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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억명의 거대한 중국과 5천만명에 불과한 소국 베트남의
싸움은 누구의 눈에도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상비군 전력에서도 중국군은 총병력 430만명(육군 360만명,
해군 30만명, 공군 40만명)에 175개 사단(121개 보병사단, 11개 기갑사단, 3개 공수사단, 40개 포병사단 등), 전차 1만대, 야포
1만6천문, 전투기 5천대, 대소함정 1천여척 등에 달하여 양적으로는 세계 최대였다. 중국군의 대부분은 소련의 공격에 대비하여 중-소 국경지대에
전개되어 있었고 베트남과 인접한 광시 군구와 윈난 군구 등 남부전선군은 10개 야전군(우리의 군단에 해당) 31개 사단
33만명과 전차 1200대, 야포 1500문, 항공기 1천여대를 보유하였다.
<중국군 남부전선군의 편제도>
베트남의 군사력은 60만명 정도였으나 절반 정도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주둔하면서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또한 베트남 북부에는 약 20만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1개 기갑 여단을 포함한 정규
부대(5개 사단 및 4개 독립 여단)은 대부분 수도 하노이 주변에 있었다. 중국-베트남 국경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내어야 할 최일선인 베트남군은 제1군구 4개 사단(제3, 제325, 제338, 제346사단), 제2군구 3개
사단(제316, 제326, 제345사단) 등 7만명이었으며 지방 민병대까지 합하면 약 15만명
정도였다.
그 중에서 랑썬에 주둔한 제3사단과 싸파의
제316사단만이 정규 사단으로서 잘 훈련된 정예부대였고 나머지는 건설, 인력 동원 등 경제 분야에 종사하는 지방군 부대로 무장과 훈련 상태가
빈약하였다. 공군력에서는 Mig-19, Mig-21, F-5 전투기 등 300여대를 보유했는데 중국 공군에 비하여 숫적으로는 열세하지만
성능면에서는 중국 전투기들에 비하여 좀 더 우수했다. 또한 해군력에서도 1,150톤급 소련제 페차급 프리게이트(Petya-class
frigate) 외에 연안 경비용의 고속정이 100여척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군사력은 물론이고, 최일선
전력에서도 베트남은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또한 베트남은 외교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된 신세였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은 일종의 지역 패권주의라는 점에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게도 결코 방관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은 베트남이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무력으로 점령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동남아 국가들 입장에서 지역의 안정을 해치는 "깡패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이었다.
또한 덩샤오핑은 베트남 침공 이전에 미국과 서방,
동남아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면서 자신의 침공 계획과 전쟁의 당위성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는 등 사전에 적극적으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방과 동남아 지도자들에게 중국은 결코 베트남에 대한 영토적 욕심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도발을 반복하는 베트남을 혼내주고 중국의 동맹국인
캄보디아로부터 베트남군을 철수시켜 동남아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군사 목표 또한 중월 국경 지대에 국한될 것이라고
약속하여 이들을 안심시켰다. 반면,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무력 점령하고 괴뢰 정권을 수립함으로서 주변국들로부터
"침략국"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유일한 동맹국인 소련 역시 거리에서 너무 먼데다 중국의 침략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체계가 구축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누구도 도움도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략적으로
본다면 베트남은 미국과 싸울 때보다도 오히려 불리한 처지였다.
그러나 과연 중국이 쉽사리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중국군의
문제점은 그야말로 총체적이었다. 소위 "문화대혁명"이라고 불리는 마오쩌둥 집권 말기에 벌어진 10년 동란은 지도부의 권력 투쟁과
광란의 분위기 속에서 중국 사회 전반에 걸쳐서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이것은 군부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마오쩌둥이 군부에 대한 길들이기에 나서면서 한국전쟁의 영웅이었던 펑더화이를 비롯해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에서 명망을
떨쳤던 군 원로들은 어린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와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문혁의 여파는
특히 군대의 교육과 훈련을 맡은 군사 학교들에게 심한 타격을 입혔다. 중국군 전체 125개 군사학교 중에서 82개가 폐쇄되었고 대부분의 교관들이
"반동"으로 몰려서 투옥되거나 쫓겨났다. 이로 인하여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군사 교수진이 붕괴되었고 교육 설비와 기자재, 귀중한 전쟁 자료들도
태반이 불태워지거나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간부들은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당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을 증명하기에
급급하였고 본연의 임무인 군의 교리와 무기, 장비의 현대화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병사들의 훈련 또한 정치 사상 교육에만 주력하고 실전
훈련은 거의 하지 못했다.
중국군의 무기와 장비 또한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졌다.
최대의 무기 교역국인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더 이상 최신 장비를 도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군이 보유한 무기는
대부분 소련과 사이가 좋았던 1950년대~60년대 초반에 도입한 구식 소련제 무기를 카피한 것들이었다. 중국 공군이
보유한 약 5천여대에 달하는 항공기 중에서 4100여대가 전투기였으나 대부분 Mig-15/17/19와 같은 한 세대 이전의 구식 전투기였다.
