抵塚)에 그려진 그림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 그려져 있는 수박(手搏)·권법(拳法)의 자유 대련 장면이 오늘날의 유도로 추측되고 있다. 이 그림은 씨름·태권도의 원형으로도 보이지만 당시의 생활수단이나 전쟁수단으로써의 격투기가 아직 씨름·태권도·유도로 분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조선시대의 회화에서도 유도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도에 있어서 우리의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 한편 한국의 수박·권법을 전해 받은 일본은 16세기경 유술(柔術)이라는 특유의 무예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는데, 19세기 후반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가 고래의 여러 유술들을 종합·집대성하여 오늘날의 유도로 정착시켰다. 그는 유도를 세계적인 스포츠 종목으로 키워 올림픽 대회 종목으로 채택되게 하는데 공헌했다. 1951년 12월 국제유도연맹이 결성되었고 1956년 제1회 세계 유도선수권대회가 열렸으며, 1964년 도쿄[東京] 올림픽 대회 때 올림픽 종목이 되었다. 한국의 현대 유도는 비록 그 근원이 삼국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무예라 해도 일본 유도가 이식된 것이다(Daum, Daum사전 '백과사전', 유도).
(3) 검도
검도(劍道)라는 말은 2,000년 전 중국 후한(後漢) 때 반고(斑固)가 쓴 〈한서 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검도 38편이란 기록으로 처음 나온다. 그러나 지금의 검도는 삼국시대 초기에 우리 나라에서 일본에 전수된 검술이 일본 내의 전란(戰亂) 과정 속에서 발전하여, 거꾸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Daum,Daum사전 '백과사전', 검도). 이사실을 증명하는 유물도 있으니 일본의 고분시대 후기(6세기 후반-7세기 초 )의 매방 유적인 이 고분의 C구 호분에서 발견된 봉황(고조선을 의미함)을 금박한 금동제 칼자루가 발견된 것이다. 일본은 전수 받은 검술을 공수도와 같은 그들의 무도로 삼아 전장에서 무사가 갖고 있던 "주군에게 바쳐 충성을 다한다"는 전투적인 도의심을 일상 생활에 연장하여 실천 도덕의 기조로 삼고 검도를 국책으로 사용하고 있다(김정행. 감상철. 김창룡 공저, 무도론, 1997, 대한미디어, ).
(4) 스모
스모는 일본의 국기로서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격투기 중의 하나이며 또한 현재 국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와 있는 무술이다. 스모의 역사는 신화시대로까지 올라가는데 일본의 가장 오래된 종교인 shinto와 큰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스모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실은 한국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642년에 일본 천황이 백제에서 온 사신을 환대하기 위해 병사들 가운데서 장사를 뽑아 궁궐안에서 스모를 공연하게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타난다. 그 후 스모는 정기적인 궁중의례의 하나로 오랫동안 행해졌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일본 스모) 스모는 황실의 비호아래 철저한 규율과 형식의 틀 속에서 배양됐다. 스모 경기는 지름 4.55m의 모래판 위에서 행해지는데 이 모래판을 '도효'라고 부른다. 스모는 경기 시작 전에 종교 색이 짙은 고유의 의식을 행한 후에 행해지며 배 둘레에 띠를 두르고 서로 떨어져 쭈구리고 앉아 마주보고 있다가 심판의 신호와 함께 몸을 부딪혀서 상대방을 도효 밖으로 밀어내거나 상대방의 몸 일부를 모래판 위에 닿게 하면 승리하게 된다. 스모는 보통 손, 발, 머리, 허리 등을 이용하여 기술을 발휘하게 되는데 승리의 순간에 쓴 기술을 기마리테(승부수)라 부르며 현재 기마리테는 총 70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스모는 다른 격투기의 '단'과 비슷한 등급체계를 가지고 있다. 모두 10등급으로 나누어지는데, 조노구치, 조니단, 산단메, 마쿠시타, 주료, 마에가시라, 고무스비, 세키와케, 오제키, 요코즈나이며 여기서 최고등급은 요코즈나이다. 이 체급에 오르면 국민적인 영웅으로 취급받는다. 스모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신체가 키 173cm이상이어야 하며 몸무게가 75kg으로 일반인의 경우 만 23세미만에 한한다.
(5) 유술
유술이란 던지기, 굳히기, 타격 등의 기술을 포함한 일본의 전통적인 근접 격투기이다. 유술은 일본 역사에서 혼란기였던 8세기에서 16세기에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국지적인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으며 이는 무술에서 전통적인 방법의 발전을 가져왔다. 근접격투기술 역시 이러한 방법의 한 부류였으며 무기술과 더불어 갑옷과 창칼로 부장한 적에게 대항하기 위한 기술로 사용되고 발전되었다. 이 근접격투 기술이 바로 유술의 시초이다. 현재 최초의 유술로 인정받고 있는 거은 1532년 다케노우치 히사모리에 의해 형성된 유술이다. 이 유술에는 맨손 기술 뿐 아니라 칼과 막대기와 단검 등의 기술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유술은 에도 시대 최전성기에는 무려 700가지 이상의 유파가 있었을만큼 성행하였다. 그러나 유술은 명치 유신 이후 사무라이들이 몰락하면서 쇼군 중심의 권력체계가 무너지게 되는데 당시 내려진 천황의 칙력에 의해 당시의 병법은 다시 과거의 무기술 중심의 병법으로 되돌아가면서 이 시기를 지나서는 거의 모든 유술들은 소멸되고 몇 몇 유술가에 의해서 명백을 유지해 오다가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술금지령이 해제되면서 다시 활기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6) 인술
인술은 우리들에게는 '닌자'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다. 이 닌자는 일본 전국시대의 자객들에 의해 만들어진 무술이다. 전국의 여러 다이묘가 전투에 관심이 있었던 시세였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의식은 굉장히 높았다. 전투의 고수라 불린 센고쿠다이묘는 모두 닌자를 효과적으로 쓰고 있었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닌자(にんじゃ)). 인술 자체의 역사는 깊으나 닌자라는 존재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는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그 정보는 상당히 빈약한 형편이다. 사실 인술이 일본 무술이라는 것이 부각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닌자의 역할은 정보수집, 암살, 이반 충동 등이다. 그들은 전투의 뒤쪽에서 활동했으나, 비밀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만약 살해당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시노부'(숨는)존재였던 것이다. 원래 '닌쥬츠'(닌자술)이 전래된 건 아스카 시대로, 그 유명한 쇼토쿠 태자도 닌자를 썼다는 기술이 있다. 중국의 병법서 '손자'에 '용간편'이라는 편이 있는데, 용간의 '간'이란 간자 즉 스파이를 말한다.즉 용간이란 간자를 쓰는 법 이라는 의미가 된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닌쥬츠의 정도이다. 그러나 닌자 발상의 진실은 더욱더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3)한국의 전통무예
한국의 전통 무예(*우리 민족은 무술이라는 말보다는 무예라는 말을 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무예라는 말을 쓰겠다.)는 그 종류가 많다. 현재 우리 민족의 고유 무술의 기는 3,608수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중 몇 몇만 시대별로 보면 고조선의 가락술, 투석술, 가락국의 지팡이술, 고구려의 두견법, 신라의 평수법, 백제의 중대법, 고려의 부채술, 그리고 조선의 궁중무술인 정검법, 단검, 쌍검법의 무술과 사계검법이 있으며, 형은 모든 무술의 기법이 들어 있는 백팔번뇌가 있고 이외 격파법, 삼방초형, 매화춘형 등이 있다(김정행. 김상철. 김창룡 공저, 무도론, 1997, 대한미디어). 이외에도 공권도, 권법술, 기공무술, 무합도, 불무도, 봉술, 도봉술, 국술, 궁중무술, 한무도, 심도, 격검도, 정도술, 권격도, 태수도, 토착무술, 작대기도, 선배 도리체, 회전무술... 등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가지 수가 많다. 이 많은 한국의 전통무예 중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려 익혀져 있는 것으로는 택견, 합기도, 선무도, 고무도, 경당 무예 24반, 삼성궁의 선무, 씨름, 해동검도 등이 있다. 그리고 택견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으나 세계적인 무술로 자리잡고 국제 스포츠로 보급된 우리 나라의 국기로 자리잡고 있는 태권도를 들 수 있다.
(1) 택견
한국 전통의 고유 무예인 택견이 언제부터 발생하여 어떻게 전래되어 왔는지를 명백히 설명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런데 택견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믿어지는 '만물보'(萬物譜;재물보[才物譜]라고도 하는 이 책은 간행연대와 저자가 확실치 않으나 조선조 제22대 왕인 정조때 이성지[李成之]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4권의 사본으로 되어 있는데 삼재만물의 옛 이름과 역대의 제도와 문물의 이름을 기록하고 이름마다 일일이 설명을 달았으며 특히 간간히 한글로 풀이가 되어 있어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유사한 성격이다.)라고 하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 탁견」 이것을 풀이하면 "변 수박은 변이요, 각력은 곧 무이다,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은 '탁견'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는 점이다. 이것은 한서(漢書) 등 중국사서와 고려사, 왕조실록 등에서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는 수박(手搏), 혹은 변(卞)이라는 기록이 우리말로 부를 때는 탁견이라고 했던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택견의 유래가 원시투기에 기원하고 있음을 짐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택견이 바로 우리 한민족의 전통성을 이어받은 민족 고유 무예의 본류임을 밝혀주는 기록인 것이다(이용복, 한국무예 택견, 1990, 학민사, P.68). 여기서 보는 대로 택견은 탁견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수박(手搏)이라는 말로도 친숙하다. 이 외에 택견이 표기된 자료들을 보면 1933년 맞춤법 통일안 발표 이후 출간된 국어사전에서는 '태껸'이라고 하였으며, 오가젼집 박타령(1935, 리선유)에서는 '착견’, 우리말사전(1938, 문세영)에서는 '결련태껸', 표준국어대사전(1958)에서는 '조선조 이후에 있던 씨름과 비슷한 유술의 한가지, 서로 맞은편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 각희(脚戱)'라고 하였으며, 조선말 사전(1960,북한 과학원의 언어문학연구소 사전연구실)에서는 '택껸, 결련 태껸, 체육경기의 한가지, 발길로 상대편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가린다(각희)'라고 하였고, 동아국어사전(1971)은 '결련(結連) 태껸', 태권도교서(1972, 최홍희)이라고 하였다. 택견이 이상과 같이 여러 명칭들로 사용된 것은 사투리로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교열과정에서 잘못된 것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명칭이 불분명한 것은 택견이 오랜 역사동안에 기록으로 전하여지지 아니하고 말과 몸짓으로 전해져 내려왔던 때문이라고 하겠다. 지금에 와서는 택견의 어원을 더 먼 상고시대까지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나현성, 한국체육사에 관한 논문집, 서울대학교사범대학교육회, 1962.5). 그러나 우리는 택견이 한국 민족의 전통 무예라고 하는 역사적 실증을 유적을 통해서 확인할 수는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의 만주 통화성 집안현 통만(通滿)에 자리잡았던 고구려의 국도 국내성의 고구려 구분 각저층과 무용총, 삼실총 등에서 볼 수 있는 현실벽화(玄室壁畵)이다. 이 벽화들은 택견의 원형 그대로를 보여준다. 각저층에서는 두 사람이 맞붙자고 씨름하는 장면이 있고, 무용총에는 고구려인들이 생활과 여인들이 춤추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또한 현실(玄室) 천장에는 두 장정이 서로 겨루는 품새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태권도(택견)의 겨루기 품새이다(김경지, 태권도학 개론, 경운출판사, 1993, pp.16-17). 오랜 역사 속에서 전해져 내려온 택견은 조선조에 와서는 무예가 천시되는 바람에 양반 벼슬아치들은 이를 기피하고 혹 이 무예를 익힌 자들은 점잖치 못한 일이라 하여 남에게 드러내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민중들 속에서 구전심수(口傳心受)로 내려오면서 무예의 체계를 실전하고 민속 경기화하였다. 택견은 생활여건상 농업종사자들보다는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중인(中人)들이 즐겨 하였다. 따라서 농촌보다는 도회지에서 성행하였다. 씨름을 잘하는 사람을 씨름꾼이라고 하듯이 택견을 잘하는 이를 가리켜 택견꾼이라 불렀는데 관자(貫子)만들던 이가 많았던 삼청동과 사직골, 고기장사하던 이가 많았던 동촌, 소금장사하던 이가 많았던 마포, 쇠다리고 땜질하던 이가 많았던 애오개에서는 이들 가운데 한량들이 있어서 뛰어난 택견꾼이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서울에서 택견이 세던 곳도 거의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이보형, 문예진흥, 제11권 1호, 1984.2, 문예진흥원, pp.62-69) 인터넷 네이버(NAVER) 지식iN의 오픈사전에 올려져 있는 '택견에 대한 자세한 정보'에서 택견을 지칭했던 다양한 용어들과 그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후한서》-〔순제 영화원년(永和元年, AD136) 부여왕이 내조(來朝) 했을 때, 각저희(脚抵戱)를 하게 했다.〕 b)《한서예문지 수박육박편, 후한의 반고( 32-92년)》-〔수박〕 c)《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중종25년)》-〔백제의 옛 땅이었던 전라(全羅)와 충청(忠淸)의 경계가 되는 곳의 ‘작지(鵲旨)’라는 마을에서는 해마다 7월 15일 백중이 되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手搏戱)를 하여 승부를 겨루었다.〕이것은 백제 택견의 유풍이 전라도 지역에 전승되어 진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증거자료라 하겠고 마을간에 친선을 목적으로 택견 경기를 펼쳤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d)《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46, 신채호(申采浩)》-〔고구려의 강성(强盛)은 ‘선(선배)제도(制度)’의 창설(創設)에 있는데... ‘선’는 원래 ‘신수두’ 교도(敎徒)의 보통명칭(普通名稱)이러니 태조(太祖)때에 와서 매세(每歲) 3월과 10월 ‘신수두(신은 최고 최상을 의미하며, 수두는 신성한 숲을 의미함)’ 대제(大祭)에 모든 군중(群衆)을 모아 혹 칼로 춤추며, 혹 활을 쏘며, 혹 앙감질도 하며, 혹 덕건이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여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이라 일컫고 ‘선’가 된 이상에는 나라에서 봉급을 주어서 그 처자를 먹여 집안에 누가 없게 하고, ‘선?’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길을 닦거나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거나 하여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한다... ...송도(松都)의 수박(手搏)이 곧 선 경기(競技)의 일부분이니 수박(手搏)이 지나(支那-中國)에 들어가 권법(拳法)이 되며 일본(日本)에 건너가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朝鮮)에는 이조(李朝)에서 무풍(武風)을 천시(賤視)한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全滅)하니라.〕이전의 기록에서는 각저희, 수박이라고 보여지던 것이 이처럼 고구려의 태조(太祖王, 53-146)때 선비들의 수련과목으로써 덕건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제천행사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때는 일반적으로 택견이 행해졌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일본과 중국에 영향을 주었을 만큼 무술적인 의미로서도 택견이 크게 발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e)《일본서기(日本書紀)》-〔백제의 사인(使人)인 대좌평, 지적 등 벼슬아치 및 수박(手搏)에 능한 무인(武人)을 일본(日本)조정에서 초청하여 일본의 무술인(武術人)과 상박(相搏)하게 하였다.〕당시에 맨손무예 경기가 국제간에 교류되고 있었고 외교상의 중요한 의식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며, 일본의 유도가 우리의 수박에서 비롯되었다는《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f)《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46, 신채호(申采浩)》-〔국선화랑(國仙花郞)은 진흥대왕(眞興大王, 540-576)이 고구려의 ‘선?’를 모방한 것으로... ‘선?’를 이두자(吏讀字)로 ‘선인(先人)‘ 혹 ’선인(仙人)‘이라 쓰는 것은 이미 제3편(第三編)에 술(述)하였거니와 ’선?‘를 ’신수두‘ 단전(壇前)의 경기회(競技會)에서 뽑아 학문(學文)에 힘쓰며 수박(手搏), 격검(擊劍), 사예(射藝), 기마(騎馬), 덕견이, 깨끔질, 실흠(씨름) 등(等) 각종기예(各種技藝)를 익히고 원근산수(遠近山 水)를 탐험(探險)하며, 시와 노래와 음악을 익히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서 공익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하는 것 등은 ’선?‘와 같았으나 국선(國仙)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 국(國)자를 더 하여 부른 이름이고, 화랑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가 조백(早帛)을 입어 조의(早衣)라 했던 것과 같이 신라의 ’선?‘는 화장을 시키므로 화랑이라 하여 조의와 구별한 이름이다.〕이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국민의 기상이 씩씩하고 강인한 무예(武藝)의 본국 고구려의 제도가 신라에 그대로 유입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 것이며 신라에서는 일반학문, 신체단련, 정신수련을 배우고 익히는 청소년 수련단체인 ‘화랑도’를 육성하여 인재를 등용할 때 이들의 기예를 보고 뽑아 썼다라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수박과 덕건이(택견)가 각각 표기되어 있는데 이 당시에는 “수박”과 “택견”을 손기술 위주의 무술(수박)과 발기술 위주의 무술(택견)로 구분해 놓고 각각 중점적으로 수련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g)《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신채호(申采浩)》-〔고려사(高麗史) 팔관회 끝에 “신라의 고사대로 백기(百技)와 기무(機務)를 습(習)한다.” 하고 백기종류는 말하지 않았으나 각 사(史)를 참증하여 그 몇 가지는 얻을 수 있도다. 이는 곧 무기를 가지지 아니하고 白手白身으로 서로 박격하는 것이니, ...다만 10월 3일의 대제후 뿐 아니라 곧 어느 명절이든지 매양 조중(朝中)의 문무를 갈라 양편이 돼서 수박을 행하고 임금이 구경하더니...〕현재 ‘오월 단오’와 ‘팔월 한가위'등 우리나라의 큰 명절날이 되면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춤과 노래와 각종 놀이를 즐기며 택견과 씨름, 줄다리기 등과 같은 민속경기를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두 단군이래로 한반도의 전 부족사회에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신라의 팔관(八關)?가배 등의 제천의식이 최근 우리의 풍속에까지 전해져오고 있음에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h)《고려사열전(高麗史, 卷128, 列傳41)》-〔...의종(1146~1170)이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 했다. ...이 의민(李義旼)은 ‘수박’을 잘하여 의종이 아껴 그를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시켰다.〕 《고려사열전(上揭書, 卷126, 列傳39)》-〔...변안열이 대신들이 교외에서 연회를 할 때 박희(拍戱)를 잘하여 종2품의 판밀직사사가 되었다.〕 《고려사열전(上揭書, 卷129, 列傳42)》-〔...최충헌이 중방의 힘센 자들로 하여금 수박을 시켜 이긴 자에게는 즉시 교위나 대정의 벼슬을 상으로 주었다.〕 i)《동사강목(東史綱目)》-〔의민이 주먹을 써서 기둥을 치면 서까래가 움직이고,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면 주먹이 벽에 파묻혔다〕이것은 용호군의 대정 이의민과 응양군의 대정인 두경승(杜景升)이 의종이 보는 앞에서 ‘수박’을 펼치는 내용이다. 그리고 《동사강목》에는 왕이 직접 ‘수박희’를 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고려의 수박희 하면 이의민이 빠지지 않는데 팔척 장신의 산악 같은 체구를 지닌 이의민은 경주 사람으로 팔 힘이 세어 수박을 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의종24년(1170년 8월 30일), 나라 일은 돌보지 않고 방탕함에 빠져있던 의종 임금과 임금을 둘러싸고 있는 경박한 무리들의 무인에 대한 멸시와 학대가 갈수록 극심해지자 대장군 정중부(鄭仲夫)가 무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고 이의민은 정중부의 심복으로 활약하였다. j)《고려사高麗史》-〔경주에서 이의민은 의종 임금을 찾아내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로 끌고 가서 짐짓 술을 올리고는 느닷없이 달려들어 수박희로써 의종을 후려쳤다. 의종 임금은 그만 등뼈가 꺽여 목숨이 끊어 졌다.〕이의민이 왕을 시해한 당시의 일을 적은 것인데, 이의민의 수박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k)《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35권》,《고려사 세가(世家) 36권》-〔충혜왕 1342년 5월에 왕이 상춘정(賞春亭)에 납시어 ‘수박희’를 구경하시었다. ...1343년 2월왕이 동쪽 교외에서 매를 풀어 사냥을 하고 화비궁(和妃宮)에 돌아와 ‘수박희’를 관람하셨다. ...신묘(辛卯)에 공주가 연경궁으로 옮겼다. 왕이 일한 이들에게술을 주어 위로하고 밤에 각저희를 보았다. ...6월 병신(丙申)에 마엄에 행차하시어 수박희를 관람하였다.〕이처럼 충혜왕(忠惠王, 고려 28대 왕)이 ‘수박희’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충혜왕 이후부터는 무예를 남용하는 자들이 늘어나 이를 단속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으로《고려사(高麗史)》에〔...‘수박’경기로 재물을 내기하는 자 곤장 1백이며...이를 금지한다.〕고 하였으며, 무예에 능한 귀족 자제들에게 내렸던 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던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거두어들이고 수박경기를 불법화시켰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고려는 역사적으로 혼란이 잦았던 시대였다. 여러 차례의 혼란기 속에 국가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 졌고 이러한 때 택견과 같은 무예가 도박성의 유희로 타락하여 사회의 물의를 가져오는 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살인적 위력의 택견〈수박(手搏)?각저(脚抵)〉등의 맨손무예는 고위 무관의 승진 기준이 될 만큼 제도적으로 정리되어 문무양반의 상예로써, 또는 군사들의 무재(武才)로써 발달하였고 경기와 유희로써의 체계를 갖추어 궁중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크게 성행했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l)《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太宗, 1400~1418)》-〔수박희(手搏戱)를 시험과목으로 채택해서 서로 겨루게 하여 이긴 사람을 채용했다. ...왕 10년(1410년) 1월에 병조에서 무과시험에 의흥부에서 군사를 뽑는데 수박희(手搏戱)를 시켜 3인을 이긴 사람을 뽑아 방패군을 보충하였다. ...왕 11년 6월에 병조의 의흥부에서 흥인문(興仁門)안에 무사를 모아 놓고 말 타고 활쏘기와 걸으면서 활쏘기를 시켜서 갑사에 보충하였다. 그런데 이를 할 수 없는 자들을 삼군부에 모이게 하여 달리기와 수박을 시켜서 3인 이상 이긴자를 모두 뽑아 쓰고 나머지는 도태시켰다. ...태종때 성왕이 탄생하여, 세자와 여러 종친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모든 신하에게 술을 내렸다. 갑사와 방패군에게 명하여 서로 무예를 겨루게 하고 수박희를 구경하였다.〕 m)《세종실록(世宗實錄,1418-1450)》-〔...향리나 관노들이 수박을 잘하는 자를 군사로 뽑아 쓴다는 말을 듣고 모여 서로 다투어 수박희를 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1455~1468)》-〔...세조 5년 9월 왕이 모회관에서 왕세자, 종친, 재추가 모여 활을 쏘게 하고... 갑을창(甲乙槍), 방포(放砲), 사모구(射毛毬), 수박희(手搏戱)를 구경하였다.〕 n)《용재총화(조선, 성현이 지은 것으로 민간설화나 소문들을 기록한 문집》-〔선비들까지도 수박을 즐겨하였다.〕 o)《만물보(萬物譜) - 조선 정조(正祖, 조선 22대 왕, 1777~1800),이성지(李成之)》의 기희조(技戱條) -〔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 탁견〕 변(卞)이란 곧 수박(手搏)을 변이라 하며 각력을 무(武)라 하는데 지금 이를 탁견이라 한다고 풀이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조선상식(朝鮮常識)》에〔예전에 변(??