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저녁에 쓰다 / 이만섭
무언가에 홀린 듯
까닭 없이 골똘해지는 이 알 수 없는 마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처음에는 나무 끝에 이는 실바람처럼
나지막이 살랑거리다가
점차 어둠을 그을음처럼 분칠하면서
눈과 귀를 가슴으로 열고 온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아득하게 들리는 귀울음이
심장으로 세들어 온 것은 아닐까,
가슴 숭숭 파고드는 은밀한 의문부호들은
느낌표 일색이다
어둠 속에서도
나만이 간직한 비밀을 발설하고 싶은 저녁,
지극한 갈망 같은 것이 신열로 오르는 게
마음밭에 그리움이 싹 트는가 보다
돌배나무 자서전 /이만섭
정원 한구석 깊숙이 차지하고도
붙박여 살아가는 주근깨투성이의 돌배나무
이 봄에도 자서전을 쓴다
하느작하느작 꽃차례 짓고
제 어깨 아래로 쓰는 유순한 가전체 문자들,
여린 꽃잎 뒤편을 유심히 살피니
가지마다 옹이가 박혔다
대체 무슨 조화 속일까,
꽃도 한때라지만
나무는 왜 견고함을 감추던 것일까.
작달막한 체구에 더디 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원의 꽃나무들 활짝 꽃 필 때
저도 버젓이 이화단장하고
봄밤의 달빛 아래 마실 들지 않았든가.
꽃은 피어 아름다움을 지으면 그만일진대
유실수의 몫까지 감당하려면
담장 가 감나무처럼 키도 커야 하겠거니와
저 총상화들 좋이 다 배 맛을 익힐 수 있을까,
주근깨투성이의 해묵은 돌배나무
이 봄에도 흰 꽃 피워놓고
모진 세월에도 정원의 관상수로 산다
가슴 산책 / 이만섭
어쩌다 가슴에 들어와 보니
방들은 참 많기도 하구나
그래선지 저 생각에서 오는 것들은
쌓아둘 자리도 넉넉하구나
해 바른 방은 기쁨이 들고나며
창가에 꽃가지 걸어놓고
모퉁이에 그늘진 눅눅한 방
같은 방인데도 쓸쓸함이 꼼짝 않고 구들을 졌다
저곳엔 우울이 몇 번인가 기웃거렸으리
가둘 수 없는 바람 같은 것은
사랑채로 들어앉은 허파 쪽으로 보낸다 해도
슬픔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와서
우물처럼 고여들 때
그런 때는 눈자위까지 퍼올려
눈물샘으로 흘려보내야 하리
명치 끝에 대문 하나 달아놓고
썰물이든 밀물이든 걸러내야 하리
저수지 /이만섭
빗장을 걸어놓고 한 질 수계에 든 자리
물은 단전호흡이라도 하는 중일까
잠자코 적요한 내부를 들여다본다
청옥빛 투명창은 창살에 운화문을 새겼다
바람은 언제 불어오고 새들은 언제 날아갔는지
깊디깊은 창공에도 한가로움을 띄웠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들여 보이는 것
햇빛을 등지고 입수하는 물갈대들이
수표면에서 둔각의 굴절로 꺾인다
소금쟁이 자취에도 파르르 이는 파문인데
번번이 한 치 미동도 없다
심연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놓은 것은 아닐까
언젠가는 물길 내가는 그날을 위해
거대한 사서함 하나 들여놓고
물은 우유체의 서간문을 쓰고 있다
바람의 형용사 / 이만섭
한 무리 되새 떼가 군무를 짓자 허공은 재빠르게 그물을 거둬간다
아구 같은 입속으로 들어가버린 새 떼들,
새 떼들은 잔잔하다 싶으면 언제고 깃들어와서 날갤 파닥거리다가 사라지곤 한다
저 홀연하고 기이한 몸짓은 허공이 비어 있는 내막이다
한 마리 새의 날갯짓인들 허공은 마다했던가.
봄동
천성이 착한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겨울 저녁 오후 5시 하나로 마트 야채 코너였다
모두 가지런한 태도로 눈인사를 건넬 때
언제 왔던지 그녀도 틈에 끼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유난히 상기된 얼굴은
둥글납작한 연초록 치마를 입었는데
어디 바람 등성에서 맥답(麥踏)이라도 하다가 온 듯
다소 들뜬 표정은 산만해 보였다
내가 반갑다는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앞서 그녀의 옷매무시를 고쳐주는데
나도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앳된 모습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마침 환절기질환으로 근신 중이라서
행여 마른기침이라도 나올까 봐 섣불리 만질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신선한 표정을 보면서
이 경직된 겨울이 활로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 깊은 곳 / 이만섭
나무와 나무 사이
허공에걸린 빈 가지
마른촉수마다 바람에 뒤척인다
능선과 능선 사이
골짜기를흐르는 물이
겨우내저 홀로 속살거린다
찬바람 불어 황량해도
산그림자에 매어 외톨져도
본능으로견디는 세월우리의 가슴에도
날숨과들숨을 비집고 찾아드는
외롭고막막한 것들기다림의 우편함에는
온종일누구 하나 찾는 이 없고
유폐된가슴은 헛헛하다겨울 속에서
겨울의변방 멀리 있는 곳이라면
모두겨울 깊은 곳이다
달이 물로 걸어오듯 / 이만섭
사랑은 그리움이 현신(現身)한 것
달이 물로 걸어오듯
그대 어둠을 밝히고 온다
한 순간 해일처럼 덥쳐온 유혹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푸른 밤의 수명성에 갇히고
아, 달빛 젖은 밤은
달빛 젖은 밤은 아무도 모르리
너와 나 사이를 하얗게 물들이고
물 위를 걸어오는 달이여,
*고연옥 작, 임영웅 연출의 연극
춘일사(春日詞) /이만섭
어제는 비가 오고 오늘은 하늘 드맑다
몸풀린 앞 냇가에 버들치 뛰어오르고
양지에봄맞이 나온 강둑길 오랑캐꽃
봄햇살 비켜앉은 다박솔의 산노루는
망울 틔운 황매목 수줍음을 엿보는데
푸드득제물에 겨워 날아가는 멧비둘기
봄바다 이야기/이만섭
먼옛날 버드내란 바닷가 꽃마을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이 마을 어귀에 맨 먼저 샛노랗게 피던 생강나무꽃이
어느 해 봄인가 도무지 필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였어요
산수유꽃도제비꽃도 앉은뱅이꽃도 다 피어나는데
생강나무만빈 가지를 푸른 하늘로 올려 꼼짝 않고 있었어요
누구하나 영문을 아는 이 없고 그래서 마을에서는
정원사를데리고 와 생강나무 가지를 살피다가 비린내를 채취했던 거였어요
냄새를확인해 보니 아뿔싸 바다에 사는 숭어의 냄새였어요
숭어는밤마다 나무에서 자고 아침이면 내려와
은비늘을파닥거리며 바다를 헤엄쳐 가는 거였어요
삼월 샛바람에 생강나무가 바람이 나서 그 몸이 먼저 꽃을 피웠던 게지요
마을에서는어린 꽃들이 피어나는데 소문이라도 날까 봐
쉬쉬하며생강나무를 버드내 뒷산 산비탈에 옮겨 심었다지요
그뒤로부터 환한 봄바다의 비릿내를 풍기며 홀로 피는 생강나무꽃
해마다 봄이오면 곤줄박이가 찾아와 바다 소식을 전해 준다지요
잔설 / 이만섭
겨울 패잔병들이 숨어든 삼나무 숲
군데군데 쫓겨간 발자국들이 어수선하다
나무들은 금세 내가 아군인 것을 알아차리고
골짜기 쪽으로 길을 터준다
동장군의 졸개들은 아직도 비탈 아래 매복해 있는 듯
능선에서나 부는 소소리바람 소리로 암호를 주고 받는데
무언가 등 뒤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
궁노루처럼 멈칫 놀란 나는
앗, 수류탄이다!
