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예레미야 23장 16-22절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 ②
예레미야가 활동할 때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입니다. 왜 북이스라엘이 멸망했는가? 지난 시간에 살폈던 말씀으로 하자면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우매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알을 의지하여 예언하였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된 길로 가게 됨으로 멸망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교훈을 전혀 받지 못한 것처럼 남유다 선지자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선지자의 우매함처럼 예루살렘 선지자 역시 우매한 자로 있으며, 심지어 가증함까지 더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땅에 온갖 악행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백성 스스로가 죄를 지은 까닭에 온갖 악행이 유다 땅에 가득한 것도 있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선지자 혹은 제사장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지금 남유다의 모습은 무엇과 같은가? 하나님께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같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시대 때 그들의 죄로 인하여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 지금 남유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당장 그들을 멸하신다고 해서 전혀 아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죄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어지는 내용으로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선 16절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더 이상 거짓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헛된 것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는 하는데, 그 가르침이 아무런 실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을 주는 가르침이 아니라 무익한 가르침, 오히려 그들에게 해가 되는 그런 가르침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말씀이 선포될 때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분명 그들은 당황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분이 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들어왔던 말씀이 부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씀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그들 자신들에 대한 부정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고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지키고 있는 절기에 대하여 성경이 명한 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지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심지어 그렇게 지키는 것이 말씀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목사들이 곱지 않는 시선을 줄 것입니다. 목사들만 그렇겠습니까? 성도들 역시 좋지 않은 시선을 줄 것입니다.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결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말은 그들의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일 뿐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바가 이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씀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지난주 살핀 본문 11절에서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 악 중에 하나가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가르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읽은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을 전하면서도 그 말씀의 합당한 내용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교훈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그들 마음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본문 1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는 것입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28:14)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할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경멸하실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오히려 평안하니 안심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완악한 대로 행하는 자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야 했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완악하게 행할지라도 결코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얼핏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완악하게 행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건전한 종교조차 완악하게 행하면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참된 종교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에서 어느 정도 저들의 가르침을 어떠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마5:38)는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들은 악한 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대적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석했습니다. 보복이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율법을 통해 가르치는 바는 개인적인 보복, 개인적인 복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먼저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피해를 줬다면 피해를 준만큼 갚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할 때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의도는 이런 뜻이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생각대로 해석해서 내놓았던 것입니다.
지금 거짓 선지자들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완악한 일을 행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선지자는 없을 것입니다. 완악한 짓을 행해도 재앙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선지자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선지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누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면서 바리새인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가르치는 바 그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무엇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대로 해석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 결과 복수해도 괜찮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복수할지라도 결코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겁니다. 달리 말하면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생각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 아래 있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재앙이 임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그들은 거짓된 가르침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멸시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히려 존중히 여기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에 존중히 여김 받을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구약 시대에도 있었고,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사를 보면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책이 아니라 같은 성경을 가지고 말씀을 내놓지만, 다른 교리들을 내 놓습니다. 어떻게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 다른 교리들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느 성도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경우 어딜 가나 같은 교리의 내용을 가르치는 데 반해 개신교는 가는 곳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라 생각됩니다. 일단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가톨릭의 경우 어딜 가나 같은 교리의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에 거기에 진리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온통 거짓된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달리 말하면 어딜 가나 같은 교리라고 할 때 가톨릭은 온통 거짓된 교리로 일관되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개신교는 나은가? 가는 곳마다 교리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개신교 역시 거짓된 교리가 다양하게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안타깝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딜 가나 같은 가르침, 같은 교리의 내용이 설교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 아래 있으면서 많은 성도들이 안주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가르침 아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가르침이 전혀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된 가르침도 있습니다. 다만 거짓 된 가르침이 함께 있다는 것이 문제고, 참된 가르침과 함께 거짓된 가르침까지 받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별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인가? 아니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씀인가?
만약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면 내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결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하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된 평안이 있는가? 없습니다.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된 평안일 뿐입니다. 혹 실제로 평안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벌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형벌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빼앗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빼앗기 위해 거짓으로, 그러나 거짓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여 미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력을 갖춰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유일하게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사들이 양편으로 나누어 다투고, 야단법석으로 인해 교회가 거의 뒤집혀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선택된 백성들이 판단과 통찰의 영이 결핍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합니다. “만일 백성들이 그들의 눈을 감지 않았다면 율법의 교훈이 백성들의 마음을 교화하기에 족하다. 율법이 그 당시에도 족했거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가장 확실히 우리에게 자신의 선지자들과 무엇보다도 복음을 통해서 더 밝은 빛을 주신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고의로 눈을 감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전체 내용을 통해 분별력을 가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성경, 같은 구절을 통해서도 다른 해석들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무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교회 역사 안에서 있었던 교리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결과 된 건전한 신앙고백 혹은 문답 내용 등을 통해서도 우리는 분별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내용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핀 것이 이런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매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내용을 배우고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교회정치 그리고 예배모범, 그 외 개혁주의 신조들은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바 교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어 분별력을 갖추도록 합니다. 다만 무오한 말씀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이해 때문인지 장로교 안에서는 임직과 관련해 선서할 때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선서하게 되는데, 저희 교단(합신) 헌법에 보면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1) 본인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어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신앙고백과 관련된 내용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2) 본인은,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에 교훈한 교리들을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 3) 본인은,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
오늘날 장로교 목사는 대부분 이 선서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선서하면서도 목사가 될 때까지, 그리고 되고 난 이후에도 이 내용을 전혀 살펴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매주 신앙고백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특히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각각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어서 이런 시각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라고 하면서 이런 내용을 등한시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보다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씀으로 나타날 확률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날마다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나아가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에 바탕을 두도록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해서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분별력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로 오시면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왜 거짓 말씀을 전하면서도 거짓인 줄 알지 못하고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혹 참여해도 여호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선지자 당시만 하더라도 율법책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책을 유심히 살펴보기만 해도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자세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마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도 되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으로도 변형이 될 수 있는 성경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는 아무런 의미도 유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권위가 성경에만 속해 있다면 만사는 동요되고 의심스럽게 될 것이란 겁니다. 여러분, 가톨릭은 성경보다 교황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이 말하면 그것이 곧 교회법이 됩니다. 성경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법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일이 오늘날 개신교 안에도 있다면 그들은 결코 성경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아닙니다. 본문 말씀처럼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며, 혹 참여했다 할지라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레미야는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는데,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이 그들로 하여금 악한 길,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새로운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율법책이 있었고 그 율법책을 연구하여 주의 뜻을 따라 드러내는 것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 진노하시는데,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거짓 선지자들이 전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진노가 아니라 평안입니다. 그러나 평안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노여움을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무엇과 같은가? 폭풍과 회오리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임하여 악인들의 머리를 치실 것인데, 그때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알리십니다.