卞?弁)이라 했고 뒤에 권(拳)이라 한 것을 수박(手搏)이라고 썼다.〕고 하였다. 이것은 한서(漢書)등 중국사서와 고려사, 왕조실록 등에 허다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수박(手搏), 변(卞, 맨손으로 치는 것), 각력(角力, 힘을 겨루는 것), 권(拳, 주먹 힘), 무(武)라는 기록이 모두 탁견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택견이 한민족의 전통성을 이어 받은 고유무예의 본류(本流)임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라고 하겠다. p) 조선시대에는 그림으로도 택견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현종 12년(1846년)에 궁중 화원인 혜산(惠山) 유숙(劉淑)이 그린 <대쾌도大快圖>라는 풍속화에는 당시 택견의 모습이 씨름과 함께 생생히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구경꾼들이 둘러앉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두루마기 자락을 허리춤에 넣고 서로 택견을 겨루려고 하는 청년들과 또 다른 한쪽에서는 씨름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기산(氣疝) 김준근의 <풍속도風俗圖>에도 택견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당시 택견이 대중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선초기에 택견은 무관을 뽑는 무과 시험과목이기도 하였던 격렬한 무술적투기였다.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궁술, 창술, 격구, 수박 등의 무예와 경서, 병서”가 부과되기도 하였는데 양반계급에만 응시 자격을 주는 문과에 비하여 신분 제약이 너그러웠던 무과에는 향리나 양인도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과의 자격이 낮게 인식되었다. 더구나 임진란과 병자란 이후에는 무과 응시자격의 신분제약이 사실상 폐지된 바와 다름없게 되어 천민, 상민은 물론 노비신분까지도 무과에 응시하게 되자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택견이 민간으로 퍼져 대중화되기는 하였으나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조선조 사회가 차츰 문존무비의 사조로 흐름으로 인해 택견과 같은 무예는 지배계층으로부터 소외되었고, 무관직으로 나가려는 양반은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에까지 이르자 무사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자연히 무예수련에 힘쓰는 사람이 점차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 때의 택견은 마을 대항 시합으로써의 명분만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산으로 들어가 은둔생활로 수절을 지키려한 무예의 명인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q)《조선의놀이(코리언게임스koreangames),1895,스튜아트쿨린(Stewartculin)》-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의 고고학자이자 고생물학 박물관 관장이었고, 전 세계 놀이의 저명한 수집가였던 스튜아트쿨린이 당시 조선 정부의 워싱턴 주재대리대사로 있던 박영규씨의 얘기를 중심으로 조선의 놀이에 관해 중국과 일본의 놀이와 비교하여 택견에 관한 글을 "Games of The Orient"라는 책에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에는 택견 경기(시합) 방법을 간략하지만 구체적으로 서술해 놓고 있다. 『TAIK-KYEN-HA-KI 택견하기- kicing 킥킹(Fr, Savate 불어로 싸바트) 택견하기는 두 경기자 사이에서 주로 다리로 이루어지는 싸움 경기다. 두 사람은 그들의 발을 벌리고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그들의 싸움자리를 잡는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방의 다리를 밑에서부터 걷어올려 차려고 노력한다. 경기자는 두 발 중 한 발은 한 걸음 뒤 제 삼의 지점에 갖다 놓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의 다리는 항상 고정된 세 지점의 한 점을 디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먼저 상대방의 두 다리 중 하나를 걷어차는 것으로부터 게임은 시작되는데 그는 그 다리를 뒤로 물린 다음엔 연이어 다른 발을 차게 되는 것이다. 높게 차는 것도 허용되는데 이 높게 찬 다리를 양손으로 잡는 것도 허용된다. 이 게임의 승부는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으로 갈리게 된다. 』 【참고】영문으로 된 원문기록을 한글로 풀이하여 적은 것임. r) 1900년쯤 외국 선교사가 찍은 사진 속에는 어린아이들의 택견 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힘차게 활개 젖는 모습이 대쾌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여 흥미롭고 그 주위에 앉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같이 실려 있어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s)《조선무사영웅전, 1919, 자산(自山) 안확(安廓, 경술국치 당시 국학을 연구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함)》의 “무예고(武藝考)”-〔근래에 청년들이 씨름보다는 소이(小異)한 박희(博戱)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 이것이 근일에 와서 퇴보한 형지(形止)에 이르렀으나 고려 때에는 크게 발달하여 매년 5월에는 연중행사로서 대 시합을 행하였던 것이다. ...석전을 열새양방의 군중이 상대로 작대하여 전투를 개시할새 그 전투는 2인 혹은 3인이 대립하여 ‘두발낭성’, ‘딴죽‘등의 유술을 쓰고...〕과거에 활발했던 택견이 경술국치 당시에는 씨름에 비하여 좀더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에 하나였던 택견이 점차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는시대상황을 담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t)《해동죽지(海東竹枝,1921년경에 매하(梅下) 최영년(崔永年)이 우리나라 4천년 동안의 기문이사(奇文異事)와 세시풍속을 칠언절구 또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읊은 것을 1925년경에 물재(勿齋) 송순기가 책으로 출판함)》-〔옛 풍속에 각술(脚術)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대하여 서서 서로 차서 거꾸러뜨린다. 이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는데 최하자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자는 상투를 떨어뜨린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를 갚기도 하고 혹은 재물과 여자를 내기하여 빼앗는다. 법으로 관청에서 금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런 장난이 없어졌다. 이 것을 탁견희(托肩戱)라고 한다.〕최영년은 택견을 가리켜 “백기신통비각술(百技神通飛脚術)”이라 하여 그 뛰어난 발기술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원수를 갚기도 하였을 정도로 살인적인 위력에 대해서도 짐작케 해주는 기록이라고 하겠고 한량들의 내기로 인한 불건전성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겠으나 그 보다는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에 제정된 ‘범죄 즉결령’을 이용해 일본이 우리의 민속 놀이문화를 치안상, 풍속 저해, 미신, 경제적 이유 등을 들어 못하게 금지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무예 택견으로 인하여 민족정신이 전수되고 민족적 저력이 형성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1926년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건’이라는 ‘특별법령’을 만들어 상무적 기상을 가진 택견을 포함한 ‘석전, 동채싸움, 횃불싸움, 장치기,’ 등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일본에 항거한 항일 투사들 중에는 택견을 한 사람도 있었으니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도 택견의 고수였다.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그가 일본의 대위 쯔치다와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칼을 내리치는 일본 대위 쯔치다를 "발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은즉 칼이 저절로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난도를 점점이 쳤다."(김구, 백범일지, 마당고문사, 1983, p.61). 택견을 하는 항일투사는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므로 이의 사용을 금지시켰을 것이다. 택견은 일본의 말살 정책에 맞서 사도계(斯道界)의 뜻있는 분들에 의해서 비전(秘傳)되어 왔으나(백원준, 체육(제176호), 대한체육회, 1982.11, p.52),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운동회나 민속놀이까지 탄압하였으니 택견도 예외는 아니어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사범들에 의해서 비밀리에 전승되어왔다(정찬모, 태권도, 동양문화사(서울대체육연구소), 1982)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택견은 일본 무도정신의 잔재와 중국무술의 화려한 기법들이 성행하면서 자취를 잃어 갔다가 송덕기(宋德基, 1893-1987), 신한승(辛漢承, 1928~1987)의 노력으로 택견은 1983년 6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 76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신한승의 택견을 계승한 정경화가 1995년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아 한국전통택견회를 결성하였고 송덕기의 택견을 계승한 도기현이 택견계승회를 결성하였으며 송덕기와 신한승의 택견기법을 이어받은 이용복이 한국전통택견연구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평안도 택견의 110대 전수자 임태호의 제자 박성호가 현재 동이무예택견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뜻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용맹하면서도 풍류적이고 격렬하면서도 상호 호혜적인 민족무예 택견의 계승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무술 택견은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기합)와 부드럽고 유연한 몸짓의 리듬이 한결 멋을 더하며, 가장 효과적인 공방을 할 수 있는 택견은 우리의 정서와 체질에 잘 맞도록 선조들께서 만들어 놓은 훌륭한 수련법으로써 수 천년을 면면히 이어온 민족 고유의 심신단련법이다. 자유자제하고 변화무쌍하며 공방의 술(術)이 본질인 택견의 겨루기(경기) 구조는 공격적이며 적극적이고 격렬하지만 서로의 기량향상에 중점을 두어 기합을 통해서나 무릎을 쳐주는 것으로 공격신호를 미리 알려줌으로써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과 의복에 손상을 주지 않게 하는 등 타와의 공존공생을 존중하는 정서가 베여 있다. 즉, 택견의 겨룸(경기)은 피아(彼我)가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상호경쟁력을 고양시킨다
(2) 합기도
합기도는 약 3,000년 전에 인도에서 시작된 체술(體術)로, 불교의 전파와 함께 수도승들의 호신술로 전해지다가 중국 소림사(少林寺) 권법이 달마대사에 의해 진흥되던 당시에 유권술로 크게 융성한 후 1925년경 일본인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監平)에 의해서 지금의 형태로 체계화되었다고 하지만(Daum, Daum사전 '백과사전', 합기도), 사실 합기도는 본래 한국 전통의 고유 무술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 겨레의 최고 경전인 삼일신고 진리훈편의 기화(氣化) 지명(知名) 합혜(合慧)라는 구절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합기도는 천기(天氣), 지기(地氣), 인기(人氣)를 인체의 단전(丹田)에 모아 그 힘을 자유 자재로 운용하여 다양한 술기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수행의 길로써 각고의 연마를 통해 자기의 존재(命)를 터득하게 되고 지혜로움을 얻는(合慧) 수도의 길이다. 일찌기 단군시절의 궁사, 기사(騎射)등과 함께 체술(體術)로써 시작한 합기도는 선제공격보다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여 제압하는 우리민족의 성격과 맥락을 같이하는 무예로써 고구려 시대의 조의선도, 백제의 삼랑도, 수벽타, 국선등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조와 이조의 무예 경시 경향이 고조됨으로 승려, 도가등 일부 소수 계층에 의해 명맥을 이어 오다가 그 근본이념과 비술이 동학혁명의 근본사상과 실천에 영향을 주기도하였다. 합기도는 타 무도와는 달리 체술(體術)에 앞서 조식. 지감. 금촉의 삼법(三法)을 수련하여 내공의 힘과 인격의 조화를 이루고 다양한 술기와 온갖 도구를 사용하여 고루 수행하는 종합무예인 것이다. 또한 적은 힘으로 상대의 급소와 혈을 공격함으로써 부녀자와 노인에 이르기 까지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으며 호흡법(단전호흡)으로 건강과 미용을 그리고 관절기의 급소를 적절히 운위(운위) 시킴으로써 신체조화와 어린이의 신체발육에 좋은 수련법이라 할 수 있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합기도의 역사). 이러한 합기도는 일본에 들어가 일본의 합기도인 '아이키도'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부산대교수인 이병선은 '일본고대지명연구'라는 저서(1996, 아세아문화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度海人들의 開拓은 목축에서도 볼 수 있다. 신라·고구려·백제에서 건너간 기마의 무사들은 武藏野(무사시노)의 넓은 평야를 이용하여 말을 기르고 ……………(중략)……………關東武士들은 여기서 일어난 것이며, 유명한 武藏의 갑옷과 투구도 이로부터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日本의 忠義心과 武士道도 이 관동무사의 『家의 子郞黨』의 의리심에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桓武平氏, 淸和原氏로 불려지는 氏族도 여기에서 일어났다. 그 중 甲문源氏로 불려지는 武田氏의 조상으로써, 新羅三郞源義光은 신라의 후예임을 自稱하였다. 그는 大東流合氣柔術의 시조로, 이 武術은 신라에서 건너간 것이다." 여기의 '신라삼랑원의광'에서 삼랑은 본래 신라에 있었던 고유의 성씨이다. 신라삼랑원의광 이전의 '삼랑씨'는 그가 일본에 건너가기 전의 일본 역사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삼랑원의광이 일본에 건너가 후지와라가 집권통치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개입해 거병하여 평정함으로써 세운 큰 전공을 인정받아 원씨성(淸和源氏)을 하사 받았는데 신라의 후예인 이 사람에 의해서 합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러한 합기도이지만 정작 우리 나라에서는 소멸되다시피 하였다가 무전총각(武田 角)의 수제자인 최용술(崔龍述, 1899-1986, 충북 황간 출생, 1908년에 도일하여 1946년에 귀국)에 의해서 해방 후 우리 나라에 다시 합기도가 널리 보급되고 발전되어 지금은 다시 한국 고유무술로써 세계 무술에 크게 기여하며 성행하고 있으며, 일본의 합기도인 '아이키도'와는 구분이 되고 있다. 합기도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된 무술이며 합기도의 원리인 원(圓)·유(柔)·염력(念力)을 이용한다. 원이란 방어자가 구심점을 확인하고 상대의 힘을 둥글게 유도하여 나선형으로 역공격하는 것을 말하며, 유란 공격하는 상대의 힘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언제나 힘을 주는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염력이란 영력과 같은 말인데 정신력과 체력을 통일하여 적절하게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기술의 형(型)에는 꺾기·던지기·치기·찌르기·차기 등이 있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합기도의 역사).
(3) 선무도
경주 석굴암 입구에는 맨 앞 좌우에 인왕이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왕은 이왕이라고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왼쪽의 역사는 입을 쩍 벌리고 잔뜩 움켜 쥔 오른 주먹을 높이 쳐들고 있고 왼손은 엄지를 안으로 말아 쥐고 아랫배를 방어하고 있다. 바른편의 인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곧 내려칠 듯이 왼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부채살 모양 쫙 펴서 허벅다리를 가리고 있다. 입을 벌린 것은 '아'라 하고, 입을 다문 것을 '음'이라 하여 산스크리트 문자의 첫글자와 끝글자를 나타낸다. 밀교에서는 인왕의 형태가 시작과 끝을 의미하고 본체적인 힘이 두개의 파생적 표현을 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인왕의 형상이 전통적인 불교 수행법의 하나인 선무도의 행공자세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자비와 인욕을 기조로 하여 이상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을 본원으로 한다. 하지만 대승적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방편으로 불교무술이 필요수단으로 발달하여 왔는데, 인왕의 상에서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수행은 몸과 마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되며 오직 둘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삼미를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한다. 조화란 몸과 마음은 물론, 강함과 유함, 정과 동, 주관과 객관, 너와 나, 우주와 나와의 조화를 포괄한다. 이것이 부처의 중도사상이며 곧 선무도 수행의 핵심이다. 선무도는 여래가 수행의 한 방법으로 무술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린 데서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와, 승려들의 심신연마와 호신술로 익혀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에 와서 숭유억불 정책과 무를 천시하는 풍조에 밀려나 쇠퇴하였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아예 그 자취마저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30여년 전인 1960년대 중반에 부산 범어사 청련암에서 양익 큰 스님을 중심으로 몇몇 뜻 있는 승려들이 불가의 전승무술을 발굴 정리하여 금강영관의 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청련암에는 전국의 사찰에서 수많은 무예승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었던 적운 스님은 지난 85년 서울 종로 거리에 금강영관의 포교도장을 개설하고 선무도, 또는 선관무라는 이름으로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적운 스님은 불교무술의 수행이 불자들의 능동적인 심신을 고양하고, 수행에서 얻어지는 에너지(기)가 개인의 건강한 삶과 사회복지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산 속의 무술을 사바세계의 거리에 끌어 내놓음으로써 대중화를 꾀하였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우리 민족의 무술 '선무도')
(4) 고무도(古武道)
고무도는 현존하는 격투기술을 포함한 농기구로 하는 농민무술이다. 산간에서는 겨릿소에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쟁기라는 이름의 원말은 "잠기"이다. 그리고 잠기는 '잠개'가 바뀐 말로서 무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전에는 땅을 가는 농기구와 전쟁에서 쓰는 무기를 같은 말로 불렀다. 그때는 농사짓는 사람이나 군사가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농기구를 들고 전쟁터에 나서면 그것이 곧 무기가 되고 군인이 되었던 까닭이다. '잠기'는 18세기 초에 '장기'로 바뀌었는에 이때까지도 농기구와 무기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병장기'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사실 이 무렵부터 유래된 것이다. 근세까지 농기구를 병장기 삼아 싸웠던 흔적은 동학농민전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별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는 농민군은 손에 농사 짓던 도구를 들고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일종의 농민무술이 되었다. 이를 후에 독립군 출신인 이인의(李仁義) 선생이 고무도로서 체계화와 보급에 나섰고, 아들인 이도윤(李道潤)씨가 전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무도는 활, 창, 칼 등과 같은 정규 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장대, 낫, 괭이, 쇠스랑, 도리깨, 노와 같은 농기구를 이용하여 싸우는 법, 맨몸으로 하는 법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이중에 정규무기 사용법은 군사무술로 흡수되고, 농기구를 이용하거나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은 생활무술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고무도이다. 고무도의 기술체계에서 농기구를 쓰는 무기술은 장봉, 단봉, 중봉, 노봉, 도리깨봉, 죽창, 삼지창, 수리검, 낫, 철퇴, 쌍절봉 등이 있다. 그리고 맨손무술은 유술과 권법으로 나누는데 유술은 씨름, 굴리기, 쪼우기(조르기), 꺾기, 비틀기, 업어던지기, 메어치기 등과 택견과 같은 족치기가 있다. 권법은 장구치기, 주먹치기, 팔굽치기가 있고 장법(掌法)에는 밀어날리기, 후려날리기, 당겨날리기 등이 있다. 또한 이른바 "난다리"라고 하는 박치기의 기법이 있다. 말하자면 고무도에는 현존하는 모든 격투기 기술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고무도는 상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술이지만 이것은 특수층의 특별한 동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민족의 주체인 민중들이 생업인 농사를 통하여 농기구 사용법에서 얻은 미립을 구체화한 생활무술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체계적, 조직적으로 전승되지 아니한 까닭에 물밑으로 흘러와 일반인의 인식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하여 그 참된 가치와 역사발전 기여도에 대하여 도외시되어왔었는데 지난 91년 5월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대한고무도협회(설립자 회장 이도윤)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의 농경생활에서 터득하여 온 농민무술을 체계화하여 생활무술로서 보급을 시작하였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우리 민족의 무술 '고무도') .
(5) 삼성궁의 선무
도인마을 청학동에 자리하고 있는 삼성궁의 무술은 선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무, 군무, 기무로 나눈다. 예무는 인간의 본능적 투쟁술이며, 군무는 사회적 욕구에서 생성한 집단적 전투술이고, 기무는 공부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예무는 춤과 노래를 바탕으로 한 각종 권법, 검법을 망라한 24반 무예이고 군무는 집체수련과 진법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기무는 삼일신고의 삼법수행을 바탕으로 한다. 즉 감정을 그치고, 숨을 고르게 하며, 부딪침을 않는다는 뜻이다. 삼성이란 한배임(환인), 한배웅(환웅), 한배검(환군)을 뜻하지만 삼성궁에서는 이 세 정인외에도 역대 우리나라 왕조의 태조, 각 성씨의 시조, 현인, 무장을 모시고 숭배한다. 그리고 옛 소도제천을 부호라하여 하늘에 제를 드리고 환무백회를 시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옛 소도(蘇塗)를 복원하여, 민족의 정통 도맥인 선도를 지키고 신선도를 수행하는 민족의 도장으로 가꾸겠다는 염원을 가지고서 삼성궁을 건설한 한풀선사는 삼성궁의 이러한 의식은 결코 종교성을 띄고 있지 않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민족성원으로서 민족장래에 대한 발원만 있다면 어떤 종교, 종파가 참여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상성궁의 선무는 아직 세상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삼성궁 무예는 해마다 10월의 청학 단풍제와 개천대제 때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리고 기회만 닿을 수 있다면 아무라도 무예를 전수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기이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술이야말로 민족무예라는 것이다. 최근 몇몇 대학에서 동아리 결성이 이루어지고 있고, 차츰 일반인들에게도 조용히 퍼져가고 있는 것이 삼성궁의 무예이다. 기러기가 제 살던 곳으로 찾아들 듯이 우리도 우리가 떠나왔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네이버 지식iN, 오픈 사전, 우리 민족의 무술 '도인마을 청학동').