나도 모르게 몸을 지표면에 바짝 엎드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슬그머니 일어나 툴툴 털고 경계에 드니
오리나무 삭정이 부러진 소리
부스스 나무의 각피가 유난히 허옇다
봄밤의 달빛 소품들 /이만섭
등 뒤에 푸른 별 무리 걸어놓고
휘영청 어둠을 밝혀 가부좌를 튼 화강암 너럭 마당, 고요가 벅차다
처마 끝 허공을 깎아 절벽으로 세워
남실남실 숨결 짓는 만조의 달빛바다
뜰의 꽃나무들 여린 새순 틔워 이슬 받아먹는데
두엄 가 늙은 고욤나무는 관음사 목어처럼 등 굽은 채 잠들었다
보드라운 비단 그물로 내린 호젓한 정적,
고단한 농기구들 쉬어 있는 헛청이며
어슴푸레 유폐된 뒷간 길에도
가뭇하게 번져 있는 적막감,
해묵은 대추나무 그림자도 담벼락에 기대서서
무료하다 못해 제 혼자 스무고개 내놓고
알아맞히면 안 잡아먹지
해진 옷깃 추스르며 부스스 부스스 몽달귀 분장을 하고
흙 속에 씨감자 파묻어놓고 비닐 덮어씌운
정지문 앞 텃밭이 유난히 새하얗다
손바닥만한 그리움조차도 견딜 수 없어
정처 없이 헤매고 싶은 봄밤,
장독대는 머리에 하얀 분진을 이고
음- 음- 그리움이란 이런 거라고 슬몃슬몃 귀띔해 주는데
잠든 창들이 일제히 불빛을 밝힌다
꽃 같은 피 /이만섭
바람도 소실해 간 한낮
제 무게조차 헐떡이는 햇빛 아래
낡은 손수레 한 대가 쇠똥구리처럼
데굴데굴 굴러 꽃집 문턱에 멎는다
훤히 이마부터 먼저 보이는 낮츰한 키는
당신의 등굽 같은 낙타고개를 넘어서
오리나 되는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우리자원의 김노인이시다
노인은 양계장에서 계분을 얻어다가
소일 삼아 만든 분갈이용 거름을 잔뜩 싣고 오셨다
종이박스 몇 점을 얻기 위해서다
땀으로 얼룩진 잔등에는 희뜩희뜩 소금꽃이 피었다
더 역동적인 것은 당신의 목줄기 사이로
툭툭 불거져 흐르는 꽃 같은 피다
그늘 속에 우두커니 피어있는
화원의 핏빛 없는 꽃들이 무색한 정오다
밑줄 /이만섭
어릴 적 어머니는 햇빛 쨍쨍한 날은
마당에 든 햇살이 아깝다며
손수 빨랫줄을 쳐놓으시고
이불 홑청을 뜯어 냇가에 가서 빨았다
나무의 내재율 / 이만섭
나무의 외관은 잎과 줄기 뿌리일테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전체가 3악장으로 된 시가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이 세 부분이
한 문장을 이루며 생명의 서사를 쓴다
행길 가의 양버즘나무가 그렇고
산비탈의 떨기나무가 다르지 않는데
교목은 교목대로 관목은 관목대로
저마다 걸맞은 내재율을 담아
이파리는 햇빛 층에서
줄기는 바람 층에서
뿌리는 물관부에서
서로 광합성을 위한 화음을 키고 있
이것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기 위한
생명의식이 아닐까 싶은데
무릇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튼실함도
여기에서 나오는 듯싶다
봄 / 이만섭
하늘은 지상에
꽃을 일시에 피워내는 아름다움을 선물했다
그밖에 새가 노래하고
바람이 나부끼고
창유리가 햇살에 반짝이는
갖가지 허다한 일들은 다 꽃을 위한 헌사다
아침 강가에 나가 보아라
강물에 낯 씻는 물푸레 곁에
물안개가 물감을 풀어내며 수채화를 그린다
잠깐에도 천 번도 더하는 얼레질로
드맑게 이는 물비늘
그도 허다한 일의 하나쯤은 되겠지만
그것이 꽃을 피우기 위함이라면
나무는 단지 몸을 빌러 꽃을 피우는 것이다
手帖論 / 이만섭
언제부터인가 내 가슴에 그대가 세들어 산다
내 육체의 어둑어둑한 협착지대에서
굴뚝새같이 겨우 몸만 들락거리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행적을 잊지 않고
산수 간에 담아내는 사유조차 글 품이라도 팔듯
또박또박 받아쓰는 문장은 간결하다
바쁠 때는 바쁜 대로 거두절미하고
형편에 맞는 문자나 기호로 대처하지만
결정적일 때는 밑줄을 그으며 뜻을 분명히 한다
나는 기억자리가 희미해지고 막막할 때면
손을 내밀어 그대의 자취를 이모저모 살핀다
그대는 오래전에 나의 자화상이 되었다
나의 깨어 있는 순간을 위해
쉼 없이 내게 귀를 기울이는 꼼꼼한 그대
오늘은 내가 그대의 크고 부드러운 손이 된다
아침 / 이만섭
밤의 비탈을 타고 오른
개마고원 같은 평원이
거울을 들여다보듯 고스란하다
밤사이에 무럭무럭 자라
하얗게 망울진 우듬지 사이로
눈동자마다 정결한 표정은
제단과 같이 성스럽다
먼동을 열고 오는 햇살이 그렇고
골짜기를 흘러온 강물이 그렇고
풀잎에 벙근 이슬이 그렇다
둥지를 날아오른 작은 방울새
온기어린 은빛 날갯짓이
평화로운 허공에 눈부시다
저 환희의 아타락시아,
은행나무 가로수 / 이만섭
겨울 아침 은행나무 가로수 강둑길을 걷는다
어깨뼈 사이로 즐비하게 늘어선 나무들
나는 종(縱)을 짓고 나무들은 횡(橫)을 지었다
아직 새들도 단잠에서 깨이기 전
하늘 우러러 서 있는 벌거벗은 표정은
기다림조차 단출하다
내를 건너온 서리까치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다시 내를 건너 숲으로 날아간다
가만히 보니 애써 풍경을 짓는 모습이다
마침 강둑을 오른 안개가 불분명한 가운데
나무는 저만치에서 경계가 된다
아무 하는 일 없는 것 같아도
저렇듯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로수가 하는 일이다
새로로 걷는 내 몸을 정중히 안내하는 것까지도
무릎에 대하여 / 이만섭
가만히 보면 무릎은 퍽 점잖다
몸의근위병 같은 건각(健脚)을 거느리고도
저렇듯낮은 자리에서 겸손하다
어떤근엄조차도 이곳에서는
예를표하지 않아도 스스로 정중하다
백번인들 천 번인들 몸을 일으키고 내려놓으며
입석의수고로움이나 가부좌의 인내조차
종순으로받드는 저 기꺼움은
차라리 순명에 가깝다
더러발을 말 몰아 먼 길을 달려왔어도
가지런한매듭은 매양 온순하기 그지없다
무릎위에 고개 숙여 기도하는 자는 안다
세상에는감사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더는감당할 영감이라도 얻는다면
일순간에무릎을 탁, 치는 장명(掌鳴)으로
줄탁(啐啄)같은 깨달음을 맛보는 희열이 또 어딨을까,
오,마침내 무릎이여.
