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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장 예레미야의 소명과 사명
5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1장의 내용은 예레미야의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돗에 사는 제사장의 아들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선지자를 세우심은 배역한 백성들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호소하며, 그렇지 아니하면 징벌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을 당하였고, 이제 남쪽 유다의 패역을 책망하며 경고하기 위하여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지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란 패역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사명은 평안이 아니라 재앙을 선포하는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임무를 누가 즐거워하겠습니까? 예레미야도 피해보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강권에 의하여 복종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요시야 13년에 부름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11년까지 무려 40년 이상을 사역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베풀어 징계”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도 40년이나 회개할 기간을 주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1장의 주제는 “예레미야의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3) 예레미야가 활약한 시대적 배경
둘째 단원(4-10) 너를 선지자로 세웠노라
셋째 단원(11-19) 시대적인 징조
첫째 단원(1-3) 예레미야가 활약한 시대적 배경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11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1-3).
① 본문은 우선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다스린지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요시야 왕은 유다 나라의 마지막 선한 왕으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 합니다. 요시야가 팔 세에 왕위에 올랐으니까 “요시야의 다스린 지 13년”(2)이라면 요시야 왕의 나이가 20세 때 하나님은 청년(6)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시기에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젊은 왕 요시야와, 진실하고 젊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짝지어주셔서 “심판을 베풀어 징계”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회할 기회를 주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점이 “요시야 왕 18년에,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지 5년 후에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고, 여선지 훌다를 통하여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그리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되는 데서 드러납니다.
② 예레미야가 활동한 기간을 요시야 13년에서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3상) 하고 밝혀주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심판을 베풀어 징계”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도 40년이나 회개할 기간을 주셨음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홍수심판 전에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창 6:3) 하고 120년 간이나 유예기간을 주심과 같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③ 또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롬 2:4) 하는 인간의 패역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활약한 시대적 배경”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이 해 오 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3하).
둘째 단원(4-10) 너를 선지자로 세웠노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4-5).
본 단원의 내용은 예레미야의 소명(召命)과, 사명입니다.
소명(召命)
① “내가 너를”,
②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③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④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 하십니다. 이렇게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선지자란 자원하거나,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택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가장 큰 감격이 있는 사람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부활하신 주님께 친히 부름을 받은 바울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합니다. 또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 1:15)라고 말씀합니다.
사명보다 “소명”이 먼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것이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이것이 사명입니다. 주의 종들에게 있어서 이 소명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러해야만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당해서도 극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선지자나 사도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아무리 작은 자라하여도 모두 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을 보면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황금고리라 일컬어지는 로마서 8:29-30을 보십시오.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합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6-7)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남다른 감동(엡 1:18)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형제도 부르심에 대한 감격을 자주 자주 묵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구별하여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는 임무가 있으셨기 때문일 터인데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사명(使命)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예레미야는 말씀의 대언자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7상), 보내시는 데도 가지 않는다면 불순종입니다.
②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하). 당연히 선포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을 범하는 일입니다.
③ 그렇다면 그가 대언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10상),
④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10하)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대언 해야 할 말씀의 성격은 파괴적인 면과 건설적인 면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주목하게 되는 것은 파괴적인 면을 먼저 언급하고 있고, 또한 강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것은 파괴하는 일이요, 70년 후에 돌아오게 하리라는 예언은 건설하며 심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면 건설하는 말씀으로 역사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파괴하는 말씀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는 “좌우에 날선”(히 4:12) 검처럼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만 주어진 사명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도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고후 10:4-5) 합니다. “파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렇게 파한 후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는 일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말씀을 통해서 파하는 일과,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은 시대를 초월하여 말씀을 맡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동일한 것입니다.
⑤ 예레미아는 사명의 막중함을 깨닫고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피해보려고 합니다. 이는 불순종이기 보다는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는 겸비인 것입니다.
⑥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 이것이 “너를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신 하나님의 보장입니다.
셋째 단원(11-19) 시대적인 징조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11-12).
예레미야를 부르셔서 사명을 맡겨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12). 13절에서도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거듭 말씀합니다.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고 “입”을 말씀하신 후에 무엇을 보느냐 하고 “눈”을 말씀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를 설명하려 애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함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눅 12:54-56)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할 사명을 맡은 자는, 시대의 징조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11-12)만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①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습니다. 살구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아직 겨울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구나무에 해당하는 “솨케드”라는 말은 “깨어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깨어 계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② 예레미야는 “끓는 가마”(13)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할(14)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참 선지자는 이를 보았기에 눈물로 경고하나, 거짓선지자는 이를 보지 못하기에 “평강하다, 평강하다”(6:14) 하고 거짓 평안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바라본 “시대적인 징조”였습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받게 될 박해를 아셨습니다. 주님은 핍박을 받느냐, 칭찬을 받느냐로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17)고 거듭(8)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④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18)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왕, 족장들, 제사장들, 백성들”이 합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 한 사람을 대적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레미야 선지자 한 사람을 파괴하려 해도 “견고한 성읍”같을 것이요, 뽑으려 해도 “쇠기둥”같이 뽑히지 않을 것이요, 넘어뜨리려 하나 “놋성벽”처럼 “그들이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19상)는 보장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보장은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팍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 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겔 3:8-9)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의 종들에게 있어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은 무엇일까요?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19하, 8)고 거듭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1장의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① 이 시대에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려야” 할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뽑아버려야 하고, 파하여야 할 것들이 없는 시대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이것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건설하며 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② 주님께서도 “너희는 가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서 파송하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보장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두려워하고, 넘어지고, 주저앉고, 낙망합니까?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어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보장의 말씀을 더디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형제의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金剛石)같이” 해주셨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히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