심지어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도 그 진노가 곧 있으면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잠시잠깐의 진노일 뿐이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의 생각을 꺾으십니다. 바로 자신의 진노가 자신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끝 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은 깨닫게 되는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들은 참된 선지자의 경고에 대하여 무감각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 사역자는 물론이거니와 주님의 양들도 보지 못하는 자로, 듣지 못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사야 55장에 있는 말씀처럼 여호와를 만날 말한 때에 찾아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불러야 합니다(사55:6).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면(사55:7)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거짓 선지자들은 이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처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처럼 자기가 정한 길을 갈 뿐입니다. 21절을 보시면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여러분, 참된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분명한 소명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가 그 길을 선택하여 갈 뿐입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고, 누가 그들 스스로가 정해서 가는 자인가? 사실 이것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적 소명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소명입니다. 일단 외적 소명에 앞서 내적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들의 경우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셨습니다. 사도들의 경우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경우는 선지자를 부르실 때처럼, 그리고 사도들을 부르실 때처럼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부르시는 것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간혹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는다는 분들이 계시지만 이미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성경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럼 오늘날에는 어떻게 부르시는가? 구약의 방식 그리고 신약의 방식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2:13). 그래서 이 내적 소명은 사실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각 일꾼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는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제공된 직책을 받는 것은 야심이나 탐욕이나 그 밖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잘 증거 한다.”(1559, 4권 3장 11)
내적 소명 외에도 외적 소명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즉 외적 소명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소명이 정당한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자를 부르시고 사도들을 부르실 때는 이런 외적 소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한 명의 사도를 더 세우는 내용 속에서 우리는 사도가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이 있다는 것과 나아가 두 사람을 천거하여 한 명을 선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데, 사도행전 6장에서는 일곱 집사로 이해되고 있는 사람도 선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14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그들을 각 교회의 장로로 임명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때 ‘택하여’라는 단어가 원래 ‘손을 들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수로 투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런 선거 방식이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인정해 줄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가 확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을 해야 하고, 신학의 최소 과정 이후 강도사 고시를 치르고 목사 고시를 치러야 합니다. 그럼 목사만 되면 끝인가? 사실 목사가 되고 난 뒤에서 계속해서 주의 진리를 위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외적 소명에 있어 정상적인 과정을 밟지도 않고 목사가 되는 일들이 더러 있습니다. 내적 소명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해서 외적 소명의 과정, 질서에 대해서는 가볍게 생각하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적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가?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아니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을 내밀어 주시고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신 자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종이나 교사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외적 소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어서 외적 소명을 위한 질서와 과정이 있었는데, 그런 질서와 과정을 다 밝아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다면 선지자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전하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내지도 않았는데 달음질할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 온갖 열심을 동원하더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이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예언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열심도 중요하지만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진리에 합당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서 10장 2절과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열심을 가지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 열심은 그것이 오히려 더 큰 해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할 방향이 반대로 간다면, 그것도 열심을 다해서 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뿐이지 결코 가깝게 나아가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가 더 중요한 것으로 있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그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놀라운 일도 행합니다. 이것보다 더한 열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을 듣습니까?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절을 보시면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앞서도 말했지만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배운 바에 합당한 것을 전하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내시지 않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외적 소명을 받았지만 내적 소명이 없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저들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했는지, 참여하지 않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바른 해석이 나오고 있느냐에 따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선지자는 확실하고 명료한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율법 가운데서 모든 진리의 개요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율법에서 지혜의 극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 선지자는 자신들이 기록한 선지서 가운데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 율법 안에서 끄집어냈다.”
실제로 선지자들이 기록한 이 선지서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선지자의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니면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일치하지 않는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 일치하였다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이 들려질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겠지만, 내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고 있는 것은 결국 내 말이 들려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너희가 말하고 있는 것이 내 말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진리만을 증거 하셨지만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는 저들의 마음이 그만큼 완악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오늘날도 그럴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이지만 진리 앞에서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면 거기에는 분명 선하고 아름다운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거기에는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는 일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벧전2:7-8)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말씀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남유다 백성들이 듣고자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평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안을 들을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길은 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평안하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고치기 위해, 나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책망하신다면 그런 책망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혹 진노를 내리시겠다고 하시면 그런 엄한 말씀에도 ‘아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본성을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자주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책망을 들을만한 짓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책망의 음성을 높이신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을 담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 책망하시는가? 본문이 잘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처럼 악한 길,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돌이키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망을 책망으로만 들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 가운데 사랑 없이 말씀하시는 바가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책망할지라도 그 책망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말씀이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모조건 잘 될 거라는 식으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 귀에 달콤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전문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