겨울 연밭에 가서 / 이만섭
연꽃들이 다비식을 치른 새미원에 갔었네
두물머리 질펀한 강물 곁에
한 자취 그대로 인연을 짓고 떠난 자리
꽃의 뒤태가 나직나직 아른거리고 있었네
꽃은 강물을 안고 피었다가 떠났건만
질 때는 화엄으로 졌는가
폐곡선의 늪을 수놓은 헤일 수 없는 건조체
삭아 검불이 된 생의 경전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꽃의 지문을 해독하네
불립문자를 짓고 생명을 밀어올린 마른 꽃대
예불을 드리듯 조심스럽게 일으키는 손
찰랑, 강물이 손등을 씻어주네
인연이란 지은 곳에서 다하고
다한 곳에서 짓는 것인가
어느덧 내가 연꽃으로 환생하고 있었네
소 / 이만섭
서 있거나 누워 있거나
두어 평 남짓한 외양간조차 다 차지한
커다란 눈
과묵하기만 하여 기다리는 일도
소는 가만히 눈으로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밖에서 돌아오시면
외양간을 먼저 살피셨는데
그때마다 소는 긴 속눈썹을 낮게 내리고
끔벅끔벅 순종하는 대꾸를 하였다
마치 오래도록 살며
우리집 외양간을 지키고 싶다는 듯이,
아버지도 알았다는 듯이
그래, 하시며 목덜미를 어루만지는데
그때 소가
음매~ 하고 울음을 터뜨리던 거였다
매우 짧은 詩的인 敍事 / 이만섭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층계를 내려오다가
유리벽에 비친 쑈윈도우의 바닥이
가을날 메타스퀘어 가로수길 같다
잠깐 사이에
난간은 줄무늬들이 행렬을 짓고 지나간다
조금 전까지 내가 밟고 있던 문양들이었인데
여름날 분수대의 물꽃 위에 핀 무지개처럼 실루엣을 드리웠다
신발에 밟힌 자리라 해도 시의 모습일 때 저렇듯 눈부시다
내 마음에 투영된 매우 짧은 詩的인 敍事
얼음/ 이만섭
모래 한 톨도 담아내지 못하면서
몸을 꽁꽁 묶어 올린 저울대
바르르 떠는 바늘이 빙점에 멈춰 있다
살갗마다 견고히 박힌 가시입자들
말갛게 응고된 결정은
살을 에는 혼신의 힘으로 이룬
냉혈의 신생이다
히말리아의 크레바스지대처럼
위태한 협곡은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추락일진데
그간 물로 살아온 존재방식을 까맣게 잊고
단단한 근육질의 뼈를 세워
수심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다
투명한 물결무늬 화석이 빽빽이 들어선
무쇠 같은 시린 몸은
꽃의 독해(讀解) /이만섭
나는 백합을 눈 같다고 말했다
또 장미에 대해서
당신의 열정을 베꼈다고 중얼거렸다
꽃의 말을 찾아가는 동안
꽃은 한마디 말이 없었고
침묵을 앞질러 오는 아름다움이
꽃보다 먼저 속삭인 까닭은 왜일까,
고갤 숙여 받드는 흠모함으로
꽃의 기쁨을 얻었나니
천 길 벼랑에 핀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던 노인이시어
당신의 머리 위에 핀 저 붉은 꽃도 그러하건대
백합을 눈 같다고 말하는 이 가슴도
꽃보다 먼저 눈부심을 읽었나이다
회화나무 아래서 /이만섭
나무를 빌려 숲으로 쓰는 도시는
한그루 회화나무조차도
여름은 왜 그리도 너그러운가,
가지마다 하얀 꽃밥 탐스럽게 지어놓고
잎잎이 환호하던 푸른 너스레
그늘도 그늘 나름이지만
저 말갛고 순결한 나무그늘 아래 서면
소나기에 토란잎 받혀 쓰던
유년의 해맑은 마음이 찾아드네
햇빛도 바람도 마실에 들고 싶은 날
그런 날은 황사를 무릅쓰고
낙타처럼 길을 떠난 사람들도
저녁이 오면 어김없이 돌아오네
나무마다 넉넉한 그늘을 차려놓고
거리의 연인들 푸른 잎 사이로 숨어들면
바람결에 실어오던 풋풋한 밀내음이여
푸름은 그 자신도 아늑해지던지
그림자 짙은 등걸에 기대어
물잠자리처럼 꿈결에 젖어 있었네
무정 /이만섭
당신은그리운 만큼만 찾아와
그리운만큼만 머물고
그사이 꽃나무 시드네
야속함이여,
끝도없이 무심해 있다가도
해져남루할 때는
끌어안고싶은 가슴이여,
이저녁에도 향기로 찾아와
내안을 뒤척이는 당신
돌아보면먼 강물 소리 높네
석류 / 이만섭
혹여, 그리움을 가슴에 품되
그 열정 가슴만큼만 품어라
다독이지 못해 끝내 터져버린 붉은 속살은
감당할 길이 없구나
나는 환장이란 말이 무슨 뜻인고 했더니
저리도 미쳐 빠개져버린 가슴을 두고
이르는 말인 줄 차마 몰랐다
귀는 말소리를 닮는다 / 이만섭
찬찬히 들어보면 말소리는 걸어서 온다
지척인들 십리 밖인들
심지어 내 입으로 중얼거리는 말소리조차도
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다
화살보다 빠른 것이 음속이라지만
그것은 청각에 대한 고정관념일 뿐
내를 건널 때는 물소리와 섞이고
찻길을 지날 때는 차 소리와 섞여도
여타의 소리와 다르게 귀를 향해 걸어서 찾아든다
그럴 때 귀는 청지기를 세워 말소리를 가늠한다
그러니까 자정능력이 없던 시절에
어머니는 대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세상의 먼지 묻은 말소리들을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로 툴툴 털어냈다
귀 안에 들어 있던 허잡한 소리들은
그때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언젠가 집 잃은 강아지처럼 고샅을 쏘다니다가
떼 묻고 눅눅한 몰골로 집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마른 수건으로 습한 곳을 닦아주시며
세상은 세상의 소리에 젖어 있지만
귀를 향해 오는 말소리는
귀를 닮는다고 나직이 일러주셨다
겨울나무학교 입교식 참관기(參觀記) / 이만섭
첫눈 내리는 날, 입교식을 치루는 겨울나무학교 교정,
바람 휑그는 운동장에 즐비하게 들어선 온갖 나무들,
그 이름만큼이나 매무새도 각색각양이다.
가로수로 자란 플라타나스가 미리 와 운동장 가에 엉거주춤 서 있고
논둑길을 언제 건너왔는지 미루나무는 그 뒤꼍에서
어깨 위에 빈 까치집 하나 올려놓고 껑충 키재기를 하고 있다.
푸른 구상나무와 측백 향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자기네들에게는 별반 해당이 안될 것 같다며 심드렁한 가운데
산골짜기에서 온 굴참나무는 아직 노란 잎들을 매달고
바스락바스락 옷깃 사이로 이웃 자작나무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저런 순전히 촌티 나는 것들 같으니라고,
땅딸막한 악어배나무가 맹감나무 손을 꼭 쥐고 맨 앞줄에서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한 마디 무안을 주다가
단상에 오른 정자나무 느티의 인사말에 귀 기울리는데..
어럽쇼, 마을 안통 활엽수들은 죄다 머리 끝도 안 보인다.
느티는 동그란 눈으로 그 연유를 알아보는데,
감나무는 아직 따지 못한 홍시가 행여 떨어질까 봐 꼼짝 못하고
쥐똥나무 또한 제집 담장을 지키며 첫눈 오는 날 참새떼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니
저런 가까이에서 살아도 먼 밖 나무들만도 못하다며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일갈 훈시를 시작한다.
