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 고등학교 동창 모임의 하나인 ‘36,39 노송산악회’ 월례모임에 참가했다. 2002년 아내가 희귀병으로 쓰러진 이후 처음으로 고교동창회의 공식모임에 나간 것이다. 10여명 친구들과 친구 부인 두 분이 중인리 가림식당에 모였다. 무려 13~4년 만에 만나는 친구도 있어서 서로 늙은 얼굴을 확인하고 반갑게 손을 잡았다. 모악산은 최근에 거의 매주 한 차례 올랐지만, 연분암 코스는 15년 전쯤의 기억밖에 없다. 먼저 저 세상에 간 가까운 친구가 이쪽 코스를 좋아해서 두어 차례 올랐던 기억이 있다.
오전 10를 조금 지나 약속된 친구들이 모두 나왔음을 확인하고 연분암을 향해 출발했다. 매달 이루어지는 산행이지만, 오랜 친구들이 만나니 70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욕설과 장난들이 넘쳐도 마냥 즐겁고 정겹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올라가며 신바람이 나서 떠드는 분위기를 깨는 건 차등족(車登族)(?)들이다. 걷기 싫으면 등산을 하지 말고 드라이브 코스를 찾을 일이 아닌가? 등산객들에게 불편을 주면서 기어이 차를 끌고 올라가는 심사를 알 길이 없다.
금선사 앞에서 연분암 입구를 알리는 거대한 표석을 옆에 두고 기념촬영을 하고 친구들이 준비한 음료와 과자, 초콜릿 등을 나누어 먹었다. 거기서 연분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나무로 짠 계단이 있었는데 그 중간 부분에 안내 글이 있다. “약수터 공사에 쓰일 자재입니다. 가져다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글과 ‘→’ 표시가 적혀있다. 표시한 방향을 보니 검은 비닐에 뭔가가 담겨져 여러 뭉치가 쌓여 있었다. 들어보니 잘게 부순 자갈인 듯했다. 등에 멘 가방이 비어있어 한두 개 가지고 올라갈까 하고 집어 들었는데 친구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때 뒤 따라오던 친구가 “젊은 애들 많아. 영감들은 걍 올라가는 거여”한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비닐주머니를 내려놓고 친구들을 따라갔다.
나이 들면서 척추가 불편한 친구가 있어서 산행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어려서 귀한 손자라고 할머니가 업어 기른 까닭에 O자 다리가 되어 척추 만곡이 된 탓이라 한다. 그런 몸을 이끌고 매주 모악산을 오르는 그 친구의 집념에 감탄을 하면서, 아직도 가볍게 산을 오르내릴 수 있는 내 건강에 고마움을 느낀다.
11시 경에 연분암 코스의 자랑인 편백나무 숲에 도착했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어 오른 나무 사이사이로 햇살이 줄기지어 비쳐들고, 다가선 봄의 온기가 숲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금상첨화(錦上添花)라던가? 어디선가 은은한 피리소리가 편백 숲의 정취를 한결 신비롭게 채색하고 있었다.
‘오감(五感)만족!’ “그래! 바로 이 맛이야!”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산행의 즐거움이여!
친구들이 숲 가운데에 마련된 공연장의 층계참에 나란히 앉아 오미자차를 꺼내 마시려는데 피리소리가 멈춘다. 동년배 정도로 보이는 피리 연주자에게 풍류를 아는 친구 한 명이 다시 한 번 불어주기를 청했다. 내 식견이 부족하여 분명하지는 않지만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이라던가 하는 불교음악의 일부분으로 생각되었다.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던 광경을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영산회상곡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자랑이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 다음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연분암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여서 나는 친구들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나는 청력이 나빠진 최근에는 산행도 혼자, 자전거도 혼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바라보며 입술을 읽어야 대화가 제대로 되는 형편이라, 앞뒤에서 걸으며 대화가 어려워 엉뚱한 대답이 일쑤였기 때문에 그냥 혼자 움직이는 게 편했다.
