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동굴
충북 단양군 단양읍 고수동굴길 8 고수동굴은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제256호이다. 모암母巖(parent rock)은 약 5억 년 전, 동굴은 약 200만 년 전에 생겨났다. 해발 160m~195 m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3층 구조의 이 동굴은 길이가 1,395m에 이르는데 그 중 940m를 개방하고 있다. 누리집을 방문해보면 ‘아시아 최고의 천연 동굴’이라는 자부심 찬 구호가 맨 위에 떠 있다.
누리집을 계속 읽어본다. 〈5억 년의 시간이 신비한 지하궁전을 창조하다 : 고수동굴의 모암은 5억 년 전 고생대 전기 해저에 퇴적된 탄산염암입니다. 이것이 1~2억 년 전에 해수면 위로 융기하였고, 그 안에서 약 200만 년 전부터 석회암 동굴이 생성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릅니다. 고수동굴은 종종 세계 3대 미굴美窟인 미국 루레이 Luray동굴과 비교됩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종유관과 종유석, 석순, 유석, 휴석, 동굴진주, 동굴산호, 석화 등이 만들어내는 신비하고 웅장한 풍경이 마치 지하궁전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동양 최고의 아름다움에 2200만 명이 반하다 : 고수동굴古藪洞窟은 단양군 고수리에 위치한 천연동굴입니다. 산 정상에 키 큰 수풀이 많아 ‘높을 고, 수풀 수-고수高藪’로 불리다가 지금은 ‘옛 고古’를 사용해 ‘고수古藪’가 됐습니다. 고수동굴은 ‘동양 최고의 아름다운 동굴’로 언론에 소개됩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가 고수동굴을 카메라에 담는 이유는, 물과 시간이 빚어낸 태고의 신비가 천연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1976년 문을 연 이래 2200만 명이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셨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관광·자연학습 ‧ 탐험을 즐기다 : 마리아상, 만물상, 천당 연못, 천지창조, 천년의 사랑, 사자바위, 인어바위, 에어리언 바위- 이름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형상의 동굴 생성물들이 관람 구간 1.3km 곳곳에 펼쳐져 있어 감탄을 자아냅니다. 동굴 전시관과 체험관, 영상관이 함께 있어 자녀들의 자연관찰 학습장으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동굴 속 온도는 일 년 내내 섭씨 14~15도입니다. 여름에는 에어컨보다 시원하고, 겨울에는 봄날처럼 따뜻합니다.>
1973년 11월 4일 고수동굴이 다시 한번 이름을 떨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한국동굴학회가 이곳에서 신석기 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동굴벽화를 발견한 것이다. 오랫동안 서양의 일부 인종차별론자들은 동양권에서는 동굴벽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동양인과 서양인의 기원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로 내세웠다. 그런데 고수동굴에서 아시아 최초로 동굴벽화가 발견되면서 그들의 편견은 완전히 무너졌다.
동굴 속에 깃든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경북 울진의 성류굴과 강원도 영월의 고씨동굴을 더 찾아본다. 그런데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에 있는 성류굴을 답사할 때면 강원도 영월의 고씨동굴을 떠올리게 된다. 두 곳은 각각 천연기념물 155호와 219호로 지정된 동굴이라는 공통점 외에 역사적으로도 같은 아픔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 산262의 고씨동굴은 천연기념물 219호이다. 이 천연 동굴이 ‘고씨’ 소유인가? 고씨동굴은 임진왜란 때 고종원高宗遠이라는 선비가 가족들을 데리고 피란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고종원은 아우 고종경, 고종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한 선비이다. 당시 고종원은 55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고경명高敬命(1533∼1592) 의병장의 격문을 보고 감동하여 혈기 왕성한 젊은 아우 고종경과 함께 창의했다. 고종원은 칼을 휘두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으므로 의병장은 아우 종경이 맡았다. 형제는 인근 지역에 통문을 돌려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했다.