" 나무 여러분! 겨울나무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비장한 각오를 주문하려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저 세렝게티의 마라강을 건너는 건기의 누우떼와도 같습니다.
누구 하나 낙오자 없이 이 살벌한 겨울을 오직 맨몸으로 건너야 합니다.
아직 잎을 내려놓지 못한 나무들은 이 자리에서 당장 잎들을 내리세요.
그렇지않으면 바람에게 빌미를 주어 커다란 수난을 당할지도 모르며
그로 말미암아 가지가 꺾여 자칫 동사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느티는 오랜 세월 그가 살아온 경험을 장광설로 늘어놓으며
은행나무 한그루를 곁에 불러 세운다. " 여기 보십시오.
이 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행운목입니다. 이 생김새 얼마나 당당합니까.
겨울은 모름지기 이처럼 부끄러움 없는 부끄러움으로 몸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빈 몸이 이 겨울의 무기입니다.
추호라도 거추장스러운 것이 딸려 있을 때 그것은 곧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느티의 훈시가 계속되는 동안 사륵사륵 내리던 첫눈은 나무들 어깨에 소복히 쌓이고
겨울나무학교 교정은 어느결에 나무들의 발길을 꽁꽁 묶어놓고
갈꽃 / 이만섭
잎은 지고
풍각쟁이도 떠나 없는데
꽃잎마다 찬이슬 머금은 외로움이여,
세월아,
메마른 땅 돌아나 보고 피었는가,
건기의 생애가 이토록 막막하다
차마 이슬 맑다고
햇살 몇 조각 투명하게 쏘아댄다고
한 자취 돋아낸 그리움이라면
절국대 끝에 걸린 산바람을 보아라
길가인들 밭 언덕인들
발길 닿지 않는 낯선 산골짜기
이 땅 그 어느 곳이라도
툭 하고 터트려
대지에 깃드는 씨앗 하나
그뿐이면 되는 것을 너는,
참으로 너는,
붉은 길 / 이만섭
붉은 길을 간다
어질어질 현기증을 앓으며,
와락,
바람손에 끌려왔다가
찐하게 한 품 안기고
저만치 달아나 드러눕는
낯뜨거운 표정
그런 뒤, 또다시 따라와
바짓단에 암팡지게 감기는
붉은 길
더는 걸을 수 없어
경직된 몸은
가만하게 물끄러미가 된
나무에게 말걸기 / 이만섭
도대체 나무들은 따분하지도 않나
서로 마주 보고 살면서도
진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이웃들에 무슨 실어증 환자인가,
바람이나 불어야 겨
잎 바스락거리고 가지 서걱일 뿐
가까이에서도 저렇듯 서로 등을 돌리고
침묵이 침묵을 낳으며 산다
그러고도 무성하게 더불어 이룬 숲,
정적은 꽤 쓸만하구나
바람이 비킨 뒤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나무와 나무 사이 몸이 귀다
그렇구나, 다 알고 있다는 듯
입때껏 서로서로 들어주며 살아왔구나,
하마터면 나는 나무에게
말을 걸고넘어질 뻔했구나,
중얼거리는 달 / 이만섭
어둑한 그믐밤을 빌러
그리움의 눈썹 하나 밤하늘에 심어놓았더
한 보름 지나 들창이 대낮 같다
달빛은 문창호지에 대나무수묵화를 그려놓고
외로움에 더는 견딜 수 없던지
손짓하여 나를 부른다
뜨락 자욱이 차오른 치자색 숨결
정원의 나무들 잎새마다
쟁그랑쟁그랑 이슬 열리는 소리
홀연한 정적 사이
나직이 일렁이는 귀엣말
텃밭에는 파꽃이 유난히 하얗다
불문율의 침묵 저편
휘영청 걸린 달이 혼자 중얼거린다
가을은 편집중 / 이만섭
북창으로 햇살 비껴놓고
가을이 편집 중이다
날카로운 눈매에 까칠한 얼굴은
머릿단을 가느다랗게 말리며,
이 지난한 건기의 시
갈대밭을 날아오른 한 무리 되새떼가
강 건너 하늘에다가 그물을 쳤
자중지란에 시달리며
마침내 가을다운 가을을 위해
칫 제 몸이 베일지도 모를
별신굿의 강신무나 타는 작두 날을 밟고
훠어이훠어이 쫓아서
날선 그리움이 무디어질 때까지
애끓는 열망을 색인하며
불온한 문자들을 지워간다
바야흐로 이 가을은 편집 중이다
부레 / 이만섭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담배를 태울 때면 한 자리에서
거뜬히 두 대는 꼬실러댔
그렇지 않고서 그 무거운 우리 집 살림을
감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두엄을 내다가도 힘이 들고 지치면
두엄나무 아래 지게를 받혀놓고
빠금빠금 폐부 깊숙이 담배연기를 들어마셨다
그럴 때 몸은 마치 가벼워지기라도 한 듯
고개는 먼 하늘을 올려보았다
목줄기 밖으로 뿜어내는 연기 따라
그 짧은 순간 몸이 부양되는 듯
허공을 물고기같이 유영하는 거었다
당신의 힘겨운 몸에서 나온 담배연기로
오직 그때만은 아버지도
몸이 공중에 뜨는 것을 느끼던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자작나무 찻집 / 이만섭
가을숲 어귀에 제 몸의 수령만큼
고색창연한 찻집이 가을을 우려내고 있다
호젓한 숲 사이로 자작자작 배어오는 갈잎 향기,
가을을 따라온 마음이 금세 젖어난다
다람쥐 한 마리 등걸에 갈빛 색선을 꽂고
폴짝폴짝 돌무지 흩어진 도토리 숲길을 걸어
저 조용한 찻집에 마실 드는데
찻집의 추녀 끝에 비낀 저녁 햇살이 따사롭다
다람쥐 쫓아 저곳에 쉬어나 볼까,
노 젓는 배 / 이만섭
우리의 그리움은 언제나 먼 곳에 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미지의 경계선 밖
몸소 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곳이기
날개가 없는 우리가 달리 갈 수 있다면
배를 띄워 노 저어 가면 어떻겠는가
물결을 가르며 상앗대는 강심을 젓고
격랑의 파고가 굽이쳐와도
끊임없이 노를 저어 저항하지 않는다면
배는 이내 표류하고 말 것이며
갈망의 목적지는 끝내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어둠이 뱃길을 가로막으며
성좌의 좌표마저 희미해지고
절망의 비애가 뱃전에 물결 쳐와도
열정의 배가 난파되지 않는 한
꿋꿋이 노를 저어가야 하리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진정 그리움에 이르는 길이기에
갈대 울음- 슬픔에 대해 /이만섭
바람은 혼자 울고 싶을 때
공활한 허공을 마다하고 강가에 와서 울었다
나직한 강물 곁에서
역마살로 살아온 모진 드난살이의 생을
처음 일으켰던 달빛도 환한 그 자리에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 품에 와서 울듯이
가슴 터놓고 울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작은 슬픔이라 해도
그가 울고 싶은 자리가 있다
바람도 그런 슬픔을 자기의 슬픔처럼 껴안고
꺼이꺼이 울어줄 곳을 찾아왔던 것이다
어떤 외로움에도 끄떡없는 갈대가
유독 바람의 작은 슬픔에도 흉금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속이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허수아비 자화상 / 이만섭