(6) 경당 무예 24반
경당이란 고구려 때 평민자제들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치던 교육기관이다. 경당은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전통 무예인 24반 무예를 가르치는데 지금의 민족무예도장 경당이 이를 재현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라고 하면 무술을 신비한 것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비책처럼 평가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본이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겪은 조선종부는 군사력 강화를 목적으로 명나라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군사들에게 훈련시켰다. 당시에는 한교가 정리한 육기였던 것을 영조때 18반무예로 보강하였고 다시 정조때 마상술 육기를 더하여 24반무예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정조 14년(1790년)에 와서 언해본을 만들어 군사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경당 무예24반은 검법을 기초로 창, 곤, 마상술, 권법 등 한, 중, 일 3국의 옛무술을 총망라하고 있다. 경당에서는 중국무술을 모방한 권법 대신 우리 전통맨손무술인 택견을 채택하고 있고 활쏘기도 추가하고 있어서 그 다양성이 우선 흥미를 끌고 있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우리 민족의 무술 '민족무예도장 경당')
(7) 씨름
한국 전통의 고유 무예로는 씨름이 있다. 씨름은 맨손 격투기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두 사람이 마주서서 겨루는 자세는 보는 사람에 따라 택견이라고도 하고 씨름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택견과 씨름은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기술의 명칭만 해도 딴죽, 덧걸이, 덜미잽이, 밭장치기, 낚시 걸이 등 넘기는 기술은 택견과 씨름이 거의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 조선실록 등의 사서에는 수박, 각력(각력), 각저(각저) 등의 기록이 자주 나오는데 같은 사실에서 시대와 장소, 인물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문헌마다 서로 명칭이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그 당시에는 맨손무 예의 명칭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무예가 원체 구전심수로 전승되어 왔으며 더욱이 남의 글을 빌려서 기록했던 때문에 입으로 부르는 이름과 글로써 적는 이름이 서로 다른데서 온 혼동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에 (모모)에서 매년 7월 15일에 수박희를 한다는 기록이 있고 일제 시대에 조사한 조선풍속에는 익산에 각희(각희)가 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그 지방의 (고모)들은 수박, 각희는 전혀 모르고 한결같이 편씨름을 했다고 말하고 있어서 명칭사용을 뒤섞어 사용한 사례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문화재위원 예용해는 "모모한.모모가운데서 기물에 콩보다도 더 드뭇하 게 적힌 짧은 글로는 수모모모나 각모모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소상하게 알 도리는 없으나 전자가 손으로 하는 노릇이고 후자는 씨름이라고 짐작은 간다. 또 두가지가 다 회로 적혀 있으면서도 수박희는 무인들에 대한 (모모)의 대상이던 것이 분명한데 각저희는 그런 흔적이 없으나 수박희는 수련을 쌓아야 하는 특기임에 반하여 각저희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대중의 놀이임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원시 투기에서 발달해온 택견과 씨름이 각기 다른 형태를 갖추게 된 것 은 꽤 오래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씨름의 장면이 나오고 혜산의 풍속화에도 같은 장소에서 씨름과 택견이 각각 경기하는 장면이 보인다. 안자산은 "자래로 권박(권박)이라고도 하고 각저(각저)또는 상박 (상박)이라고도 하여 서로 뒤섞은 명칭으로 기록하였으나, 후일에는 기술 의 발달로 인하여 씨름과는 이허(이허)가 다르게 되니 씨름의 오직 육박 (육박)으로써 각투(각투)에 불과한 것이요, 유술은 인체 근육의 혈맥(혈맥) 을 박동하여 죽이기도 하고 어지럽게도 하며 또는 벙어리가 되게도 하는 삼법이 있어 학술적으로 되어진 것이다. 근래에도 청년들이 씨름보다 소이(소이)한 박희(박희)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택견>이라고 하는 것이 그 종류다."고 하였다. 안자산은 택견을 유술(柔術)이라고 하였는데 택견의 부드러운 몸짓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가 1919년에 저술한 조선무영웅전의 무예고에서는 편쌈(석전)에서도 유술을 쓰는데 두발낭성이나 딴죽을 쓴다고 하여 기술용어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그가 택견에 대하여 상당히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런 안자산이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를 모두 열거하면서도 씨름을 제외한 것은 씨름을 무예의 범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같이 씨름이 무예에서 제외된 반면에 민속놀이가 망라되어 있는 세시기에는 택견이 빠져있다. 씨름이나 택견이 서로 상대를 넘어뜨려서 승부를 내는 민중의 격투기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데도 옛 사람들은 무예와 놀이로 분명한 구분을 한 듯이 보인다. 씨름과 택견은 고대의 맨손 격투기에 다같이 근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씨름은 놀이로 그리고 택견은 무예로 그 목적을 달리하여 발달한 것이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택견과 씨름')
(8) 해동검도
한국의 전통 무예에서 병기 사용은 칼과 창에 비해 활을 쓰는 것이 탁월했다. 이는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에서 "우리 나라는 옛부터 궁시 한가지 기예만 있고, 칼과 창은 헛되이 무기만 있고 쓰는 법이 없다."고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는 전쟁에서 갖는 지리적, 지형적 여건의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 민족이 발달시켜 온 무술이라고 객관적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활쏘기, 씨름, 택견 등에 불과하여 그 종류가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각종 무술과 문헌자료, 그리고 인접 전통분야를 참조하여 전통무술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에서 두드러지게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해동검도이다. 해동검도는 현재 미국에서 선불교를 포교하고 있는 원광(김창식)스님이 1960년대에 창안한 심검도가 그 전신이다. 원광은 당시 화계사 주지 종산대선사(68세)로부터 참선검법을 구전심수로 이어받아 득도하였다고 한다. 원광은 1969년 포교를 목적으로 서울 역수동에 도장을 개설하였다. 이때 신이철, 나한일이 처음으로 문하생이 되었고, 뒤를 이어 정도근, 송복근, 김정호(대한 해동검도 총관장) 등이 차례로 제자가 되었다. 그후 원광이 도미함에 따라 그 도장은 나한일이 맡게 되었다. 해동검도란 명칭은 1983년 나한일이 서초동에 도장을 개설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해동검도는 그 전신이 심검도이지만 현재 해동검도는 심검도와 분리되어 있다. 해동검도는 전국의 48개 도장 및 수련단체를 두는 괄목할 발전을 해 오면서 최근에 한국 해동검도를 중심으로 해동검도를 국민생활체육으로써 뿐만 아니라 현대적 스포츠로 개발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 검도경기와는 달리하여 90센티미터의 짧은 죽도와 훨씬 가볍게 만든 호구를 착용한다. 그리고 목과 허리아래의 공격에 가산점을 주는 등의 경기규칙을 정했다. 해동검도에서는 일본검도의 하까마 대신 우리 고의를 입도록 하는 등 되도록 우리의 전통양식을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우리 민족의 무술 '해동검도').
(9) 태권도
태권도의 명칭은 1955년 4월 11일 사계의 전문가와 사회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명칭제정위원회가 그때까지 당수, 공수, 권법, 화수, 수박, 심지어 가라데라고 불러오던 명칭을 통일하기로 하여 태권도(跆拳道)라는 신어(新語)를 제정하면서 사용되었다. 이 태권도란 말은 첫째로 민족 고유의 무예인 택견과 어음(語音)을 연결시킬 수 있고, 둘째로 손보다 발을 많이 쓰는 기술적 성격을 나타내는데 적합하다고 해서 채택된 것이다(최홍희, 태권도지침, 정연사, 1966, p.22) 그렇다면 태권도란 명칭이 사용되어 불려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태권도는 한국 민족의 무예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 것으로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기(國伎)로 있다. 한때 씨름계 인사의 발설을 기화로 경향 각지에서 태권도에 대한 국기 시비론이 있었고, 또한 1961년 9월 6일에 태권도의 명칭이 태수도(跆手道)로 바꾸었다가 1965년 8월 5일에 다시 제 이름인 태권도로 되돌아오는 우열곡절이 있었지만(이용복, 한국무예 택견, 학민사, 1990, p.105), 그럼에도 전 국민의 애호를 받으면서 국기로 있는 것은 이것이 민족 무예를 지향하고 그 정립의 뿌리를 택견의 계승에 두었던 때문이다. 이렇게 태권도의 고유성 주장의 이면에 택견의 오랜 전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또 태권도를 국기로 인식시켜가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이영진, 종합무예에서 파생된 씨름. 택견, 전통문화(1985.9), p.53). 태권도는 그 뿌리를 택견에서 찾는다. 태권도가 비록 현대적 스포츠화 된 것이어서 택견과는 그 형을 달리하고 있겠지만 그 유래는 택견의 역사에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 태권도는 1962년 제43회 전국체육대회의 경기종목이 된 것을 시발로 경기화가 가속되어 1973년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18개국 2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였으며, 1980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이 ITF의 방해공작과 가라데의 경쟁을 물리치고 I.O.C의 정식승인단체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태권도는 1986년 제 10회 아시안 게임의 정식종목이 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경기가 열림으로써 국제 스포츠계에서 당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짧은 기간에 세계 무예 스포츠의 총아로 급성장한 태권도는 한국 민족의 저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겠다(이용복, 한국무예 택견, 학민사, 1990, p.108) Ⅲ. 인류의 생존법칙인 무술(武術)과 의술(醫術)
1.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서 무술(武術)과 의술(醫術)을 필요로 하였다.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필요로 하였다. 하나는, 생존을 위한 먹이를 얻기 위해 무술(武術)을 개발하고 연마하는 것이었다. 무술인들은 무술의 기원을 인류의 역사와 그때를 같이 하여 동시에 보고 있다. 원시의 시대에서는 인류가 생존하기 위하여서 음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제약되어 있었다. 자연에서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대로 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물에서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잡아 먹었으며, 큰 몸집의 동물과의 싸움에서 이겨 취하여야 하고 때로는 자칼이나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 만큼 여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술을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원시의 시대에서는 무술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돌을 던지는 투석이라든지 또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창이라든지 돌을 갈아서 만든 칼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이용복, 한국무예 택견, 1990, 학민사, p.25) 고대원시사회의 생활은 자신과 그 일족(一族)을 보호하고 그들의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수렵활동을 통해서 식량을 해결했고, 점차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사회를 거쳐 부족사회를 형성하는 동안 대립과 화해, 투쟁과 정복 활동을 통한 부족국가로 발전해 왔다. 그에 따라서 원시적인 무기는 석기, 청동기, 철기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점차 더욱 위협적으로 발전하고 이를 사용하는 기술도 더욱 다양하게 발전을 하여왔다. 이는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고 또한 삶을 꾸려나가려는 자위적 본능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손쉽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신체의 여러 부분 즉 주먹, 손, 발 등을 사용하여 왔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공격적인 형태의 복잡하고 다양한 행동으로 발전해가면서 원시적이고 단조로운 동작으로부터 그 방법과 내용이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또한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다(김경지, 태권도학 개론, 1993, 경운출판사, p.11). 다른 하나는, 사나운 짐승과 싸운다든지 또는 다른 부족과의 세력 다툼을 한다든지 하면서 다쳐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경우가 있고 또한 재해라든지 자연으로부터 질병을 얻어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정신적 질환이 생김으로써 병을 고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고대일수록 병을 고치는 기술은 원시적일 수밖에 없고 이는 샤머니즘, 곧 무술적(巫術的) 일 수 밖에 없었다. 무술(巫術)은 종교성을 띠면서도 또한 강력한 의술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고대일수록 무술(巫術)이 발달하였으며, 또한 무술인(巫術人), 곧 무당(巫堂)은 강력한 세력을 지녔다. 무술이 종교성을 띠는 것은 '중국 양생술의 신비로움'의 저자인 치하오가 그 책에서 엥겔스가 한 말을 소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태곳적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체 구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꿈에 나타난 영향을 받아서 다음과 같은 관념을 만들어냈다. 즉 그들의 의식과 감각은 자신의 신체 활동이 아니고 그 신체 어딘가에 깃들어 있다가 마침내 사람이 죽게 되면 바로 신체를 떠나버리는 일종의 독특한 영혼의 활동인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영혼의 외부 세계에 대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이 그 육체를 떠나서 삶을 계속하게 된다면 영혼 자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 영혼의 불사(不死)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났다."(치하오 저, 정민성 역, 중국 양생술의 신비로움, 2003, 에디터, pp.29-30) 그리고서 그는 말하기를, "이처럼 사람들은 불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난 뒤 귀신이 되어 인간의 생명 활동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Ibid, p.30)라고 하였다. 육체를 떠난 영혼은 자연의 기후 및 지리적 변화를 장악하는 신통력을 갖는 신으로 화해서 인간 생명 활동의 외부 환경을 장악하고 또 인간계의 귀신으로 화해서 생명 있는 인간의 사유 및 육체에 영향을 끼치는 까닭에 기후 및 지리적 급변에 의해 생기는 지진, 한발 따위의 자연 재해, 그리고 인간의 질병, 의식의 상실, 가지각색의 고통 따위는 모두가 귀신의 장난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은 귀신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하나가 외경(畏敬)이다. 귀신을 숭배하며 객체를 신격화하고 그것을 경배함으로써 신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시 종교이며 소극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사(또는 무당)의 힘을 의존하는 것이다. 무사는 신비스런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서 귀신을 조정하고 또는 그것에 영향을 주는 바에 의해서 객체를 조정한다. 이것이 원시 무술이며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인간의 귀신에 대한 인식은 늘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때로는 귀신을 숭배하고 때로는 귀신을 조정하고자 했으며 혹은 그것을 동시에 실행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무술과 원시 종교는 그 한계를 구분 짓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점차 계급사회로 들어서게 된 이후부터는 종교는 무술(巫術)을 흡수하여서 서로 밀접한 상관성을 가져나갔다(Ibid, pp.30-32). 그래서 점차 무술인(巫術人)에게서 병들거나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하는 의술의 행위가 비중이 커져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술(武術)과 의술(醫術)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본능적으로 생존법칙으로 삼은 데 따라 갖게 된 행위라고 할 것이다.
2. 무술(武術)이 의술(醫術)과 더불어 갖는 중요성
앞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할 때 의술은 그 기원을 무술(巫術)에서 찾는다. 치하오는 중국양생술의 신비로움이란 책에서 설문해자에서 말하고 있는 의(醫)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의(醫)란 병을 고치는 기술이다"라고 하였다(치하오, 정민성 역, 중국양생술의 신비로움, p.40) 그러면서 그는 이 의(醫)의 기원에 갖는 견해가 4가지가 있는데 "첫째, 의의 기원은 동물적 본능으로부터다. 둘째, 의의 기원은 무(巫)에 있다. 셋째, 의의 기원은 성인(聖人)에 있다. 넷째, 의의 기원은 노동이다"라고 말한 후, "이상의 것들 가운데서 영향이 가장 큰 것은 둘째의 '의의 기원은 무에 있다'와 넷째의 '의의 기원은 노동이다'의 2가지이다'라고 하였다(Ibid). 여기에서 보듯이 의의 기원은 인류의 노동과 함께 '무'(巫)에서 찾아진다. 무(巫)란 '샤마니즘'으로서 '종교'이다. 이렇게 의술은 그 기원을 무술(巫術)에서 찾아지고 그에 따라서 최초의 의료 수단은 무술의식(巫術儀式)이 되지만, 이는 치료(治療)가 주목적이 된다. 그런데 의술은 치료와 함께 예방(豫防)적 차원에서 다루어지기도 한다. 즉 치료의 상태에 있게 되기 전에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데서 의술의 기능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적 예방의 효과를 갖는 것이 노동(勞動)이다. "노동이 의학을 창조했다"(Ibid, p.43)란 말은 그런 면에서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은 사람에게 힘을 제공해주며 면역력을 강화하고 건강의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람은 체격과 체질이 다양하다. 체격이 크고 체질이 단단한 사람이 있지만 작고 허약한 사람도 있다. 건강하다고 해서 건강을 지켜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며, 허약한 사람은 더더욱 건강을 신경 쓰게 마련이다. 여기에 무술(武術)은 의학적 도움과 효과를 준다. 현대에 이르러서 사람이 생존법칙으로 삼는 양상은 변화를 가져와 크게 달라졌다. 그것은 의학의 발달에 의해서이다. 의학은 크게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으로 구분되는데 이중 동양의학은 중국에서는 중의학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한의학으로 불려진다. 서양의학은 병의 증상에 따라서 치료하는 약이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는 반면에 한의학은 같은 병이라도 그 증상에 따라서 치료하는 약의 내용이 달라질 수가 있다. 그것은 사상의학(체질의학) 및 음양오행에 의한 증상에 따라서 치료하는 처방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인간의 체질을 4가지로 나눈 것인데 조선 말엽 때의 이제마(李濟馬)가 창안했다. 1894년에 지은 저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통해 인간은 천부적으로 장부허실(臟腑虛實)이 있고, 이에 따른 희노애락의 성정(性情)이 작용하여 생리현상을 빚으며, 체질에 알맞는 음식과 양생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사상의학설은 체질의학의 원전으로서 각자의 체질을 안다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요지이다. 사상의학의 4가지 체질이라 함은 태양인(太陽人)·소양인(少陽人)·태음인(太陰人)·소음인(少陰人)을 말하는 것으로 각 체질에 따른 장부허실이 상대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만일 허한 것이 더욱 허하거나 실한 것이 더욱 실할 때 병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이를 장부의 태(太)·소(少)라고 했다. 여기서 태·소란 해부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며, 태양인은 폐대간소(肺大肝小), 소양인은 비대신소(脾大腎小), 태음인은 간대폐소(肝大肺小), 소음인은 신대비소(腎大脾小)라고 했다. 사상의학은 인간의 건강과 질병 상태를 각 개인에 맞게 규정한 우수한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자의 정확한 체질을 알 수 있는 방법에서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체에 적용하는 것이 어려우며, 4가지의 체질로만 분류해 너무 단순하고 서로 중복되는 측면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상의학은 개체의 활동능력과 적응능력을 지배하는 반응능력을 설명하고 유전생물학적인 차이점을 규정한 독창적인 이론이다. 또한 체질의 본질적인 측면과 개체의 특성을 논하여 생리적·심리적 측면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한의학의 전체성 개념을 잘 구현한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Daum, Daum사전 백과사전, '사상의학'(四象醫學) 이제마가 의술을 이렇게 사상의학을 만들어 적용한 것은 그가 원래는 의학자가 아니고 유학자인 것과도 관련이 있다. 공자와 맹자의 철학을 직접 자기의 가치관에 비추어 일반인에게 설명하려는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즉 개신유학인 사상철학을 완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사상의학을 완성하였던 것인데 대부분 사상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사상의학만 접하면 오해도 많이 생긴다. 사상의학은 체질의학이다. 체질이 다르면 체형이 다르고 심성도 다르다. 체질을 구별할 때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체질이 다르면 적합한 음식물이 다르고 보약도 다르며 병의 치료법도 달라진다. 그러나 과거에는 체질을 구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으나 다행히 근래에는 체질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완성되어 사상의학의 보급이 보편화될 것으로 생각되므로 보다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네이버, 지식iN, 오픈사전 '사상체질의학'(四象體質醫學)) 게다가 한의학은 동양철학인 음양오행(陰陽五行)에 의해 처방한다. 고전에는 '금궤'(金 )라는 명칭이 자주 눈에 띈다. 금궤는 황금을 넣는 상자를 뜻한다. 그러니까 매우 귀중하고 참으로 중요한 물건을 넣는 상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고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소문(素問) 4편에서는 '금궤진언론'(金 眞言論)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금궤에 넣을 정도로 그만큼 중요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내경소문 4편이 다루고 있는 금궤진언론은 다름 아닌 오행과 음양에 관한 것이다. 음양오행 사상은 음(陰)·양(陽)의 2기와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5행의 움직임으로 우주와 인간 생활의 모든 현상과 생성 및 소멸을 해석하고 설명하려는 사상이다. 황제내경에서는 오행을 장기(臟器)를 중심으로 분류하였다. 그 내용은 생리, 병리, 질병의 증상, 병인 등과 관계하기도 하고, 단순히 장부(臟腑)의 의미로 분류한 것도 있다. 이때 오장(肝, 心, 脾, 肺, 腎)을 보양하는 맛이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오히려 해당 장부에 해를 끼친다. 지병에 걸리기 쉬운 부위도 본시 오장이 영양을 담당하고 지배하는 부위이다. 따라서 오장이 질병에 걸리면 그 부위에 가장 먼저 증상이 나타난다. 오장은 나름의 성격을 가지고 활동하는데 오장이 충분히 활동하지 못할 때는 탈이 난다. 즉 병의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그 증상에 따라 어떻게 처방해야 할 것인지를 황제내경은 말하고 있다(이케다 마사카즈 저. 이정환 역, 처음 읽는 사람들을 위한 황제내경(上), 도서출판 청흥, 2001, PP.32-33). 황제내경 소문의 금궤진언론에서는 또한 신체부위를 음양으로 구별하고 있다. 고전의학에서는 치료할 때 먼저 질병을 앓는 부위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 부위가 어느 경락하고 연결되었는지를 살핀 뒤에 비로소 해당 경락을 치료한다. 이때에 질병에 걸린 부위를 병위(病位)라고 하는데, 그것을 분명히 하려고 음양으로 구별한 것이다. 그래서 음양으로 나뉜 부위에는 당연히 각각에 해당하는 기가 많다. 그 음기와 양기가 어떤 작용을 하고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증상을 나타내는지 확인해야 한다. 황제내경의 원문에는 음기와 양기의 균형을 조절하는 것이 치료라고 나온다(Ibid, p.35). 동양철학 사상이 응용되고 있는 한의학은 역시 동양철학 사상이 깃든 무술(武術)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에서 무술은 싸움과 전투에 임하는데 필연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도모하는 운동의 개념으로 전환이 되고 있는데 이뿐만 아니라 한의학에서 행하는 의술에 무술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기에 이 둘의 관계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연관 속에서 중요히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Ⅳ. 동양무술과 의술의 상관 관계
1. 동양무술의 의술적 효과
동양무술이 한의학에서의 의술과 긴밀한 관련을 가져 나갈 수 있는 상관 관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철학 사상과 이것이 가져다주는 의술적 효과를 볼 수 있는 동양무술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동양철학을 내포한 동양무술
서양무술에 비해서 동양무술은 동양철학을 내포한 무술(武術)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 사상은 불교, 유교, 도교의 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열반을 집착과 욕망을 일으키는 무지로부터의 행방을 찾으려 하는데, 불, 법, 증의 견지에서 해석하며 수행과 요가를 강조하는 소승불교와 이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열반을 추구하는 대승불교로 나뉜다. 대승불교는 창조적인 자비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서 정신 세계를 자력으로 성취해야 할 과제로 이해하고 있다. 불교에서 중요한 문제는 실천이며 열반에 도달하는 길이다. "길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목표 자체이다."(Joseph M. Kitagawa 저, 강위조. 김관석 역, 동양종교, 유림사, 1982, p.198) 그러나 이 둘 다 중생은 무명에 가려지고 갈애에 구속되어 그릇된 고의 생존을 하고 있다고 보며 무명을 근원적인 원인으로 중요시하는데서 불교사상의 주지적 성격이 드러난다(윤사정, 동양사상과 한국사상, 을지출판사, 1984, p.32-42). 유교는 동양 최고의 성인인 공자에서 대표적인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는 사회 생활에서 예를 중시하였고 예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용이었으며, 윤리가 정치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사회는 다섯 가지 인륜관계 즉, 근거, 군자, 부부, 장유, 붕우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Joseph M. Kitagawa 저, 강위조. 김관석 역, 동양종교, 유림사, 1982, p.59) 도교는 춘추전국시대에 노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도교에 의해서 도의 철학 사상이 구체화되었다. 동양철학의 핵심 사상은 도(道)에 있으며 이는 불교, 유교, 도교의 중심 사상인데 이 도에 대한 탐구는 유, 불, 도 삼교 중 도교의 노자와 장자에 의해서 보다 구체화된 것이다(정삼현, 한국무도사 연구, 한국체육학회 35권 4호, 1996.12, p.9-26). 동양에서 도의 의미는 우주 자연의 근본이 되는 본체이며, 인간이 도에 이르는 것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김형규, 동양무도의 내재적 가치와 수행과제, 체육철학학회논문집, 1998, p.66-87). 도의 본체는 무명, 무상, 무형, 무장의 것이지만 그 작용은 무위한 것이라 한다. 무욕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점에서 작다고 할 수는 있지만 만물의 자기에서 귀일 시키면서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고 있는 포용력은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도는 본래 인간적인 작위가 없으면서 어떤 큰 일이라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한편으로는 천지 대자연의 조화의 근원에 있는 무위자연의 도를 자각한 인간이 그대로 행하여야 할 법칙으로서도 이해하고 있다(김익주. 원종려 공저, 동서철학사상의 개요, 수덕문화사, 1981, p.158). 자연과 무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노자의 사상을 자연무위사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Ibid, 156-157). 동양무술에서 세계관과 인생관의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다(김형규, 동양무도의 내재적 가치와 수행과제, 1999, p.66-87)
2) 동양무술의 기(氣), 심(心), 체(體) 일치가 가져다주는 건강은 의술적 효과와 같은 가치를 지님.
