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자들이 복 짓는 법과 남방불교에서 복 짓는 법이 어떻게 다른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전하고자 합니다.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이며, 복은 어떻게 지어야 받을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어는 부처님 재세 시 쓰인 언어 입니다. 빨리어에 이어 600년 후에는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이 번역됐고, 그 경전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한자로 번역됐습니다.
존귀한 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여의고 탐진치를 떠나신 분을 말합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아라한이 이같은 뜻이고, 번뇌를 여의고 예경받을 분이라는 뜻입니다.
올바르게 삶을 깨달으신 분, 사성제를 깨치신 분입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 여의고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분입니다.
부처님 시대인 2500여년 전 왕들과 학자들, 범천들의 예불문이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입니다.
그렇다면 '나무 석가모니불'은 무슨 뜻입니까. '나무'는 빨리어로 '나모'인데 산스크르트어도 똑같습니다.
인도의 '나마스테'라는 말은 '존중하다', '예경하다'는 뜻입니다. '나모'역시 같은 뜻으로 '나무 석가모니불'은 '석가족에서 출가하신 부처님께 예경 또는 절합니다'는 뜻입니다.
약을 알고 시간에 맞춰서 먹는 것이 바른 것처럼, 앎이 지혜로울 때 공덕 역시 큽니다. 지혜로운 자의 공덕이 어리석은 자보다 훨씬 큽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복은 무엇을 말할까요?
한국에서 복은 고통이 아닌 행복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복은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입니다. 고통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합니다.
우리는 항상 행복하다는 착각 속에서 한 평생 살고 있습니다. 결국 죽음에 이르렀을 때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도 똑 재물을 찾듯이 행복은 별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단지 행복해 하는 척, 그리고 아는 척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와 윤회를 벗어나고자 수행하는 자가 비구입니다. 그 고통을 알고 그런 생각을 가진 자가 비구입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선업을 무서워하지 마라. 선업할 때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선업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행복이다. 행복을 원하면 기도를 하는데 그 선업을 무서워하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선업이라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다른 이름입니다. 선업과 복은 같은 말입니다.
근본불교에서는 다른 것이 없고 복이 곧 선업입니다. 복을 얻고 싶은 사람은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선업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누가 와서 물어도 복을 주거나 선업을 쌓아주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방편을 일러줄 뿐입니다.
부처님은 "복이라는 것은 스스로 지어야 오는 것이기에 선업을 무서워하지 말라. 선업은 너희가 원하는 행복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선업과 복이 같다는 말을 이해하셨다면 선업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믿음이 최고가 아니라 지혜가 최고입니다. 선업이 무엇인지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믿음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지혜 없는 믿음은 무섭습니다.
부처님은 "믿어라 하지 않고 잘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전에 나왔다 하여 무조건 믿지 말고 잘 살펴보고 진정 나에게 이익이 있을 때 믿으라는 뜻입니다.
즉 선업이 무엇인지 알고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죄가 없고, 잘못이 없어 다음의 결과를 알고 있을 때 행복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선업에는 죄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행복을 결과로 말해줍니다. 선업의 결과가 행복입니다. 선업은 '죄가 없어 행복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원한다면 선업을 해야 합니다. 선업의 결과가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복이 곧 선업입니다.
선업에는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몸으로 짓는 선업, 둘째는 마음으로 짓는 선업, 셋째는 입으로 짓는 선업입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욕심 부리면 악한 마음이 생기고, 눈으로 보면 갖고 싶고 이것이 없으면 못살겠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을 보면 질투심에 빠져들어 마음은 자연스럽게 작아져버립니다. 마음을 잘 못쓰니까 번뇌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한 마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내 마음이 어떻게 되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 번 바라보십시오. 마음을 악하게 쓰고 있는지 착하게 쓰고 있는지, 말할 때마다 어떤 마음이 있다가 말을 하게 되는 지 잘 관찰해 보십시오. 착한 마음으로 하는 말은 좋은 행동이 되고, 이와 반대로 악한 생각은 악한 말이 되고 악한 행동으로 귀결됩니다.
착한 말은 선업이 되고 행복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생각할 때, 말할 때, 행동할 때 등 모두가 다 기도입니다.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일상생활이 곧 기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위빠사나 붐이 일면서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을 열심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악하면 불선업이 되고, 착하면 선업입니다.
선업은 행복을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선업이라는 것은 죄가 없고 착한 마음을 생각하기에 남을 헤치지 않습니다.
'살생하지 마시오'라는 것은 '몸으로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거짓말을 한다면 마음에 악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루 종일 무슨 생각,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그 마음이 악한 마음인지 착한 마음인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악한 마음을 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악한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화'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화나는 말, 화나는 행동 등을 스스로 자제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는 척하는 것입니다. 탐진치를 아는 척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탐진치가 안 좋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척하는 것입니다.
'화'가 누구인지 제대로 봐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화가 났다가 아닌 '존재하는 화'를 보라는 말입니다. 욕심을 잘 보면 그 욕심이 나를 만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생활이 곧 기도이기에 행동이, 말이 기도입니다. 날마다 기도하는 모습이 좋습니다.
우리는 절에 기도하러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 몸과 마음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남을 헤치지 않는 말과 마음이 바로 선업입니다. 선업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행복을 가져댜 줄 것입니다.
* 부산 담마야나선원의 아신 빤딧짜스님의 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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