들녘 한가운데 홀로 나는야 허수아비
워낙 한곳에서 오곡을 지키며 살아가는 몸이기에
사방은 어느덧 인적도 끊기고 길도 사라져
헐렁한 옷깃 사이로 바람만 휑하니 드나든다
곡식을 익히는 한낮의 뜨거운 햇빛인들
가쁜 숨소리 몰아쉬며 지나가는 소나기인들
황망함은 나의 오랜 풍경
참새의 날갯짓에 귀 기울다가 하루해를 살라먹는다
이렇듯 혼자만의 저녁이 오면
시름겨운 창가에 외로운 꿈 자락 펴놓고
노랗게 찰랑거리는 달빛 물결을 저어가면
헤진 옷깃은 어느 사이 밤이슬에 젖고
날이 밝아오면 파충류 같은 축축한 어깨를
샛바람에 펄럭이며 아침 햇살에 말려보지만
우두커니 고착된 생의 테두리 밖으로
누렇게 익어간 곡식이 베어지고 나면
이 빈들에서 나는 또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갈 것인가
그리움 삭히는 법 / 이만섭
구절초는 왜 쓸쓸한가에 대해 골똘한 적이 있다
일몰의 뒤끝에 깃드는 어둠처럼
그도 등 뒤에 그리움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먼산 바라보다가 어느 날 가을빛에 눈먼 그리움이라면
왜 아니 그럴만도 하겠지,
매양 그리움은 앞에 놓여 있건만 생각해보건대
언제 그리움이 앞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이명처럼 뒤꼍에서 가느다란 속울음을 지펴놓고
틈새를 비껴간 바람처럼 허공을 맴돌다 갔지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고립무원을 자처하고 습관처럼 붙박여 사는 그리움이지만
젖은 마음도 챙겨드는 것이 또한 그리움이라
그렇기에 어떤 외로움에도 그 깊이를 재지 말아야 하거니
저녁이 오면 어둠으로 맞서 저녁을 삼고
어둠 속에서 불빛을 찾아나서기보다는
기다리면서 사위가 어떤 모습으로 색칠해가는가를
내색하지 않고 눈여겨보아야 하리
치자색으로 물든 달빛이 어둠을 지우며 그윽히 밀려오고
별빛이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오는
그런 빛으로부터 숙지하는 밤을 견디면서
밤배를 노 젖듯 서둘지 않고 침착하게 다가설 때
본성이 착한 그가 나직나직 꽃숭어리처럼 피어난다
그리고 곁에 와 가만히 고갤 기대어 고백할 것이다
그대 가슴에만 살아가겠노라고,
쪽빛문장 / 이만섭
서늘바람이 가을잎을 북돋운다
뜨겁게 달구던 여름날의 지면을 넘기고
피정처럼 펴놓은 가을 노-트
하늘가에 내걸린 흰 구름도 쓸어내며
속속들이 드러나는 맑은 행간에에
드높이 게양되어 펄럭이는 푸른 깃발
두렵도록 설레는 가슴으로 쪽빛문장을 읽는다
투명한 햇살을 배웅하며
갈망을 열고 오는 시야는 이토록 눈부시지만
가슴 한 편은 그렇지가 못하다
봄날에 눈물 글썽이며 떠나간 꽃잎들
하늘에 별로 박혀 있다가
어느덧 열매로 익어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아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먼 후일 같은 가을이고 싶다 / 이만섭
지난날
추억이정해놓고 그리워하던
먼후일 같은 가을이고 싶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가면 겨울이 오는
그런세월에 묻어지는 가을이 아닌,
수없이 비낀 세월에도
터벅터벅걸어온 신발의 뒤축은
닳고닳아 초라해졌어도
내마음에 화해를 품고 찾아온 계절
과원의 사과는 탐스럽게 익어가고
설화처럼살아 돌아온 나는
마침내추억의 사과나무 아래를 걷는다
달빛 아래 피어나던 그 봄의 사과꽃
하얀그리움에 진저리치며 눈시울 붉히던
그마음 그대로
내가슴에 이 가을을 물들어다오
노을빛 붉게 타오르는 저녁강처럼
여직껏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후일 같은 가을이고 싶다
바람의 이중주 / 이만섭
허공을 건너온 손이
나무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린다
손은 가지와 가지 사이로
깍지를 낀다거나
등 뒤로 와서 간지럼을 태우다가도
바쁠 때면 데면데면 수인사만 나누고
무채색의 유순한 표정을 짓고 간다
저 나긋하고 한들거리는 손길은
보랏빛도 되었다가 하늘빛도 되었다가
잔정어린 마음이 역력하다
간혹 광기 있는 몸짓을 앞세워
자기만의 이유로 거친 손짓일 때
흉흉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가슴에도 상처를 입힌다
그렇다 애먼 자가당착의 오류를 물리고
건기의 지리한 갈증을 씻으며
시원한 빗줄기라도 몰고 오는
크고 부드러운 이타적 모습이라면
나무가 햇빛을 받아 광합성에 들듯
화음을 연주하는 악사와도 같이
곱고도 아름다운 손길인 것을,
가을에 서다 / 이만섭
지나고 보면 헛되지 않은 것이 어딨으랴
그것을 영화롭게 누리고 간 이
칠성판처럼 침묵으로 닫혀 영원을 견디고 있는데
내 그런 주인공의 후예인 양
뚜껑을 열고 다시 이승의 몸으로 현신했으니
꽃도 한때요 열매도 한때이건만
유독 열매가 익어가는 계절 앞에
바람도 내 것인 양 햇빛도 내 것인 양
여여로운 행보를 짓고 있으니세월이 비킨 듯해도 곤궁치만은 않구나
그래 그때도 내 마음은 만경평야였지
훤훤 바람에 낭창낭창 파도 타는 황금 물결
무성하기로서야 광릉내의 푸른 숲을 지
저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제 허물어진 빈집 모퉁이에 서 있는
고욤나무 한 그루인들 담아내지 못할까
비록 지나고 보면 헛될지라도
어둠을 걷어내고 이마를 비추는 달빛 자락에서
저녁 바람에 실어온 마른 잎의 향기라도 담는다면
생의 한가운데란 다른 것이 아니리
거미 / 이만섭
유년의 기억 자리에 희미한 풍경 하나가
엎드린채 모로 걸려 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 고즈넉한 고향집
황혼은이끼 낀 흙담 아래서 졸고
검푸른먹감나무에 어둠이 깃들면
하늘빛쫓아 아스라한 추녀 끝으로
드넓은성좌의 바다가 닻을 올린다.
나무와 추녀 사이 위태한 선의 난간에
곡예사가되어 원형의 날줄을 엮어놓고
유혹을모자이크 하다가
어언화석이 된 부생浮生의 자리에
이제도내 어머니가 앉아계신다.
골방 한구석에 주름 깊은 세월 끌어안고
인고의씨줄을 놓으시며
어느해여름 태풍 불어오던 날
난바다로떠난 당신의 아들을 기다리다가
더는곱울 수 없는 손마디에는 피멍이 들고
그밤도 뜬눈 지어 날을 새운다.
기차여행에 대하여 / 이만섭
나만의 길인 양 내 마음의 활로가 있다.
미답의 길이어도 좋고 갔던 길 다시 가는 길이어도 좋다
무조건 기차에 몸을 실어라.
돌아오는 홀가분함보다 떠나는 가뿐함에 젖어라,
그러다가 떠나는 기차. 도시를 벗어나면서
한바탕 기적소리를 울리더니
언제 다리를 건넜는지 기차는 이내 변두리의 촌락 가를 지나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낮은 지붕들, 장독대도 보이고
슬라브집 옥상에는 흰 빨래가 나부낀다.