동양무술이 격투기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동양무술은 기(氣), 심(心), 체(體)의 일치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1)기(氣) 동양무술이 서양무술과 다른 뚜렷한 차이는 손과 발이 움직이는 차이에 있다. 말하자면 동작이 진행되는 선(線)이 서양의 무술이 갖는 동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이다(고동영, 한국상고무예사, 1993, p.13, 한뿌리). 그리고 이 동작의 선은 유연성에서 설명되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동양무술의 하나인 태극권의 기술을 정의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태극권의 기술은 그 운동으로부터의 동작, 그리고 그 동작으로부터의 운동을 의미심장하게 포괄하는 하나의 운동형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 구조들은 신체의 가장 작은 관절에서부터 가장 큰 근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움직이도록 할 정도로 다양하다. 조화롭게 계획되고, 교묘하게 본떠진 그것은 흐르는 듯한 연속성으로 행해진다. 유연성, 균등, 그리고 명쾌한 것, 평온한 것은 그 복합기술의 다섯 가지 기본적 특질이 된다. 또 운동과 형식의 역할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자신을 결코 소모함이 없이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이 이 운동 유형의 '유연성'이다. 이 유연성은 그러한 행위의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경직되거나 과도한 에너지 힘과는 대조를 이룬다. '결코 끊이지 않는 강의 흐름과 같이' 유동적이며 지속적인 동작으로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신체적 행위는 딱딱하거나 굳게 되는 경직성을 제거한다."(표충실, 태극권, 「완전 건강을 위한 108식 양가태극권」,1992, 학민사, p.20) 그렇다고 해서 이 선(線)에 의한 차이에 의해서만 이것이 동양무술이 갖는 특징적 차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동양무술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색다른 자세와 동작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보다 근본적인 특징은 '기'(氣)에 있다. 동양무술의 동작은 무(武)에 기(氣)가 접합, 일치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동양무술은 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기가 빠진 무술은 동양무술이 아니며, 기는 동양무술의 바탕이며 요체이다. 그러므로 동양무술의 피상적인 특징은 그 자세와 동작에 있다고 하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특징은 기가 그 바탕이라는데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의 운영이 수반되지 않는 무술은 동양무술이라고 할 수 없다(고동영, 한국상고무예사, 1993, 한뿌리, p.14). 무술의 깊은 경지에 들어간 고수(高手)는 그 동작이 부드러운 것 같으나 강하고, 나약한 것 같으나 역동적이다. 규격화된 획일적인 틀에서 벗어나 있어 몸 전체는 마음에 맡기고, 마음은 기를 조정하며, 기는 몸의 동작을 유도한다. 이것은 기로 말미암아 인간이 대자연과 하나된 상태이며 거기에는 강한 생명력이 약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양무술의 특징은 그 자세와 동작이 특이하다는데 있다고 하겠으나, 실은 대자연과 하나되므로 기가 바탕을 이룬다는데 있다(Ibid, p.16) 동양에서 기를 처음으로 운용한 분은 제1세 환인 임금(B.C. 7897-)이다. 그는 몸을 다스리는 어려운 수련을 통하여 도(道)에 이르러 병이 없이 장수하였다. 그러니까 치신득의(治身得道) 무병장수(無病長壽)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도에 이르러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기무수련(氣武修鍊)에 있었다. 모든 기혈의 순환이 원활하여서 병이 없이 오래 살게 되었던 것이다(Ibid, p.17). 이 기가 문헌으로 처음 등장하고 있는 것은 한나라 때부터 입으로 전해져 오던 것을 환웅천왕(桓雄天王, B.C. 3897-3804)이 기록하게 한 삼일신고(三一神誥)이다. 이 삼일신고에는 지감(止感), 조식(調植), 금촉(禁觸)등 기무(氣武) 수련의 기본지침이 수록되어 있다. 삼일신고에 수록된 기는 전국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정설되어 있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의 기에 관한 기록보다도 약 3,500여년이 앞선다. 환웅천왕은 백성들에게 기를 직접 강론하며 기무수련을 독려하는 등 무술을 국책으로 시행함으로써 백성들은 건강하여졌으며 건전한 정신을 갖게 되어 도덕적으로 순화되었다(Ibid, p.19). 이렇게 무술에서의 기는 인간의 건강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일찍이 장자는 '기가 모이면 생(生)이요 흩어지면 사(死)'라고 했다. 이는 기가 곧 생명 활동의 원동력이라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서도 잠재적 관념으로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기가 넘친다'고 말하거나 '기가 허하다'고 말하고, '기가 막혔다', '기가 죽는다', '기진맥진한다'고 말한다(봉산, 태극봉 기공, 1994, 도서출판 유림, p.25). 동양무술은 수련을 통해서 사람을 기가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는 말과 같다. 동양무술이 단지 무(武)를 다루는 기술로서가 아니라 건강(健康)을 다루는 생명의 차원으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것인가?
(2)심(心) 동양무술은 심(心), 곧 마음의 다스림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정신통일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무술에 임하기 전에 먼저 정신을 통일하는 수련에 집중하는데 이는 수련방식은 '정신의 운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체운동을 지도해야 한다. 즉 정신은 의지하고 신체는 행동하는 것이다(표충실, 태극권 '완전 건강을 위한 108식 양가태극권, 학민사, 1992, p.23). 이 정신 통일을 위한 방법은 무술의 시작과 함께 해 왔다고 할 것이다. 요가(yoga)가 발달한 인도는 열악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무술과 같은 신체적 활동은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인도는 무술적 측면보다는 건강 측면과 종교 양식에 필요한 무용이 발달하여 행해졌고, 여기에 다양한 건강법이 종교 교의에 들어가 있었다(노희덕, 나영일, 조명렬 공저, 체육사, 1996, 형설출판사, p.20). 이 중에 요가는 심신 훈련 방법으로 유명한데 호흡법을 중요시한다. 그 까닭은 신체적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명상을 가짐으로써 근육이 탄력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송방호는 '내몸을 살리는 요가 30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척추처럼 땅에도 뼈가 있으니 바로 산맥이 그것이다. 그런데 흙의 움직임에 따라 바위가 움직이고 산맥이 형성되듯이 척추의 어긋남이나 뒤틀림의 원인은 뼈 때문이 아니라, 근육 때문이다. 뼈는 근육의 지배를 받고 근육은 신경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신경은 뇌의 지배 아래 있고 뇌의 주인으로서 뇌를 다스리는 자는 뇌의 주인인 정신이다. 결국 정신을 다루는 명상이야말로 척추의 어긋남이나 뒤틀림, 뼈를 바루는 첩경이 되는 것이다."(송방호, 내몸을 살리는 요가 30분, 2003, 넥서스BOOKS, pp.32-33.) 요가에서 정신을 다스리는 명상은 건강한 인간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요가에서 병(病)이란 부조화의 다른 이름이다. 몸과 마음을 조화시키는데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그 결과가 병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흐트러진 부조화를 바로 잡기 위한 생명의 경고가 바로 병이고, 그래도 이 경고를 듣지 않을 때 통증을 유발하여서 부조화를 바로 잡는 행위를 촉구하는 것이다(Ibid, p.31). 명상에서는 다양한 호흡법을 사용하는데 이 호흡 수련만으로 거의 대부분의 질병을 예방하고 치유한다(Ibid, p.33). 정신을 다스리는 것과 호흡 수련의 중요성을 무술로 해 나가는 것이 있다. 합기도가 그것이다. 무술 합기도는 "선이나 요가와 같이 정좌 명상하는 것도 또한 마음을 통일하는 좋은 방법이다"(한정두, 생활합기도, 1994, 학민사, p.9)라고 말하여 선이나 요가에서 행하는 명상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합기도는 한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훈련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각자가 타인에게 의지함이 없이 일상생활에 적합하게 마음을 통일시킬 수 있는 독자적인 호흡법 '합기호흡법'을 만들어 수련한다. 정신을 집중하고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동양무술의 특징이며 또한 이것은 수련법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것은 기공(氣攻)의 원류가 고대인들이 생활 속에서 본능적으로 터득한 각종 체조법과 안마법, 호흡법과 정신 집중법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봉산, 태극봉 기공, 1994, 도서출판 유림, p.20). 이중 호흡법은 토납(吐納), 조기(調氣), 조식(調息), 복기(服氣) 등의 이름으로, 정신 집중법은 좌망(坐忘), 심재(心齋), 선정(禪定), 존상(存想) 등의 이름으로 체계화됨녀서 동양 고유의 독특하고도 심오한 수련법을 이루었다(Ibid). 각 유파와 계통의 수련법들은 각기 상이한 특징적인 점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이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형식과 내용의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 다음과 같은 수련상의 세 가지 공통점을 지니게 되었다(Ibid, p.21). 첫째, 몸의 형태(자세)를 바로잡고 바르게 움직이는 법을 배워서 실천한다. 이것을 조신(調身)이라고 한다. 둘째, 호흡을 올바르게 하는 법, 호흡을 적절히 조절하는 법을 배워서 실천한다. 이것을 조식(調息)이라고 한다. 셋째, 마음을 안정시키고 의식과 정신력, 즉 의념(意念)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법을 배워서 실천한다. 이것을 조심(調心)이라고 한다. 어느 유파, 어느 계열의 수련법이건 간에 수련 양식과는 관계없이 위의 세 가지 기본 요소를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곧 기공법이다. 동양무술에서 호흡법과 정신 집중법을 수련하여 기공수련하는 것은 현대인에 있어서 다수자에게서는 건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건강이 절실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3)체(體) 무술(武術)은 신체 단련에 의한 운동이다. 태극봉기공은 수련을 가르치는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건강 증진, 질병 치료, 무병 장수 등 육체적 생명의 보존과 연장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로서 명공(命功)이라 불렀다. 둘째는, 인성(人性) 도야, 지능 개발, 종교적 깨달음 등 정신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로서 성공(性功)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여타의 무술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이를 통해서 정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강을 보존하고 유지해 나가지 못한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태극권기공에서는 육체적 건강을 위한 기공법에도 조심(調心)이 포함되고, 정신 수양을 위한 기공법에도 조신(調身)이 포함됨으로써 수련 목적이 달라도 수련의 기본 방법에는 차이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봉산, 태극봉기공, 도서출판 유림, 1994, pp.22-23). 무술은 신체의 단련을 통해서 체력을 증진시켜 강하게 만든다. 이를 무술에서는 기(氣)의 작용으로 본다. 그래서 무술을 수련하는 것을 무공을 단련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를 단련하는 수련을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기가 모이면 생(生)이요 흩어지면 사(死)이다"라고 말하여서 기가 곧 생명의 원동력이라는 사상을 가졌다. 그래서 우리가 "힘이 하나도 없다"라거나 "매우 지쳐있다"를 말할 때 '기진맥진하다'라고 말하며, 이것이 지속되어 허약해 있는 사람을 한의학에서는 '기가 약하다'라고 말한다. 태극권에서는 수련은 일종의 육체적 훈련으로서 우리 몸 안의 혈액순환과 선(腺)의 활동을 증가시키고, 근육을 형성하게 하며, 관절을 유연하게 하고, 신경조직을 자극하면서도 전혀 심장의 활동이나 호흡 리듬을 높이지 않는다. 특히 음과 양의 원리에 일치하는 그 기술은 우리 몸의 근육은 물론 내장기관은 오장육부의 기능에 영향을 주고 우리 몸의 순환기관을 순조롭게 하며 노화작용의 과정을 억제하는 매듭이나 압박을 풀어준다. 한의학에서는 이것들을 기의 정체(停滯), 즉 기의 멈춤을 풀어줌으로써 각종 질병을 치료한다고 본다. 무술은 "사람으로 하여금 노화를 지연시키고 심적 활력을 변하지 않게"하며 동시에 그것은 신체에 힘을 더해주며 생기(生氣)를 회복시켜주기 때문에 평온한 마음의 수련을 도고 정신기능의 보다 높은 인식과 명확성, 그리고 집중력을 향상시켜 준다(표충실, 태극권 '완전 건강을 위한 108식 양가태극권', 학민사, 1992, p.18) 이렇게 볼 때 동양에서의 무술은 기(氣), 심(心), 체(體)의 일치를 통해서 의학적 효과를 얻는다고 할 수 있다.
2. 동양무술과 한의학의 유사점
1)동양무술이 한의학과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한의학의 역사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음
고대국가 시기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온 우리 나라 한의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고대국가시대 고조선시대에는 독자적인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고, 노예소유제적 봉건통치를 실시했다. 이 당시의 의료형태는 남겨진 기록이 없어서 그 전모를 알 수 없기에 이를 문헌상으로 유지할 만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단순한 민간요법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다만 후세에 나온 문헌으로 그 개략만을 짐작할 뿐이다. 이 시기의 법령인 범금8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매우 중요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국가의 질병관은 천벌이나 몸 안에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들린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질병이 발생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므로 '역신'을 물리칠 수 있는 무당 같은 존재에 의존했다. 이때의 의료는 동북아시아의 공통적인 특성 중에 하나인 샤머니즘에 바탕을 둔 무술형태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동시에 초기 의료형식인 단방약(單方藥)의 사용이 태동한 시기이기도 하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쑥과 마늘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에게 의학문화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한 이외에도 약물요법으로 산삼, 마늘, 쑥, 대추, 밤 등 여러 가지 식물성 약재와 가물치, 닭 등 동물성 약재를 사용했다. 그리고 돌침요법과 뜸요법도 사용되었는데 특히 돌침은 외과적 요법에도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국가의 위생관념은 우리 나라가 예로부터 흰옷을 좋아하고 청결했으며, 해충을 제거하고 몸을 가꾸는 위생적 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2)삼국시대 우리 선조들은 BC 1세기경 고구려·백제·신라라는 강력한 봉건국가를 세웠다. 삼국시대의 기본생산은 농업이었으나 어업·염업·상업 등이 상당히 발전했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또한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이 발전해서 건강과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심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고대국가시대부터 발달해온 보건의료제도를 이어받은 삼국은 이를 더욱 현실적이고 과학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전까지 단순한 경험의 수준에 머물렀던 의학은 이제 이론의 틀을 갖추어 고급의학으로 승화, 발전될 조건을 얻은 것이다. 고구려에는 '시의'(侍醫)라는 관직이 있었다는 기록이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전해지며, 이로 미루어보아 국가기구 내에 보건의료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 '약부'(藥部)라는 전문보건의료기구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니혼쇼키〉에는 백제에 의학 교육을 담당하는 의박사(醫博士)와 약을 다루는 채약사(採藥師), 그리고 정신의료를 담당했던 주금사(呪禁師)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의약이 분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는 태의승과 약장승이라는 의료직제가 있었으나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채약사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백제의 의약분업이 독자적이었음을 시사한다. 또 백제는 〈백제신집방 百濟新集方〉이라는 우리 민족 최초의 전문의서를 편찬했다. 그런가 하면, 신라에는 '약전'이라는 의료기관이 있었고 의료직제로 내공봉의사·국의·곡봉복사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또한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자선적인 구료사업을 했고, 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여러 활동을 했으며, 위생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고대국가시대에 비해 의학과 약물요법이 크게 발달해 중국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3)통일신라시대 7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는 격변기를 맞이했다. 당나라의 성립과 그에 따른 대외 팽창 정책은 삼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외세에 힘입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고구려 땅에서는 뒷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대진국)가 건국되었다. 발해는 많은 제도를 고구려에서 취했으므로 의학분야도 고구려와 유사할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통일신라는 676년 당나라와의 전쟁 이후 200여 년 간 외세 침입이 없었기 때문에 농업·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고, 그에 따라 보건의료제도가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때에는 중국의학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들어온 인도의학을 수용·융합하여 다양한 의료자원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는 승의(僧醫)들이 많은 활약을 했는데, 그 면모를 〈신라법사방 新羅法師方〉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국가제도를 정비하여 새로운 발전과 전문의료인의 양성을 도모하고 약전(藥典 : 통일신라시대의 의료행정을 담당했던 保命司를 말함)이라는 의료행정기관과 의학(醫學)이라는 의학교육기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구조상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의 건강보다는 지배계급의 건강을 중심으로 한 의료제도가 바탕을 이루었다. 삼국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발전했던 보건의료제도를 참작하여 보다 정비된 보건의료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당나라의 여러 직제를 수용했다. 대표적인 의료기관으로는 약전(藥典)이 있었는데 이는 한때 보명사(保命司)라고 불렸고, 의약기술자 이외에 행정업무를 보는 직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약무만이 아니라 보건의료사업 전반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약전 이외에 의료사업을 담당한 의사들의 관명으로는 국의, 공봉의사, 내공봉의사, 의관, 의박사 등이 있었다. 특히 의박사는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기관의 교수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국가적 정규 의사양성사업의 첫 기록이 692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신라의 의사양성사업은 그 당시의 당나라나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중국, 일본과 달리 침의사와 의사를 구별하지 않은 것, 교재의 차이('난경'과 '침경'의 사용), 기초 이론적인 교재의 사용 등에서 독자성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보건의료제도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상당히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자선의료사업을 들 수 있는데, 상설기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방별로 자선에 필요한 물품을 비치해둔 것이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질병관과 임상의학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의학의 교과과정을 보면, 중국의학을 대표하는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황제내경'(黃帝內經', '난경'(難經)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책들은 조선 중기의 〈동의보감〉의 저술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현재 동양의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본서적들이다. 이는 고대의 신비적·미신적 질병관에서 외부의 힘이 작용하는 외인론이 대두된 점과 당시 창궐하던 전염병을 여러 병으로 분류하여 처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임상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이전보다 더 많은 약물들이 치료에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곧 본초학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이미 '본초경' 등 본초서가 수입되었고, 중국과 일본으로 신라의 여러 약재가 수출되고 있었다. 특히 인삼·우황은 국제간의 증품으로 '삼국사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의 번성으로 승의들이 많은 활약을 했지만, 주술적인 형태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로 보건의료상 오류를 남기기도 했다.
(4)고려시대 10세기에 들어서면서 발해는 거란에 의해 무너지고, 극도로 타락한 신라는 후백제·후고구려와 30여 년 간의 전쟁을 거쳐 고려로 통일되었다. 통일 후 많은 침략전쟁을 치러야 했던 고려는 군인들과 민중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건의료사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컸고, 생산력 향상과 과학발전으로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여기에 통일신라시대가 가졌던 중국의학에 대한 연구학습은 고려에 들어와서는 자주의학의 발전으로 꽃피우기 시작했다. 태조 이래로 학교에 '의과'를 설치하여 의학교육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도의 실시 초기부터 의업을 별도 과목으로 운용했다. 이는 곧 당시의 의학교육이 이미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영석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 1147-70)을 필두로, 최종준의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1226),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1236) 등이 출현했다. 비록 이러한 책들이 중국의서를 모방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방 내용이 많이 다르고, 약재를 우리 것으로 대체한 것은 곧 자주적인 의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12세기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서 출판업이 발전했고 그에 따른 의학서적들의 간행과 보급이 크게 늘었으며, 항해기술이 발전함으로써 해외무역으로 인한 의료서적과 약재의 수출입이 활발해졌다. 또한 질병에 대한 인식 및 그에 대한 치료 능력이 크게 발전했고, 전염병에 대한 방역대책과 더욱 자세한 분류방법을 강구했다.
①전기(918~1018) 고려는 창업초부터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어진 정치를 표방했으며, 그에 따라 보건의료기관을 정비·강화하여 모든 군현에 의사를 배치했다. 이는 수·당의 의학에 영향을 받은 신라의학전통을 어느 정도 계승한 것이다. 또한 국력강화를 위해 인구증가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지배층의 건강증진을 위해 보건의료사업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중앙 보건의료기관으로 중앙의 지배계급의 건강 증진과 질병치료를 담당한 전의사(사의서·태의감 등으로 명칭이 변경된 시기가 있음)와 왕궁 내의 어용 보건의료기관인 봉의사(1357년 상의국, 1363년 봉어서, 1372년 봉의서 등으로 명칭이 변경)·사선서(국왕의 식사 담당 기관)·다방(차·보약 등을 끓여 제공하는 기관)·약장랑(왕세자의 건강과 보육을 책임지는 직제)·한림의관(왕과 귀족의 질병을 치료하는 직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서민들을 위해 혜민국(惠民局)·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제위보(濟危寶) 등을 설치하여 자선의료활동을 했다. 지방의료기관으로는 행정단위인 주·부·현에 약점(藥店)을 설치했다. 신라의 구제도에 따른 의학교육제도를 실시하면서 과거법을 새로 제정하여 의사를 육성·선발했는데, 의약교육의 질을 높이는 한 방편으로 평민들도 의과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했다.
