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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본문: 눅4:38-44
제목: 우리의 현실을 아시는 주
I. 들어가는 말
지난 주 L. Thomas 목사님께서 방한하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만큼 조금은 허탈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여동생이 암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오히려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가는
길이지만, 특별한 사정으로 이와같이 먼저 떠나는 경우가 있지요. 특히 그 분이 사랑하는 가족일 때는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도 안타
깝고 많이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 그 뒷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만, L. Thomas 목사님과 그 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열병도 불치병이었겠지요.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그랬겠죠.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를 치료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몬은 베드로의 히브리어 이름입니다. 5:8을 보면, 시몬 베드로라고 부르고 있지
요. 시몬은 히브리어의 헬라어 발음이고,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반석은 아람어로 게바)
아무튼 본문을 읽을 때, 저는 항상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시몬 베드로의 후계
자를 자처한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간혹 카톨릭 신자들 중에는 베드로가 독신이었기 때문에 교황도 독신으로 산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장가를 간 사람입니다. 장가도 안 간 사람이 장모가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러면, 왜 그런
말이 나돌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본문의 핵심적인 교훈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되었을 때, 가볍게 살펴볼까 합니다.
또 한가지 본문에서 제공하는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시는 이유 중에 세 번째 이유가 여기에서 설명되고 있다
는 점입니다.
II. 교황제도의 모순
1. 카톨릭 성직자들의 독신제도의 근원
우선 결론을 먼저 말씀 드리면, 카톨릭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는 이미 본문에서 살펴 보았듯이 베드로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 성직자도 처음에는 결혼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중세에 카톨릭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
는 시간이 몇 백년 씩 흘러갔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망하지요. 로마 카톨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직자들의 타락이 도를 넘어 섰
습니다.
1073년 쯤에 그레고리 7세가 제 157대 교황으로 즉위하는데, 그는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이 도를 넘은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27개조 교황칙서’에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독신제도를 언급을 합니다. 그러다가 1123년에 교황 칼리투스 2세가 소집한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법으로 선포를 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카톨릭에서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원리강론을 보면,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마19:27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보소서 우
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랏사온데...”하는 구절과 사도 바울이 고전 7:32-33에서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
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라고 생각하고,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하므로
바울은 독신을 고집했다는 것을 근거로 성직자는 당연히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와 모순이 존재합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아내도 버리고 가정도 팽개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가 부부관계를 지속한 사실은 고전9:5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
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 말합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아내가 증언한 것을 누가가 기록했을 가
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잖아요? 자기 엄마의 일인데, 오죽 자세하게 알고 있었겠습니까.
두 번째로, 카톨릭의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심각한 모순은, 장가 안 간 자는 모두 어떻게 하면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합니까?
또, 장가 간 자는 어떻게 아내를 기쁘게 할까만 생각하고 살아갑니까? 만약 그렇다면 카톨릭 성직자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들이고,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을 성질나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는 거겠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카톨릭 신자들은 신부들을 보면서 신앙
적인 대리만족을 하는 거잖아요.
겉으로 드러내 놓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바로 이러한 모순된 사상에서 계급이 나오고 서열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황은 예수님 다음이
고, 그 다음은 추기경, 그 다음은 주임신부, 그 다음은 그냥 신부, 그 다음은 수도사..., 이렇게 나가다가 가장 말단은 결혼한 일반 성도
가 되는 것이겠죠.
계급만이 아니라, 고해성사 문제도 여기서 나옵니다. 일반성도는 신부에게 죄를 고하고, 신부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신분이 되는 것
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구약 모두 이 사상에 반대를 합니다. 삼상 2:22를 보면, 당시 엘리 제사장의 아
들들이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당시는 왕이 없었습니다. 엘리 가문은 제사장의 지
위와 왕의 전신인 사사의 지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망한다는 말은 여기서도 진리입니다. 무서울 것이 없던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죠. 엘리 제사장은 그런 아들들에게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께 범한 죄는 하나님 외에는 용서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그가 카톨릭 신부든, 목사든, 축복은 해 줄 수 있어
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목사도 죄인인데, 죄인이 어떻게 죄인을 용서합니까? 카톨릭 신부는 전부
의인입니까? 그렇다면 롬3:10의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지요.
2. 카톨릭 교황의 지위와 베드로
그들도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모순들을 모를 리가 없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베드로 후계자’ 설입니다. 물론
카톨릭에서는 마16장의 말씀을 근거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16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 대답에 마음이 흡족하셨던 주님께서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로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즉, 로마 카톨릭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수위권”을 주신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수위권이란 마16:18에서 주님께서 베드로
에게 교회의 모든 권한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앞 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
음”이 교회의 토대가 되고, 바탕이 된다는 말씀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17절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사람이 베드로에게 가르
쳐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죠.
