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적조당 앞마당에 베롱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4~5년 후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려할 즈음 진딧물이 달려들어서 나무를 온통 망쳐놓았다. 유기농 농약을 만들어 쳐주었지만 속수 무책, 하는 수 없이 농약상에 의논했더니 이는 유기농 혹은 일반 살충제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진딧물 전문 농약을 내주었다. 그들이 추천한 농약을 한번 밖에 뿌리지 않았는데 진딧물은 박멸되었다.
전원에 살면서 가능하면 자연친화적으로 살고자 했지만 밀려오는 병충해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년 여름 복숭아와 체리, 자두는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다. 꽃 지는 시기에 농약을 2회 살포했지만 수확기에 이르니 복숭아는 열매마다 벌레가 속을 파먹었고 자두와 체리는 몽땅 썩는 병에 들었다. 이때 농사를 짓는 사람의 심정는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베롱나무 역시 진딧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현대과학의 힘을 빌어야 했다. 베롱나무는 그 보답으로 금년에는 천하에 제일가는 꽃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베롱나무꽃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못나도 제 자식이 최고로 보이듯이 내가 가꾸는 꽃나무와 작물들이라서 그런지 애정이 더가고 더 좋아보인다. 7월 10일 경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벌써 한달이 지났지만 꽃은 여전히 절정이다. 작년의 농사일기를 보니 9월에도 꽃이 피어있었다. 아마도 백일홍이란 이름 그대로 100일간 꽃이 피려나 본다.
이 베롱나무 밑에 돌판 탁자를 놓고 아침에는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베롱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어느 여류 문인은 땅집에서 베롱나무를 심고 그 밑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나는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것을 얻고 있으니 투입한 노동의 댓가를 충분히 보상받는 셈이다.
아침마다 베롱나무 꽃잎이 탁자와 주변에 붉게 뿌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장관이다. 한 나절은 그냥 두었다가 오후가 되어 시들면 빗자루로 쓸어준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지만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꽃잎이 바래고 시들어 버린다. 제행무상은 철저하게 자연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 인간도 이를 피할 방법이 없으니 베롱나무꽃을 보면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방법을 익혀야 겠다.
베롱나무 곁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연꽃잎이 가득하다. 금년에는 연꽃도 몇송이 피었고 연잎 위에는 개구리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뛴다. 그 모습이 지극히 편안하게 보인다. 그들에게 큰 어려움은 연못의 물이 말라버리거나 뱀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안 마당이니 개가 지키고 앞집 고향이가 지켜주고 있으니 뱀이 올 가능성은 낮다. 또한 연못의 물이 마르지 않도록 개울물을 끌어와 채워준다. 가끔 비가 와서 연못을 채우기도 한다. 이런 비오는 날 저녁에는 개구리가 좋아서 밤이 깊도록 노래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노래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우거 적조당 앞 마당에는 이렇게 베롱나무가 100일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개구리가 노래를 하며 살고 있다. 나는 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과의 합일을 맛보고 있다. 이런 삶이 가능하게 한 것은 내가 몸소 이런 환경을 만들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베롱나무를 심고 가지치기를 하고 진딧물을 박멸하고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으니 개구리가 와서 살게 된 것이다.
그렇구나.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그 인연은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고 다가가야 생기는 것임을 알겠다. 베롱나무꽃 아래서 차를 마시고 연못의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들이 준 고마움에 가슴이 적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