그 사이에 술렁거리던 마음 다소 진정이 되고
다시 바라보는 창밖, 기차는 금새 벌판을 지났는지
머리 위에 흰 구름 얹혀
놓은 먼 산들이 퍼즐처럼 겹쳐 있다. 무엇이 나를 떠나게 했던가
저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내 기차처럼 흘러간다.
저 시내 또한 무엇이 저처럼 흐르게 하는 것인가.
정체된 삶에서 떠나는 여유로움을 배우는 것이 여행일 것이다.
아니 떠나는 여유로움만 배울까, 돌아오는
아름다움도 배울 것이다. 이런 만족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모습으로 저만치에서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객관적 탈자아를 찾았다면 그 여행은 모름지기
삶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여행일 것이다.
저녁의 섬 / 이만섭
저물녘거대한 섬이 들어선다
머윗머윗사물들이 희미해지고
사위가어둠으로 물들면서
일상을물의 수계 아래로 침잠시키며
세상을바꾸는 어둠의 방식
허례허식같은세상의 잡다한 구조조차
깡그리지우고 들어서는 섬
그간빛은 사물을 나열해놓고
삶으로부터오랫동안 고행길을 걷게 했다
마침내나도 여기에 다다랐다
우리는무엇 때문에 뭍을 건너왔는가
저황폐한 빛의 자리가 아둔하다
말굽을달리며 생의 길을 떠났던 자들
누구라도저녁 앞에서 멈춘다
스멀스멀물이 차오르는데
누구멈추지 않을 자 있겠는가
그물처럼걸린 어둠 아래서
살아있는것은 불빛으로 다시 태어나고
벌떼같았던 일상을 재우고 오는
저녁의섬이 묻고 있다
너의섬은 어디에 있는가,
오동나무 목관악기 / 이만섭
고향집 뒤란에 점잖게 자란 오동나무 한 그루
해마다 푸른 등걸로 그늘 짙은 갈망의 활엽층을 키우더니
어느 해 부터인가 나무는 목관악기가 되었다
까막까치나 참새 따위의 텃새들이 담장 안으로 날아와
가지를 타고 앉아 노래를 부를 때면
나무는 제 몸속의 동공을 열어 음악을 연주한다
설화에 따르면 봉황을 기다리는 중이라지만 그것은 확인할 길 없고
계절을 날아온 철새들이 노래를 부를 때도
나무는 어김 없이 예의 악기를 킨다
휘리릭- 휘리릭- 바람손이 나뭇가지 끝을 훑고 갈 때도
우웅- 우웅- 나직한 베이스의 앙상블로 화답을 하고
그런 날에는 듣다못한 할아버지가 쫓아나와
풍각쟁이 같은 실없는 소리라고 나무를 심은 뜻과 거리가 멀다며
죽기 전에 베어 장롱이나 만들겠다고 벼르셨다
어느 추운 겨울날 종일토록 멧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자
나무는 뒷동산에서 놀던 한 아이의 연을 빼았아갔다
높다란 하늘가지 끝에 매달아놓고 쌩쌩거리는 찬바람을 불러
허공으로 허공으로 제 몸의 쓸쓸함을 키며 계절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때 빈 가지에 나부끼는 황량감은 참으로 겨울다웠다
그러나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날이 저물도록 나무 곁을 떠날 줄을 모르고
아이에게 연을 돌려주기 위해 나무의 등걸을 타고 오르다가
나는 그만 몸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한 올 기이한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간 나무의 연주는 그 울음소리였던 것이었다
여름날의 무성했던 활엽층을 거두고 맵찬 추위 속에서
몸을 악기로 빚어놓은 나무의 가슴판에 내장된 울음에 비밀이 있었다
추위에도 가지가 푸른 것을 빌미로 나무는 봉황을 기다리는 중이었으리라
등걸을 타고 오르다가 나무의 가슴을 부등킨 채
나는 잠시 그 몸속을 흐르는 목관악기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나무의 식사 / 이만섭
여름 한낮, 점심을 기다리다 듣는 빗소리
후드득 후드득 무더위를 씻는 장대비에
후드득 후드득 무더위를 씻는 장대비에
여름 한낮, 점심을 기다리다 듣는 빗소리
후드득 후드득 무더위를 씻는 장대비에
식당 앞 화살나무가 소란스럽다
빗소리는 분명 빗소리인데 나무가 식사를 한다
그러니까 나무는 제 그림자를 깔고 앉아
머금머금 입을 여닫으며
아까부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이 거칠게 우듬지를 흔들고 지나갈 때도
입의 언저리만큼은 매무새를 흩트리지 않고
비의 식단을 가다듬었던 것이다
그간 건기에 시달린 몸의 갈증 같은 것은
땅속의 뿌리가 이내 해결해 줄 진데도
둥근 이파리를 저어새의 부리처럼 납작하게 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던 것이다
한바탕 소나기가 멎고 창밖이 말짱해지자
나무는 식사를 맛나게 끝낸 듯
포만감에 젖은 푸른 잎을 함초롬히 반짝인다
나무의 식사를 일없이 지켜보다가
그만 내가 늦은 식사를 한다
당신의 목록(目錄) / 이만섭
나의 노스텔지어는 이렇습니다
민음사 간 시집 <애너벨 . 리> 한 권,
그 19페이지에 담긴 당신의 미쁜 손길 위에
가만히 나의 손을 얹습니다
꽃 꽃 꽃잎이 흔들리듯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군요
그때 당신은 도홧빛 얼굴로 다가왔고
나는 당신의 가슴 속 손거울을 살짝이 엿봅니다
거울은 반드시 사물의 정면을 비춰줍니다
그 무렵부터 초콜릿과 딤섬은 우리의 품목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으로부터 작성한 첫 목록입니다
아, 깜빡 잊을 뻔했군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건기의 사이프러스를 적시던 베를렌느의 비를,
비는 는개처럼 우리 사이를 흩뿌렸지요
촉촉해진 사월의 사과나무는 꽃눈을 틔우고
푸른 계절을 흰나방처럼 꿈꾸던 나
저녁이 오면 창가에서 장미를 위한 연가를 부릅니다.