②중기(1018~1259) 이 시기는 고려의 중흥기로 중국의 신흥국가인 송나라와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의학교류가 장려되어 의학서적·약물·의료인의 교류가 여러 형태로 진행되었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로 인도의 의학서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기 후반에는 여러 지식들이 융합되어 고려 자체의 경험방들이 편집되고, 향약에 대한 경험방도 간행되었다. 고려가 거란을 물리친 후 국력이 세계적으로 위력을 떨쳤고 그에 따라 대외교류가 활발해졌다. 고려 정부는 품질이 우수한 약재생산과 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당시의 고려는 막강한 국력으로 여진·송·일본은 물론 멀리 남방의 제국가와 아랍의 여러 나라와도 직접 약재 교류를 했다. 특히 송나라와는 약재의 교류뿐만 아니라 서적과 인적 자원의 교환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주요약품으로는 고려에서 송나라로 인삼·향유·송자(松子)를 수출했으며 송나라로부터 각종 향료, 서각, 용뇌(龍腦) 등을 수입했다. 이러한 의학적인 교류는 고려의 의학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랍인들은 7~8세기에 걸쳐 눈부신 해상활동을 통해 인도·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푸젠[福建]을 지나 일본과 고려까지 교역을 했으며 고려에는 수은·용치(龍齒)·점성향·몰약·대소목(大蘇木) 등 많은 의약품을 가져왔다. 이들은 대부분 열대성 의약품이었는데 이러한 희귀한 약물들을 접하게 되면서 아라비아 의약의 지식도 상당히 축적되었다. 고려는 또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일본 등과도 직접 교역했는데 이러한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향약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향약재에 대한 긍지를 갖게 되었다. 신라의학의 전통을 이은 고려의학이 인도의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중기초인 1010년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을 조각할 때 인도의 의학서들을 채록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실제로 초조대장경판은 유실되어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1236년경에 조각한 재조대장경판에서 10여 종의 의학서들이 관찰됨으로써 초조대장경판에도 채록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에서는 인도의학에 대한 신념이 깊었고, 당시의 명승들 중 의술에 정통한 승의들이 인도의술을 보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후반 향약(우리 고유의 의약)이라는 용어가 기록에 나타난다. 고려의 통치자들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는 천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당재만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왕이 병이 들면 비싼 당재를 사들이고 중국의 의료인을 초빙했다. 그러나 가난한 민중들은 산지에서 직접 약초를 채취하여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해외와의 의약품 교역과 그 실제적인 사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산천에서 나는 의약재가 우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향약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12세기에 접어들면서 향약에 대한 좋은 책들이 서술되기 시작했다. 특히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은 그 처방이 자세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며, 이름 그대로 급한 시기에 의사를 청할 수 없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걸쳐 계속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조선시대인 1417년(태종 17)에 간행된 것이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1부만이 보관되어 있다. 1226년 최종준이 편찬·간행한 〈어의촬요방〉에는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 의한 임상적 관찰의 결과가 잘 나타나 있다. 그외에도 중국·인도 등의 외국서적을 간행하거나 이러한 서적들을 참작하여 편술한 책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③후기(1260~1392) 몽골 제국인 원나라와 오랜 전란을 마친 후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여 왕래가 잦아지면서 남방열대산 약재 수입이 더욱 왕성해졌다. 중기 후반부터 연구되어오던 향약의 전문방서들을 더욱 발전시켜 고려의학의 자주적 기초를 더욱 굳게 했다. 고려는 원나라와 모든 문물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의학교류에 있어서는 왕비가 병들었을 경우 원나라 의사를 초청했으며, 원나라에서도 제왕이 고려의 의원을 초청해가곤 했다. 이처럼 100여 년 간 원나라와 20여 회에 걸쳐 의약품을 상호 교역했으며, 중요한 의약품이 오갔다. 고려에서는 인삼·향다(香茶)·수과(水果)·송자·탐라소유(耽羅蘇油)·오매(烏梅) 등을 보냈으며 원나라에서는 포도주·앵무·공작·황향 등을 보내왔다. 당시 몽골 제국의 판도는 중앙 아시아에서 유럽 일부에 걸쳐 있었으므로 원나라 관리 중에는 많은 서역인들이 있었고, 그에 따라 많은 서구의학적 요소와 접할 수 있었다. 중기 후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향약에 대한 연구와 믿음은 많은 의학 관련서적을 편찬·간행하게 만들었으며, 후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전문성을 띠게 되었다. 정도전은 1389년 맥법을 쉽게 해설한 〈진맥도결 診脈圖訣〉을 편찬했다. 그밖에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향약고방 鄕藥古方〉·〈동인경험방 東人經驗方〉·〈향약혜민경험방 鄕藥惠民經驗方〉·〈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 등이 있으며, 이들은 실전되었으나 조선시대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에 처방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5)조선시대 14세기말 고려 봉건정부의 국방중추를 담당하고 있던 신흥군벌 세력인 이성계 일파는 세기말적 정치혼란이 심해지고 사회·경제가 악화된 시기에 왕조를 일으켰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적인 생산수단의 발전이나 소유관계의 변화가 없는 왕조의 변화였기 때문에 고려의 여러 상황과 제도를 답습했다. 고려시대부터 큰 발전을 이룩한 인쇄술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발전을 거듭했으며, 유교를 표방한 정치이념에서 많은 책들이 인쇄·보급되었고, 〈농사직설〉·〈금양잡록〉 등 농업과학기술 서적의 보급도 늘어나 조선시대 경제의 토대가 되는 농업의 증대가 일어났으며, 그와 함께 수공업의 발전으로 국내외 상업의 발전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하에 역학(曆學)·지리학·의학 등 자연기술과학이 여러 방면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출판·인쇄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기술과학 서적들이 보편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자주적 의학 발전의 명제하에 의료제도를 힘을 쏟았는데 고려 때부터 시행한 과거제도를 확충하여 의료인의 사회적 진출을 확대하고, 효율적인 운용을 위하여 교육제도와 의료기관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교육기관으로는 중앙 및 각 도에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하고 '의학교수관'을 파견했다. 또 '습독청(習讀廳)'을 설치하여 의방서를 정리·연구하여 의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다. 의료기관으로는 중앙에 '내약방'·'전의감'·'혜민국'·'동서대비원'·'제생원'·'종약색'(種藥色) 등이 있었고, 지방에는 '의원'이 있었다. 이중 전의감은 주로 왕실의 의료와 아울러 의학교육을 담당했으며, 혜민국은 일반 민중의 치료를, 동서대비원은 전염병과 구호사업을, 제생원은 약재의 채취와 의서의 수집, 민중의 의료를 각각 담당했다. 이외에 부녀자의 진료를 담당하는 의녀(醫女)가 있어, 남녀의 구분이 엄격한 봉건사회에서의 부녀자 의료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완전한 제도를 갖춘 조선은 고려시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먼저 향약연구에 심혈을 쏟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조선 초기에 완성했다. 향약집성방은 모든 병을 망라하여 임상서로서 완전함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로 대치했고, 처방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경험방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약의 독립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의학이론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연구와 발전을 꾀했는데, 세종 때 중국의 모든 방서를 정리한 작업을 벌이기 시작해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는 당시 중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의방의 총서이다. 의방유취가 비록 중국방서를 정리하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한국의학은 수용의 단계를 벗어난 창조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완비하게 되었다. 선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허준에 의해 중국의학에 대한 동의학(조선의학)이 탄생하게 되어 우리 의학은 독자성을 가지고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이때부터 우리 의학을 동의학이라 한다). 동의학이라는 명칭은 '동의보감'에서 유래된 말이다. 허준은 책을 완성하고 중국의학과 우리 의학을 구별할 목적으로 특별히 '동의'의 보감이라 명명했다. 물론 '동의보감'이 중국의학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당시 중국에는 동양의학의 기본이론이 되는 음양오행을 우리 동의보감처럼 완벽하게 소화시킨 책은 없었다. 즉 허준처럼 음양오행을 그대로 완전히 기초에서 임상까지 적용시킨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도가술을 중시하여 의학에 접목시킨 것도 동의보감의 특색이라 할 것이다. 동의보감은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예방에도 큰 비중을 두어 예방의 구체적인 방법인 도가(道家)의 양생술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생활방법, 음식관계, 도인안교, 단전호흡 등이 포함되어 있다. 허준이 주창한 동의학은 중국의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중국의학이 여러 문파로 나뉘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음에 비해 동의보감은 모든 문파와 학설을 종합했으며, 중국의학의 정통을 황제내경으로부터 잇고 있다. 이렇게 외래의학의 수용에 성공한 우리 민족은 조선말 이제마에 이르러 그 꽃을 피워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 탄생하게 되었다. 동의수세보원은 세계의학 사상 초유의 '체질의학'을 개발하여 동의학의 진가를 한층 높였다. 이 책은 질병의 원인을 외부의 병사에서 찾지 않고 인체의 개별적인 체질의 특성에 따라 해석한 새로운 차원의 질병관을 담고 있다. 즉 인체를 그 체질적 특성에 따라 사상인(태음인·태양인·소음인·소양인)으로 나누고, 체질별로 질병의 원인·증상·치료방법을 각기 다르게 논한 의학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조선 시대의 전기, 중기, 말기로 시대적 구분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이는 이 시대의 의학, 곧 조선 시대의 의학의 역사를 아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①전기(1392~1592) 조선이 건국하면서 민중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전, 특히 한글창제에 따른 의약서적 편찬사업의 확대·보급, 보건의료체제의 강화 등 사회적 요인이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의료제도에 있어서 조선은 고려의 의료제도를 계승하면서 필요에 따라 새로운 기관을 설치했다. 중앙 의료기관으로는 내약방(內藥房), 전의감(全醫監), 혜민국(惠民局),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 또는 동서대비원), 제생원(濟生院), 종약색(種藥色), 의학(醫學) 등이 있었고, 지방 의료기관으로는 의원(醫院), 의학교수원(醫學敎授院), 의학교유(醫學敎諭), 의학원(醫學院), 의학승(醫學丞) 등이 있었다. 내약방은 왕실에서 상용되는 내약 전담기관으로 세종 때 내의원(內醫院)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관직은 도제조, 제조, 부제조, 첨정, 판관, 주부, 직장, 봉사 등이 있었다. 전의감은 국내 의료행정을 총괄하는 중앙관서로 의학교육 및 과거의 직무까지 겸했으며, 관직은 판사, 감, 소감, 승, 겸승, 주부, 겸주부, 직장, 박사, 검약, 조교 등으로 구분되었다. 혜민국은 고려 때의 기구를 답습한 것으로 일반민중들의 질환을 구치하는 기관이었고, 동서활인원은 도내의 환자들 중 무의탁 환자와 전염병 환자를 주로 취급했다. 제생원은 혜민국과 함께 일반민중을 위한 구료기관으로 의녀(醫女) 양성과 함께 각 지방의 향약재의 수납과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등의 편집과 같은 중요한 의료사업을 했다. 종약색은 약초를 재배하는 곳으로 설립된 후 곧 전의감에 통합되었다. 의학은 병(兵), 율(律), 자(字), 역(譯), 산학(算學) 등과 더불어 6학의 하나로 설치된 의학교육기관이었으며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 제생원, 혜민서 등에는 각각 의생방을 설치하여 의사를 양성했다. 이는 의료기관에 의사양성소를 병설한 조선 특유의 제도였다. 지방에서는 의원, 의학교수관, 의학교유에서 의사를 양성했다. 조선에서는 고려에 비해 의사과거를 비롯한 시험제도를 한층 완비했다. 잡과에 속한 것으로 녹시(의사로서 국가의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시험)와 의과시(고급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가 있었으며, 그밖에 검정시험과 유사한 시험과 침구사 시험이 따로 있었다. 조선 건국 후 많은 의학서적이 편찬·보급되었는데, 특히 1399년(정종 1년) 제생원에서 '향약제생집성방' 30권(338증, 2,803방)을 편성했고, 1432년(세종 13년)에 이를 보완하여 '향약집성방' 85권(959증, 1만 706방, 1,479침구법, 694종의 약재)을 간행했다. 이 책들은 우리 나라 향약이 풍토병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밝혔으며, 그에 따라 국내 각 지방을 조사하여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고 향약채취의 시기를 정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간행했고, 향약의 채취를 이 '향약채취월령'에 따라 채취, 처리했다. 또한 1445년 우리 나라에 전해오는 한의방서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자주적 입장에서 노중례, 김예몽, 전순의 등이 집대성한 '의방유취' 266권 264책을 편성 및 간행했다. 그리고 형사재판에서 법의학적 지식을 요하는 검시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원나라 왕여가 편술한 '무원록'(無寃錄)에 음주(音註)를 붙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1438년에 간행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사체검안서에 의해 재판을 실시하도록 했는데 절차는 초검, 복검, 삼검 등의 3검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에서는 초기부터 의과고시에 침구학이 다른 의학과 분리되었으며, 다른 의원들과는 별도로 배치되었다. 그외에 나력(癩瀝)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나력의가 있었고 창종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청에서는 치종의 등의 전문외과의가 양성되었다. 외과전서로는 '치종비방 (治腫秘方), '치종지남'(治腫指南) 등이 있는데, 치종비방은 1559년 임언국이 간행한 것으로 농양의 관혈적 절개요법등이 서술되어 있다. 치종지남에는 여러 가지 종농(腫膿)을 치료할 수 있는 절개술 등의 수술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제재술의 발달로 가공 약물인 가루약이나 납약(臘藥)을 제조했고, 이는 세종 때 편찬 간행된 '언해납약증치방'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우황청심원, 구미청심원, 소합원, 지보단, 목향보명단 등 37개의 납약 목록과 효과, 적응증, 금기사항 등이 적혀 있다.
②후기 200여 년 동안 안정기였던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일본과 명나라에 의해 서양의학과 문물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명나라의 도움을 받은 조정은 사대주의가 심화되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신흥 강국인 청나라와 2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민생이 피폐해졌다. 이로 인한 정치적인 부패는 더욱 심해졌고 의약기술의 발전도 침체에 빠졌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열강들의 문화적 침투가 시작되었다. 1593-1800년의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2번에 걸친 호란을 겪으면서 안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통치계급의 부정부패, 권력쟁탈을 위한 당쟁, 극심한 친명사대주의 등으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심각한 침체기다. 이러한 사회전반적인 보수성향과 사대주의는 우리 전통의학에 억압을 가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의학서적이나 의료인들에게 많은 핍박이 가해졌다. 또한 조선초 장려되어 어느 정도 활기를 띠던 향약의 수탈이 강화되면서 약초밭은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약재의 전반적인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와 더불어 인구증가 및 질병치료를 위해 더욱 많은 약재가 필요했으므로 약령시라고 하는 약재시장을 만들어 약재의 유통과 생산을 원활하게 하고자 했다. 의학에 대한 사고가 지배계급에서는 사대주의 경향을 띠면서 다소 추상적인 형태였던 반면, 실제로 의료 일선에서 활약하던 의사들은 보다 자주적이고 임상적인 면을 강조한 의료기술을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의약활동을 한 명의 허준에 의해 '동의보감'(東醫寶鑑; 1621년)이 25권 25책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매 편이 모두 전문 의학책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저술로서 중국과 일본 등 동양의 여러 나라 의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의보감은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근세 임상의학의 각 과를 망라한 한방의학의 백과사전으로서 청나라와 일본에서 출판되어 현재까지도 한의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동의보감의 전통을 이어 18세기 전반에 많은 의학저서가 편찬되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조선은 왕자 2명을 포함하여 많은 신하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그들은 청나라에서 많은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서양 문물 중에는 천주교리의 내용을 담은 서적이 많았는데, 그러한 서적 중에는 의학에 관한 내용이 함께 수록된 서적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서양 문물과 그 영향을 받은 중국의 변화된 문화는 조선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상은 의학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에 따라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서양의학의 생리학 분야와 혈액·호흡·신경계 등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이헌길의 '마진방'(麻疹方)이나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1798) 등 전염병에 대한 책이나, 자신들의 임상경험을 살린 경험방서들의 서적들이 간행 출판되었다. 특히 마과회통에는 천연두 치료를 위한 E. 제너의 종두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적들은 대부분 당시 집권세력이 아닌 남인들에 의해 연구·발전되었으므로 불행히도 사회전반에 폭넓게 수용되지는 못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18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더욱 성장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적 관계와 낡은 봉건적 관계의 모순이 한층 심화되었다. 한편 구미 열강의 침략활동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감행되었다. 이러한 세계 정세에서 국가부강을 위해 낡은 제도를 청산하고 생산력을 강화하는 새로운 질서와 사상이 필요하다는 개화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개화사상은 자본주의 발전이 미숙했던 당시에 중간 계층이며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고 있던 중인과 선구적인 양반층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당시 중인이 대부분이었던 의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근대 초기의 한방의학은 '동의보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황도연의 '부방편람'(附方便覽; 14권), '의종손익'(醫宗損益; 12권), '의방활투'(醫方活套; 1권), 황필수의 '방약합편'(方藥合編; 1권) 등은 동의보감 중 실용에 긴요한 처방들을 실제 의료에 맞게 편집한 것이다. 또한 사상의설(四象醫說)을 주창한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3권)과 부양론(扶養論)을 강조한 이석고의 '의감중마'(醫鑑重磨) 등이 있다. 서양의학의 본격적인 전래는 1876년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성립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서울·부산 등 각 개항지에 서양의학에 의한 병원을 개설하고 의료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1877년 부산 제생의원(齋生醫院)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개설한 서양식 의료기관이다. 그후 계속해서 원산에 생생의원(生生醫院), 1883년 인천 일본영사관에 일본병원, 같은 해 서울 일본공사관에 일본관의원 등을 설치했다. 이러한 일본의 서양식 의료기관은 물론 자신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것이었지만 우리나라 의료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일찍이 정약용의 〈마과회통〉에서 소개된 종두법은 우리나라의 일부지역에서 시행되다가 서학과 천주교의 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9세기말인 1880년대에 들어와서 박영선·지석영 등에 의해 실시되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 이후 보건의료문제에 대해 형식적으로나마 변화를 시도하여 갑신정변 당시 많은 활약을 했던 앨런을 중심으로 1885년 왕립병원인 광혜원(廣惠院 : 2주일 뒤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했다. 이 병원은 개원 당시부터 미국선교회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후로도 조선 정부의 재정상태 악화로 더욱 미국선교회에 의존했다. 미국선교회는 전국각지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많은 의료활동을 했다. 1884년 개혁자들의 갑신정변 실패와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및 통치권 내부의 부패와 무능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외세의 힘에 의존하려던 조선 정부는 결국 조선침략에 대한 빌미를 주게 되었다. 이에 혁신관료들은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했고, 그에 따라 보건의료제도도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 혁신관료들은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군국기무처를 창설했고, 이 기구에 의해 의료사업은 내무아문에 소속된 위생국이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의과시 제도가 폐지되고 의사 임명 및 등용이 새로운 관리임용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또한 약재의 생산·판매 등에서도 구법이 폐기되었다. 1897년 근대식 병원인 내무병원을 설립하고 다음해에 광제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 일반구료사업과 죄수치료·전염병치료 시설을 갖추었으며, 1906년부터 창녀들의 검사를 실시했다. 1907년 의정부직할 대한의원이 설립되어 광제원의 역할을 계승·담당하고 교육부·위생부를 증설했다. 의학교육제도로는 1899년 학부직할로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다. 이것은 1907년 대한의원이 설립되면서 대한의원교육부로 개칭되었다가 1910년 대한의원 부속의학교가 되면서 의학교 내에 의학과와 약학과를 두었으며, 산파 및 간호과도 병설했다. 그밖에 대구·평양 등에 의학강습소가 있었으며, 사립의학교로는 제중원의 제중원의학교가 1904년 미국의 도움으로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의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1908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1909년 사립 세브란스 병원의학교로 정부인가를 받았다.