즉, 교회는 베드로의 바탕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신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쳐 준 것입
니다. 여기에 서열이 있을 수 없고, 높고 낮은 계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은 주님의 제자들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마20:20이하를 보면, 제자들 끼리 싸움니다. 주님은 25절에서 서열을 따지고, 계
을 나누어 권세를 부리는 것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하는 짓이라고 선을 그으셨습니다. 그리고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런 말씀을 적용하자면, 교황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신도들을 보살펴야 됩니다. 카톨릭 신부들 중에는 그렇게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자신은 돌보지 않고 죽어간 이태석 신부 같은 사람은 말씀대로 산 사람입니
다. 제가 존경하는 카톨릭의 신학자로서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한스 큉이라는 분도 교황무오설과 수위권 설을 부정하다가
카톨릭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개혁주의 교회, 즉 우리와 같은 개신교 내에도 계급 따지고, 등급 따지고, 심지어 강남 강북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그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III. 베드로의 집에서 보여주신 교회의 원리
오늘 읽은 본문이 중요한 것은 이 말씀 속에 교회의 원리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31-37절의 말씀을 가지고 주님
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고, 가버나움에 head quarter, 즉 본부를 차리신 이유 두 가지를 살펴 보았습니
다.
첫째는, 경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가내수공업이 발달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이었다면, 가버
나움은 서민들의 경제 중심지였습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신성한 곳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저잣거리, 사람의 삶이 왕성하게 이루어
지는 곳 즉, 시장 바닥 한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문화교류의 중심지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북쪽으로는 지중해 해상무역의 중심지 두로와 시돈과 연결되어 있었고, 동쪽으
로는 로마가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10개의 도시 즉, 데가볼리를 만들고 각국의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놓았습니다. 경제
적인 교류와 더불어 인종적, 문화적인 교류도 활발한 곳이 바로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즉 두 번째 원리는 동심원의 원리입니다. 중심지
에서부터 교회를 시작하여 퍼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전략이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세 번째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교회를
현실의 바탕 위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1. 첫째는 예수님도 현실 속에서 사역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첫 번째 치료를 받은 여자, 즉 베드로의 장모는 39절 하반절을 보면, 곧 일어나서 예수님 일행을 수종듭니다. 수종을 들었다
는 헬라어 동사 διαχονέω는 노예가 식탁에서 주인의 식사를 돕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 일행의 식사를 챙겨주었다는 것
이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사역의 본부를 설치하신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예수님도 배고프시면 먹어야 하셨고, 피곤하시면 주무셔야 할 장소가 필요하셨고, 비가 오면 피
해야 할 지붕이 있어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집이 바로 주님이 사역하실 베이스 캠프의 역할을 해 준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은 주님의 사역에 필요한 인간적인 필요들을 제공했던 것이구요.
우리가 이미 1-13절 사이에서 살펴본 것처럼 철저하게 사람이 되시는 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이었기에 우
리와 같은 한계를 몸소 겪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처음 시험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
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거부하셨습니다. 단순히 그것이 마귀의 시험이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해서 거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표가 되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대표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와
똑같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 우리의 한계, 우리가 겪는 희노애락, 우리가 꿈꾸는 미래, 시간의 변화에 따라 쇠퇴해져
가야만 하는 인간의 현실, 이런 것들을 몸소 겪으셔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4:1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
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교황이 하나님 다음으로 높아졌다는 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라는 뜻인 것이지요. 목회자
가 무슨 신비한 영역에 반쯤 몸을 담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목회한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아플 수도 있고, 아프면 병원
에 가야한다는 사실에 실망하더군요. 목회자도 먼 길을 갈 때는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갈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본문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목회자가 그런 신비한 영역에 있다면, 목회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같이 먹고, 같이
아프고, 같이 힘들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현실의 바탕위에 세워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제공합니다.
