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친구
류 근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자명종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내가 듣지 못한 것인지 그놈이 심술을 부렸는지 눈을 뜨니 해가 중천에 떴다. 내가 가려는 곳은 노치원도 아니고 유치원은 더욱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친구가 있고 날 보면 반가워하는 유혹에 끌린다.
그렇다고 ‘농장’이라 하기엔 너무 거창한 이름이고, 쉬기엔 편안한 장소가 아니기에 ‘쉼터’라 할 수도 없다. 노는 또래나 기구들도 없어 ‘놀이터’라 이름을 붙이기도 모호하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주말주택에 세웠던 간판이 한구석에 쓸쓸히 서 있다. 어색하지만 그냥 편하게 그 이름(柳&梁의 작은 쉼터)을 줄여 ‘쉼터’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가 있긴 하다. 그러나 어색하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곳이고,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하기에 이름이 없으면 어떠랴!. 지하수도 있고 전기가 있어 큰 불편이 없기에 치유하고 즐기는 장소다. 누가 물으면 그냥 “거기” 에 간다고 대답한다.
‘거기’에 가면 흙을 떠들고 머리를 내미는 어린 친구도 있고, 성년이 다 된 놈도 있다. 노소(老小)도 암수(雌雄)도 가리지 않는다. 동고동락하는 친구들이니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다. 그뿐만이 아니다. 집에서 탈출하는 비상구 역할도 한다. 홀로 집을 지키는 것도, 고령사회에 접한 부부가 함께 있어 봐야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다만 내가 초저녁에 잠들지 못하고 헤매다가 늦은 아침까지 게으름을 피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내가 문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격언이 있다. 이른 아침에 만나는 친구는 더욱 반갑다. ‘밤새 안녕’을 외치면 알아들은 듯 손짓한다. 이슬을 머금은 모습은 더욱 싱그럽고 사랑스럽다. 일 할 때도 힘이 덜 든다. 더울 때는 아침에 하는 일이 종일 할 일과 맞먹는다. 그것도 즐겁고 신바람 나게 대화하면서 힐링하는 것이다.
매사가 그렇듯 밭에서 자라는 친구들도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어느 하나 엇박자가 나면 안 된다. 하물며 인간인 내가 걸림돌이 되어 안타까운 것이다. 하늘의 힘은 대신할 수가 없다. 다만 농업용수는 하늘의 힘 대신 인력으로 어느 정도 대체한다.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토질도 인력으로 다룰 수 있다. 나는 토질을 개량하느라 부엽토를 덤프트럭으로 운반하여 다량으로 살포했다. 토질도 양호하게 관리했다. 그런데 정작 내 힘으로 못하는 것은 게으름이다. 참으로 답답하다.
올해는 애초부터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하늘에서 심술을 부렸다. 제철도 아닌데 나무들이 볼록한 꽃망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 늦서리에 얼고, 봄 가뭄에 말라 고사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암술과 숫꽃 가루가 결합해야 씨받이를 하는데 벌들이 중매를 못 해서 인지 꽃은 화사하게 피었지만 열매는 없고 이파리만 무성하다.
청년기를 맞은 살구, 매실, 자두라는 친구가 몇 있다. 그런데 성년이 되었어도 제구실을 못 한다. 우거진 가지를 헤쳐보지만 달린 것이 없다. 어쩌다 하나 둘 뿐이다. 열매를 맺지 못한 불임 신세다. 사춘기가 되었는지 여기저기서 여드름 나듯 잔가지만 무성하다. 다섯 살배기 호두나무도 어린애 주먹 같은 방울을 겨우 서 너 개 달았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짝도 못 찾고 후손도 못 두는 세상을 닮는 것은 아닌지 아쉽다.
‘거기’에 가면 유달리 눈에 띄는 키큰 친구가 있다.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환송하듯 날 반가워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기운이 쭉 빠져 보인다. 군인처럼 늠름해야 할 친구들이 군기가 빠졌다. 해멀 거니 수염만 늘어트린 체 반가운 기색이 안 보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발굽처럼 생긴 발목은 튼실하다. 발가락도 조밀하면서 장신을 지탱하느라 온갖 힘을 다 쏟고 있다. 길고 넓은 잎은 좌우로 길게 늘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훤칠한 체구에 어린애를 등에 매단 채 헉헉거린다. 인공수정도 아닌데 어떤 놈은 쌍둥이를 업었다. 늙지도 않은 것들이 수염을 길게 늘어트리고 죽은 시늉을 하고 있다. 안쓰럽고 걱정스럽다.
옥수수도 여러 줄로 심으면 서로 의지가 되는지 바람도 덜 탄다. 사람도 홀로 있거나 친구가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럿이 어울리는 삶은 사람이나 식물이나 마찬가지다. 지난해는 수확을 목적으로 많은 양을 심었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겨우 모판 한 판만 키웠다. 얼마 안 되기에 더욱 신경을 쓴 것이다. 어린 손자보다 더 정성을 들여 키웠다. 그리고 한 달여쯤 되어 이파리가 대여섯 개 나올 때 일렬종대로 옮겨 심었다. 보살핀 만큼 성장으로 보답을 한다. 옥수수도 노래를 좋아한다. 주인 발자국 소리에 키도 훤칠하고 폼 나게 자란다.
옥수수는 학문상 볏과의 한해살이 식물이다. 키는 2~3m 자라며 잎은 수수잎 같이 크고 길다. 꽃은 단성화로 암수가 따로 있다. 웅화수(雄花穗: 수꽃)는 줄기 끝에 달리고 자화수(雌花穗: 암꽃)는 줄기 중앙의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열매는 식용으로 쪄먹거나 떡, 묵, 밥, 술, 엿의 재료로 쓰인다. 튀밥을 튀면 간식용으로도 일미다.
이렇게 나에게 유용한 친구다. 그래서 그들을 좋아한다. 친밀하게 지내려고 봄부터 정성을 다한다. 이른 봄철 모판을 만들고 매일같이 보살핀다. 목마르지 않게 물도 주고 양식도 주면서 애지중지 키운다. 제 질로 한 질씩 컸을 때부터는 관심이 덜 하다. 홀로서기를 하라는 뜻이다.
손자도 어릴 때만 귀엽지 학교에 다니고 사춘기가 지날 때면 저 혼자 크듯이 말이다. 게다가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이 오랜 가뭄과 불볕더위로 땅속까지 물기가 마른 것이다. 기절 직전인 상태다. 이런 꼴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허둥지둥 살수 호스를 늘이고 지하수를 연결했다. 금세 가느다란 물줄기가 퍼진다. 천만다행으로 흐물거리던 놈들이 물맛을 보니 진통제를 맞은 듯 금방 되살아난다. 옥수수를 심은 지 백일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친구들과 재미를 붙이다 보면 즐겁다. 아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있다. 농업은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임을 뜻한다. 천하의 사람들은 농사와 분리할 수가 없다. 친구처럼 지내려면 차별이 없어야 한다. 목마를 때 물주고, 배고플 때 비료 주고, 병들거나 벌레 물리면 약을 줘야한다. 사람과 꼭 같은 이치다.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땅은 거짓이 없고 욕심도 없다. 심은 대로 거두고 뿌린 대로 되돌린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속담도 있다. 정성을 드리면 열 배, 스무 배 아니 수십 배로 돌려준다. 가진 것을 다 준다. 사람도 저승 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키다리 친구’야 고맙다. 너한테 많은 것을 얻는다. 옥수수가 따다가 압력솥에 쪄서 하모니카처럼 입에 물고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받은 만큼 돌려주면서, 오늘도 ‘거기’에 가서 힐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