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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66)여호사밧의 통치(4) 선지자 400 vs 미가야 1 대하18:12-27
본문에는 참선지자 한 사람과 거짓선지자 400의 대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쇼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사밧을 꼬여내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살펴보셨지요? 그냥 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지파들을 향하여 축복한 말씀을 인용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오늘 아합과 여호사밧이 저들을 받아 승리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참 왕들 앞에서 거짓예언이 판을 치고 있을 때, 늘 미움 당하던 미가야가 안쓰러웠던 것일까요? 이 거짓쇼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요? 미가야를 부르러갔던 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400명의 선지자들이 모두 승리를 예언하고 있으니, 다른 말 하지 말고, 그들 중 한 사람처럼, 같은 말로 예언을 하라고 조언이랍시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말과 같은 행동을 하라고 성경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두 군데에서 확인해볼까요? 먼저 빌립보서 2장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2-3절) 또한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빌립보서의 말씀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로 말미암는 빌립보교회의 고통을 위하여 쓴 말씀이고,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사람을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던 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쓴 말씀입니다. 그러니 같은 뜻을 품으라, 같은 말을 하라는 권면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우리의 것들을 버리고 조율하고 일치시키라는 뜻이지, 많은 사람들의 뜻, 대세의 흐름에 그것이 설령 거짓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튀지 말고 동참하여 손해를 면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다 똑똑해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확고한 자기 기준, 자기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고민해두고 생각해두고 시행착오를 겪은 일들을 살피며, 안전하고 손해가 없는 쪽을 따르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지요? 마치 물고기와 짐승들이 떼로 움직이듯, 사람도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대세를 따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 길이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아니면 잘못되어 죽어도 같이 죽으니 괜찮다 혹은 나만 손해가 아니니까 라고 위안삼을 수 있기 때문일까요? 그 대세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늘 본문, 저 사자도 말하듯, 대세는 승리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니 여태껏 시끄럽게 했으면 충분하지 않냐고 그간 참아온 우리도 좀 생각해봐라. 오늘 만큼은 제발 딴소리해서 큰소리 나게 하지 말고, 저 왕 기분 나쁘게 해서 우리 모두 힘들게 하지 말고 “좋게 좋게 끝냅시다”
이 말에 오늘 미가야의 대답이 무엇이었지요? 13절입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그래요. 미가야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사자가 말해도, 왕이 말해도, 부모가 와서 말해도,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외에는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지난 주에도 살펴보셨지만, 이것이 겉보기에는 똑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해도,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가 가려지는 모습입니다. 거짓선지자는 사람들의 말,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예언이 달라집니다.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 힘 있는 사람과 힘 없는 사람에 따라서 말이 달라지지요? 예언을 위해 쏟는 노력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1류 가수와 3류 가수의 차이가 그러하다지요? 관객이 많은 곳, 장소가 좋은 곳, 출연료를 많이 준 곳에서는 최선을 다해 노래하고, 팬 서비스도 많이 해주지만, 관객이 적고, 돗자리만 깔아 놓은 곳, 출연료도 볼품없는 곳에서는 설렁설렁 노래하고 휙 떠나는 것입니다.
저들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모여서 한 목소리로 사력을 다하고 있는 저들은, 궁중예언가라고 불리는 이들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중요하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들, 아니 그것을 알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사람들, 정확하게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저들이 중요한 것은 아합의 계획이고, 아합의 마음이요, 아합의 기분이고, 아합의 입장입니다. 아합이 기분좋아 궁중창고를 열어주는 것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of 아합, for 아합, by 아합 이지요. 아합의, 아합을 위한, 아합에 의한 사람들, 그들 입술의 단 한 마디마저 아합 때문에 준비하고 예언하는 사람들, 이미 확인하신 것처럼, 미리 정보를 받고 연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저 아합의 비위를 맞출까를 생각했고, 아합의 축복을 기원하고 비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나라와 궁중의 녹을 받아먹으며 안위를 누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 미가야는 어떻지요? “내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그것 외에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으시면 말하지 못합니다. 말씀하시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수정할 수도 첨삭할 수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그가 참 선지자인 것이지요.