이들은 레이더가 없고 적외선 유도 미사일을 장비하지 않아 현대적인 공중전이 불가능했다. 전차 역시 20년도 더 전에
개발된 T-54/55를 베이스로 한 59식, 69식같은 구식이었다. 같은 시기 소련은 전자 기기와 무장, 속력에서 훨씬 우수한
Mi-23/25/27 전투기와 T-64/72 전차를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중국은 더 이상 최신 무기를 도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중국 공군이 보유한 가장 최신 전투기는 Mig-21의 카피판인 J-7이었지만 숫자가 80대에 불과했고 베트남 공군은
J-7보다 우수한 Mig-21bis를 운용하는 등 질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중국군은 상급 제대가 하급 제대를 지휘하는데 필수적인
지휘 통신 장비도 결여되어 있었으며 기동작전에 필요한 차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참능력 또한 결여되어 있었다. 최일선 부대는
수십km 후방에 있는 보급소까지 사람과 우마의 힘으로 식량과 탄약을 부지런히 실어날라야 했다. 교리 또한 인해전술에
의존하던 마오 시절의 인민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군의 전반적인 수준은 30여년 전의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지형적으로도 매우 불리하였는데, 중월 국경은 험준한
산악지대인데다 울창한 정글이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베트남은 이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중국 봉건 왕조의 군대를 여러차례 물리친 바 있었다. 그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베트남 국민들은 강력한 결속력을 갖추었으며 침략자를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또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비록 베트남군은 숫적으로는 열세해도 미제와 소련제 최신 무기로 무장한데다 잘 훈련되고
경험이 풍부하였다. 변변한 훈련도, 전쟁경험도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중국군으로서는 결코 만만찮은 상대였다. 그런 점에서
중월전쟁은 1939년 소련이 군사력의 우세만 믿고 무작정 핀란드의 동토를 침공했다가 호되게 당했던 "겨울전쟁(Winter War)"에 비견할 만
하였다.
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침공에 주력 부대를 동원하면서 중국의 침공을
대비하여 국경 지역 주민들을 민병부대로 조직하였다. 무기는 비록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 소화기로 무장했지만 게릴라 전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중국군을 상대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강한 의지와 높은 사기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트남 국경 방어선은 상당히
강력하였다. 산과 계곡, 동굴, 밀림 등 험준한 지형지물을 따라서 수많은 지하 갱도와 참호, 토치카가 구축되었으며 과거 미군과
프랑스군을 괴롭혔던 온갖 부비트랩, 지뢰, 함정 따위가 곳곳 설치된 채 중국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등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길도
매우 협소하여 전투는 고사하고 부대를 이동하는데도 대단히 불리하였다.
중국군의 전략은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이용한 우회 기동 및
포위 섬멸전으로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1950년의 한국전쟁과 1962년 중국-인도 전쟁 당시의 전술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격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병참 능력이 뒤따라야 하고 베트남군의 주력부대가 중월 국경에서 조기 결전에
응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였다. 숫적으로도 상대를 압도할 만큼의 월등히 우세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적을 포위하려면 적어도
6배의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이 동원한 병력은 최대 30만명~40만명 정도로 15만~20만명 정도가 투입된
베트남군에 비하여 겨우 두배 남짓 우세했을 뿐이었다. 이는 베트남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형이 대부대의 집중과 기동을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덩샤오핑이 "제한전쟁"이라고 못 박았고 베트남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중국군은 보병 위주의 기동성이 결여된 군대였다. 전차는 어디까지나 보병의
지원 무기에 불과했다. 주력 전차인 59식 전차는 소련제 중전차인 T-54를 베이스로 한 것으로, 유럽의 대평원에서의 운용을 전제로 했기에
무겁고 속도가 매우 느렸다. 그외에 62식/63식 경전차도 있었으나 기계적 신뢰성이 낮고 장갑이 매우 빈약하였다. 따라서
중국군은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나 중동전쟁 당시의 이스라엘군처럼 베트남을 상대로 전격전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북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전쟁이나 인도군이 중국군 진지를 선제 공격한 후 병참 준비 없이
깊숙이 진격하여 스스로 불리함을 자초했던 중인전쟁과 달리 이번에는 완전히 적지라는 점이었다. 싸움은 훨씬
불리하였다.