2. 둘째는, 예수님은 현실을 함께 나누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알았던 병은 “중한 열병”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베드로의 장모가 아픕니다. 고쳐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
래 알았다. 열병아 떠나가라!’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39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열병을 꾸짖기 전에 먼저 하신 일이 있습니다. 네, “가
까이 서서”라고 되어 있지요. 아마 베드로의 아내는 집회 때마다 청중들에게 이 모습을 훨씬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이 “가까이 서서”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 έπιστάς έπάνω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NIV는 ‘bent over’라
고 번역을 했더군요. ‘전념했다’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의 장모의 병세를 집중하여 열정적으로 살펴보셨다는 말입니다. 증세를 살펴보
면서 그 병의 성격과 성질, 종류, 그리고 얼마나 고통이 큰지, 얼마나 위험한지를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NIV는 이 중한 열병을 High Fever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높은 열을 다스리지 못하면 매우 위험해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흔한 병이었습니다. 요4:43이하를 보면, 왕의 신하가 자존심을 꺾고 예수님에게 아들을 살려달라
고 간청한다. 그 이유는 아들이 이 열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행28:8를 보면, 사도 바울이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을 당하는 중에 유라굴로 광풍에 배가 파선하여 잠시 하선했던
멜리데 섬의 추장 아버지도 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가 바울의 기도로 병이 치료되는 사건이 있었지요. 알렉산더 대왕도 열병으
로 죽었는데, 학자들은 인도를 침공했을 때, 말라리아에 전염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말라리아로 인한 열병은 현재까
지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질병이라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지난 백년간 1억5천만명이 이 열병으로 죽었고, 20세기 초반
인도에서 사망한 사람의 1/2이 이 열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현실입니다. 린 토마스 목사님이 하나님의 일로 한국에 오셔야 하지만,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아픈 가족이 있을
때,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처럼,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시면서도 현실의 문제로 고통 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
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쳤다는 소문은 금방 퍼졌겠지요. 본문의 구성을 보면, 아직 베드로가 정식으로 제자가 되기 전입니다. 당시에는 능
력있거나 명망이 있는 분을 집으로 모시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분을 모셨으니 베드로 집안 식구
들은 그것을 자랑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40절을 보면, 해질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줄을 섰습니다. 왜 “해질 무렵”이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구절을
굳이 사용했을까요? 주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간에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둔 완전한 사람이시기 때문이
셨습니다. 즉, 회당에서 말씀 전하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느라 피곤하신 몸입니다. 내일 또 복음을 전하려면 오늘은 쉬셔야
한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이 사람들을 고쳐주면, 두 가지 면에서 사역에 방해를 받게 됩니다. 첫째는, 귀신들이 자꾸 예수님의 정
체를 폭로하는 거예요. 지난 주에 살펴 본 것처럼 때가 이르기 전에 폭로해서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자는 거지요. 둘째는, 42절 말씀처
럼 사람들이 주님을 병자나 고쳐주는 분으로 여기셔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자꾸 빼앗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차마 외면하지 못하셨습니다. 42절을 보면, “날이 밝으매”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지요. 밤새셨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현실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복음을 핑계로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3. 셋째는, 현실을 극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병자들을 기적적으로 고치는 것은 들어난 표면적인 현상만 보면, 한 가지씩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주님이 능력자로 소
문이 퍼진다는 것이죠. 그 소문은 주님이 전도하는데 수월하게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기적만 바
라고 말씀은 듣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다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떠나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습니다. 병자를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했을 때는 밤을
새가면서 고쳐주셨지만, 언젠가 기적이 필요할 때, 수월하게 주님을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의 발을 묶어 두려는 시도는 단호하게 거부하
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4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고
합니다만,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심지가 굳고 확실한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 뿐입
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호의에 넘어가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때때로 교회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에 혹해서 자기의 사명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님이 생전에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목회를 하다가 어느 날 보니까, “성도들이 전도도 안 하고, 사랑의 교
회 교인이라는 것을 즐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러워하면서 물었습니다. ‘그게 왜 문젭니까?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
들은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좋습니까?’하고요. 옥목사님은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청년들 중에는 말씀을 사모하기 보다는 괜찮은 친구를 찾아 교제하러 사랑의 교회로 등록하는 것을 보았습
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은 차량봉사도 하고, 새로오는 분들을 안내도 열심히 하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교회
근처에서 사업하시는 분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교회에 나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는 사람들이 전부 사랑의 교회에 나
오니까 할 수 없이 나온다는 분도 있더군요. 어떤 분들은 교회가 커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니까 나온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
회가 아니지요.”
어떤 책에서도 이 말씀을 기록해 놓으신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제자훈련에 목숨을 걸게 된 이유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보
시겠지만, 주님이 이후로 병자들을 안 고쳐주신 게 아닙니다. 다만 본질을 회복하시기 위해 영광을 과감하게 버리신 것이지요.
IV. 결론
신비주의를 경계하십시오. 주님은 가장 현실적인 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신앙의 현실을 두고 사탄과 벌이는 영적인 싸움입니
다.
현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현실의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살피셨습니다. 마28:20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한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면서 우리의 현실을 함께 겪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영혼구원입니다. 우리는 42절 말씀처럼 교회라는 이름으로 주님을 묶어 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혼구원의 사명을 잊는다면 주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셨던 것처럼 우리를 떠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