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신(玉泉 金永信) 목사 (1905 ~1994)
감리교회에서 41년 목회하고 1976년 왕십리교회에서 정년은퇴하신 김영신 목사는 크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 한국감리교회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설교집 ‘영원한 신앙’ 서문에 박대선 감독(전 연세대 총장)은 그를 평하기를 “나는 김 목사님을 40년 전, 그가 평남 양덕에서 목회할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배목사로 사귀면서 그의 인격과 그의 신앙에 대해서 존경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감리교회 목사로 어디로 파송되든지 그 교회에 가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시는 전형적인 감리교목사이시다. 그는 굉장히 큰 교회를 담임한 분도 아니고 대 설교가도 아니며 부흥목사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충실하게 살면서 그의 인격과 신앙으로서 40여 년간 착실하게 교회를 섬기신 성공한 목회자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 평일 것 같다.”
그의 출생 이야기
그의 증조부 처관(處觀)은 헌종(1848) 때 문과에 입시하여 생원이 되고 광무 8년 9월 26일 통정대부 정3품을 받은 부유한 가정이지만 3대 독자로 아들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어 오던 중 모친(김조정 부인)의 친척인 김홍식 목사가 “예수를 믿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며 한나가 기도로 사무엘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친은 강서 왁새물(鶴洞)교회 전삼덕 부인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아들 낳는다는 희망을 가지고 옥천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으로 기도하여 결국 그 이듬해(1905.8.10.)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증조부께서 玉泉이라는 별호를 지어 주셨고 아버지는 예수 잘 믿고 목사가 되라는 뜻으로 永信이라 이름을 지어 주셨다.
한국 서북지역에서 여자로서는 최초로 세례 받은 전삼덕 부인은 김폴린 교수(전 감신대 교수)의 친 할머님이시다. 그의 남편은 승지의 관직을 가지고 서울에 상거하셨고, 그의 집 일부를 뜯어서 강서 鶴洞(왁새물)교회를 건축했다.
전삼덕 부인이 처음 세례를 받을 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이에 휘장을 치고 그 휘장에 구멍을 뚫어 세례를 주었다는 선교사 보고에 있는 재미있는 일화의 장본인이시다. 선교사가 쓴 한국선교사(The Mission in Korea) 책에는 The first baptized woman in Korea 로 소개되어 있다.
(사진해설: 위의 사진은 윤춘병 감독이 미국 문요한 선교사댁에서 입수하여 2006년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앞줄 가운데 앉아 계신 어른이 한국 서북지역에서 여자로서는 최초로 세례 받은 전삼덕 부인이시고, 뒷줄 왼쪽에 흰 두건을 쓰신 어른이 김영신 목사의 모친(김조정)이며 전삼덕 부인의 전도를 받아 예수 믿게 되었다)
그는 대흥제라는 서당에서 7세에 소학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읽고 머리를 깎은 후 학교에 입학했다. 머리를 깎을 때의 에피소드이다. 전삼덕 부인이 영신이 머리를 깎으라고 하는 바람에 도망가다가 붙잡혀서 댕기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그는 본교회(강서 왁새물교회)에서 1930년에 본처 전도사로 임명되어 교역자가 없을 때 설교를 도왔고 강서지방 주일학교 총무, 엡웓 청년회 총무로 활약했다.
아버님의 추도식
김영신 목사가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시절(1921)에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고 그 이듬해에 결혼했다. 아버님의 1주기가 되어 음악을 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추도예배를 계획했다. 왜냐하면 완고한 집안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첫째 이유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 본을 보여주려고 계획하고 본 교회 장정식 담임전도사를 찾아가서 예배인도를 부탁드렸더니 “안 돼. 제사 드리지 못해 예배드리려는 것이 아니냐? 예배드리려거든 다른 날에 드려라.”고 거절했다. 그는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장 전도사는 화를 내면서 “정말 오늘 예배드린다면 출교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추도예배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것이 그때 실정이었다. 예수 믿고 나면 옛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바람에 증조부가 조정에 입궐할 때 입던 관복까지 다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신학교 입학
18세 때 광성고등보통하교를 졸업하고 동기친구인 정일형 박사는 연희전문으로 갔고 김영신 목사는 협성신학교(현 감신대)에 입학시험을 치르는데 시험장에서 하디 박사(교장)가 “이 애는 시험장에 왜 들어왔느냐?”고 묻기에 “시험 치르려 왔지요. 제가 일등으로 합격합니다.”하고 정말 일등으로 합격이 되었다. 오후3시에 하디 박사가 불러서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아침에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일등으로 합격한 것을 축하하면서, 신학교를 졸업해도 겨우 20세가 되는데 감리교 규칙에 25세가 되어야 교회 담임을 할 수가 있으니 5년 후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다는 것이다. 한 학기를 마치고 방학에 집에 와서 5년 후에 계속할 생각을 하고 교편을 잡고 13년을 지낸 것이다.
교편을 잡고
1922년 9월 1일 18세 때 처음으로 봉명학교에 부임하여 교육계에 투신했고 학생들 중에는 선생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도 있었으나 실력으로 가르쳐 “군자 선생”이란 별명을 들었다. 1924년 9월 1일에는 완고한 고향에 신학문을 보급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동지와 힘을 합해서 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4개의 서당을 폐합하여 명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사 겸 교장으로 시무했고, 봉천 조천학교를 거쳐(1927) 1928년에 봉명학교 교장으로 1932년까지 근무했다.