사랑은 목록을 만드는 거라고 말했나요
그런 저녁은 밑줄을 그어 당신의 목록을 적습니다
추가, 또 추가, 목록에 등재되던 수많은 언어들,
먼바다로 가는 푸른 기차는 언제쯤 오나요
당신과 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계절의 약속은 더욱 굳건해지고
기다림은 배낭처럼 꼬박꼬박 꾸려집니다
한 시절 가슴에 쓰여진 우리들의 시편들
당신, 이 여름 당신에 대한 나의 노스텔지어를 열고
나 이렇게 당신의 목록을 읽습니다
자귀꽃 / 이만섭
자고새 날아와 울고 간 뒤란으로
대낮에도 적막하여 꽃등을 켜든다
나릿나릿 봉우리마다 금실 지펴놓고
그리움 깊어지면 속울음으로 울었다
청홍으로 다시 이울 밤은 언제일까
기다림은 분홍적삼만 흥건히 적시고
아침이 오면 부챗살로 벙그는 아릿 가슴
순정의 세월 뉘라 서럽다 말하는가,
비의 원형질 / 이만섭
화가박서보 선생의 그림을 감상하다가 그의
묘법가운데서 비를 흠뻑 맞았다
캔버스를가득 적시고 내리던 채칙비
그빗속을 서성거릴 때,
비라는것은 가슴을 적시면
반드시사연을 낳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우연이었을까, 연극이 서는 날
강을건너온 비는 물기둥처럼 굵어지고
거기회람의 장소까지 따라붙었다
한작부가 나긋한 몸매로
비의사연을 찾아다닌 자를 꼬드기고
그들은만나서 소나기 같은 사랑을 나눈 뒤
빗길을떠나버렸다. 생각했다 나는
누구나가비를 맞다보면 가슴까지 젖는다는 것을,
선생의그림을 감상하는 내내
주룩주룩내리는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캔버스바닥을 차오르는 원형질의 빗물들을,
단단한 여름 / 이만섭
여름 아침 마당 가에서
하루치 일의 목록을 점검한다
헛청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차렷 자세를 취하는 연장들,
그래 오늘은 남새밭이다
아비는 괭이를 어미는 호미를 움켜쥔다
살촉처럼 쏟아지는 짱짱한 햇살
불볕더위 이글거리는 옥토에다가
아비와 어미는 오늘도
괭이와 호미를 얼마나 담금질 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여름이 단단해진다
풍경의 소묘 (素描) / 이만섭
한 하고 포근한 젖빛 하늘
일광이 풍경을 흔연스레 비추는데
산이 강에 내려와 물을 베고 누워 있
저렇듯 한가로운 날은 산도
물 곁에서 한 숨결 내리고 싶은 것일까,
거대한 몸집은 필시
일순간에 첨벙 하고 들여놓았을 터인데
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표정은 숨죽인 듯 명징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까,
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수런거리자
산이 재빠르게 물속을 빠져나간다
어느 쓸쓸한 저녁, 달이
강 가운데서 은밀히 노닐던 그 밤에도
물의 촉수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자
달은 황급히 하늘로 돌아갔다
그때도 나는 깨달았다
고요는 풍경을 소묘하지만
중심을 잃으면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붉은 우체통에 대한 경배 / 이만섭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란 정해진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방황하는 것일까,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서도 신호등은
노란 경계선 밖에서 기다림에 들고 있다
차들은 흙탕물을 끼얹으며 질주해 가는데
무심한 거리는 방황을 일삼아도
결코 좌절을 말하지 않는다
안개가 자욱한 날은 바람이 불어와
안개를 거둬가 주길 원했건만 바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움이 지독해지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비가 그친다거나 안개가 사라진 뒤에도
처음에 혼자인 자는 맨 나중에도 혼자였
이 막막한 자학 속에서도
길을 가다가 붉은 우체통을 보면
변함없이 가슴이 뛰는 까닭은
혼자임을 어디론가 편지처럼 붙이고 싶기 때문이다
갈망의 푯대 끝에서 이정표로 서 있는
저 해방구의 랜드마크로 가서,
기다림으로부터 / 이만섭
마음구석에 심은 떨기나무
외상(外傷) 없이 자란다
흐린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우체통같이
언제까지 가슴 설레게 할 것인가,
무성져라 무성져라 중얼거려놓고도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가슴을 매어놓는 일처럼
속절없는 짓이 어딨을까,
허리춤에 갈고리 걸듯
끈 하나에 매어 의지하는 우둔함이여,
나무야 나무야
너의 푸름은 어디까지냐,
햇빛과 비바람의 간극에서 고삐 풀린 채찍비
해 질 녘, 산 그르메를 비껴가다가
강가에 무지개를 세워놓았다
그리워하다가 젖는 꿈이라도
기다림으로부터 오는 약속은
노상 더디기만 하다
내 안에도 섬이 있다 / 이만섭
내 안에도 섬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 몸에 이주해 와서
섬은 감쪽같이 숨어 있다가
몸에 바다가 들어설 때 나타난다
바다는 바람 없이도 풍랑이 일고
때때로 쓸쓸해지면
아득히 다가오는 섬,
간혹 섬으로 가기 위해
나는 배를 기다리고
섬 또한 나를 기다린다
나무들이며 집들이 사라진 생의 근린,
황량한 섬의 바닷가에는
물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철 늦은 해당화 뿐,
파도에 달아버린 몽돌이 고즈넉하다
지루한 뭍의 일상으로부터
내 몸이 에워싸여 힘겨울 때면
나는 섬으로 돌아가고,
섬은 나만의 풍경이 되고
미사리에 가서 비를 만나면 / 이만섭
미사리에 가서 비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가는 온통 모래 둔덕뿐
몸 가릴 곳도 여의치 않겠구나
거기 세월 매어놓은 빈 배 한 척
강물에 먼저 띄워놓으면
높새 따라온 부슬비야 피할 수 있겠지,
그러나 개부심으로 쫓아와서
강물 흐려놓고 물안개 피우는 저녁은
강 건너 버드나무 뒤뜰로 노 저어 가서
봉수아제에서 수제비나 실컷 뜨다가
어둠 사이로 새어든 불빛
강물에 헹구고 나올 때쯤
슬슬 노 저어 돌아오면 안 될까,
흐린 날 가마우지 물질하듯이
그때는 찰삭찰삭 삿대로 강물도 치면서
별사(別辭), 흐린 이별을 쓰다 / 이만섭
사랑이어, 불온하다
기차는 저물녘에 떠나고
그대 마음은 실어보내지 못했구나
가슴 패이도록 깊은 상처 자국
쓰다듬는 저녁은 별빛도 흐리다
세상은 어둠이 독차지했는데
그대는 저만치에 더디 가느냐,
그렁지는 슬픔을 손등으로 훔친다
이별이란 남는 자의 몫,
비켜가는 바람도 가파른 벼랑을 탄다
추억이란 아련할수록 뼈저리고
한동안 지나간 세월 곁에 두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견디기 힘든 아픔에 시달리리
흐린 이별을 쓰는 가슴
사랑이어, 불온했다고 말하리
풀잎의 서(書) / 이만섭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들의 몸은 피륙투성이다
바람이나 비를 맞을 준비가 철저하다
햇빛이나 안개까지도,
한 장 한 장 낱장으로
단층을 지어 펴 있는 푸른 날개가
칼날처럼 예리한 가운데
부드러운 솜털의 하모니즘이 박혀
이슬을 거둘 때도 숨결과 같이 고요하니,
어느 한 번은 내가
문우마을에 가서 시누대를 베어다가
죽필을 만들었던 뜻도
언측(偃側)의 서(書)를 쓰고자 함이었다
드러누웠을 때도 지탱하는 생으로
저 뿌리와 같은 꿋꿋한 잎은
한 생애가 의미 없이 태어나 시드는 풀 포기가 아닌
단장(丹粧)의 풀잎인 것을
몸소 깨닫고 싶었던 것이다
봄볕 아래서 깁다 / 이만섭