고종원이 동굴로 들어간 때는 아우 종경이 이미 죽은 뒤였다. 그는 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이끌고 동굴로 숨었지만 이내 포위되었다. 적은 1592년 8월 18일 동굴 입구에 연기를 피워 안에 숨어 있는 조선인들을 생포하려 했다. 고종원의 아내 조씨는 남편의 탈출에 자신이 걸림돌이 될까 걱정하여 동굴 속 깊은 물구덩이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내의 비극적 선택에도 불구하고 고종원은 동생 고종길과 함께 적에게 사로잡혔다. 형제는 폭우가 심하게 쏟아져 주변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추격해온 적에게 다시 붙잡혀 종길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내와 두 아우를 전쟁 초에 잃은 고종원은 1592년 4월 20일부터 9월 6일 사이의 사건을 기록한 《기천록祈天錄》을 남겨 임진왜란 발발을 맞아 조선 백성들이 겪은 처참한 피란 생활을 증언했다.
성류굴 (경북 울진)
성류굴에도 고씨동굴 못지않은 슬픔이 배어 있다. 전쟁이 터져 왜적이 들이닥치자 울진 사람들은 성류사의 부처를 동굴 안으로 모셨다. 성류굴聖留窟은 부처聖가 머문留 굴窟이라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불상만 성류굴 안으로 들어갔을 리는 없다. 주변에 살고 있던 백성들 500여 명도 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왜적이 알고 몰려왔다. 왜적은 백성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회유했다. 백성들이 나갈 리가 없었다. 왜적은 동굴 입구를 돌로 막아버렸다. 조선 백성 500명이 그 안에서 굶어죽었다.
지금도 동굴 입구 경사진 곳에는 바위들이 깔려 있고, 제 5광장 동쪽에서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고 있다. 시간과 장소가 분명하고 증거물이 있으니 성류굴의 비극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설로 받아들여진다.
500여 백성들이 생매장되어 굶어죽은 성류굴 앞에서 임진왜란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를 읽어본다.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잔학성은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 분탕하였고 비전투원까지 학살하였다. (중략)
본래부터 일본을 이적시夷狄視하던(오랑캐로 보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으로 그들을 더욱 멸시하여 적대시하는 국민감정이 뿌리박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의 의병장 등 열사와 논개를 비롯한 많은 사민士民(선비와 백성)·부녀자의 순절은 도의적 생활의 모범으로서 추앙되게 되었다.’
《한국사》의 관념적인 설명은 임진왜란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그에 견줘 《지봉유설》의 사실적인 기술은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못할 형편이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쌓이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체의 살을 떼어 먹었으며, 시체의 골까지 뻐개 그 진물을 빨아 마신 뒤 바로 그 자리에서 엎어져 죽었다. 쌓인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으나 거두어 장사지내주는 자가 없었으며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아먹었다.’
성류굴은 동굴 중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자연 유산이기도 하지만, 최초의 동굴 탐사기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성류굴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는 이곡李穀(12 98∽1351)의 〈동유기東遊記〉가 바로 그 글이다.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은 가전체假傳體 작품 〈죽부인전〉을 지은 문장가로, 1333년(36세)부터 1344년(47세)까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며 고려의 공녀貢女(공물로 잡아간 처녀) 공출을 중단시킨 업적을 남겼다. 〈동유기〉 중 해당 부분 일부를 읽어본다.
울진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가니 성류사聖留寺가 나왔다. 절은 돌벼랑 아래 장천長川(긴 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돌로 된 절벽은 높이가 1,000척(321m)이나 되었는데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동굴 이름은 성류굴聖留窟이라 했다. 동굴은 깊이를 재볼 수도 없었지만 으슥하고 어두워서 촛불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절의 승려에게 횃불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하고, 또 출입에 익숙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앞뒤에서 돕게 하였다.