반면, 베트남군의 전략은 공간으로
시간을 번다는 전형적인 종심방어였다. 기갑부대를 포함한 주력부대는 하노이 주변에 배치하고 국경에서는 결전을 회피한
채 유격전과 지연전술로 상대의 전력을 꾸준히 소모시킨 다음, 하노이 주변의 평야 지대에서 결전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군이 원하는대로
국경지대에서의 조기 결전에 응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중국군이 이를 강요할 능력 또한 없다는 점이었다. 베트남군의 기갑전력은 소련제
T-54/55/62와 미제 M-48 등 전차 800여대를 보유하였고 장비 면에서는 중국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소련군
군사고문단에 의하여 철저하게 훈련되었다. 이들은 1975년 남베트남을 침공했을 때 숫자와 장비에서 우세한 남베트남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버리고 단
두달만에 사이공을 점령했을 만큼 뛰어난 교리와 기동력, 운용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중월전쟁 당시 만약 중국군이 베트남군의
최일선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평야지대로 진출했다면 베트남군 기갑부대에게 괴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되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현대전에 어두운 중국군 수뇌부는 베트남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국경수비대 정도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적당히 체면 치레만 한 다음 물러난다면 미국처럼 수렁에 빠질 일은 없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하였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현대전에서 공지 협동은
필수적임에도 중국은 해공군력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차적으로는 전쟁을 지상에만 국한시킴으로서 확전을 막기 위한 의도도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중국 해공군의 작전 능력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었다. 중국 해공군은 타이완 해협에서 장제스 군대를 상대로 국지적인 전투를 여러차례 벌인 적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자국의 영해, 영공에 대한 적의 해공군의 침입을 요격한다는 방어적 교리에 머물렀고 미국, 소련처럼 적극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한다거나 지상군에 대한 전술 지원, 상륙전 능력은 결여되어 있었다. 또한 베트남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서 막강한 방공망과 해안방어망을 갖추고
있어 중국 해공군이 접근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는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중월전쟁 내내 양측 해공군이 직접 교전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중국군의 작전 지휘를 맡은 쉬스여우, 양더즈 두 사령관은
군벌내전기부터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베테랑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고 마오식 인민전쟁에나 익숙할 뿐, 현대전에 대한 경험이나 전문 지식도 결여되어 있었다. 1920년대에 우페이푸 휘하의 군벌 군대에서 졸병으로
시작한 쉬스여우는 술이 좀 들어가야 용감해진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장군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소위 "혁명 원로"라고
불리는 당시 중국군 고위 간부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또한 쉬스여우가 총사령관, 양더즈가 부사령관을 맡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협력
체계를 구성하지 않았고 개별적으로 지휘하는 식이었다. 이런 협조 결여도 작전 실패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1979년 2월 5일 덩샤오핑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중국-베트남 국경 일대에 집결한 중국군은 17개 사단 22만 5천명에 달했다. 덩샤오펑이 공공연히 "혼내주겠다"라고 떠들고 국경 지대에 중국군의
대부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베트남이 모를 리 없었다. 덩샤오핑의 외교전은 서방과 동남아 여러 국가들의 양해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중국의
의도를 베트남이 사전에 간파함으로서 대비할 시간을 주었고 기습의 효과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실패하였다. 덕분에
베트남 역시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 중국군의 공격에 철저하게 대비하였다.
그로부터 약 2주일 뒤인 2월 17일 새벽 5시,
중국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1,347km에 달하는 중국-베트남 국경을 따라서 중국군의 야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리고 3시간 후인 오전 8시 전차 200여대를 앞세운 중국군 12개 사단 16만명이 전 전선에 걸쳐서 진격을 시작하였다.
중국군의 공세는 크게 3개로
나뉘었다. 광시 군구 산하의 제41군(제121, 제122, 제123사단)과 제42군(제124, 제125,
제126사단)이 북부의 까오방 정면을, 제55군(제163, 제164, 제165사단)이 동쪽의 랑썬 방면을, 그리고
서쪽에서는 윈난 군구 산하의 제13군(제37사단, 제38사단, 제39사단)이 라오까이-싸파 방면을 맡았다. 중국군은 까오방과 라오까이, 랑썬 등
베트남 북부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여 베트남군 최일선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간선도로를 따라서 단숨에 수도
하노이로 진입하여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한편,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카터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은 불개입할 것이며 소련 또한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중국과 베트남군은 전쟁을 중지하고 각각 철수할 것과 베트남군 역시
캄보디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남아 국가들 역시 중국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는 결국 중국의 편을 들겠다는
것과 같은 말로 덩샤오핑 외교의 성과이기도 했다. 소련은 중국의 베트남 침공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전군에 1급 임전태세령을 내렸다. 또한
소련 극동 함대의 일부를 남중국해로 파견하였다. 중국도 소련과 인접한 신장 군구, 란저우 군구, 선양 군구에 1급
임전태세령을 하달하였고 미국 역시 2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한 서태평양함대가 필리핀과 일본으로 출동하는 등 일촉 즉발의
상황에 돌입하였다. 그야말로 제3차 세계대전 직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베트남은 이번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싸울 것" "침략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 따위의 의례적인 말만 늘어놓았을
뿐 그 이상의 무력 개입이나 군사지원에 나서지는 않았다. 베트남과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은 소련으로서는 베트남을 직접적으로 도울 방법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중국을 공격한다면 전면전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중월전쟁 내내 소련은
경고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고 베트남은 사실상 소련에게 배신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덩샤오핑이 예상했던
결과대로였다.
2월 17일 전쟁 첫날 중국군의 진격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국경 지대의
베트남군이 전투를 회피하고 뒤로 물러나서면서 중국군은 베트남군의 전초 기지들을 손쉽게 파괴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는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해발 1천m가 넘는 산악지대는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도로도 형편없는데다 중국군의 통신망이 부실하여 지휘도 여의치
않았다. 좁은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 중국군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베트남군은 북부 산악지대의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국경에서 160km 떨어진 하노이가 당장 위태로와진다. 따라서 중국군을 막아내려면 무슨 수를 써서건 이곳에서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