정물이 꼼지락거리는 풍경을 본다
앵둣빛 붉게 쏘아대는 거,
그 이파리 연초록으로 색칠하는 거,
저것들은 한창 깁는 중이다
솔기 없이 싱싱하게
잎은 진초록 빛깔로
열매는 또옥 따질 때까지
생명으로 피워낸 몸을
봄볕 아래서 가만가만 깁는 중이다
물수제비 띄우는 법 / 이만섭
강가에 가면
나도 모르게 강물에 젖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잠자코 강물을 바라만 보라
물 쪽을 향해 누군가를 부른다거나
손짓 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라
그것은 유유히 흐르는 물흐름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조약돌 하나 손에 쥐고
뜨개질로 그리움에게 건너가기 위함이라면
벌판의 허수아비 새 쫓듯
훠어이 훠어이 내달릴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깊이로 가다듬어
강물이 저녁노을에 들 때까지 기다려 보라
곰살거리는 물결 잦아지고
강물이 조약돌 하나 던져주길 바랄 때
수계 위까지 낮아진 몸
강물과 몸의 각도에 시선을 두고
한껏 던져 물 위에 놓는 노둣돌
징검징검 건너 가는 그대의 팔매질은
어디까지 뻗어 갈 것인가
그리움도 마음길인데
조약돌 하나인들 강물에 던지는 일이
어디 예사로워서 쓰겠는가,
누가 푸름을 조율하는가 / 이만섭
한 개의 현, 두 개의 현,
열두 개의 현, 혹은 스물네 개의 현,
그 배수가 집약되어
공명으로 번져 온 저 일색의 현현들,
알 수 없다
잎이 푸른 내력은 몸이 나무라는 것을,
광합성에 들기까지 햇빛은
창공에서 얼마나 부서져 내린 것일까,
실어 오고 실어 가고,
바람도 우듬지에서만 맴돈 것은 아닐 테지
밤사이에 소리 없이 일군 저 군락,
나무 아닌 삼림 없고
나무 아닌 터전 없고
터전을 바라보자니
가분수가 된 신록은 감당할 길이 없구나,
땅 기운 돋아 안개를 짓고
안개는 이슬을 짓고
이슬은 청명을 짓고
청명은 산수 간에 마음을 짓고
짓고 지어, 푸름 밖에서 성찬을 받자니
정녕 저 진경을 조율하는 자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저녁 강 / 이만섭
흐를 수 있다면
흐를 수 있는 곳까지 가 보리라,
골짜기를 떠나온 물이
아홉 구비가 아니고서
어찌 강물에 닿을 수 있으리
그대를 향하여
하나의 마음이고자
노을빛 아래서 숨결 짓는 강물,
바다에 이르러
한 세상 아름답게 흘러왔다고 말하리라
실밥 / 이만섭
허름한 옷에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한 몸 가리어 풍상을 견디다 보니
타개진 솔기 사이에서 앵돌아 나오는 밥,
기제사에 메를 짓고 내오듯
밥은 끈기 잃어 퍼석퍼석하다
그간 옷은 말 못할 거식증에 시달린 것일까,
육감적으로 부끄러운 표정이다
몸의 접경지대에서 오랜 세월 부지하며
어미의 탯줄 같은 실을 빌어 옷을 먹여 살리더니
이제 저렇게 고스레처럼 문 밖에 내놓는다
산목숨인들 밥 거두면 그만일 진데
아무리 옷인들 아니 그럴까,
세월마당에 낡아진 옷이
실밥을 지어놓고 도대체 후줄그레하다
그 숲 / 이만섭
*반디엔루니스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는데
묶었던 머리를 예고 없이 풀고 나왔다
그녀를 앞세워 층계을 밟아가다가
그녀의 머릿결 사이로 첩첩한 숲이 보였고
숲의 입구에 커다란 종려나무가 있었는데
나무는 대낮인데도 불을 켠 채 숲을 밝혔다
숲은 수많은 언어의 퍼즐들을 채곡채곡 쌓아놓고
나무마다 가지 사이에 나무의 말을 감추고 있었다
우리는 숲을 시원으로 흐르는 강물이고 싶어
그녀 또한 숲의 성원이 되려고
숲처럼 검은 머릴 풀어뜨리고 나온 이상,
파란 표지의 '영원'이란 시집을 한 권 구입했는데
삶은 숲이 감춘 비밀을 찾는 거라며
그녀는 책에다가 우리의 배를 띄우자며 졸라댔다
단 한 번만의 생을 그 숲에서 얻어가자고,
종려나무 가에서 경건히 닻을 내려
마침내 반디엔루니스를 떠나 올 때
우리는 그 숲의 수많은 나무 사이에 열리는
튼실한 열매가 되고 싶었다
* 종로타워 지하 서점
오월 / 이만섭
꽃피어 잎 푸르러간
생명의물굽이 같은 말,
가만히혀끝에 올려
오월이라고중얼거린다
화화개(花華開),연연두(軟軟豆),
꽃의말, 푸름의 말,
오월이라고다시 써 본다
어느꽃인들 아름답지 않으며
어느푸름인들 싱그럽지 않을까,
안개를헤치고 열린 아침
초록을머금은 이슬도 창에 닿았다
이아침,
아름다움을누리는 마음이
왜인지호사스럽고 부끄러워
먼동을건너온 햇살의 등 뒤에 숨는다
상처속의 안부 / 이만섭
가끔은 망연히 들여다보는
어둠 깊은 안쪽
그곳의 안부를 묻네
아직도 용소처럼 들끓고 있을까
점등으로 아스라한 푸른 섬 같은
깊다랗게 패인 그곳을 남겨두고 떠나와
황량한 벌판을 정처없이 걷고 있네
거기 적멸해간 모성이 있기라도
눈물 훔치며 하늘 올려 보던 가슴은
슬픔을 수신하네
홧홧 타오르다가
꽃마당 뒤란에서 지는 봄을
가만히 한 움큼 움켜쥐던 꽃잎같이
상처 속 안부를 묻는 내가
안타까움에 겨워 진저리치네.
나무의 뼈 / 이만섭
비바람 사이로 뼈가 기다랗게 자랐다
잎들이 지고 난 뒤
몸이 아버지처럼 헐렁해지면
나무는 뼈를 끌어안고 겨울을 난다
당신의 등에 뿔처럼 돋은 피붙이들은
그 무렵, 옹이처럼
상처가 되는 줄 알면서도
당신은 상처를 쓰다듬다가 늙어간다
등으로 짐 지고 걸어간 세월인데도
생전에 한 번도 등을 보이지 않고
꿋꿋이 세운 뼈,
잎들은 푸르다가 떠나면 그만 일테지만
뼈는 이미 늙고 쇠잔하다
그렇게 선산에 묻힌 내 아버지
생각하면 설핏설핏 눈물 어룽진다
봄밤 / 이만섭
꽃은 피었어도 난감하고
살랑살랑 바람만 에두르고 간다
타닥타닥 무엇이 타는 것일까
그리운 것들 타들어가는 소리
이러다가 재가 되는 것은 아닐지
애틋해서 더는 못 견디겠다
꽃 / 이만섭
우리가 부르는 이름 중에
꽃이라는말처럼
어여삐불리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장미, 진달래, 해당화, 동백,
그 어떠한 이름조차도
하다못해 돌 틈 사이에 피어난
연둣빛꽃다지나
화단귀퉁이에서 나직이 피는
어머니가좋아하시는 채송화도
다꽃의 이름으로 반기는 까닭은
꽃은꽃으로 피어나서
하나의선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사람을 위해
꽃은기꺼이
그마음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기에
언제라도이름을 꽃이라 부른다
꽃잎, 그리고 / 이만섭
꽃잎이 진다,
그대의 사랑이 서럽다 하지 마라
이별이란 서러운 것이 아니다
외로운 것이다
혼자가 되었을 때,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별이 찾아오는 것이다
주름의 문장 / 이만섭
무엇을 바라볼 때, 그것이 빤히 보이는데도
감추고 있는 것이 더 크고 깊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무의 껍질 같은 것이다
나무는 그 몸속에 나이테가 있다는 것을
표피에 덕지덕지 껍질로 씌워놓고 있다
그러니까 몸속에다 세월의 문장을 감춰놓고 있다
어디 나무뿐일까, 사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길고 긴 세월의 문장을 몸속 깊은 곳에 쓴다
세상의 주름이란 주름은 다 이것의 얼굴이다
이것은 사물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겠는데
가령 어둠 속에서 빗발치는 양철지붕인들
그 가슴에 골판지 같은 문장을 쓰지 않고서야
어찌 밤새워 쏟아지는 빗소리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
첫댓글 詩를 훔쳐가는사람/이생진--00시인님 시한편 훔쳐갑니다 어디다 쓰냐구요? 제집에 걸어두려고요..略..시인님“ 내안에도 섬이있다” 詩한편 모시고 가옵니다.. 내안에도 담아두려고요 감사합니다 문운 건필하시옵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