그래요. 적지 않은 분들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하는 게 뭐가 어렵냐, 말씀만 해주시면 나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참으로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한 것이요. 내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과 피눈물을 보면서도 전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면, 이렇게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 눈물, 애원보다도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이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이 중요한 사람, 이것이 참 선지자입니다. 모두가 울어도, 가면 죽는다고 말려도,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사람, 사도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래요. 오늘 미가야는 자신을 부르러 온 사자의 사전 협박에 굴하지 않습니다(12). ‘청하건대’라며 부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탁반, 협박반’입니다. 결국 뒷일 감당 못할테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때도 미가야는 확고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만 말하리라고 합니다. 아합이 미워해도 싫어해도 옥에 가두고 설령 죽게 할지라도,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 주신 말씀을 전할 기회 앞에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내게 허락하신 시공간 속에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 바세루 사페루,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 이 선지자요, 참 하나님 백성인 것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인지, 함께 찬양한 곡 부르고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사람입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곳에서 예배하는 사람, 아무도 증거하지 않는 곳에서 증거하는 사람, 하나님 이끄시고 보내주셔서 지금 내가 선 이곳, 주의 보혈로 덮으시길 구하며, 주의 향기로 물들여주시길 구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래요. 이 땅에 무수한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인터넷, 텔레비전, 핸드폰, 모든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고 하듯, 지금은 올바른 말씀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말씀하시는 것만을 선포하는 용기있는 목회자와 참된 하나님 말씀을 분별할 줄 아는 성도가 필요하고 세워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수한 말씀 속에서 참된 메시지를 찾는 것이 중요한 시대, 그러다 보니 이제는 마음 탁 놓고 편히 설교를 들을 수 없는, 힘겹고 불편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설교를 평가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왜곡되고 변질된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어쩌면, 참된 선지자는 400명 중에 1명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말과 주변의 대세에 영향을 받지 않고, 부탁과 협박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여, 정확하게 목숨을 걸고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말입니다. 목회자들만 그러한가요? 목회자들에게만 거시는 기대인가요? 아뇨, 하나님의 일꾼된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루하루를 진실하라고, 참된 성도로 살라고 이 저녁에 더욱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이겠지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에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4:20-25)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그래요, 참 선지자는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 그대로를 전달합니다.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끼눈을 뜨고 있는,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무수한 사람들 한복판에 서 있지만,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참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아합의 명령 하나에 즉각 움직일 수백, 수천 명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그곳에서 미가야는 400명의 거짓예언자들과 정반대의 말씀을 전합니다. 16절이하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대하18:16)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이 되어 흩어질 것, 목자인 왕이 죽고, 백성들은 패배하여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18~22절을 보니, 그가 보았던 천상회의의 모습을 통해, 오늘 저 400명의 선지자들이 거짓영의 꾀임을 받아 왕을 죽게 만드는 예언을 하였다, 목숨이 여러 개인 사람처럼 “폭탄선언”도 서슴없이 마다하지 않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미가야는 홀로 거짓선지자 400명 앞에서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으며 위협받을 때에도, 아합왕이 자신을 옥게 가두고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마시게 할 때에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외 다른 것을 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무엇을 말씀한 것입니까? 올라가서 죽으라고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올라가지 말라고, 올라가시면 정말로 죽게 된다고, 불의하고 악한 왕이지만, 오늘도 악한 모략으로 여호사밧을 죽이려는 아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 악한 길을 버리고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호소하며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여러분 아시지요?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정한 길을 막는 하나님의 말씀은 배제해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거짓된 이야기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믿고 가지 못합니다. 미적찌근하니 변장하고 가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것 참,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안타까운 인생일 뿐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성경을 읽어내려가다가 마주하는 불편함이 늘 이것입니다. 이게 왜 이러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쫓았고 바르게 전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고난을 당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랬고, 이사야가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습니다. 또 누가? 예, 하나님의 아들이신, 말씀이 육신되신, 구주 예수님마저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과 행동을 미워하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던 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누가 ‘참’입니까? 4백 명이나 되는 그 많은 선지자들이지만 가짜요, 미움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감옥에 가고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 한 명이 선지자의 미가야가 ‘참’이지 않습니까? 모두가 살인자 바라바보다 더 악하다며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고발당했던 그 한 분, 한 사람의 변호사 없이 재판에 형집행이 이루어진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셨던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교훈 하나는, 저 다수가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다수결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체계 속에서 다수결에 익숙하고,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상 다수가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수결이 얼마나 잔혹한 결정인가를 우리는 늘 기억하고 있어야합니다. 다수가 아닌 소수가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결정이 다수결입니다. 그 소수의 설 곳이 사라지는 결정이 다수결입니다. 다들 경험해보셨지요?
무엇보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복음에 관해서는 우리는 세상을 대세를 따르지 말고,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가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백성들은 다수결로 결정을 합니다. 열 사람이 못들어간다고 했고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40일을 40년으로 바꾸어 모두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빌라도는 다수결로 결정합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선동된 군중들은 바라바를 선택했고, 다수결의 결정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선택과 결정을 앞에 두고, 여호사밧의 말처럼,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소서”입니다. 양과 소를 잡아 먹여 꼬드겨 볼 생각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꾸짖지 않고 지혜를 주시는 분께 구해야 합니다. 나아가 저 시편기자처럼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읊조리는 삶,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이 말씀에서 참 진리를 찾는 것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새 다수와 대세를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고 표류하고 말 것입니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대로 생각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이 참 성도이고, 그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 말씀이 지금 우리의 삶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다수를 따라,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는 태도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있는 그 어느 것 하나 확신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 아합의 길로 가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요. 오늘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기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고, 진리보다는 세상을 더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곳으로 우리는 결국 발걸음을 옮겨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 더욱 세상이 아닌, 다수결이 아닌, 오직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시는, 내게 주신 시공간,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는, 참 종,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라옵기는 진리를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는 좋은 목회자와 여러분의 평생에 하나님 받으실 만한 신앙생활을 하시는, 그 참된 신앙생활을 견디고 완성하시어 하나님께 칭찬 들으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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