동굴 입구가 워낙 좁아 네댓 걸음쯤 기어서 들어가니 조금 넓어져 일어나서 걸어갔다. 다시 몇 보를 걷자 이번에는 세 길가량 되는 끊어진 벼랑이 나타났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조금 평탄해지면서 공간이 높고 넓어졌다. 여기서 수십 보를 걸어가자 몇 묘畝(99㎡)쯤 되는 평지가 나타났다.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였다. (중략) 7∽8보쯤 앞으로 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깃발)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부처) 같기도 했다.
또 10여 보를 가니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다. 깃발과 부처처럼 생긴 것만 해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네댓 보를 가니 불상 같은 것도 있고 고승 같은 것도 있었다. 못도 있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넓이도 수 묘쯤 되었다.
못 속에 바위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수레바퀴 같고 다른 하나는 물병과 비슷하였다. 그 위와 옆에 드리운 번개幡蓋(깃발과 일산)들도 모두 오색이 찬란하였다. 처음에는 석종유石鐘乳가 응결된 것이니 별로 딱딱하게 굳지 않았으리라 여기고 지팡이로 두들겨 보았더니 제 각각 길고 짧은 크기에 따라 청탁淸濁의 음향을 내었는데 마치 편경編磬(돌로 만든 타악기)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어떤 사람이 ‘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라고 말했다. 나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삼아 구경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중략) 예전부터 조물造物(하늘)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중략) 이 동굴을 보니 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런 경치는 저절로 생긴 것인가, 아니면 누가 만든 것인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어찌 변화무쌍한 교묘함이 이토록 대단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누가 만든 것이라면 귀신이 영원한 시간을 들여 힘을 쏟았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이곡은 1349년(고려 충정왕 1)에 이 글을 썼다. 이곡은 그 당시에도 동굴 이름이 ‘성류굴’이라고 했다. 1349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보다 243년 전이다. 1349년 이전부터 이 동굴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었고, 이름도 성류굴이었다. 이곡은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이 동굴에 부처가 모셔졌고, 그 이후 성류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성류굴
우리나라에서 동굴 속에 부처를 모신 대표적인 사례는 ‘경주 석굴암 석굴(통칭 “석굴암”, 국보 24호)’과 ‘군위 삼존석굴(통칭 “제2 석굴암”, 국보 109호)’이다. 또 의성군 비안면 자락동 뒷산에도 ‘비안면 자락동 석조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56호)’이 있다. 셋은 모두 경북에 있다. 이처럼 불상을 동굴에 모시는 경우는 불교에서 흔한 일이었다. 즉, 성류굴은 종교적으로는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류굴은 이미 고려 말에 이곡이 답사를 하고 그 후기를 남겼을 만큼 예로부터 유명세를 떨쳐 왔다. 우리나라 동굴 중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지하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굴 자체가 대단한 위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성류굴에는 임진왜란의 비극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자 백성들은 성류사의 불상을 굴 안으로 피란을 시키고 함께 들어가 숨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500여 명이 생매장을 당해 목숨을 잃는 참극을 겪었다. 이 비극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고,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끝내 잊을 수 없는 동굴로 각인되었을 터이다. 왜적이 입구를 막는 데 썼던 돌들을 보면서 굴 안으로 들어서야 하는 지경인데 어느 누가 그 날의 애통한 정경을 망각할 수 있을까.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성류굴을 찾을 때 꼭 명심할 것이 있다. 곧장 주차장으로 달려가 입장권을 끊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곡은 성류굴이 긴 물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했다. 강 건너편에서 성류굴의 전경부터 눈에 담으라는 가르침이다. 굴 안만 답사해서는 굴 전체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물에 비친 성류굴 일대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500여 백성들이 갇혀서 굶어죽은 곳인데, 오늘 내 눈에는 어째서 이토록 절경으로만 보일까……! 이렇게 역사는 잊혀가는 것인가?
위의 글은 현진건 현창을 목적으로 발간하는 <빼앗긴 고향> 원고로 집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