초년병 교역자
그는 1935년 3월 10일 영변지방 양덕구역 담임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부임했다. 6시간 기차를 타고 양덕역에 내렸을 때 7명의 임원이 환영 나왔고 주택에 짐을 풀었다. 그는 바로 예배당에 들어가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거룩하신 하나님,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나는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충성을 다 하겠나이다.”라고 기도 드렸다. 첫 주일 예배에 20명 가랑이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파쟁으로 서로 화목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중에 서로 화목하게 되고 교인도 늘기 시작했다.
하루는 손씨의 14세 된 딸이 뇌막염에 걸려 평양 도립병원에 갔으나 고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낙망하다 목사관에 찾아와서 기도해 주기를 간청했다. 교회임원들과 합심하여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튼 날 새벽기도회에 딸이 깨끗이 낳아 참석한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는 부흥되기 시작했다.
양덕교회에 부임한 첫해 맹산이라는 120리 되는 산골에서 장례식을 주례해 달라고 사람이 찾아왔다. 밤12시에 도착해 보니 12살 된 소경 딸 하나를 두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를 치루고 나니 차마 그냥 떠날 수가 없어 그 소경 딸을 데리고 평양 헤인스 선교사에게 가서 맡아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쾌히 허락했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가을에 교양이 있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 안마 업을 하겠다고 찾아 온 것이다. 그제야 소경인 줄 알았고 혹시 정순애가 아니냐는 물음에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느냐고 깜짝 놀랐다. 10년 전에 어머님 장례를 치르고 헤인스 선교사에게 소개한 목사가 바로 나라고 하니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정의여고와 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안마기술까지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영어와 일본어 성경을 점자책으로 자유롭게 읽으며 회화도 능통하게 할 수 있었다.
1942년 미일전쟁이 일어나면서 교회가 통페합하는 등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양덕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교회증축과 주택신축, 그리고 전도사 초빙도 했다. 전부터 잘 아는 군수 김홍식, 변종환 등의 도움이 컸었다.
양덕교회에서 10년을 시무하다가 해방되던 해에 영변지방 고장교회로 파송되었다가 해방을 맞고 1946년에 평양지방 석양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6.25 이후
북한 정부는 교회를 감시하고 탄압하기 시작했고 특히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는 특별한 감시를 받았다. 김영신 목사도 밤중에 내무서에 불려가 이유 없이 2~3일씩 구속되기도 여러 번 했다. 성화신학교에 다니던 황병삼 선생이 정치보위부에 끌려갔고 그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이달영 권사도 끌려가 평양형무소에서 옥사했으나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김 목사님의 꿈 이야기를 듣고 부인 강 속장이 수소문해서 겨우 알아낸 것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교회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9.28 서울수복 이후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뉴스를 유엔방송을 통해서 알고 있던 중 10월 14일 새벽에 후장교회 박태흥 전도사가 와서 그의 아들이 모 기관에 있는데 김영신 목사가 학살자 명단에 있다면서 오늘 12시 전에 피신해야 한다고 알려왔다는 것이다. 교회 장로들을 불러 의논하고 오전11시에 고향으로 떠났다.
마침 고향 알뫼에서는 국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일직 폭동을 일으켰고 주변의 인민군이 출동하여 진압되고 인민군이 둘러싸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 소굴로 가다가 길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승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목사라니까 반동분자라 하며 취조를 당하며 너무 매를 맞아 졸도했다가 깨어났다. 사실대로 말 안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자신은 폭동 난 줄을 정말 몰랐고 4대 독자로서 홀로 계신 늙은 어머니를 한 번 만나 뵈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사정하니 옆에서 때리던 인민군이 사정이 불쌍하니 놔 주자고 하며 끌고 내려와서 “목사님 용서하세요. 나는 안악교회 김 장로의 아들인데....” 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결국 집에 와서는 한 달 동안 병석에 누어 정양을 해야 했다.
피난 길
1950년 12월 3일 밤12시 교회 장로 권사님과 청년자제들이 함께 피난을 떠난 날이다. 평양 하늘이 불바다가 되었고 교인 17명의 일행이 걷기도 하고 기차 화물칸지붕에 타기도 하면서 결국 서울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함께 왔다. 교역자 가족들을 제주도로 소개하여 배급과 천막생활로 어려움은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40여년 목회생활 중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수복 이후
수복이후 강화 내가교회에 파송되었을 때는 아직 전쟁의 대포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1954년에 인천 학익교회로 파송되었을 때 예배당은 판자 집이었고 주택은 흥방회사 사택을 빌려 쓰고 있었다. 당시 총리원 보조와 미 항만사령부의 원조물자를 가지고 교회건축을 시작했고, 어떤 사람의 모함으로 건축이 잠시 중단되었을 때 제프리 선교사가 방문했고 그때 옆에 있는 인하공대 학생들을 생각해서 2층으로 지어야겠다는 사정을 말했더니 자기 모교인 예일대학 학생들이 보낸 선교금을 주어서 148평의 2층 예배당을 봉헌하게 되었다. 1958년에 인천 송월교회로 전임했고 1962년에 서울 전농교회로 전임하여 1967년에 새 성전을 건축했다. 전농교회에서 회갑과 성역30주년을 지냈고 성동지방 감리사를 겸임하면서 1968년에는 왕십리교회를 담임 목회하다가 450평의 새 성전 설계와 건축자재를 구입해 놓고 1976년 4월 11일 70세로 41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정년 은퇴했다.
김영신 목사는 1994년 7월 28일 아침에 9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왕십리교회에서 성동지방 지방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일산기독교공원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자손 중에 감신대 동문이 6명이며 아들 김연기 목사도 역시 효창교회에서 정년은퇴하고 감리교 원로목사복지실 실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참고서: 영원한 신앙(김영신 목사 설교집) 1981
승리의 생활(노블 부인 편) 기독교서회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