(6)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의 한일합병에 따라 이 땅에는 군국 식민주의가 실시되었다. 이 시기의 의료행정은 조선총독부의 경무총감부 내에 위생과를 설치하여 담당하게 했다. 의료행정은 크게 보건과 방역으로 분류되었으며, 서의학을 시행하는 의사와 종래의 한의학을 배운 의생(醫生)으로 구분하는 이원적 방법을 취했다. 또한 의사는 의사, 한지의사(限地醫師) 또는 치과의사, 입치영업자(入齒營業者)로 구분했다. 한지의사와 입치영업자는 당시 부족한 의료인들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자격을 인정했다. 그밖에 산파, 간호부, 안마술사, 침구술사 등의 면허도 별도로 시행했다. 약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약제사, 약종상, 제약사, 제약업자, 매약업자 등으로 구분했다. 행정상 필요한 의료인을 위해 공의, 촉탁의를 두었는데, 공의는 주로 전염병 예방, 지방병 조사, 종두 실시, 공공위생, 예기와 창기와 작부들의 건강진단, 사체검안 등의 공무의료를 취급했고 촉탁의는 경찰임무를 위해 공무상 상해, 질병진단, 행려병자의 처리 등을 취급했다. 방역은 전염병 예방에 관한 것으로 예방령에 규정된 콜레라, 적리(赤痢),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두창,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페스트 등 9종 전염병과 폐디스토마, 나병 등 지방병, 마진, 폐결핵 등의 예방규정도 반포되었다. 의학교육제도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되었다가 1916년 4년제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4년제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압적으로 아사히(朝日) 의학전문학교로 그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1932년 수업연한이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설립했는데, 일본인 중심으로 우리나라 학생은 25% 정도였다. 1922년 경성치과의학교가 설치되었다가 192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7)8·15해방 후 현재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 나라는 해방을 맞이했다. 미군정시기를 거쳐 1948년 남한지역에 단독으로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의료제도가 점차 현실에 맞도록 정비되었다. 의학교육의 연한은 종전대로 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통일되었으나 국가시험 및 수련과정인 인턴·레지던트·전문의 자격시험 및 일반의료행정의 모든 제도들이 미국 전통을 많이 답습했다. 미군정 초기에는 중앙에 위생국, 그후에는 보건후생국을 두었지만 1946년 보건후생부로 독립하여 의무국·예방의학국·위생국·수의국·약무국·구호국·후생국·부인국 등 13국을 배치했고 지방에도 보건후생국을 두어 의료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사회부 안에 보건국을 따로 설치했다가 그 다음해인 1949년에 사회부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뒤 보건부는 사회부와 이합(離合)을 계속하다가 1955년 보건사회부(보사부)로 독립되었으며, 보사부는 1994년 보건복지부로 개편되었다. 2001년 현재 보건복지부는 보건 관계로 보건정책국과 보건증진국을 두고 보건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산하에 국립의료원·보건원·보건안전연구소·정신병원·소록도병원·재활원·결핵병원·검역소 등을 두고 보건 및 방역 사업을 연구·관리하고 있다. 지방에는 시립병원·공의·보건소 등을 통해 의료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 협력하고 있으며 국제아동기금 등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경성대학교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설립했고, 세브란스 의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대구의학전문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광주의학전문학교(지금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도 6년제 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정부수립 후에는 많은 의과대학을 신설했고 그 소속병원들의 개편을 시행했다. 1999년 현재 의예과를 두고 있는 학교 39개교, 6년제 치과대학 11개교, 한의과대학 11개교가 설치되어 있어 의학교육은 서의학과 한의학 2원제로 실시되고 있으며, 서울대·연세대·경희대·가톨릭대·고신대 등에서는 보건대학원을 병설하여 공중보건의 전문석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학은 각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기초의학에 있어서 많은 발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임상의학에 있어서도 외과학, 방사선의학, 정신과의학, 첨단의학 분야 등은 발전을 거듭해 국제의학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지 12년 만인 1989년 전국의료보험이 실시되었고, 2000년에는 오랜 논의 끝에 의약분업이 시행되어 의료형태가 더욱 전문적으로 안정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또한 예방의학, 환경위생, 공중보건학 등 각 분과별 연구에 각 대학의 예방의학 분과와 보건대학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Daum, Daum백과사전, 한국의학사). 이상을 보게 되면 한의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꽃을 피웠다. 특히 허준과 이제마에 의해서 한의학(漢醫學)은 최고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그 진가를 더욱 발휘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고, 서양 의학의 본격적 도입으로 한의학은 점차 백성들에게서 멀어져갔다. 서양 의학에 의한 첨단 과학적 진단은 한의학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진단과 치료가 빨랐으며 또한 그 효과도 빨랐다. 그뿐만 아니라 외과적 치료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보니까 점차 사람들은 서양 의학을 찾았으며 선호하게 되었고 한의학은 주로 보양제를 만들어 주는 곳으로 또는 삔데 침을 놓아주고 뭉친 피를 뽑아주는 부앙을 뜨는 곳 정도로 인식되어 갔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상황이 많이 전환되었다. 대학에서 한의학과과 의예과보다 더 선호가 되고 있는 것은, 그래서 가장 우수한 두뇌가 학의학과를 지원하는 것은 단지 한의학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보건의료에서 서양의학보다 동양의학인 한의학이 우수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다행이며 또한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2) 한의학은 동양철학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점에서 동양무술과 유사함 한의학(韓醫學)은 중국의 의학을 도입하여 우리 민족의 실정에 맞게 변형, 발전시킨 민족의학이다.
(1)한의학(韓醫學) 용어에 대하여 지금 우리 나라가 사용하고 있는 한의학은 한문으로는 '韓醫學'이다. 한국의학이라는 뜻에서이다. 한의학(韓醫學)은 본래는 한의학(漢醫學)이라 표기했던 것인데, 1986년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중국의 한의학(中醫學)이나 일본의 한의학(황한의학)과 우리 나라의 한의학을 구별하기 위하여 '漢'을 '韓'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고 보건사회부의 채택과 법령개정을 거쳐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서 중국의 한의학은 중의학(中醫學)으로 부르며 우리 나라의 한의학은 한의학(韓醫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한의학은 중국의 의학을 도입하기는 하였으나 허준과 이제마를 통해서 우리 나라 고유의 한의학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허준과 이제마는 우리의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의학이 중국의 것만을 그대로 수입하여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의 독창성과 자주성을 발휘하여서 우리 나라에 알맞는 의학으로 정립하고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의학(韓醫學)은 한(漢)의학이란 중국의 한나라 때 형성된 의학을 기본 의미로 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서 기본적인 이론체계와 임상의학의 제반 내용들은 현재에도 한(漢)의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본 논문은 우리 나라의 한의학(韓醫學)을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의 한의학(韓醫學)에 대한 고집에서가 아니라 중국의 의학을 도입하여 동양의학으로 더욱 발전시킨 것에 대한 이해에 의해서 이다.
(2)한의학(韓醫學)의 동양철학 사상 한의학은 크게 음양설과 오행설을 합한 음양오행학과 사상의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음양오행학 가. 음양오행학설 동양철학 사상인 음양오행학설(陰陽五行學說)은 한의학에서도 중요한 기초이론이다. 한의학의 자연관과 인체의 생리, 병리에 대한 원리와 진단, 치료, 약물 등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음양오행은 음과 양의 2기와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5행을 가지고 자연현상이나 인간, 사회의 현상을 설명하는 사상이다. 본래 음양설과 오행설은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엽에 하나의 사상체계로 통합되었다. 음양설과 오행설을 통합하여 체계적인 음양오행설을 성립시킨 대표적인 학자는 추연(鄒衍)이다. 그는 음양의 기와 오행에서 발생하는 덕(德)의 소식(消息)이론으로 사물의 변화를 설명했는데,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학설로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있다. 오덕이란 오행에서 발생한 다섯 종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오덕종시설에 따르면 천지가 나누어진 이래 오덕의 전이에는 일정한 기운이 있고, 거기에 적응한 정체(政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왕조의 제왕은 누구나 이 오행의 덕 가운데 하나를 갖추어 왕자가 되며, 모든 왕조는 오덕의 순서에 따라 흥망하게 된다. 그리고 5행의 상호관계는 토 - 목 - 금 - 화 - 수와 같이 각기 전자의 왕조를 이기고서 나타난다는 상승(相勝)과 순환의 법칙, 즉 상극설(相剋說)의 입장을 취했다. 그후 이 오덕종시설은 진한의 교체기를 거쳐 전한(前漢)의 정치적 안정기가 오면서 목 - 화 - 토 - 금 - 수로 차례차례 생성해간다는, 정권 선양(禪讓)의 형태를 취하는 상생설(相生說)로 변화했다. 그리고 진한대의 음양오행설은 '여씨춘추'(呂氏春秋) 12기(十二紀)와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보이는 시령설(時令說)로 발전되었다. 시령설은 사계절의 변화와 인간의 정사를 오행상생의 순환원리에 의해 설명하고, 다양한 인간사의 현상과 4시(時), 12월(月)의 자연현상을 각각 오행에 배당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이 음양오행의 순환운동에 따르면 그 화평상태가 유지될 수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면 자연과 사회의 화평이 깨어진다고 했다. 또한 인간의 행위 가운데서는 특히 천자의 통치가 음양오행의 순환운동을 제대로 따름으로써 사회의 안녕과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했다. 한대에는 이러한 음양오행설이 유가와 도가를 포함한 모든 사상에 공통적인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지게 됨으로써 하나의 보편적인 사상으로 성행했다(Daum, Daum백과사전, 음양오행설) 이처럼 음양오행학설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고대의 소박한 유물론적 관점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 것인데, 음양오행학설은 옛사람들이 자연계의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상방법 범주에 속하는 것인바 사람도 자연계 사물의 하나이므로 한의학에서는 자연계에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을 인체에 유사하게 비교하여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이 이론을 의학에 적용하게 되었다.
나. 음양오행 사상의 의학적 적용 한의학에서는 오행의 상생(相生), 상극(相剋)의 이치를 원용하여 내장의 상호자생, 상호제약의 관계를 설명하고 오행의 귀납법으로 인체 각 부위간의 상호 연관을 설명한다. 오행의 운행에 따른 상생 관계는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이 된다. 그리고 오행의 상극 관계는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이다. 이를 인체에 적용하면 간은 목, 비는 토, 심은 화, 폐는 금, 신은 수에 배속된다. 가령 간을 예로 들면 심장과 상호자생의 관계로 있다. 그리고 담과 표리관계(表裏關係)에 있다. 한의학에서 오행학설은 장부의 병리 현상(변화)를 추정 해석하고 질병을 진단하며 치료하는데 중요한 기본 이론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음양오행의 이론은 오늘 한의학의 해부, 생리, 병리, 임상 및 약물학 등 모든 부분에서 그의 이론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음양오행의 이론으로 인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완전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는 없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음양오행은 한의학에서 그 이론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다. 음양오행 사상의 인체 적용 한의학에서는 음양오행학설에 의해서 인체를 소우주로 보기 때문에 인체가 하늘과 땅을 본받아 구조와 기능이 이루어졌다는 천인상응이론(天人相應理論)과 자연계의 생성 및 변화가 1일 또는 1년마다 규칙적으로 교대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우주 운행 원리인 음양을 중심으로 한 5운6기(五運六氣)의 법칙을 인체에 적용하여 그 인체의 생리 현상을 설명한다. 내장을 기능에 따라 장과 부로 나누며 장에는 간, 신장, 비장, 폐, 심장의 오장이 있고, 부에는 담, 방광, 위, 대장, 소장, 삼초(三焦)의 육부가 있다. 여기서 간은 담과, 신장은 방광과 비장은 위와 폐는 대장과, 심장은 소장과 음양 관계에 있다.
라. 장기(臟器)의 한의학적 개념 현대의 생리, 해부, 조직학적인 견지에서 본 장기 개념보다 범위가 광범위하다. 한의학에서는 각 장기뿐 아니라 여러 세포 조직, 나아가서 정신 건강에 이르기까지 그 장기의 기능과 유사한 성질의 현상들은 모두 관찰하게 되므로 보다 넓은 장기 개념이 형성된다.
마. 무형적 음양과 유형적 음양 한의학에서는 음양을 무형적(無形的) 음양과 유형적 음양으로 구분한다. 무형적 음양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음과 양으로 모든 생리적 조절이 유지되고 적당한 신진대사가 영위되게 하는 무형적 힘을 한의학에서는 원신(元神)이라 하며, 이것을 두 방면으로 보아 진음(眞陰)과 원양(元陽)이라 한다. 유형적(有形的) 음양이 서로 대립 상반하는데 대하여 진음과 원양은 생명을 위하여 서로 타협, 조화한다. 병리는 음양의 부조화가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음양 부조화의 원인에는 선천적인 소질의 허약,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 외감(外感), 내상(內傷), 노손(勞損) 등이 있다. 질병은 이러한 내재적 원인과 외래적인 원인이 합세한 까닭에 발생한다고 본다.
바. 한의학적 치료 방법 한의학에서는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진단이 나오면 여러 방법에 의해서 수단을 쓴다. 이중에 대종을 이루는 것은 약물요법과 침구요법이다. 그 외 한의학 특유의 물리요법이 주요한 치료 수단으로 이용되는데 한의학 물리요법으로는 기공요법, 부항요법, 지압요법, 한방체조요법 등이 있다.
②사상의학(四象醫學) 사상의학은 19세기 후반에 본래는 유학자이나 한의학에 일생을 바친 이제마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체질의학'이라고도 말한다. 사상(四象)은 주역(周易)의 음양의 원리를 따른 것으로 음과 양의 양의를 한 단계 발전, 분리한 것인데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네 가지로 나눈다. 이제마는 인간론과 수양론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인간의 타고난 체질·기의 강약과 심성을 설명하고 약물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편벽된 성격과 감정의 수양·조절을 통하여 질병을 예방·치료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의 교화를 이루고자 했다. 이것은 맥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사장사부와 칠정이 아닌 사정을 주장하여 기존의 한의학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독특한 의철학체계(醫哲學體系)이다. 즉 한의학의 핵심이 '병증' 감별에 있다면 사상의학의 핵심은 '체질' 감별에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한의학은 상이한 두 의학체계를 축으로 하여 〈동의보감 東醫寶鑑〉과 향약 관련 제서, 사암의 침구이론, 이규준의 부양론(扶陽論) 등에서 축적된 성과들을 바탕으로 새롭고 더욱 정확한 진단, 치료이론의 개발 및 치료 장비·기술·방법들을 혁신하기 위한 과제들을 안고 있다.
3) 한의학에서의 의술은 동양무술의 수련과 원리적으로 같음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할 때, 동양무술은 한의학과 매우 밀접한 연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양무술은 여기에 깃든 동양철학 사상에 의해서 그대로 수련이 된다. 철학 사상과 무술의 수련이 별개가 아니라 철학 사상 그대로가 수련으로 배어 나오는 것이다. 그것처럼 한의학도 여기에 깃든 동양철학 사상이 의술로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 하나는 무술로 하나는 의술로 말이다. 무술은 수련하는 한 개인에 집중되어 그 자신의 건강을 도모하는데 있다고 하면 의술은 다른 사람에게 건강의 혜택을 주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관 관계로 인해서 한의학에서의 의술은 동양무술의 수련의 원리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의학에서 의술을 행함으로써 얻는 치료의 효과는 무술을 가지고 수련을 함으로써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면에서 동양무술, 특히 우리 나라의 전통무예를 배우는 것은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전통무예를 통해서 기대할 수 있는 의술적 효과를 다음 단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Ⅴ. 무술이 갖는 의술적 효과
1. 사상의학(四象醫學)으로 본 체질의 문제점 사상의학은 인간의 체질을 4가지로 나눈 한의학 분야로서 이제마(李濟馬)가 창안했다. 1894년에 저서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을 통해 인간은 천부적으로 장부허실(臟腑虛實)이 있고, 이에 따른 희노애락의 성정(性情)이 작용하여 생리현상을 빚으며, 체질에 알맞는 음식과 양생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사상의학설은 체질의학의 원전으로서 각자의 체질을 안다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요지이다. 사상의학의 4가지 체질이라 함은 태양인(太陽人)·소양인(少陽人)·태음인(太陰人)·소음인(少陰人)을 말하는 것으로 각 체질에 따른 장부허실이 상대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만일 허한 것이 더욱 허하거나 실한 것이 더욱 실할 때 병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이를 장부의 태(太)·소(少)라고 했다. 여기서 태·소란 해부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며, 태양인은 폐대간소(肺大肝小), 소양인은 비대신소(脾大腎小), 태음인은 간대폐소(肝大肺小), 소음인은 신대비소(腎大脾小)라고 했다. 이제마에 의해서 주창된 사상의학(체질의학)은 모든 인간은 체질적으로 완벽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질병을 얻을 수 있는 여지를 늘 안고 있다. 무술은 수련에서 갖는 기공의 훈련으로 이 문제를 사전에 해결함으로써 건강한 몸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사상의학으로 본 체질의 문제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태양인(太陽人) 태양인의 신체는 Y자형에 가깝다. 가슴 윗부분이 잘 발달한 체형이다. 이러한 체질은 폐가 크고 간이 작기 때문에 목덜미가 굵고 머리가 크다. 얼굴은 둥근 편이고, 살이 비후하지 않으며, 보통 이마가 넓고 관골이 나왔으며 눈에는 광채가 있다. 또한 간이 작으므로 척추와 허리가 약하며,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기대어 앉거나 눕기를 좋아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오래 걷지 못한다. 대체로 몸은 마른 편이며, 여자인 경우에는 몸이 건강해도 자궁 발육이 잘 안 되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성격은 남들과 잘 어울리고 과단성·진취성이 강하다. 또한 머리가 명석하고 뛰어난 창의력이 있어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연구한다. 반면에 계획성이 적고 대담하지 못하며, 남을 공격하기 좋아하고 후퇴를 모른다. 지나친 영웅심과 자존심이 강하여 일이 안 될 때는 심한 분노를 표현한다. 태양인은 더운 것보다는 차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뜨거운 음식을 오래 먹게 되면 위가 상하거나 식도경련, 식도협착증 같은 것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2)소양인(少陽人) 소양인은 비가 크고 신이 작으므로 비부위 흉곽이 발달되고 허리 아래 관골부(寬骨部)가 약하다. 즉 소양인은 가슴 부위가 충실한 반면 엉덩이 아래가 약하다. 대개 몸은 비후하지 않은 편이며, 상체가 실하고 하체가 가벼워서 걸음걸이가 빠르다. 항상 먼 곳을 바라보면서 걷고 곁을 잘 살피지 않는다. 머리는 앞뒤가 나오거나 둥근 편이고, 얼굴은 명랑하다. 눈이 맑고 반사적이다. 입은 과히 크지 않고 입술이 얇으며 턱이 뾰족하다. 피부는 희지만 윤기가 적고 땀이 별로 없다. 말소리는 낭낭하고 쓸데없는 이론을 싫어하며, 말할 때는 논리적이지 못하다. 보기에 경솔하고 무슨 일이나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기 때문에 실수가 많고 일이 거칠며, 싫증을 내기 쉬워서 용두사미격이 된다. 여자는 다산을 하지 못하고 남자는 양기부족이 많다. 소양인은 밖의 일은 좋아하지만 가정이나 자신의 일은 경솔히 여긴다. 남의 일에는 희생을 아끼지 않고 그 일에 보람을 느끼므로 자기 일을 돌볼 겨를이 없다. 판단력이 매우 빠르나 계획성이 적으며, 일이 안 될 때는 체념을 잘한다. 의분이 생길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야 만다. 항상 열이 있으므로 체질상 더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겨울에도 냉수를 좋아한다.
3)태음인(太陰人) 태음인은 간이 크고 폐가 작으므로 허리 부위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자세가 굳건하다. 반면에 목덜미의 기세가 약하다. 키가 큰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골격이 굵고 체격이 건실하며 살찐 사람이 많고 특히 손발이 큰 편임으로 작은 사람은 드물다. 태음인은 대륙성 체질을 타고났으므로 사상인 중에서는 가장 체격이 큰 편이다. 피부근육이 견고하고 땀구멍이 성글며, 항상 땀기가 있다. 얼굴은 윤곽이 뚜렷하여 눈, 코, 귀, 입이 크고 입술이 두텁다. 턱이 길고 두터워 교만하게 보인다. 상체보다 하체가 건장하여 걸을 때는 약간 고개를 떨어뜨리고 앞을 내려다보며 배를 내밀고 발을 땅에 놓아 오리걸음같이 걷는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양반걸음같이 위엄 있게 팔을 저으므로 교만한 인상을 준다. 여자의 경우에는 눈매의 자태는 없으나 시원스럽고 남자의 경우는 눈끝이 치올라가서 범상하고 또 성난 사람 같은 인상을 준다. 몸에는 늘 땀기가 있고 활동을 하면 땀이 잘 흐른다. 찬밥을 먹을 때도 땀을 흘리는 사람은 대개 태음인에 많다. 땀을 흘려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고 도리어 신진대사가 잘 되므로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여자들은 겨울에 손이 많이 튼다. 성격은 겉으로는 점잖으나 속은 음흉하여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이 넓을 때는 바다와 같고, 고집스럽고 편협할 때는 바늘구멍같이 좁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무모하게 밀고 나가려는 우둔성이 있다. 비록 묵묵히 있어도 속으로는 무궁무진한 설계를 하여, 실행에 옮기게 되면 대성할 수 있다. 자기 주장을 말할 때는 남들이 좋아하거나 말거나 끝까지 소신을 피력하는 끈질긴 성격이다. 태음인은 비교적 식성이 좋고 대식가가 많으나 성격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므로 때에 따라 폭음폭식을 하여 위를 손상시키는 일이 많다.
4)소음인(少陰人) 소음인의 체형은 중초비위(中焦脾胃)가 허약하고 신방광(腎膀胱) 부위가 발달되어, 상체보다는 하체가 실하지만 위아래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따라서 소음인은 엉덩이가 크고 앉은 자세가 성장하고 가슴둘레를 싸고 있는 자세가 외롭게 보이고 약하다. 대체적으로 키는 작은 편이나 큰 사람도 있고, 용모가 잘 짜여 있어 여자는 오밀조밀하고 예쁘며 애교가 있다. 피부가 매우 부드럽고 밀착하여 땀이 적으며 겨울에도 손이 잘 트지 않는다. 몸의 균형이 잡혀서 걸을 때는 자연스럽고 얌전하며, 말할 때는 눈웃음을 짓고 조용하고 침착하며 논리정연하다. 가끔 한숨을 쉬는 일이 있어 남 보기에 고민하는 사람 같다. 성격은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다. 겉으로는 유연해도 속은 강하다. 작은 일에도 세심하고 과민하여 늘 불안한 마음을 갖는다.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고 실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머리가 총명하여 판단력이 빠르고 매우 조직적이며 사무적이다. 자기가 한 일에 남이 손대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남이 잘하는 일에는 질투가 심하다. 또한 작은 일에도 마음을 끓이고 늘 불안정한 마음을 가지므로 신경증 환자가 가장 많다. 다른 체질에 비해 소음인이 병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음인은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 되고 장이 약하다. 소음인에 이로운 음식은 닭·양·염소·노루·꿩·대추·사과·귤·복숭아·시금치·미나리·양배추·찹쌀·조 등이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사상의학은 인간의 건강과 질병 상태를 각 개인에 맞게 규정한 우수한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자의 정확한 체질을 알 수 있는 방법에서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체에 적용하는 것이 어려우며, 4가지의 체질로만 분류해 너무 단순하고 서로 중복되는 측면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상의학은 개체의 활동능력과 적응능력을 지배하는 반응능력을 설명하고 유전생물학적인 차이점을 규정한 독창적인 이론이다. 또한 체질의 본질적인 측면과 개체의 특성을 논하여 생리적·심리적 측면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한의학의 전체성 개념을 잘 구현한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내경 영추(靈樞)의 제53편 논통(論痛)에서 황제(黃帝)와 기백(岐伯)과 갖는 대화에서 체질의 차이에 따라서 그 처방도 달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황제:근골(筋骨)이 강하고 약한 것, 기육(肌肉)이 견고하고 부드러운 것, 피부가 두껍고 엷은 것, 피붓결이 가늘고 굵은 것 등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소. 그런 것들과 침이나 듬에 의해 통증을 느끼는 것하고 어떤 관계가 있소?
