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는 뇌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촛불대행진 집회에서 울려퍼진 노래 가사 중 하나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다가 낙마한 정순신의 고등학생 아들로 인해서 유명해진 말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2000명 넘는 대한민국 검사들에게 그렇게 심한 모욕이 어디 있을까.
사법연수원 다니는 사람들이 이 칼럼을 읽고 불쾌할지 모르겠다. 예수가 법률가들을 싫어한 이야기를 할 참이기 때문이다. 검사뿐 아니라 판사, 아니 변호사들까지도 비슷한 심정일 수 있겠다. 교회, 성당 다니는 검사, 판사들은 더 심각하겠다. 법조인 가슴에 예수는 왜 크나큰 대못을 박았을까. 21세기 대한민국 시민들만 검사 판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행동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특징보다는 신비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단 한 번도 비판한 적이 없었다. 예수는 여성, 어린이, 노인도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 여성, 어린이, 노인들의 약점과 어두운 모습을 예수는 과연 몰랐을까. 그렇진 않다. 가난한 사람들의 모순과 이중성에 예수처럼 시달리고 고뇌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그런데도 예수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예수 시대 유다 사회에서 현대적 의미의 사법체계는 갖추어지지 못했다. 당시 사법제도에 관한 기록도 우리가 찾기는 쉽지 않다. 한글 번역 성서에서 율법학자라고 불리는 그룹이 오늘날 법조인 의미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정치와 종교가 뒤섞인 당시 유다 사회에서, 재판 업무는 율법학자들이 맡았다. 구약성서를 전공한 율법학자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법조인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예수는 왜 검사 판사를 싫어했을까. 율법학자, 즉 법조인 중에 임은정 검사 같은 사람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 공정한 수사를 하고, 재판을 하고, 뇌물 받지 않고, 남몰래 선행을 하는 의로운 검사 판사가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예수는 단 한 차례도 율법학자를 칭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율법학자를 비판한 구절은 드물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예수는 이렇게 법조인들을 욕했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 새끼들아! 너희가 지옥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복음 23:33) 이웃 사랑은 물론 원수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던 예수가 법조인에게는 가혹하고 무자비했다. 자기 말을 스스로 뒤집어엎을 정도로 예수는 법조인을 싫어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법조인들을 조심하시오.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마가복음12:38-40) 법조인들이 가난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는다니! 법조인들의 악행은 당시 유다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예수는 심지어 부패한 법조인 비유를 들 정도였다. 그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정도로 부패한 법조인이 당시에도 많았다는 뜻이다. 오늘 한국 현실과 크게 다를까?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라댔습니다.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으시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습니까?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누가복음 18:2-8)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 고약한 재판관. 이런 예수 말씀을 대한민국 법조인들은 가슴 깊이 새길 일이다. 예수가 그런 표현을 대한민국 법조인들에게도 쓰고 있는 것이라고.
그런 예수를 법조인들이 가만 놓아둘 리 없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예수를 잡아죽일까 궁리하였다.(마가복음 14:1) 배신자 유다와 함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떼지어 왔다.(마가복음 14:43) 검사 판사들이 예수를 체포하러 몰려든 것이다. 예수를 죽이라고 로마 군대에 밀고한 유다인 밀정들 속에 검사 판사들이 빠지지 않았다.
조선인 독립투사 예수를 죽여달라고 조선인 검사 판사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일본 군대에 넘긴 격이다. 예수는 동족 검사 판사들 때문에 식민지 군대에 넘겨졌고 정치범으로 식민지 군대에게 처형되었다. 예수가 조선인 독립투사라면, 검사 판사들은 일본 군대의 밀정이다. 일제 강점기에, 아니 대일 항쟁기에 밀정 법조인, 아니 일본 군대 하수인 검사 판사들이 얼마나 날뛰었던가.
예수는 검사 판사들에게 가혹하였다. “여러분이 검사 판사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태복음 5:20) 오늘 대한민국에서 법조인보다 더 죄짓고 사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지옥의 첫 자리는 당연히 대한민국 검사 판사들 차지 아닐까? 예수가 오늘 한국에 온다면, 누구를 가장 먼저 혼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검사 판사들이 첫머리다.
예수는 결국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마태복음 19:24) 오늘 한국 현실에 빗대어 덧붙일 말씀이 분명히 있다. “대한민국 검사, 판사, 변호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사라지고, 성서 말씀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대한민국 검사 판사들의 악행은 세상 끝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