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중앙 박물관장 현조 스님
“스님(僧)은 더 열심히 정진하고 베푸는 사람입니다.”
‘서울지역 왕실발원 불화를 주제로 테마展’ 개관 바로 다음날인 지난 2일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현조스님. “개관 10주년을 맞은 만큼 박물관이
서울 시민들에게 불교의 진수를 한껏 보여줄 수 있는 쉼터이자 성소로 정착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세간의 ‘저출산’은 출세간의 교단에서도 걱정거리다. 아이들을 좀체 낳지 않으니
스님이 될 아이도 그만큼 줄어드는 추세다.
출가자 숫자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해 400~500명 수준이었다.
이제는 200명을 채우기가 버겁다. 그럼에도 출가를 감행하는 사람은 꾸준히 나타난다.
왕자 신분이라는 넉넉한 세속이었음에도, 부처님은 거기에 희망이 없음을 일찌감치 깨우쳤다.
세상살이가 결국은 시집살이요 노략질임을 절감하는 순간을 누구나 한번쯤은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머리를 깎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운명’도 무시는 못한다는 입장이다.
玄照스님은 지독한 ‘애어른’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인생의 허무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좋은 대학에 가든 돈을 많이 벌든 예쁜 여자와 결혼하든 종착지는 똑같다.
죽음. 어차피 끝날 거, 빨리 끝내자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철학소년이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비롯해
니체 쇼펜하우어 사르트르 등이 쓴 책의 구절을 술술 외웠다.
대부분 알아주는 염세주의자들이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무작정 고속버스를 탔다.
초점 없는 길의 끝에서 마주친 강화도 적석사에 아예 눌러앉기로 했다.
스님처럼 생활하다보니 평소 괴롭히던 잔병이 종적을 감췄다.
바로, 여기였다.
35년째 스님으로 살고 있다.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만족하는 삶이다.
물론 단순히 체질 덕분에 출가수행자로서의 威儀를 유지하는 건 아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아픔을 겪고 상처를 받게 마련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인생은 苦海예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러한 실존적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만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과거의 시간을 버리지 못하고 미래의 시간을 억지로 잡아당기면서
번뇌를 자초하는 건 아닌지, 되새겨봐야겠습니다.
현실만으로도 녹록치 않을 텐데, 실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한 불안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잖아요?
過去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입니다.
지나간 마음을 붙잡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마음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행복입니다.”
현조스님은 동국대 선학과 87학번이다. ‘386세대’다.
단아한 외모와는 달리 젊었을 적엔 당찬 행동가였다.
승복을 입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반정부 시위에 뛰어들었다.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마치 토끼의 몸에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육조단경>.’는 게
지금도 좌우명이다. “역사와 현실을 떠난 종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스님들의 현실참여는 정교분리 원칙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신념은 여전하다.
그래서 지난해 늦가을부터 광화문광장을 물들이고 있는 촛불집회를 찾는다.
“사고도 엄청나게 치지만 수습도 대단하게 하는” 한국인의 DNA에 새삼 놀랐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정의롭고 지혜로운지를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 사건의 중심에서 1980년대 함께 반독재를 외치는 도반들과 해후했다.
반가웠으나 한편으론 “후배 스님들이 잘 보이지 않아” 섭섭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가치관의 혼란입니다.
보수와 우익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보와 좌익을 동일시하는 세태입니다.
사실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를 위하느냐 나만의 가치를 위하느냐,
공익을 추구하느냐 사익을 추구하느냐만 살피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상식과 양심이 관건입니다.”
스님은 “이웃과 사회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 이들이 상식과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일깨우고 위로하는 것이 스님과 종단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스님이 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은 도심 속의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1700년 한국불교의 값진 유물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오는 3월31일까지 ‘서울지역 왕실발원 불화를 주제로 테마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조선시대 왕실 원당이었던 수국사와 흥천사 불화 등 21건 63점의 불교성보가 전시된다.
특히 수국사 불화는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스님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을 통치이념으로 삼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 답할 수 없었던
유교의 한계로 불교는 꾸준히 신앙됐고, 왕실 또한 불사의 중심이 돼 왔다”고 밝혔다.
앞으로는 헛기침을 하며 억불(抑佛)을 역설했으나 뒤로는 쉬쉬하며 부처님을 믿었던 게 왕족들이다.
그들은 부모나 자식이 죽으면 절을 짓고 사자(死者)의 위패를 모셨다.
수국사나 흥천사는 도성 근처에 있던 願刹들이었다.
‘사람이 죽어 氣가 흩어지며 끝’이라며 죽음 이후의 문제에는 젬병이었던 유교다.
성리학적 질서에 충실했던 세종대왕도 말년에는 궁중에 內佛堂을 건립했다.
훈민정음으로 맨 먼저 만든 책은 佛書였다(釋譜詳節). 세조는 대표적인 護佛의 군주였다.
세조는 刊經都監을 설치해 중요 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
행차하는 곳에 절이 있으면 重修를 지시했다.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제2호 원각사도 그의 작품이다.
잔혹하게 숙청한 단종 일가와 사육신에 대한 죄책감을 이렇게 씻었다.
곧 죽음이라는 실존적 한계를 위로해주지 못했다면 불교는 엄혹의 시대에서 존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조스님은 “찬란한 불교문화 역시 사람의 아프고 억울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방편”이라고 역설했다.
제5교구본사 법주사 주지에 취임하자마자 처음 한 일도 聖寶를 보관한 收藏庫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요즘에도 불교의 값진 유적이 망가진 채로 버려져 있는 시골 사찰을 보면 가슴이 무거워진다.
불교중앙박물관은 금년으로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앞으로도 더욱 다채로운 기획전을 마련해 서울 시민들에게 불교의 진수를 한껏 보여줄 수 있는
쉼터이자 성소로 정착시키겠다”는 발원이다.
현조스님은 초기불교를 공부하며 불교학에 입문했다.
스님이 출가한 1980년대만 해도 초기불교는 몹시 낯설고 무시되는 학문이었다.
은사인 전 조계종 원로의원 혜정스님(2011년 원적)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라며
상좌를 동국대에 입학시켰다. “현대인을 교화하려면 가장 안목이 뛰어난 현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게
현조스님의 지론이다. 포교의 기본은 언변이다.
“종단의 뿌리인 선종은 不立文字를 가르쳤습니다.
불립문자의 의미는 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아예 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수승한 깨달음을 성취했다 해도 그걸 말로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직도 당나라 시대의 ‘임제할 덕산방’을 찾아야겠습니까?
또한 법문을 잘 하려면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의사소통의 근본은 문자입니다.
종단 집행부가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할 스님은 포교 잘 하는 스님이고 말 잘 하는 스님입니다.”
21세기에 걸맞은 승가想을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기차다.
그러나 어쩌면 시대와 환경을 초월한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 누구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탁마(琢磨)다.
“스님을 뜻 '僧이라는 한자를 보세요. ’사람 人‘ 자에 ’거듭할 증(曾)‘ 자를 합쳤습니다.
어제보다 더 훌륭한 賢者이자 聖者가 되려면 더 정진해야 하고 더 베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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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스님은...
1983년 혜정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86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95년 범어사에서 일타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불교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제14․ 15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과 국제선센터 초대 주지를 역임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제5교구본사 법주사 주지를 지냈다.
2016년 8월부터 불교중앙박물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
출처 : 봉은사랑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