소유: 뼈가 강하고, 근육이 약하고, 기육이 부드럽고, 피부가 두꺼운 사람은 침이나 뜸으로 인한 통증을 잘 견딥니다. 반면 기육이 견고하고 피부가 엷은 사람은 침이나 뜸으로 인한 통증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황제내경 영추, 이케다 마사카즈 저, 이정환 역, 도서출판 청흥, 2001, p.238)
2. 동양무술은 과연 의술적 치료 효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동양무술은 한의학에서의 의술과도 깊은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중국 무술 영화를 보면 종종 무술인들이 한의학 치료를 다루는 것을 보게 된다. 가령 이연걸이 주연으로 나오는 황비홍을 보면 그는 무림의 고수이면서 또한 한의학 치료에 정통하다. 아마도 이는 실제적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도 동양무술이 한의학에서의 의술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동양무술의 기(氣)가 한의학에서도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 개념의 저변에는 두 단계의 대전제가 들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기의 우주 발생론적 관점과 인식을 들 수 있다. 이는 곧 태허(太虛)의 적막무짐(寂寞無朕)한 공간을 기가 충만하고 있으며 일월성신의 운동에 의해 주야(晝夜)와 한서(寒暑)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만물이 생화(生化)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기를 통상 원기(元氣)라고 하는데, 아울러 이로부터 한의학에서는 진공의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곤원(곤(坤元)이란 대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변화의 근원을 밝히는데, 이것을 총통(總統)하는 것이 다름 아닌 기이며, 그 기는 여러 가지가 아니라 단일한 명칭으로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발생론적으로 하나의 기로부터 파생된 모든 이명(異名)의 기들은 아무리 형태와 작용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같다. 둘째, 인간을 비롯한 유형질(有形質)의 만물이 모두 기의 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체발생론적 인식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본격적인 의학 이론의 도입을 위한 기본 관점인데 그 핵심은 천지에 포산(布散)된 원기가 곧 인간을 구성하는 원료라는 것이며, 이러한 언급의 의의는 바로 우주와 인간의 본원적이고 절대적인 동질성의 확보에 있다(김교빈, 박석준 외, 동양철학과 한의학, 아카넷, 2003, pp.195-196). 이 기에 대하여 한의학에서는 그 기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기의 기된 소이(所以)는 유행변화하는 본성에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생긴 기류가 편서평을 타고 날아와 상반된 기류로 변하고 봄철에 따뜻한 운기였던 것은 겨울이 되면서 싸늘한 한기로 변한다. 인체에서는 공기와 음식 중의 곡기(穀氣)를 막음으로써 체내에서 변화하여 오장의 기와 육부의 기, 경락의 기 등으로 바뀌고 다시 변화하여 대변과 소변으로 배출된다. 즉 천지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시공 좌표(座標)를 유행하면서 각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 여건에 따라서 적절한 형태, 예를 들면 비, 구름, 우박 눈 등으로 변화한다고 보듯이 인체의 삼초강자(三焦腔子)와 사지(四肢百骸)를 유행하는 기는 삼초부위와 각 장기에 따라서 무(霧), 구( ), 독(瀆), 종기(宗氣), 시기(矢氣) 등의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고 보는 것이 현대 철학 및 의학의 기에 관한 본질 인식이다(Ibid, P.198). 한의학에서는 기를 진기(眞氣), 원기(元氣), 종기(宗氣), 영기(營氣), 위기(衛氣), 호흡지기, 장부지기, 경락지기, 육기(六氣), 음기와 양기, 칠정(七情)의 기로 분류한다. 그런데 원기가 허손(虛損)하여 장부 조직의 기능이 저하되어서 항병(抗病) 능력이 떨어진 병리 상태가 되면 이를 '기허'(氣虛)라고 한다. 이 기허는 구체적인 징후들이 인체의 어누 부위에 분포하여 있느냐에 따라서 오장의 기허와 기수상관(氣水相觀)에서의 기허, 기혈상관(氣穴相觀)에서의 기허, 기위상관(氣衛相觀)에서의 기허로 나눈다(Ibid, p.222) 그리고 기의 운동성에서 행할 것이 행하지 못하여 체하고, 강(降)할 것이 강하지 못하여 역(逆)이 되며, 출(出)할 것이 출하지 못하여 폐(閉)하고, 입(入)(存) 할 것이 입(入)(保存)하지 못하여 탈(脫)하게 되어서 기체(氣滯), 기역(氣逆), 기함(氣陷), 기폐(氣閉), 기탈(氣脫)의 병기가 있게 되는 것을 기기실조(氣機失調)라 한다. 그리고 또한 인체에서 정상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기의 개념이 정기(正氣)인데 이와 반대로 인체의 기혈이나 장부, 경락 등의 생리 작용을 병행할 때의 기를 사기(邪氣)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양기의 속성과 음기의 속성에 의하여 양기가 홀로 성해지면 열세(熱勢)가 진짜로 성해져 이를 실한(實寒)이라 하고, 양기가 홀로 허해지면 한세(寒勢)가 상대적으로 약해져서 진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寒)하게 되는데 이를 허한(虛寒)이라 한다. 이러한 성쇠의 단계에서 치유되지 않으면 점차 음양호손(陰陽互損)과 음양망실(陰陽亡失)의 단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기가 이처럼 국소에서 자기 조절성을 잃고 편중성을 띠기 시작하면 더욱 가속적으로 심화된다. 이것이 이른바 악순환의 기전이다. 그리고 육기가 장기간 또는 갑작스럽게 태과하거나 불급한 이상 변화를 일으키면 유음이라 하고, 오행의 기가 태과와 불급의 변화를 일으키면 운기라 하며, 칠정이 과다하게 발하거나 부족하여서 병변이 생기는 것을 칠기병이라 한다. 그러므로 기는 반드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다(Ibid, p.226). 여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는 인체의 생명 현상의 발현을 일으키고 조절하여 변화의 마디를 가져오고 병을 발생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에 치료에 있어서도 반드시 기를 조절하는 곳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기가 부족하면 더하고, 과하면 빼주며, 멈췄으면 가게하고, 뭉쳤으면 풀어주며, 막혔으면 뚫어주고, 열렸으면 닫아주고, 닫혔으면 열어주며, 위에 있으면 위로 빼주고, 아래에 있으면 아래로 빼고, 중간에 있으면 섞어서 풀어주는 등 각 병소(病所)의 위치적 특성과 기의 존재 또는 운동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를 기준으로 하여 원상태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의 조절이다(Ibid, pp.226-227). 이 원리는 방제학 뿐만 아니라 기공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까닭에 학의학에서의 기(氣)의 의술적 치료는 기(氣)의 무술(武術)이라고 할 수 있는 동양무술과도 그 연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무술에서의 기의 수련이나 기의 사용으로도 의술적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가령 송대(宋代; 기원 5세기경) 말기에 선도의 도사 장삼봉(장(張三 )이라는 사람이 자연의 현상에서 태극권이라는 원리를 배워 그 법칙으로 만든 도인법(導引法)은 기(氣)의 유동 변화에 의하여 일어나는 천지 자연의 현상에서 자연의 원리를 끄집어 내어 그것을 인간의 신체에 맞추고 원기(元氣)를 안으로 쌓아서 도(道)와 일체가 됨으로써 진생을 실현하기 위한 기법으로 편성한 것이다(小野田大藏 저, 한국선도학회 편역, 건강과 기공, 명지사, 1996, p.114). 이 기는 연단의 기법을 따라서 올바르게 연단 훈련을 가지면 사람에 따라서 빠르고 더딤은 있을지라도 반드시 하단전에 진양(眞陽)을 발생시켜 단을 결성시킬 수 있게 되어서 인간의 생명력을 강화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도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통하여 무한한 우주력이 체내로 흘러들어 질병이나 노화 등 원래 실존하지 않는 가재적(假在的) 현상을 마치 빛을 비추면 어둠이 자연적으로 사라지듯이 해소하여 진생을 실현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Ibid, pp.116-117). 동방건강보감의 저자인 오재환은 오식건강법(吳式健康法)에서 "질병에는 마디가 굳어 있고 굳은 마디는 질병(疾病)의 씨가 된다. 질병은 기(氣)를 막고 막힌 기는 정신과 육체를 병들게 한다"고 말하였다(오재환, 동방건강보감. 건도생활, 도서출판 동방문화사, 1998). 그런데 동양무술의 특징의 하나가 기공무술(氣功武術)이다. 동양무술이 지닌 기공(氣功) 수련은 기를 단전(丹田)에 침잠시켜 기와 혈을 왕성하게 해 줌으로써 장부(臟腑)에 매우 많은 도움을 준다. 본래 인간의 장부들은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물들과는 달리 수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운동을 할 수가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나날이 쇠약해질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폐단은 단전에 기를 침잠시킴으로서 보완할 수가 있다. 기를 단전에 침잠시킬 수만 있다면 매번 호흡에 따라 장과 부가 가볍게 운동하는 것이 가능하며 기가 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또한 허리를 펴고 돌리거나 손을 편안하게 하여 가슴을 열고 다리를 움직이면 장과 부는 능히 가볍게 요동하여 종근(宗筋)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후덥지근하고 축축한 것은 능히 사라지게 되어서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등골의 힘과 마음의 힘과 머리의 힘이 여기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한다(이찬, 태극권 강좌, 하남출판사, 1992, p.20). 뿐만 아니라 기공 수련은 단전으로 호흡하여 오랫동안 기를 기르면 정은 곧 기로 변하고 기가 뼈 속에서 넘쳐 부글부글 끓어 극에 달하면 미려(尾閭)를 통과하여 등골을 거쳐 머리끝으로 올라가고 또 사지(四肢)로 퍼진다. 그러면 그 열기를 뼈 속에서 넘치게 하여 그것을 꽉 막아 못 나가게 막는다. 그리하여 기로 되었던 정은 천천히 액으로 되돌아오고 그 짙은 액은 다시 질(質)이 있는 체(體)로 변하는데 이것이 바로 골수(骨髓)이다. 이 골수는 뼈에 꼭 들어 붙는데 마치 금속을 도금한 것과 같이 딱 들어 붙는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하루하루 공(功)을 쌓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기공을 쌓게 되면 그 골수는 뼈 속에 가득 차게 되어서 뼈가 단단해지고 튼튼해진다(Ibid, p.37) 동양에서 중국무술인 태극권은 이 무술이 한 번 연습하면 장과 부에 목욕과 안마를 한 번 시켜 주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연속적인 허리의 움직임으로 허리와 등골을 강화시켜 준다고 본다(Ibid, p.21). 그렇다면 태극권에서 보듯이 동양무술은 이 기공의 수련을 통해서 의술적 치료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극권은 생리학적 측면에서 그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태극권은 횡격막이 가슴에 수축 작용을 일으켜서 아래를 향하여 확장을 시켜 주고 복부와 내장에 압력을 주어서 부교감 신경에 흥분을 일으키도록 자극을 준다. 그러면 호흡을 할 수 있게 하고, 맥박을 천천히 운동하게 하고, 또 타액을 증가시키며, 혈당량 감소 및 혈압을 내리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해주며, 열을 내리게 하는 등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Ibid, p.21). 태극권은 특히 여성에게도 좋은 건강 운동법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의 체질에 적합한 이유에서이다. 여성의 체질은 혈(血)이 위주로 되어 있고, 이 혈은 정(靜)으로서 양성이 되는 것인데 기(氣)하고는 다르다. 그런데 여성은 집 안에서만 생활하므로 갑갑하고 우울하여 혈이 차갑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굳어서 병이 생기기도 한다. 반면에 여성이 구속에서 벗어나 방종이 지나치면 혈을 너무 쉽게 소비해 버린다. 그렇게 되면 혈은 마취 물과 같이 되어서 피가 끓어오른다. 이로 인하여 생리가 늦어지거나 심지어는 말라 없어져서 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에게 태극권은 부드럽고 정적이며 가볍고 묘한 것을 위조로 하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적합하여 몸을 건강하게 하여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Ibid, pp.21-22). 태극권의 의학적 효과는 호흡 기능을 증강시키며, 폐활량을 높여 주며, 소화 능력을 강화시키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한다. 모세 혈관을 개방시키며, 혈액과 임파(Lymph)의 흐름을 좋게 한다. 신경 계통을 단련시키며, 감각 기관을 능력을 높여 준다. 근육을 부드럽고, 탄력있게 강화시켜 미용에 도움을 주며, 뼈와 관절의 능력을 증강시킨다. 현재까지 의학적으로 밝혀진 태극권 수련에 의한 치료 효과는 고혈압, 당뇨병, 신경통, 폐결핵, 요통, 신경 쇠약, 심장병, 위장병, 동맥경화, 변비, 간질환, 신장병, 관절염, 내치질, 유정, 다리 시리고 저림 현상 등등 참으로 많다(Ibid, p.22). 이렇게 태극권은 기공의 수련을 통해서 의술적 치료 효과를 크게 내고 있다. 그렇다면 기공 수련은 동양무술의 공통인 까닭에 다른 모든 동양무술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술적 치료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무술에서 다른 하나를 더 살펴보겠다. 중국무술에는 외가권의 소림무술로 잘 알려져 있는 남파권법, 곧 남권이 있는데 이 남권을 장시간 잘 수련하면 각 운동기능을 높여주고, 신진대사를 촉진하여 건강을 유지시키고, 기력의 전달 방법을 터득할 수 있고, 그 방법에 의하여 기혈의 유통이 원활해져서 신체의 각종 질병을 퇴치하게 되며, 정신과 의지가 강해져서 인간성을 향상키기고 인내력도 크게 강화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면 소림무술의 무공(武功)으로 역근경(易筋經)이 있다. 이 역근경의 행법은 팔단금과 같이 신체건강법의 일종이며 기혈의 유통과 운행을 도모하여 근육과 근골을 개조시켜준다. 소림권법에서 소림오권(少林五拳)은 인체에 정, 력, 기, 골, 신을 단련하는 것으로 용권연신은 근육의 변화로 인한 힘을 사용하지 않고 단전의 기를 끌어서 수련한다. 그리고 호권연골은 팔을 튼튼하게 하고 허리를 견고하게 하며 겨드랑이의 힘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종권연력은 힘을 키우는 것이 목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허리와 쌍권에 힘을 이끌어 전신에 힘이 넘치게 한다. 그리고 사권연기는 기를 양성하며 팔과 허리를 유연하게 하여 기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한다. 그리고 학권연정은 정을 축적하는 수련으로서 신, 기가 합하여 정을 증강시킨다. 이렇게 소림무술도 기공을 쌓고 이것의 사용을 하는 것을 통해서 내공과 외공의 증진은 체력을 크게 신장시켜줄 뿐만 아니라 기와 혈을 강화시켜주고 장과 부의 운동을 도와줌으로써 건강에 크게 도움을 준다고 할 것이다(*1. ). 이제 일본무술의 하나인 공수도(가라데)의 경우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본무술의 특징은 기공 수련 쪽 보다는 기초체력을 향상시켜 강인한 체력을 만드는데 역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공수도를 배울 때 반드시 익혀야 하는 트레이닝은
3. 무술의 도인(도사)들이 무술을 통해서 의술을 베푼 실증들. 4. 현대의 무술관(무도관;체육관)에서 볼 수 있는 치료 행위들.
음양오행학으로 사람의 신체를 다루며 의술을 행하는 한의학은 인체가 하늘과 땅을 본받아 구조와 기능이 이루어졌다는 천인상응이론(天人相應理論)과 자연계의 생성 및 변화가 1일 또는 1년마다 규칙적으로 교대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오장육부론(五臟六腑論)·정신기혈론(精神氣血論)·병인론(病因論)·병기론(病機論)·전변론(傳變論)·사진론(四診論)·변증론(辨證論)·경락론(經絡論)·영위론(營衛論)·본초론(本草論)·방제론(方劑論)·침구론(鍼灸論) 등의 세분된 생리·병리·진단 이론과 임상명 및 치료이론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초분야
한의학의 기초분야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① 의학사 : 의학은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그 활동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학은 단순한 경험의 단계를 거쳐 진단과 치료의 초보적 이론을 갖추게 되는데, 이러한 이론의 형성은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반영한 역사적 현상으로 관찰되어질 수 있다. 의학사 분야에서는 의학을 현대의 시점에서 연구하여 의학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② 원전 한의학 서적들은 대부분 당시의 언어로 그 내용이 적혀 있기 때문에 현재 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문자적 장벽이 되고 있다. 따라서 원전연구분야에서는 한의학 원서의 정확한 해독을 모색하여 현재 한의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이러한 문자적 장벽을 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한의학 고전에 현대의 임상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한의학의 이론적 범주를 규정짓는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③ 해부학 : 서양의학의 해부학적·조직학적·발생학적 관점으로 한의학 이론과 임상을 연구한다. 현재 조직화학적 또는 면역조직화학적 염색과 영상분석기를 통해 한약재와 침구의 효능을 연구하고 있다. ④ 생리학 : 생리학연구진은 '제3 의학(차세대의학) 창조'라는 기치 아래 한의학의 대상인 인간의 생명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기존의 음양오행학설 및 이를 응용한 여러 이론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에 더하여 실험 등의 여러 측면에서 이 이론들을 확인·보완하여 재정립함으로써, 한의학 각 분야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있으며, 나아가 미래의 한의학 방향을 잡아나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 ⑤ 본초학 : 기미론(氣味論 : 藥性을 감별하는 이론적 체계)을 바탕으로 한 약물의 성질·효능과 약물의 산지, 부위, 채취시기, 수치 등에 따른 약효의 변화를 연구하고 약물의 규격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⑥ 방제학 : 약물의 효능을 높이기 위하여 한약의 전탕방법과 복용방법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탕제·산제·환제 등의 전통적인 제형 외에 엑기스제·정제 등 보다 간편한 복용형태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다. ⑦ 병리학 : 병리학자들은 기의 병리, 체질 병리, 내경 병리, 외감병학, 종양, 병중 모델 개발, 동서양 질병화합 등을 주요과제로 연구하고 있다. ⑧ 경혈학 : 침구시술의 목표점이 되는 경혈의 치료효과와 경락의 작용 메커니즘을 규명한다. 또한 고대의 침구요법을 근간으로 현대에 적합한 새로운 침구치료방법을 개발하여 이를 임상에서 보다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데 연구의 중점을 두고 있다. ⑨ 예방의학 : 동의예방의학과 공중 보건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며 그 특성상 동의와 서의의 예방의학을 모두 담당하고 있다. 예방의학은 매우 광범위한 범주를 갖고 있는데, 크게 분류한다면 양생학·면역학·공중(환경)보건학·역학·의료관리학·산업보건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임상분야
전통 한의학을 계승하고 있는 한의과대학 한방병원은 한방의 과학화와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은 세계 최초로 무약물 마취 개복수술에 성공했고, 규모나 진료에서 한의학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한약을 산제·환제로 조제하여 복용이 간편하고 약효의 균일화를 이루어 한약 복용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또한 한방병원은 진료 이외에도 원전을 해석하고 메커니즘의 발견 및 과학적 해명으로 한의학의 새로운 입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우리 전통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다. ① 제1내과(간계내과) : 각종 간장질환, 담낭질환, 혈액질환, 허약과 면역(保養療法)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그밖에도 오행설에 근거한 간속물류(肝屬物類 : 인체의 조직·기관을 분류할 때 간에 속하는 간·눈·근육·손톱·담·등을 말함)에 따라 간풍내동(肝風內動 : 중풍의 발생이, 즉 간풍이 안에서 요동하여 발생하는 것)질환인 뇌실질의 병변, 뇌혈관장애 등도 일부 담당하고 있다. 또한 근육질환도 그 대상이 되며 경락이론에 근거한 각종 간병증(肝病證)도 연구하고 있다. ② 제2내과(심계내과) : 한방치료로 뇌혈관계질환인 중풍 및 심장질환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으며, 순환기질환에 대한 효율적인 치료법 개발과 아울러 제3의학의 실현에 목표를 두고 있으며 임상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발전에 더욱 노력하고 있다. ③ 제3내과(비계내과) : 본과는 소화계에 대한 교육·연구·진료를 담당한다. 일반적인 소화계질환 연구는 물론 암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관련약물에 관한 문헌조사, 항암작용 및 면역증강 효과에 대한 실험적 연구 등으로 이루어진다. ④ 제5내과(폐계내과) : 폐계내과학과는 내과학의 한 분야로서 호흡기 질환과 기병증(氣病證)에 대한 병인, 진단 및 치료를 연구하고 있다. 알레르기 및 담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질환에 대한 임상연구로 새로운 치료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⑤ 제6내과(신계내과) : 신계내과학과에서는 그 영역을 비뇨학·신장학·장부학(남성과학)·장정생화학(내분비학)·노쇠학(노인의학)으로 분류하여 분야별로 병인, 병기, 진단 및 치료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다. ⑥ 침구1과 : 진료 면에 있어서는, 한의학적 개념으로 볼 때 중풍·위중·비중 등에 해당하는 뇌혈관질환·말초신경질환·척수신경질환·근육질환과 같은 각종 마비질환에 대한 원인·병리·진단·치료·예후 등을 연구한다. 연구 면에서는, 각종 새로운 침구요법과 침구치료의 메커니즘 및 침술마취에 관하여 실험 및 임상관찰을 통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⑦ 침구2과 : 오랜 임상경험을 통해 입증된 침구요법의 진통효과는 탁월하다. 따라서 침구2과에서는 동통을 수반하는 각종 질환 특히 척추 및 관절질환에 대한 심도 있는 임상연구를 하고 있다. 그밖에 수침·전침·레이저침 등 신침요법에 관한 임상연구도 수행하고 있다. 그 결실로 금연 클리닉·근시 클리닉·통풍 클리닉을 설치·운영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⑧ 부인과 : 한의학 기본이론을 운용하여 월경, 임신과 출산 등 여성의 생리적 특성과 여성성기에 관련된 모든 질환에 대하여 연구하며 예방 및 치료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근래 많이 볼 수 있는 냉증·불임증·갱년기질환·여성종양 등에 대하여 집중 연구하고자 각종 클리닉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⑨ 소아과 : 한방 소아과는 소아가 태아기부터 청년기까지의 성장·발달 과정에서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건전하게 발육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소아의 질병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서 소아의 여러 질병 중 다음 항목을 중점적으로 연구·수행하고 있다. 즉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허약아의 기초체력을 향상시키고 알레르기성 기침이나 천식, 경련성 질환, 소아야뇨증을 위주로 전문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⑩ 안이비인후과 : 한방 안이비인후과는 눈·귀·코·인후·피부의 영역에 속하는 각 질환에 대한 치료는 물론 그에 대한 연구 및 실험을 통해 한의학의 독특한 이론체계인 내장과의 상호관련을 갖는 내외 상응적 형상의학론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임상에서 볼 수 있는 각각의 중례에 대한 동서 의학적 고찰을 시도함으로써 제3의학 창출을 모색하고 있다. ⑪ 신경정신과 : 신경정신과는 여러 신경정신계 질환을 동양의학의 기본이론인 심신일여의 이론을 토대로 치료하고자 하며 더불어 다음과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 한의학적 처치(약·침)를 통한 '스트레스' 극복에 관한 연구, 정신요법을 통한 긴장이완 및 심신의 안정에 대한 연구, 기를 활용하는 명상활용법에 대한 연구, 정신과 질환자에 많은 두통 등 동통에 대한 연구이다. ⑫ 물리요법과 : 물리요법과는 동양의학 중 도인안교와 각종 양생법을 연구·개발하여 전문화와 다양화로, 전신적이고 생리적인 균형조절을 목적으로 하는 과이다. 진료내용은 근골격계 질환인 상과 영역과 중풍·산업재해·교통사고 등의 후유증을 지닌 신체장애자의 회복을 돕는 재활의학분야, 그리고 식이요법의 일환인 절식요법을 통하여 성인병 및 만성 질환을 치료하고 있다. ⑬ 사상의학과 : 우리나라의 독특한 의학체계인 사상의학의 이론을 계승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 임상에 적용하며 효율적인 의학 방법론의 모색을 위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밖에 중풍 센터는 현재 입원환자 약 340명, 연간 입원환자 약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전문진료 센터이다. 심계내과를 중심으로 해서 다른 분야까지 어우러진 종합기구로 구성되어 중풍뿐 아니라 그에 병발하는 여러 가지 질환 및 합병증을 진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최신 의료기기를 통한 정확하고 신속한 진단 및 처치, 치료약의 개발 및 투약의 현대화, 다양한 치료방법의 입체적 활용 등을 통해 보다 효과적인 질병치료를 수행하고 있다(Daum, Daum백과사전, 한의학) .