연분암에 도착해서 경내에 올라서는 순간 “아차!”하는 놀라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큰 실수를 했음을 절감했다. 경내에 들어서는 입구에는 밑에서 내가 가져오려다 내려놓았던 것과 같은 검은 비닐주머니들이 쌓여 있었다. 그 옆 탁자에는 썰어놓은 바나나와 떡 조각들이 쟁반에 담겨 있고, 왼편으로 간이 주방이 설치되어 국수사리가 담겨있는 그릇들과 큰 솥에선 국물이 끓고, 잘게 썬 김치와 양념장 그릇이 그 앞에 놓여 있었다. 힘들게 올라온 등산객들에게 국수를 대접하고, 떡과 바나나 등 간식을 제공하는 그들의 배려에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망연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비닐주머니를 가져왔더라면 주고받는 정이 얼마나 떳떳하고 아름다웠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먹는 약수터를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재를 빈 몸으로 올라가는 길에 가져다주는 일은 당연한 것인데, 그 일을 귀찮아하다니! 70년을 헛살았다는 자책감이 들어 참담한 심경으로 서있는데 뒤 따라온 친구가 “왜 그렇게 서있어? 자, 가서 국수 맛 좀 봐야지. 맛이 일품이여.”하고 잡아끈다. 염치는 없었지만 궁금하던 참이라 못 이기는 척 따라가 그릇 하나를 들고 국물을 받아 썰어놓은 김치와 양념장을 넣어 한 입 먹어보니 맛이 그만이다.
국수를 먹으며 앞을 보니 칸막이처럼 세워진 곳에 “모악산과 연분암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라는 머리글 아래에 “국수 보시 받습니다.”라고 세워 쓰기로 적혀있다. 순간, 연분암에 오르기 전 친구들과 사진을 찍을 때 장년층의 남자 둘이 커다란 국수뭉치를 배낭에 나누어 넣는 모습을 보았던 생각이 났다. 그분들이 힘들여 가져온 국수를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다. 같이 국수를 먹던 친구가 “우리도 지난번 산행 때 다섯 뭉치 가져왔어. 국수 보시 걱정은 말어.”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국수 가닥이 조금 목구멍에 매끄럽게 넘어가는 듯 했지만 검정비닐주머니에 대한 미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분암 국수는 10여 년 전 무진스님이 힘들여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좋은 인연을 맺고, 국수발처럼 오래 살라’는 뜻으로 나누어 주던 사랑의 유물이라고 한다. 2007년 스님이 열반하고, 그 뜻을 이어받은 ‘모악산과 무진스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주 일요일 12시까지 연분암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국수를 제공하고 있다.
연분암 입구 왼편에 작은 오석으로 세워진 추모비가 있다.
앞면에
“국수면발보다 더 긴 인연인 걸
무진 스님! 염불암의 바람으로 머무소서
2008. 3. 10.
모악산과 무진스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뒷면에
“모악산객들에게 일요일이면 국수 한 그릇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던
염불암 무진스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정겹고 따스한 웃음이 어제인 듯한데
비통할 따름입니다.
스님의 아낌없는 나눔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산객들이 정성을 모아
추모비를 세워 귀감이 되고자 합니다.“
무진스님은 갔지만 그의 나눔과 사랑은 여전히 남아 세상을 맛있게 하고 배부르게 하고 포근하게 감싸는 사랑으로 남아있었다. 연분암 국수는 국수를 나누며 수고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삭막한 이 시대의 한 가닥 희망이었다.
첫댓글 모악산에 연분암이 있군요. 저는 모악산에 한번도 못갔습니다. 꼭 가봐야 겠습니다.
반드시 일요일 것두 12시 전에 가야 맛난 국수를 맛봅니다.ㅎ
참으로 글맛, 사는 맛, 인생의 맛을 느끼게 하는 좋은 글 읽었습니다.
어르신이 누구신 줄 모르오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늦게 댓글을 봐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제 글을 배우는 소졸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