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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 : 다스릴 리
判 : 쪼갤 판
事 : 일 사
判 : 쪼갤 판
한자말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붙어서 된 말이다. 그리고 이 이판과 사판은 불교 용어로서 조선
시대에 생성된 말이다. 조선은 건국 이념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표방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지배
세력이 불교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들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불교 탄압했어야 했다. 또한 고려의 숭불
정책으로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불교의 폐해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건국에 신흥 유학자 사대부 세력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으로 불교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하루 아침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천민 계급으로 전락한 승려들 또한 활로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찰(寺刹)을 존속시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불법(佛法)의 맥(脈)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는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雜役)에 종사하면서 사원을 유지하였다.
특히 관가나 유생들이 승려들에게 종이만드는 일을 시켰는데 조선시대에 사용된 종이는 거의 대부분이 사찰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산성을 축조하면 그 성의 수비를 승려들에게 분담하였다. 이런 잡역에 종사하는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고 불렀다.
한편으로 이와는 달리 깊은 산속에 은둔(隱遁)하여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는 승려들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이판승(理判僧)이라 하였다. 결국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의 현대 불교가 융성한 것
도 이 두 부류의 승려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런데 이 이판사판의 뜻이 전이되어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된 데에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억불정책은 불교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태였다. 승려는 최하 계층의 신분이었으며, 도성(都城)에서 모두 쫓겨나고 출입도 금지되어 있었다. 자연히 당시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래서 이판이나 사판은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되고 말았다.
조선뿐만 아니라 일제와 8·15광복 후의 건국 초기에도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더욱 부정적
이미지로 몰아갔다. 이 두 부류를 정치적으로 이용, 서로 분열 반목케 하여 이판사판의 면목을 그대
로 대중(大衆)에게 심어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은 뾰족한 대안이 없을 때 무의
식으로 이판사판이라는 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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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공사판
원래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경론(經論)을 공부하고 참선수행을 하며 불교의 이치를 탐구하는
스님(이판理判)들과, 절 살림을 맡아 부족한 물자들을 구하러 마을에 시주를 얻으러 다니고
땅을 일구고 채소 밭을 일구는 등의 일을 하는 스님(사판事判)들을 나누어서 지칭하게 되었다.
어떤 것을
의논 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반드시 여러 대중의 논의를 거치게 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을 대중공사(大衆供辭)라고 하며 보통 줄여서 공사(供辭)라고 한다.
이판승들과 사판승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개회의를 하여 판단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이판사판 공사판(理判事判供辭判)이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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