2) 한의학에서의 의술은 동양무술의 수련과 원리적으로 같음
으항 kf 여라 고 다만 각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가 그렇게 서로 武術 무술이란 중국에서 쓰는 말이라고 한다. 한국은 무예, 일본은 무도라고 한다고 한다. 난 무술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우리는 권을 쓰는 것을 권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같은 경우는 도술이라고 한다. 또한 검은 검술이라고 하고, 봉은 봉술, 창은 창술이라고 한다. 왜 권은 법이고 무기술은 술일까?? 단순한 말의 차이일까? 과연 그럴까?
법이란 정해져 있는 하나의 규칙이다. 권의 법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길이다. 그 길대로 우리는 살아야 할 것이다. 정권이 하나의 똑바른 길을 가야 그 위력이 나오듯 우리도 똑바른 길을 걸어야 되겠다. 우리는 이미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 학교에서 배워서 스스로 알고있다. 학창시절의 도덕시험을 외워서 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문제를 보면 바로 답이 보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배워왔기 때문이다.
길은 이미 우리 스스로 알고있다. 우리 안에 답이 있다.
그렇다면 술은 무엇일까? 재주 술이다. 융통성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은 오직 진실만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 있고, 상대를 위한 거짓말도 있다. 그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을 우리는 융통성이라 부른다.
법에서 그 길을 배웠다면 술에서 우리는 그 길을 융통성있게 상황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이다.
이미 답은 그대 안에 있고 행동도 그대 안에 있다. 그대여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자.
................... 무술28단-무림건강비법 | 개인 수양 2005/07/11 16:57
http://blog.naver.com/oh539/40015128621
[주목받는 新건강법 열전⑥]
무술 28단 고수 설영익의 ‘武林 건강’ 비법 “하루 15분 택견체조 하면 ‘노화시계’가 거꾸로 돕니다”
심신 수련을 표방한 무술은 과연 무병장수의 지름길일까. 그렇다면 무예인들이 장수하지 못하는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겨루기’보다 ‘오장육부의 조화’를 강조하는 결련택견 전수자 설영익씨의 택견 건강법 특강.
심신을단련하는 무예인이나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운동선수들이 매우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평생 몸을 가꾸는 그들이 보통 사람보다 잔병 없이 오래 살 것이라는 게 상식적인 추측.
과연 그럴까. 스포츠의학 전문가들은 특정 부위의 근육이나 힘줄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운동선수들이 일반인보다 오히려 관절염, 신경통 등 각종 질환에 더 많이 시달린다고 말한다.
필자가 아는 무술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평생 온갖 무술을 연마해왔고 사망 직전까지 노익장을 자랑하던 무예인 K씨는 65세를 넘기지 못한 채 돌연사하고 말았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충격이 컸음은 말할 나위 없다. 세계 곳곳을 돌며 최고의 무예 고수들과 100여 차례 겨뤄 모두 승리를 거둔 ‘전설의 파이터’ 최영의도 고희를 갓 넘긴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무예인이 무병장수할 것이란 일반인의 생각과는 차이가 큰 사례들이다.
흔히 무술인들은 마음과 몸을 닦는, 이른바 심신(心身) 수련을 주창한다. 그것은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으로 평생 질환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술인이라고 해서 각종 질환의 위험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게 현실이다. 이는 곧 무술의 대중화에도 적잖은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들어 무술의 건강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무술계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단지 싸움을 잘하기 위한 기술로 무술을 인식하는 틀에 갇혀 있는 한, 무술계는 소수의 동호인 모임 정도로 쇠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무술의 대중화 작업’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 정점에 선 인물이 택견 무예인 설영익(薛永翊·55)씨다. 그는 무술이라는 고유의 기예에 ‘건강’이라는 현대적 패션의 옷을 입히는 데 앞장서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누구보다 무예를 사랑하고 우리나라 전통 무술인 택견을 일반에 알리는 데 노력해온 설씨는 ‘무술의 놀이화 및 건강화’ 작업이 현대 무술계가 살아남을 수 있는 비책(秘策)이라고 주장한다.
무술인이 장수하지 못하는 까닭
지난 5월 말 삼육대 사회교육원 연구실에서 설씨를 만났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 눈에서 뿜어나오는 형형한 기운이 오랜 세월 무예를 연마해왔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의 몸 어느 군데에서도 병약하다는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설 선생님의 몸매를 보니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 알려진 무술인들이 그다지 장수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건강하니까요.”
설씨는 짧은 대답과 함께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필자에게 “건강을 어떻게 정의하냐”고 반문하면서 자신의 건강론을 설파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힘센 사람이 건강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상 몸을 단련하는 무술인이나 운동선수들이 당연히 건강할 것이라 짐작하지요. 그러나 의학적으로 간, 심장, 폐, 신장 등 생명유지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오장육부와 조직이 튼튼해야 건강한 것입니다. 근육과 뼈만 튼튼하다고 해서 건강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요. 더욱이 무술인에겐 빠른 스피드와 집중력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그런 기술을 익히기 위해 몸을 혹사하다 보면 인체 장부에 무리가 와서 겉은 멀쩡해도 속은 병들어 있기 십상입니다. 젊을 때는 못 느끼더라도 늙어서는 병으로 고생하죠.”
눈·코·낭심은 단련되지 않는 부위
설영익씨가 제자들에게 ‘건강택견’을 가르치고 있다. -무술을 찾는 이들이 건강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무술 본연의 ‘겨루기’ 같은 것에 매료됐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에겐 오장육부의 건강보다 남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무언가를 찾는 욕구가 있을 테고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요.
“무술을 연마하는 무예인이라면 자기가 닦은 무술의 기량이 어떠한지 알고 싶은 욕구가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타인과 대결을 하지요. 그것이 겨루기 같은 싸움이라든가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한 룰에 따라 치르는 경기와 같은 형식으로 이뤄집니다. 저 역시 무술을 닦은 무예인으로서 ‘이기는 것’이 신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어느 정도 기량을 갖춘 무술인들이 겨루기 같은 싸움을 할 경우 몸이 아닌 ‘머리’에서 승패가 갈리고, 시합의 경우는 이길 수 있는 룰을 얼마나 잘 숙지하고 구현해낼 수 있는가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나뉩니다. 결국 타인과 대결하는 게 얼마나 허탈한지를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설씨는 무술 그 자체로 현대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호신술이라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무술을 아무리 잘해봤자 날아오는 총알 앞에선 무기력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만, 총을 들지 않은 불량배는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 호신술을 적절히 활용하면 자신의 몸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어요. 호신무술은 스피드와 급소 공격이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남성에 비해 힘이 달리는 여성은 손을 이용해 최단시간에 남성의 급소를 겨냥하면 됩니다.
사람에게 눈과 코, 남성의 낭심은 단련이 되지 않는 부위입니다. 즉 치명적인 급소지요. 여성이 최단거리에서 빠른 속도로 급소를 공격하면 상대방은 최소한 5분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어요. 이때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설씨는 손가락을 이용해 눈과 코, 그리고 낭심을 공격하는 택견의 무술 자세를 보여줬다.
“지는 싸움 해본 적 없다”
이제까지 지는 싸움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설씨. 여기서 그의 무술 이력을 살펴보자. 그의 공인 무술 경력은 합기도 6단, 특공무술 6단, 혈도술 8단, 단도술 8단으로 가공할 만한 고수다. 여기에 본업이라 할 만한 택견은 ‘정(正)선생(최고 지도자를 가리키는 호칭)’급이라고 밝힌다. 그 외에 차력, 격파술 같은 무술도 두루 익혔지만 다 언급하자면 구차한 제 자랑 같다면서 언급하려 들지 않는다.
설씨의 무술 사랑은 10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진도의 한적한 사찰에서 마음공부를 하다가 심신을 연마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고수들을 찾아다닌 세월만 30년. 20년 전 지금의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릴 때까지 끝없는 유랑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저는 무술과 더불어 자연요법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쌀 증산이 최우선 정책으로 꼽히던 1960년대에 이미 유기농에 의한 자연농법을 주창하고 일찌감치 현미식을 해온 강태봉 목사, 흥사단에서 자연건강법을 강의하는 김민 선생 같은 자연요법의 선구자들을 만나 자연요법이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 외에도 선도(仙道)를 익힌 이세연 선생에게서 한의학을 배우는 등 곳곳에 숨어 있는 기인들을 만나 여러 건강비법을 전수(傳受)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저는 스승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연건강법이나 선도를 하시는 분들이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무술 동작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무술의 건강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 또한 이런 분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면서 설씨는 자신의 손을 보여줬다. 설씨의 손에는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해온 내력을 알려주는 마디마디가 굵은 손가락 외에도 자연의 흙을 돌봐온 농사꾼의 투박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남 순창, 보성, 진도 등지에서 유기농을 실천해온 농사꾼이었다.
“무술을 연마하는 틈틈이 흙을 일궈 자연농법을 해왔는데, 그때 환자들을 만났습니다. 암 환자들과 함께 자연식을 즐기면서 그들에게 맞는 간단한 무술체조를 가르치는 동안 입소문이 많이 났어요. 환자들의 몸 상태가 놀랄 만큼 좋아졌으니까요.”
이때 개발한 무술체조를 그는 후에 ‘정법도’라고 이름붙였다. 정법도는 인체의 건강 원리를 수행과 연계시킨 그만의 독자적인 ‘수행 무술체조’라고 한다. 현재 정법도는 ‘대한정법도’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인 사단법인 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설씨는 정법도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정법도에는 아침 저녁으로 호흡법과 굴신(屈身)법을 위주로 한 수행, 저녁을 제외한 하루 2식(食)만 하기, 해가 떨어지면 30분 후에 잠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도시와 떨어진 한적한 마을에서 생활하기, 철저한 자연식 실천하기와 같이 일반인이 따라하기엔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난치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이러한 정법도를 실천하면서 여러 환자가 치유되는 것을 현장에서 체험했기 때문에 정법도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요.”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은 그만큼 효용성이 크다는 게 설씨의 지론. 그는 그때의 생활을 지금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미식을 30년 넘게 해왔고 평상시엔 하루 2식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단식 횟수만 해도 5000회가 넘을 것이라고 한다.
결련택견의 세계
그런 그가 우리 고유 무술인 택견을 만난 것은 1980년대 후반 무렵. 1983년 택견이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면서 유일한 택견 기능 보유자인 송덕기(1893~1987) 선생에 이어 2대 무형문화재(신한성)와 3대 무형문화재(정경화)가 연이어 등장한 시기였다.
설씨는 무형문화재 1호인 송덕기 선생에게서 직접 택견을 전수받은 이호범씨를 만나 택견 무예를 배우고 대신 자신은 이씨에게 정법도를 가르쳐주는, 이른바 품앗이 식으로 택견을 익혔다고 한다. 3대 무형문화재인 정경화 선생에게서도 따로 택견을 배웠다. 설씨는 어릴 적부터 워낙 무술로 몸을 단련해왔기 때문에 택견을 배우는 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택견 2대와 3대 무형문화재들도 젊은 시절 다른 무술을 익힌 뒤 뒤늦게 택견을 접한 사람들이란 게 택견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무예인으로선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세에 택견을 접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무엇보다 택견이 우리 민족 고유의 무술이란 점에 끌렸지요. 우리 무술계를 들여다보면 우리 고유의 무술이라 주장하지만 실상 일본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동작이 뒤섞여 있는 무술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택견만큼은 외국 물이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둘째, 택견은 정통성이 확고하다는 점입니다. 조선 최후의 택견꾼이던 송덕기 선생은 일제 강점기 이전 자신의 스승인 임호 선생에게서 택견을 사사한 후 그 맥을 끊지 않고 후세에 넘긴 분입니다. 현재 택견협회가 여럿 생겨나 있지만 그 누구도 1대 무형문화재인 송덕기 선생으로부터 택견이 시작됐다는 것만큼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정통성을 갖춘 택견이야말로 앞으로 한국 무술의 세계화에 큰 장점이 될 것이라 믿기에 남은 인생을 택견에 바치기로 결심했지요.”
현재 설씨가 참여해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는 단체는 결련택견계승회와 한국건강택견협회. 결련택견계승회는 1983년 송덕기 선생에게서 직접 택견을 사사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인데, 1987년 송덕기 선생이 타계한 후 구심점을 잃은 채 한동안 표류하다 2000년 8월 사단법인 결련택견계승회(회장 도기현)로 새 출범을 했다. 설씨는 이 단체의 고문으로 결련택견을 부활시키는 데 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련택견에 대한 설씨의 부연 설명이다.
“결련택견은 송덕기 선생의 적통 제자들이 익힌 택견으로, 공격 위주의 무술입니다. 사실 무술에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데, 결련택견은 매우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력한 공격력과 파워를 드러냅니다. ‘이~크’ ‘엑~크’ 와 같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런 추임새에다 약간은 흐트러진 듯한 자세에서 강인한 기예와 춤사위 같은 발놀림이 드러나는 것은 결련택견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죠. 몇 해 전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모 방송국의 ‘무림일기 고수를 찾아서’란 프로그램에 등장한 주인공 2명이 바로 결련택견을 익힌 제 제자들이지요.”
결련택견계승회와 함께 설씨가 직접 회장을 맡고 있는 단체가 사회단체 한국건강택견협회다. 바로 이 단체가 택견의 건강적 측면을 부각해 택견의 대중화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사령부라 할 수 있다.
-결련택견이 부드러운 듯하지만 매우 강력한 무술이라면 이를 현대인의 건강체조에 결합시킨다는 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데요. 보통 사람들은 강력한 무술을 익히는 데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거나 잘 따라 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을 것 같은데….
“음양의 이치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가장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가장 세다고나 할까요. 결련택견은 그 자체가 무술이면서 무희입니다. 원래 택견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놀면서 즐긴 무예로 매우 부드럽다는 게 특징입니다. 그렇게 유희적 성격과 부드러운 동작이 펼쳐지니 민중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고, 다른 무술에 비해 생명력이 질겨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잖아요. 결련택견은 건강운동으로 널리 보급될 수 있는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설씨는 현대인의 건강운동은 다음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뭐니뭐니 해도 운동은 부드러워야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할 수 있다. 둘째, 운동은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속적으로 할 수 있고 습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인체의 체형구조에 잘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피곤해지기 쉽다. 넷째,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된 운동일수록 좋다. 그만큼 부작용이 없다는 얘기다.
“결련택견이야말로 이 네 가지 장점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특히 택견의 동작은 신기할 정도로 인체 원리와 잘 맞게 구성돼 있어요. 인체 근육을 생김새대로 움직여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운동 동작은 인체가 움직일 때의 원시나선형 복합운동을 하고 있어서 많은 근육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어 짧은 시간에 운동효과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또한 능청거리면서 널름거리고 굼실대고 우쭐우쭐 으쓱으쓱하는 택견 동작은 근육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해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어주고 유산소 운동에도 그만입니다.”
결련택견과 운동요법
설씨는 필드에서뿐 아니라 강단에서도 이 같은 건강택견을 전수하고 있다. 그는 삼육대 사회체육원 주임교수로 ‘건강택견 양생학’이란 과목을 강의하면서 1년 과정의 1급 지도자 과정 및 강사 과정(1년 코스)을 이끌고 있다. 이 밖에도 경기대 대체의학대학원 최고지도자 과정 및 경희대 체육대학 대학원 대체요법 최고전문가 과정을 만들어 건강택견을 널리 보급하고 있다고 밝힌다.
-건강택견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인체의 기가 흐르는 경락을 자극하는 경락택견 체조, 에어로빅을 응용한 택견 에어로빅, 스트레칭 체조, 증상별 택견체조 등 다양한 과목이 있어요. 이중 경락택견 체조나 택견 에어로빅은 여성 미용에도 아주 효과적입니다. 실제로 이런 택견체조를 한 여성들은 피부가 매우 탄력 있게 변하고 아름다운 체형을 갖춰 인기가 매우 높은 편입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위한 증상별 택견체조는 병을 호전시키는 데 썩 효과가 좋습니다.”
그러면서 설씨는 몇 가지 동작을 시범삼아 보여줬다. 먼저 택견 에어로빅. 그는 ‘진도아리랑’ 중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하는 노랫가락에 맞춰 택견 고유의 자세를 보여줬다. 노래와 동작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맞아 돌아갈 수 없었다. 이어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이 많이 호소하는 오십견의 예방과 운동치료에 도움이 되는 춤사위 비슷한 택견 동작들이 나왔다. 필자 역시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저절로 흥이 나고 일어나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 외에 증상별 택견체조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호소하는 여러 질환에 맞춘 다양한 택견체조가 노랫가락과 함께 맞춤형으로 제공된다고 한다. 이를테면 위장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체조, 변비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체조 등등.
“노랫가락에 맞춰 체조를 하다보면 15분에 4km를 걷는 것과 같은 운동효과를 얻습니다. 다른 어떠한 유산소 운동보다 효과가 크다는 얘기지요. 그러면서도 심장 박동수가 안정되고 또 별로 힘이 들지도 않습니다.”
설씨는 특히 중년기 사람들은 건강 장수와 관련된 운동을 할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격하고 단시간에 이뤄지는 운동은 호흡량을 많게 하고 그 결과 활성산소가 증가해 되레 노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중년의 나이에는 안정된 심장 박동수를 유지하고 가벼울 정도의 운동을 지속하는 것이 노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건강택견의 세워밀기, 가로밀기, 품전후밟기, 헤치며깍금걸이를 혼합한 체조는 아침에 일어나거나 잠자기 전, 또는 직장에서 쉬는 시간에 5~15분 하면 노화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게 설씨의 주장이다.
“이러한 건강택견이야말로 전세계에 내놔도 경쟁력이 충분히 있지 않겠습니까?”
세계로 뻗어나가는 건강택견
지금까지 설씨가 직접 결련택견과 건강택견을 가르친 제자는 500명 남짓. 물론 그 제자의 제자들까지 따지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제자들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택견을 보급하고 있다.
-택견의 세계화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현재 미국, 아르헨티나, 캐나다, 독일, 중국, 몽골 등지로 제자들이 파견돼 택견을 보급하고 있고, 얼마 전엔 러시아에도 건강택견이 보급돼 자리를 잡았어요. 지금은 우리 동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점차 현지인도 늘어나는 추세예요. 사실 저는 택견의 리듬을 기반으로 한 한국형 체조로 세계 체조시장을 제패할 수 있다고 봅니다. 택견의 자세는 가장 인체 친화적이고 자연에 가까운 동작이기 때문에 인종을 초월해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건강택견을 기반으로 한국형 ‘신선 무술’ ‘신선 레크리에이션(recreation)’ 같은 이름으로 고래의 전통 무술과 현대적 운동치료의 결합을 연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택견지도자 양성, 대학 강의 등 바쁜 일정 속에서도 원광대 대학원 기학(氣學)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마지막 제 꿈은 잃어버린 백제 무술의 부흥입니다. 택견을 하는 동안 그 풍류가 백제의 풍류문화와 맞아떨어짐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잃어버린 백제 무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아직 구체적으로 내놓을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백제 무술은 북방으로 넘어간 고구려 무술과 달리 일찌감치 해류를 통해 중국의 신선사상을 접하면서 독특한 호흡법을 기초로 한 신선 무술이 발달했을 것이라는 정황 증거가 여럿 있습니다. 저는 신선사상에서 중요시하는 호흡법을 연구하기 위해 석사학위 논문도 ‘포박자의 신선사상’으로 발표했어요. 그리고 이런 옛 무술을 현대인에게 맞게 개발하는 것이 진정 백제 무술의 부활이라 믿습니다.”
설씨의 다부진 다짐이다. 진정한 무술인은 허언을 내뱉지 않는다고 한다. 평생 몸을 통해 자신의 다짐을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황당하기조차 한 설씨의 백제 무술 부흥의 꿈이지만, 그가 진정한 무예인이기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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